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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시로써 살지만 더 정확하게는 시를 품은 인식으로 산다. 이때의 인식은 실천 가능한 삶까지를 아우른다. 이 글들은 그 인식으로 차오르던 순간의 성찰인 셈이다. (8)
복잡한 엘리베이터에서 고개를 돌리다 옆 신사의 양복 어깨에 내 입술이 묻었다. 그는 그걸 달고 종일 업무를 보고 귀가도 할 것이다. 말하지 못한 미안과 보이지 않는 질책이 종일 따라다녔다. 오해는 절반 이상이 소모다. (30)
당신의 책을 복사해 읽는 시간, 당신이 줄 친 대목에서 훅 숨이 멎을 때, 영혼의 부딪힘이 있다면 그 순간일까. (35)
ㅂ부장님께 자꾸 책을 건네고, 기다리게 되는 마음.
희소성의 가치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결국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견딜 수 없는 말의 홍수. 본질은 설명을 덧붙이기보다 설명을 줄일 때 드러날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37)
책상 위에 커피를 쏟아버렸다. 젖은 책과 젖지 않은 책, 더 가까운 쪽이 늘 더 많이 젖었다. (42)
어떤 경우에도 불완전한 자의 위치를 벗어날 순 없지만 해답을 구해야 하는 일에 직면할 때면 더 아름다운 쪽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제는 덜 부끄러운 쪽을 선택한다. 그리고 입을 닫는다. (46)
보통은 슬프다 말하면서 어느 정도 타인에게 기대려 한다. 그건 슬픔이 아니다. 진정한 슬픔은 입이 닫히고 출입이 멎는다. 그후 서서히 암흑을 가르며 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투명하게 오는 그것, 슬픔은 정화이며 한 뼘 솟은 성숙이다. (51)
사막은 산악지역보다 더 많은 얼굴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당신이 무표정하거나 침묵할 때 더 많은 마음을 숨기고 있듯이. 혹은 그것이 더 많은 발화이듯이. (63)
크...
눈을 보는 기분으로 살아간다면, 눈을 만질 때의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눈이 사라질 때의 고요함으로 죽을 수 있다면. (72)
싸움에서 이기는 쪽은 영리해서가 아니라 더 극악해서이다. (77)
그런 것도 같다.
나는 몇 번이나 극악했고, 얼마나 극악했던 걸까.
인도에선 마구간의 말 한 마리가 아프면 다른 말들이 밥을 먹지 않는다고, 비가 오면 우산을 건넬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아준다는 말로 받는다. 당신이 홀로 비난받을 때 맨얼굴로 피켓을 들고 옆에 서주는 일, 공동체를 능가하는 영혼의 문제다. (81)
자녀를 사랑한다면 그 어머니는 스스로 쓰레기통이 되어야 하리라. 세상의 모순과 괴로움을 안고 온 자녀들이 분비물을 토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 혹은 장소. (87)
자기 자식이라 해도 보고 싶거나 그립다고 선뜻 전화기를 들지 못하는 일. 전화를 한다 해도 다 말하지 못하는 일. 그 머뭇거림, 그 지나감이 자녀를 깊게 하리라. (88)
학생과 타자에 대한 내 시각과 같아서, 너무 반가웠던 부분.
그 머뭇거림, 그 지나감이 그를 더 깊게 한다는 표현. 내가 모호히 가진 생각을 이렇게 명료하고도 아름답게 표현해내는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독서의 기쁨이겠지.
복수초는 제 몸에 열을 내서 주변의 얼음을 녹이며 노랗게 꽃 핀다. 길고 추웠던 2월이 노랑에서 열린다. 생각에도 열이 있따면 그대를 향하는 감각의 모든 집중은 뜨겁고 적막하리라. 넌 열이 날 때 무엇으로 견디니? 열이 아름다운 건 얼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 어머니처럼. (101)
시가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믿지 않는다. 그저 돌아보게 한다. 잘 돌아보게 한다. 저 어둡고 낮고 누추한 곳에서 어찌 빛이 나오는지. 그 빛 따라가다보면 헐했던 몸의 둘레가 환해진다. 그것이 변화이다. (103)
안과 밖, 밝음과 어둠, 앞과 뒤는 통합이 가능하다. 그러나 참과 거짓은 명제로서만 관계가 성립된다. 참말과 거짓말, 두 가지를 반복하다 내성이 생겼다. 참말과 거짓말이 묘하게 섞이는 지점, 합리화. (112)
카프카는 책을 빌리러 온 사람에게 책을 건네면서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말한다. 두세 단계의 배려를 건너뛰어 상대의 부담을 헤아리는 말에서 향기가 난다. 그리고 말년, 그가 요양원에 있을 때 방문한 인터뷰어가 "오늘은 안색이 좋아 보이십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빌려온 빛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친절한 말에 대한 반영입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곧 그의 심연이며 품격이다. 돌려주는 방식이 혹하게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워 나는 외롭다. (114)
가족은 벌레 먹은 사과와 같아요. 누군가는 벌레이고 누군가는 과육이지요. 상한 부분은 다 같이 엎디어 울었던 그 겨울밤의 눈물자국. (125)
맑은 날은 밖이 잘 보이고 비 오는 날은 내가 잘 보인다. 비가, 빗소리가 송두리째 스며드는 육체의 이완은 경계 없이 부드럽다. (128)
어떤 불행한 사태 앞에서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라고 탄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은 마지막까지 사랑했다는 카드를 꺼내지 않는 미룸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서둘러 깐 패처럼 얄팍하고 민망할 것이다. 더구나 탄식할 정도의 마음이라면 분명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수용할 뿐 자랑하지 않는다. (133)
지형이가 떠올랐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두고 그 앞에서 나는, 매번 작아진다.
우리네 삶이란 얼마간은 남의 옷을 빌려 입는 일이거나 불편을 감수하면서 파티란 것에 참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불편한 감정을, 남에겐 도저히 내비칠 수 없는, 그 뭐랄까 좀스러운 부끄러움을 기어코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내보이고야 만다. 그러면서 산다. (135)
만년필에 잉크를 넣을 때, 관을 타고 검푸를 액체가 쪼록 들어갈 때, 지적인 차오름을 느낀다. 장전하는 전사처럼 어딘가로 향하여 발사할 준비를 하는 순간이다. 탱탱하게 부푼 몸이 머리를 통하여 나아갈 푸른 사상을 꿈꿀 때 충만은 괜스레 저 먼저 분주하다. (150)
나는 아마 다이어리를 펼칠 때겠지?
그런데 최근, 어떤 영상을 보다가 깨달은 점이 있어 자꾸 맴돈다.
다이어리와 계획에 집중한 나머지, 계획을 하기 위한 시간을 반드시 '소비'하게 된다는 일설.
그래서 그냥 '해야할 목록'을 머리에 끊임없이 가지고 있다가, 바로 착수해버리는 압도적인 실천 그것이 주는 힘이 있다고.
그렇겠네.
죽은 사람에게는 미움이 떨어져나가요. 흉악범이라도 그래요. 부재는 감정의 대상이 아니라 기억의 범주이기 때문이죠. 기억이란 것도 이미 과거태, 더욱이 부재하는 것은 아무런 힘이 없어요. 미운 사람이 있다면 부재한다고 생각할래요. (178)
부재는 감정의 대상이 아니라 기억의 범주.
돌아갔던 마음들아, 벗어났던 생각들아, 가여움으로 다시 오라. 가엾음으로 바라보면 친근하지 않은 것 없다. (190)
미움도 점점 야위어간다. 너그러워서가 아니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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