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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세번째 남자

'아르바이트'란 표식과 초록 에이프런을 벗으면 저 여자애도 엄마에게 스커트를 다려놓지 않았다고 짜증을 내고 약속시간에 늦은 남자친구에게 신경질을 부릴 것이다. 타인에게는 친절할 수 있기 때문에 서비스업이 생겨났다. (10)

 

결혼한 사람은 모두 불행을 견디고 있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견디기에 가장 어려운 것은 불행이 아니라 권태야. 하지만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에 현상을 바꿀 의지 없이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 권태의 장점이지. (11)

 

그가 결혼한 뒤에도 그다지 달라질 것은 없었다. 여전히 그는 그녀를 찾아와서 연애감정과 섹스를 인출해갔다. 마치 돈이 떨어졌을 때 잔고의 일부를 인출하듯이 당연하게. 그의 뻔뻔스러움을 그녀는 이해했다. 이해한 게 아니라 단지 습관을 바꾸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19)

 

생각해보니 그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질투가 아니었다. 집착이었다. 사랑이라면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고 얼마쯤 용서할 수도 있는 여유가 있지만 집착은 매섭고 가차없는 감정이었던 것이다. (53)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

끊임없이 새로운 화제를 찾아내서 여러 직장에서 모인 서먹서먹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도록 만드는 여자의 노련한 사회생활의 매너에 얼마쯤 기가 질리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그것이 이해관계와는 상관없는 여자의 다감한 성격과 타인에 대한 성실함이라는 것을 간파하게 되자 남자는 여자의 매력을 인정할 마음이 들었다. (74)

 

그렇게 되면 '나는 사랑에 빠졌어'라는 자기 암시와 '저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야'라는 최면에다가 '이것이야말로 나의 진짜 첫사랑이야'하는 망상의 세 가지 구색이 다 갖춰지는 셈이다. (중략)
그런데 그들, 위대한 연인은 헤어졌다. 왜 헤어졌냐고? 그야 그들의 사랑에서 더이상 위대함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그들이 피곤을 무릅쓰고 만날 약속을 한 것은 스스로에게 사랑의 엄연한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누구나 피곤할 때는 그 피곤의 이유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눈앞의 대상까지도 피곤한 존재로 여기게 되는 법이다. 만나자마자 씻은 듯 피곤이 사라지는 관계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이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나마 상대방을 짜증스럽게 바라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위대한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해왔던 그들은 한순간이라도 상대의 존재가 피곤하게 느껴진다는 데에 모욕을 느꼈으며 피곤의 여지가 끼어들 수 있다면 그렇다면 혹 그들의 사랑은 다음 기회에 다시 올 수도 있는 평범한 사랑 중의 하나가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 의심은 과민함으로, 그렇다, 지나친 과민함의 미로 속으로 그들을 질질 끌고다녔다. 미로를 빠져나왔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도달한 곳이 작별의 지점이라는 데에 어리둥절했지만,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는 수없이 헤어져 돌아가며 그들은 각자 위대한 사랑의 장렬한 파국을 애도하면서 울었다. (80)

내가 은희경을 좋아하는 이유...

 

약속을 하면 그 약속을 실현시키는 외에 다른 선택이나 돌발사태에 대해서는 전혀 상상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 그가 택한 나름대로의 편리한 삶의 방법이었다. 그것은 때로는 직장상사가 그의 업무처리 방식을 얘기할 때 들먹이곤 하는 고지식함으로, 그리고 때로는 그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칭송하는 순수함으로 표출되었다. (81)

 

여자는 입술을 깨문다. 그녀에게는 자기를 향한 사랑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본능이 있었다.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의 호감을 얻어내지 못하는 일이란 여자에게는 치명적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어떤 경우라도 여자는 남에게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기는 싫었다. 더구나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닌 위대한 연인 아니던가. 그래서 '피곤하게 이러지 마'하는 말에 상처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다운 참을성과 기지를 동원하여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애쓰는데 남자는 자기 생각에만 골몰한 채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여자는 혹시 자기들의 위대한 사랑이 순전히 자기 혼자만의 지혜와 노력으로 지탱되어온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서운하다기보다 억울한 기분이다. 그럼 나 혼자의 일방적인 감정이었나?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본다. 당장이라도 이 피곤한 자리를 모면하고 싶다는 표정이다. 나는 위대한 연인의 분위기를 되찾으려고 이렇듯 애를 쓰는 반면 그는 소파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시들한 눈길을 내 등뒤의 벽그림에 던질 뿐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나 혼자서 저 이기적인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안달을 해야 하는 걸까. (89)

