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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우리 몸에서 가장 확실하게 노출된 부분이지만, 어쩌다 상처라도 입어야 비로소 그 노출된 상태를 깨닫게 되고, 알아차리고 나면 온통 그 생각만 하게 된다. (20)

 

내가 가르친 세라 로런스 칼리지의 학생들은 맹렬하여ㅡ자율적이고 정치적 참여도 열심히 하고 똑똑했다ㅡ참 다행이다, 이 학생들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아시아인 2.0이다, 고함을 내지를 준비가 된 아시아 여성들이다, 라고 생각했다. 또 그러다가도 다른 대학교 강의실에 가보면 머리만 예쁘게 매만지고 아무 말 없이 생쥐처럼 얌전히 앉은 아시아 여학생들을 만나는데, 그럴 때는 닦달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너 입 좀 열어라! 안 그러면 저들에게 완전히 짓밟힌다고! (27)

 

아무 생각 없는 백인에게 인종 문제를 참을성 있게 가르치기란 정말 고되고 피곤하다. 내가 가진 설득의 능력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야 한다. 그것은 존재론적이다. 그것은 남에게 내가 왜 존재하는지, 내가 왜 아픔을 느끼는지, 나의 현실이 그들의 현실과 왜 별개인지를 설명해야 하는 일이다. 아니, 실상은 그보다도 훨씬 더 까다롭다. 왜냐하면 서구의 역사, 정치, 문학, 대중문화가 죄다 저들의 것이고, 그것들이 내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37)

 

트라우마를 겪고 이곳으로 이민 온 많은 이민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떤 일이든 감수한다. 사람을 속인다. 아내를 구타한다. 노름을 한다. 그들은 생존자이고, 대다수의 생존자가 그렇듯, 지독한 부모가 된다. (57)

 

환심을 살 청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시인들이 왜 그렇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지 외부인들은 어리둥절할 수 있다. 사실 시인의 청중은 제도다. 우리는 학계, 심사위원단, 펠로십 제도라는 고등한 관할권에 의존하여 사회적 자본을 획득한다. 수상 제도를 거치는 것은 시인이 주류적 성공에 이르는 소중한 길이며, 수상 결과는 심사위원단이 공들여 이뤄낸 타협에 의해 결정된다. 이 타협은 미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수상작에 아무 위험성이 없음을 보장한다. (66)

 

또한 청중을 억지로 웃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허튼소리로 코미디를 이어가기란 쉽지 않다. 진짜 웃음은 오르가슴과 마찬가지로 의지와 관계없이 근육이 갑자기 수축하면서 터져나온다. 놀라야 웃음이 나오고, 놀라는 것은 한 번뿐이다. 그래서 코미디는 가차 없이 찰나적이다. 농담만큼 금방 낡아버리는 것도 없다. (69)

 

리처드 프라이어에 관한 특집 기사를 <뉴요커>에 기고한 힐튼 얼스는 흑인의 체험을 미화하는 "단일한 이야기"에 대해 언급한다. 

흑인성이라는 주제는 미국인의 사고에서 기이하고도 불만스러운 여정을 거쳐왔다. 왜냐하면 첫째로 흑인성은 들어줄 사람을 찾기 위해 거의 언제나 백인 위주의 청중에게 설명되어야 했고, 둘째로 흑인성은 오로지 한 가지 이야기ㅡ진보 성향 사람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억압당한 이야기ㅡ만 들려준다고 상정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79)

미국에서의 흑인 이야기만 해당하는가?

한국에서의 여성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의 성소수자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모두 듣기 좋게 정제되어야 하며, 매끈하고 산뜻하고 어느 쯤은 측은하게끔 들려야한다. 

 

 

소수적 감정(minor feelings)은 일상에서 겪는 인종적 체험의 앙금이 쌓이고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끊임없이 의심받거나 무시당하는 것에 자극받아 생긴 부정적이고, 불쾌하고, 따라서 보기에도 안 좋은 일련의 인종화된 감정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어떤 모욕을 듣고 그게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뻔히 알겠는데도 그건 전부 너의 망상일 뿐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 소수적 감정이 발동한다. 클로디아 랭킨의 시집 <시민>은 소수적 감정을 탐구하는 책으로는 이제 고전으로 꼽힌다. 화자는 인종차별적 언사를 듣고서 자문한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지? 본 것, 들은 것이 다 확실한데도, 내 현실을 남에게 폄하당하는 경험을 너무 여러 차례 겪다 보니 화자 스스로 자기 감각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런 식의 감각 훼손이 피해망상, 수치심, 짜증, 우울이라는 소수적 감정을 초래한다. (84)

 

내가 쓰는 "소수적 감정"이라는 표현은 문화이론가 시앤 나이에게 깊이 빚지고 있다. 그는 오늘날 후기 자본주의 '긱 경제(gig economy: 전통적인 고용 관계 대신에 필요에 따라 사람을 구해 임시로 계약을 맺고 일을 맡기는 고용 형태)의 증상인 못난 감정(ugly feelings)ㅡ부러움, 짜증, 지루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ㅡ이라는 정서적 속성에 관해 폭넓게 저술했다. 못난 감정과 마찬가지로 소수적 감정 역시 "놀라운 지속력"을 지닌 "카타르시스가 없는 감정 상태"이다. (85)

 

또 소수적 감정은 우리가 까다롭게 굴려고 마음먹을 때ㅡ다시 말해 솔직하려고 마음먹을 때ㅡ배어나는 감정이라고 비난받는다. 소수적 감정이 마침내 표출되면 적대, 배은망덕, 시샘, 우울, 공격의 감정으로 해석되며, 백인들이 도가 지나치다고 여기는 인종화된 행태가 그런 정서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간주된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구조적 차별을 그들이 착각하는 현실과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에 우리의 감정은 과잉반응이다. (86)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추앙받은 작가는 필립 로스나 칼 오베크나우스고르처럼 인물의 결점 많은 모습까지 전부 고스란히 노출하는 책을 써온 백인 남성 작가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독자들은 백인 남성 작가가 못되게 굴면 막 좋아하면서 소수자 작가에게는 늘 착하게 굴 것을 요구하는 듯하다. 바로 이래서 우리는 백인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소수적 감정을 옆으로 제쳐둔다. (87)

 

이제 나는 네 살배기 딸내미의 엄마다. 딸을 머리 빗겨주거나 밤에 목욕시킬 때면 불현듯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더 이상한 것은, 그런 기억이 떠오르기를 기대하는 순간에는 오히려 안 떠오른다는 점이다. 우리 부모님은 내게 책을 읽어준 적이 없기 때문에 잠자리에 든 딸에게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을 때 처음 느낀 것은 향수 어린 추억의 물결이 아니라 어떤 무게감의 결핍이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처럼 누구나 애용하는 의례적 행위는 시냅스를 통해 옛 기억의 발화를 유도하지만, 내 정신은 연체동물이 텅 빈 해저를 더듬듯 저장된 기억을 못 찾고 멍하니 더듬는다. 이런 신경학적 감각, 이 기묘한 무중력상태를 지칭하는 용어가 어디 있을 법도 하다. 
딸에게 책을 읽어주노라면, 내 어린 시절은 서서히 물러가고 딸의 어린 시절이 이 나라에 단단히 연결되는 것이 보인다. 나는 딸에게 나의 행복한 기억을 물려준다기보다 딸을 위해 행복한 기억을 연출해주고 있다. 부모님도 나를 위해 똑같이 그렇게 하셨겠지만, 부모님에게 돌봄의 개념은 먹이고 재우고 학교나 보내는 정도의 훨씬 기본적인 것들이었다. (100)

 

미국뿐만 아니라 전 지구에 기억을 심어주는 할리우드 산업은 백인 향수를 일으키는 가장 수구적인 문화적 주범이며, 무한 반복되는 타임루프에 갇혀 1965년 이후로 미국의 인종 구성이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점을 인정하길 거부한다. 할리우드 영화의 출연진을 보면, 유럽 혈통만 조심스럽게 골라 그들만 미국인으로 등장하도록 보장하는 백인 우월주의 법이 아직도 이 나라를 "보호"하고 있는 것만 같다. (107)

 

번스틴에 따르면 인종적 순수란 단순히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아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로서 "음, 는 인종이 문제라고 보지 않는데"와 같은 언급 속에 엉켜 있으며, 여기서 ''는 보는 일을 가로막고 있다. 순수는 하나의 특권이자 인지 장애, 즉 잘 보호된 무지의 상태이며, 일단 이것이 성인기까지 오래 이어지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굳어진다. 순수는 성적인 것만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굳이 특정해서 "표시되지 않으며"(unmarked) "자유롭게 본연의 너와 나가 될 수 있다"라는 신념에 기대 사회경제적 위계 속에 놓인 자신의 지위를 외면하는 것이다. 이런 순수가 초래한 아이러니한 결과는 백인이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학자 찰스 밀스는 말한다. 따라서 아이들이 인종적 서열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집요하게 상기당하고 그 위치 때문에 심지어 범죄자가 되면 순수할 자격을 박탈당한다. 리처드 프라이어가 농담한 대로다. "나는 여덟 살때까지 아이였어요. 그 후 깜둥이가 되었지요." (108)