 

하지만 우리도 아다시피 그녀는 냉소와 지각을 갖춘 여자이다. 이내 헛된 집착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궁리 속으로 접어든다. 구차해지기는 싫다. 헤어짐이 어차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실이 되었다면 이제부터 할 일은 헤어진 뒤 남자가 후회하도록 나의 마지막 모습을 최대한 기억에 남도록 아름답게 아로새기는 것뿐이다. 헤어짐을 정해진 사실로 받아들이고보니 어느새 여자는 남자가 요구하지 않았어도 자기 쪽에서 이 피곤한 만남을 끝낼 셈이었다는 기분마저 든다. 또한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자신이 그렇게 보려고 노력했을 뿐 사실 남자가 그렇게 멋진 사람만은 아니지 않은가. (92)

 

한 남자의 위대한 연인은 많은 남자에게 매력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친 여자는 주인남자를 쳐다보며 이제 많은 남자들에게 해당하는 자신의 매력이 돌아왔다는 것도 깨닫는다. (중략)
주인남자의 강렬한 눈빛과 그 위로 몇 가닥 쏟아져내린 머리카락을 보면서 여자는 문득 이제 지하철 안에서나 거리에서 멋진 남자에게 눈길을 돌려도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동시에 그 동안 자기 자신 역시 많고 많은 멋진 남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점을 반성한다. 그녀는 역시 사고의 탄력성이 넘치는 여자였다. (104)

ㅋㅋㅋㅋㅋㅋㅋ 그치. FA시장에 나오게 된 거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시간 남자는 이미 침대 속에 들어가 있었다. 택시 안에서 생각하기로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돈을 가지고 나와서 다시 여자의 집 앞으로 갈 작정이었다. 여자를 잃고는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자기 방에 들어온 남자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늘 궁상맞고 권태롭게만 보이던 자기의 침대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으로 보였던 것이다. 순간 남자의 머릿속에는 잊고 있었던 피곤이 되살아났다. (104)

 

다음날 아침 눈을 뜬 그들의 첫 느낌은 무엇일까. 술과 잠에서 깨어나며 그들은 언제나처럼 자기의 위대한 연인을 생각했다. 입술의 감촉, 안을 때 느껴지는 양감과 한순간 몸속 은밀한 곳에 불을 지르는 팔의 힘, 그리고...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은 동시에 깨닫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가 어제 무슨 짓을 한 거지? 하룻만에 그들은 자기들 인생에 가장 당연한 일이 부정되고 그토록이나 없어서는 안 될 행복이 어이없이 사라져버린 것을 깨닫고는 경악한다. (105)

 

 

 


연미와 유미

억새풀 안에서 우리는 입을 맞추었습니다. 당신 가슴에 안기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세상에는 나를 안아주고 있는 당신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당신에게 안겨 있으면 아무에게도 내가 안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122)

 

 


짐작과는 다른 일들

그녀는 자신을 저주했다. 이사만 가지 않았어도 그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슬픔이 생기면 사람은 다 어리석어진다. (142)

 

그녀는 남자 때문에 울엇다. 눈물이란 철저히 이기적인 현상이며, 불편한 죄의식을 떼버리기 위해서 스스로가 택한 통과의례의 한 방식이란 것을 그때의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울 때 대부분 자기가 왜 우는지 진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154)

 

 


열쇠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영신은 그제야 한숨을 내쉰다. 그녀에게는 차 안이야말로 자기의 방 다음 가는 방심의 공간이다. 영신이 처음 운전을 배우겠다고 할 때 영신을 아는 사람들은 다들 의아해했다. 덤덤하고 소극적인 데다가 유행이나 첨단 문물 따위에 호기심이라곤 없는 고지식한 영신이 차를 갖고 다닌다는 것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영신이 단 한마디 "혼자 있고 싶어서"라고 대답하자 그들은 쉽게 이해를 했다. 차를 갖고 난 뒤 영신은 기대만큼은 아니어도 세상의 시선에서 차단된 듯한 안도감을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었다. (189)

곧 내게도 생길 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내 방 다음으로 방심의 공간이 되어줄 차와 공간에 대해서.