 

인종주의의 한 가지 특징은 아동을 성인처럼 취급하고 성인을 아동처럼 취급한다는 점이다. 부모가 아이처럼 굴욕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깊은 수치심을 유발한다. 우리 부모가 백인 성인에게 무시당하거나 놀림당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그런 일이 너무 관행처럼 발생해서, 엄마가 어떤 식으로든 백인 성인과 상대할 때면 나는 늘 바짝 경계하면서 중간에 끼어들거나 엄마를 옆으로 잡아끌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자란다는 것은 권위 있는 사람이어야 할 부모의 굴욕을 목격한다는 것, 그리고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뜻한다. 부모가 아이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112)

 

아시아인이 좋은 처지에 있다는 거짓말은 너무나 은근히 퍼져 있어서,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나도 남들에 비하면 나쁜 처지가 아니었다는 의심에 시달린다. 그러나 인종적 트라우마는 누가 앞서고 뒤지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다. 문제는 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이례적이 아니라 실은 오히려 전형적이었다는 데 있다. (112)

 

순수한 상태로 향수에 젖어 회귀하는 것이든 불안과 걱정을 갑작스럽게 떠올리는 것이든 간에, 어린 시절은 하나의 정신 상태다. 어린 날의 순수가 보호받고 위안받을 때의 정신 상태라면, 어린 날의 불안은 그 사람이 최소한으로만 보호받고 위안받는다고 느낄 때의 정신 상태다. (113)

시인이 쓰는 에세이ㅡ지만 사회과학적인 성격을 띠는 글ㅡ를 읽을 때의 기쁨. 
시원한 물을 마신 듯 해갈되는 이 즐거움에 몇 번이고 읽게 된다. 
분명 세심히 감각하고 섬세히 매만지며 썼을 표현이지만 활자로 나오는 순간 거침이 없다.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에 대한 반격으로 흔히 들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의 생명은 소중하다"(all lives matter)라는 구호에도 저들의 망상이 암묵적으로 내재해있다. "모든 사람"(all)은 포용적이라기보다는 방벽을 둘러친 대명사, 즉 "그것을 인종 문제로 만들지 못하도록 해" 눈에 보이지 않는 백인성의 헤게모니가 도전받지 않고 지속되게끔 하는 방어 장치이다. (120)

 

내가 백인성 문제를 거론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이 나라의 자본주의적 백인우월주의 위계질서 속 어디쯤에 위치하는지 명명백백하게 따져봐야 하는데 여태 그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꼼꼼히 따져보기는커녕, 일부 아시아인은 인종이 자신의 삶과 무관하고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백인들이 하는 똑같은 소리 못지않게 잘못된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인종 정체성 때문에 차별만 받은 것이 아니라 혜택도 누렸기 때문이다. 인종을 나와 무관하게 여기는 이 아시아인들이 바로 내 사촌이고, 내 옛 남자친구이며, 브루클린에 안락하게 틀어박혀 맑고 포근한 날 불현듯 나는 인종에 영향받지 않아도 되고 그저 자진해서 그 문제를 생각할 뿐이라고 여기는 나 자신이다. 나 또한 오로지 나와 내 직계 가족만을 위해서 살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을 전부 누르고 앞서라가는 이 나라의 신자유주의 정신과 일치된 생존 본능을 갖춘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자신을 옥죄는 수치심은 묻어버린 채 말이다. 정도는 조금씩 달라도 미국에서 자란 아시아인은 모두 내가 묘사한 수치심을 익히 알고 있으며, 그 기름진 불길을 느껴봤다. (122)

 

시인 너새니얼 매키는 에세이 <타자: 명사에서 동사로>에서 타자라는 명사는 사회적 의미를 띠고, 타자화하다라는 동사는 예술적 의미를 띠는 것으로 구분한다. 

예술적 타자화는 문화적 건실성과 다양성 증진의 기반인 혁신, 발명, 변화와 관계 있다. 사회적 타자화는 권력, 배제, 특권과 관계 있다. 즉 한 명사를 중심에 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타자성을 측정, 배분, 주변화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에 예속되는 사람들에 의한 전자의 실천에 초점을 둔다. (136)

미쳤어. 너무 좋아.

너새니얼 매키도 시인이라면, 대체 시인은 어떤 유의 사람들이라는 건지... 사람이 맞는 건지... 
진짜 이런 게 통찰력이지.

 

 

혁신의 영혼은 문화 교차가 주는 영감 속에서 활짝 피어난다. 우리가 각자 자기 차선에만 머무르면 문화는 죽어버릴 것이다. (142)

 

말을 이렇게 하지만, 전례도 별로 없는데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일에 관해 내가 어떻게 쓸 수 있을까? 다문화적 합일성이라는 안이한 환상이나 도덕성을 과시하는 살균된 언어에 기대지 않고서 쓸 수 있을까? 솔직하게 쓸 수 있을까? 내가 받은 상처뿐만 아니라 내가 남에게 준 상처에 관해서도 쓸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 (151)

정말 미친 거지...
이 글들을 작가는 모조리 영어로 썼다면, 원서의 표현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내가 영어 원서의 행간을 파악할 만큼 역량이 있다면 느껴보고 싶다. 정말 욕심나는 문장이다. 

 

 

예술작품을 박탈당한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예술가의 행위 뿐이다. 문제는 예술가의 규칙 위반을 역사가 "예술"로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점이며, 이것은 그 예술가가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여성 예술가는 좀처럼 "교묘히 넘어가"지 못한다. 흑인 예술가는 좀처럼 "교묘히 넘어가"지 못한다. 뺑소니치고도 교묘히 넘어가는 사립학교 부잣집 아이처럼, 교묘히 넘어간다는 것은 그 사람이 무법자라는 뜻이 아니라 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악동 예술가가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신분 때문이다. 
규칙을 위반하는 악동 예술은 사실 가장 위험 회피적이며, 돈 있는 수집가라는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한 무한 반복되는 재탕 묘기이다. (160)

 

지금 돌아보면, 조용조용 말하고 항상 졸려 하던 그 시절의 에린과 지금 내가 아는 목소리 크고 자기 의견이 강한 에린이 도무지 일치가 안 된다. 
나는 에린의 수동성이 남자친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에린을 조종하고 있고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의심했다. 아마 나도 에린에 대해 약간 소유욕이 있었던 듯하다. 에린은 친구들에게 그런 부러움, 그런 독점욕을 일으켰다. 특히 나중에 헬렌이 그런 경향이 심해졌다. 하지만 그 남자친구가 좀 재수가 없기는 해도 그 사람 때문에 에린이 수면 발작에 시달리고 수동적으로 굴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 남자친구는 에린이 슬픔에 젖어 있을 때 옆을 지킨 유일한 사람이었다. (162)

 

병이 병으로 명백히 진단되지 않으면 자식이 그 멍에를 짊어진다. 이를테면 엄마가 우리 같이 죽어버리자며 차선을 급변경해서 다른 차를 받을 뻔했을 때 나는 조수석에 앉아 있던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꼈다. (165)

 

에린은 매력적이고 재능 있고 똑똑했지만, 칠면조 샌드위치를 하나도 반드시 에린이 만들어줘야 할 정도로 무력한 남자를 사귀었다. 겉보기에는 그 관계에서 에린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무력한 척하는 남자들은ㅡ오벌린 대학에는 이런 부류가 특히 많았다ㅡ무능력을 핑계 삼아 하찮은 일을 여자에게 떠넘긴다는 점에서 상남자만큼이나 여자 조종에 능했다. (183)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상남자만큼이나 여자 조종에 능무력한 척하는 남자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피식 웃음이 났다. 

 

 

그러나 나는 마치 말이 치유법이 아니라 남을 오염하는 독인 양, 자칫 고통을 언급했다가는 정신적 외상을 또 한 번 입을 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트라우마를 입히게 되는 문화에서 자랐다. 이런 비밀과 수치의 문화에서 성폭행을 고발할 만큼 대담한 아시아 여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현실 부정은 항상 상처에 바르는 연고가 되어주지만, 그건 국소적 요법에 불과하다. (213)

 

침묵의 문제점은 침묵하는 이유를 목청 높여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침묵은 쌓이고, 증폭되고, 우리의 의도 박으로 자체의 생명을 얻어 무관심이나, 회피나, 심지어 수치심으로 잘못 해석될 수 있으며 결국 이 침묵은 망각으로 이어진다. (222)

침묵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멋있게 들을 수 있다니. 영광이다. 