 

 


타인에게 말 걸기

나는 타인이 내 삶에 개입되는 것 못지않게 내가 타인의 삶에 개입되는 것을 번거롭게 여겨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에게 편견을 품게 되었다는 뜻일 터인데 나로서는 내게 편견을 품고 있는 사람의 기대에 따른다는 것이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할 일이란 그가 나와 어떻게 다른지를 되도록 빨리 알고 받아들이는 일뿐이다. (229)

 

나는 어깨에 힘을 주어 담뱃불을 비벼 껐다. 내키지 않은 자리에 가게 되면 반드시 내키지 않은 일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을 전에도 몇 번 경험하지 않았던가. (230)

 

말을 많이 할수록 그녀는 왜 나를 찾아왔는지 오히려 점점 용건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용건을 먼저 묻는 쪽이 그 용건의 불리한 측면을 감당하기 일쑤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나는 왜 왔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236)

 

나는 결코 너그러운 편은 아니지만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할 때 그 절박함이 상당히 지저분한 포즈를 요구한다는 데 수치심을 느낄 만큼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싶어하는 축이었다. (237)

 

 


먼지 속의 나비

어색하고 조심스럽고, 그래서 감동을 줄 수 있는 섹스. 나는 그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에게 무슨 의미로 비칠 것인지 몰라 몸짓 하나, 말 한마디에도 긴장했다. 사실 만족감 같은 것은 그다지 상관없었다. 그와 한몸이 되고 이로써 각별한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가 완전히 나만의 것이라는 기쁨, 그런 것이 감격스러웠을 뿐이다. 그 감격이 너무 벅차고 서정적이라서 나는 섹스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270)

 

피우던 담배를 입술에 대주자 선희는 한 모금 들이마신 뒤에 벗고 있는 내 가슴 쪽으로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러고는 거기 늘어져 있는 내 목걸이를 장난스레 만진다. 남녀가 상대에게 열정을 느끼는 것은 서로 결합하는 그 순간이겠지만 정이 드는 것은 이처럼 모든 것이 끝난 뒤 다정하게 바라보고 만지는 순간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랑이란 섹스가 아니라 섹스 후에 함께 잠드는 일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도 났다. (275)

 

 


이중주

인혜는 어느 쪽 슬픔이 자기를 더욱 슬프게 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지금 병실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죽음인지, 아니면 남아서 혼자 살아내야 할 어머니의 삶인지. (280)

나도 그랬다.
초롱이의 부재인지, 엄마의 삶인지. 그리고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인혜는 문득 자식이란 부부가 함께 산 세월에 대한 가장 뿌듯한 추억이기도 하지만, 가장 정직한 상처라는 생각을 한다. 흔히 자식 때문에 이혼 못한다는 말들을 한다. 그 말은 자기 자식을 이혼한 가정에서 살게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자식에게 고스란히 투영돼 있는 공동의 추억을 차마 저버릴 수 없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291)

 

 

 

이 책이 1996년에 출판되었다는 걸 믿을 수 없었고, 여전히 없다.

약 26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이 있지만, 감정적으로나 관계적으로는 전혀 차이가 없다. 가장 놀라운 부분.
이 책에서 이질적인 부분을 굳이 고르자면 아마 시대적 한계를 나타내는 사물뿐. 예를 들어 공중전화기라던가, 삐삐라던가.

임경선의 책과 글이 쿨하다고 생각해 그녀를 참 좋아했다. 그런데 임경선 이전에 이미 쿨하지 못해 차가웠던 이가 있었네.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쿨계의 1세대는 은희경, 2세대는 임경선. ㅋㅋㅋㅋ
그런데 이 책과 함께 빌린 양귀자作 <모순>을 5쪽 정도 읽고 있는데, 이또한 만만치 않다.
근래 다시금 회자되고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유가 있는 듯하다.

아무튼 1996년에도 이런 생각과 삶이 가능했구나.
내가 오히려 협소했구나. 과거를 과거라는 틀에 단단히 묶어 고정된 무엇으로 바라보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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