 

 

그것을 직시하든지 아니면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의 죽음이 너무 끔찍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때때로 나는 뉴스 기사에서 범죄 피해자가 아시아인이면 일부러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사건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싫기 때문이다.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상관하기 싫다. 왜냐하면 분노 속에 방치되기 싫기 때문이다. (231) 

깊이 공감한다. 

아시아 혐오 범죄에 대해 동일한 만큼의 분노를 하는 건 아니지만, 여성 혐오 범죄에 대해서는 나도 비슷하게 느끼곤 시선을 돌리니까. 분노 속에 방치 되기 싫어서. 

 

 

가로등이 희미하게 켜지고 하늘에 푸른 여광이 남은 박명의 시간에 딸에게 젖을 먹이다가 빛을 깜박이며 상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보았다. 나는 그 비행기 속에, 조도가 낮은 기내의 하얀 정적 속에 있고 싶었다. 흰색 이어폰을 깊숙이 꽂고, 뉴욕 스카이라인이 시야에서 흐려져 아가의 입김 같은 불빛으로 변할 때까지. (243)

내가 고등학생일 때, 집에 가는 길 어두운 하늘을 보며 자주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저 멀리 움직이는 깜빡임으로 비행기임을 유추할 수 있을 때 눈이 시릴 만큼 오래 바라보았었다. 그리고 꼭 그때는 겨울이었어서, 내 옆에는 상아가 있었고 우리는 노래를 듣고 있었다. 집 옆 고등학교의 까만 운동장을 걸으며 오래도록 하늘을 바라봤었다. 저 비행기에 타고 있는 나는 어떤 모습이며, 어떤 연유로 비행기를 탔으며, 누구와 함께 있을지... 그런 것들을 마구 상상했다. 
그리고 비행기를 아주 많이 타게 된 무렵의 나는 그때의 상상만큼이나 차분하지도 고요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이제는 또 모르겠다. 

내가 그린 비행기 속의 내 모습은 언제쯤의 나였을까(혹은 나일까).

 

 

1968년 UC 버클리 학생들이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용어를 고안해 새 정치적 정체성의 개시를 알렸다. 블랙 파워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에 의해 급진화된 아시아계 학생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를 거부한다는 취지로 그 명칭을 고안했다. 오늘날 이 명칭은 납작하고 텅 비어서 그 어떤 맹렬한 정치적 수사도 담겨 있지 않기 때문에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말이 급진적인 기원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전에는 아예 아무 명칭도 없었다. 아시아인은 출신국으로 구별하거나 '오리엔탈'로 통칭했다. (253)

와우.. 몰랐던 점.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용어는 정말 말 그대로 너무나 온유해서 그어떤 의미도 담지 않은 중립적 지칭이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이 고안한 것이라니. 또 게다가 운동의 일부로써 나온 용어라니. 

 

 

한국전쟁과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은 기막힌 사실 하나는 당시 한국에서 복무하며 화상 피해자를 치료했던 미국 외과 의사 데이비드 랠프 밀러드가 바로 아시아인의 눈을 서구적으로 만드는 쌍커풀 수술을 창시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수술법을 한국 성노동자들에게 시술하여 미군 병사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했다. 오늘날쌍커풀 수술은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성형 수술이다. (259)

이것도 몰랐지. 

하하ㅎ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곱씹을 자유가 허락되는 평범한 일과를 글로 적는다. 내가 이렇게 살 수 있기 위해 무엇이 희생되었을까? 이 안락함이 나에게 주어지는 대가로 무엇이 지불되었을까? 일제 감점기. 한국전쟁. 일제와 한국전쟁 때 학습한 방식으로 반체제 인사들을 고문한 독재 정권. 나는 그중 어느 것도 겪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역경에서 회복할 시간이 없었던 사람들, 성찰할 시간도 없고 성찰을 허락받지도 못한 사람들의 후손이다. (265)

 

가서 한 마디 쏘아주는 것, 그것이 주저되는 것은 아니다. 그거야 못 할 것도 없다. 문제는, 그런 내면적 갈등과 심지어 언어적, 신체적 충돌에 노출될 가능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게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주류 다수 백인 남성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스트레스다. 바로 이 인구 집단에 속하는 남편은 지금이야 나만큼이나 이 문제에 예민하지만 결혼 초기에는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바를 구체적으로 일일이 설명해주어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했다. 그렇게 설명하면서 느꼈던 내 심정, 그것이 바로 '소수적 감정'이었다. (274)

옮긴이의 글을 발췌한 것으로 역자 또한 표현력이 상당하다. 
그러니 캐시 박 홍의 글을 이렇게 멋지게 번역할 수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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