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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어가 우리를 구해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말, 새로운 이야기가 있는 곳에서 새로운 사람이 태어난다고 믿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인간 삶은 그렇게 변해왔다. 그러니 나에게서 어떤 새로운 말도,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오늘 내가 가장 슬퍼해야 할 일이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할까? (7)

 

'단어1'은 제가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놓았고 제 말을 바꿔놓았습니다. 그전에 제 말에는 내용도 의미도 없고 말버릇이나 말투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단어1' 덕분에 저는 아무 말이나 그때그때 따라 하는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11)

나도 마찬가지. 

 

그런데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었는데, 이를테면 다이버나 아마추어 조류학자나 목욕탕 주인이나 인삼파는 상인이나 구름 연구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바로 이 모습이 되어서 살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존재한다는 것 역시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단어를 쉽게 쓰지만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이 각자의 가장 무거우면서도 놀라운 '현실'이다. 생각할수록 삶은 놀라움의 연속이지만 우리의 고유성은 계속 하나의 범주로, 하나의 숫자로 지워져만 간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의 고유성을 지울수록 자기 자신만은 자신의 고유성, 내면에 '살아 있는' 어쩌면 아직은 '이름 없는' 뭔가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도 고유한 무엇인가를 품고 있다고, 우리가 궁금해할 무엇인가를 품고 있다고 믿는 것은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는 거의 '저항'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고 최고의 존중이다. (13)

 

이야기의 신비로움은 삶의 신비로움이 된다. 그 반대말도 사실이다. 삶의 신비로움 없이는 이야기가 없다. 좋은 이야기 안에는 늘 원인과 결과의 딱딱한 인과론만으로도, 숫자로도 잘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것이 모든 좋은 이야기 안에 있는 '고유한 기쁨'이고, (15)

 

나는 현재 우리의 위기는 미래를 말하지 않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더 이상 미래를 믿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더 이상 좋은 미래를 믿지 않는다. 미래를 위한 대안을 질문하고 말하는 것을 너무 큰 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들이 진정으로 알고 싶어 하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미래다. 진정으로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은 좋은 미래다. 언어 공동체에 속하는 우리가 이 좋은 미래를 만나는 방법은 좋은 미래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한 새로운 세계의 창조 앞에는 언제나 언어와 이야기가 있어왔다. 그러니 살아 있는 자의 심장에서 나온 살아 있는 이야기는 우리 모두를 살아 있게 하는 데 필수적이다. 한 사람의 좋은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좋은 이야기는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부드럽게' 각인되고 남아서 우리의 자아를 바꾼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드러움 중 가장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것은 인간의 변화다. 내 이야기를 존 버저는 이렇게 정확한 문장으로 써버렸다. "어떤 이야기에 감명을 받거나 울림을 얻으면, 그 이야기는 우리의 본질적인 일부가 되는, 혹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낳고, 이 일부가, 그게 작은 것이든 광대한 것이든 상관없이, 말하자면 그 이야기의 후예 혹은 후계자가 된다." 
우리 존재는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만큼이나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들었고 무엇을 상상하느냐에도 달려 있다. 이야기 안에는 숨어 있는 사냥꾼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한번 사로잡힌 이야기에서 헤어 나올 수 없고 우리 삶은 우리가 들었던 이야기들의 결론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가 가치를 두는 이야기 안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바로 그것, 우리의 미래, 우리의 최종 결론을 암시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17)

아. 
이 부분을 옮겨 적는 게 두 번째인데, 여전히 좋다.

읽자 마자 옮겨 라샘께 보냈던 기억이 난다. 

 

세상에 소외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이 이야기들에서 멀어지는 것이 '자기소외'다. 그래서 다시 말하기를 시도하려고 한다. (19)

 

 


자유, 약속, 품위

그 바다에서 인간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간의 대소사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간은 빛의 사소한 조각들에 불과했다. 빛 속에 떠 있는 작은 배 한 척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어부는 생각했다. 어부는 인간의 모든 일이 사소하고 무의미할 수 있다는 사실에 실망했던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사실에 위안받았을까? 이를테면 누구나 다 똑같이 덧없고 부질없다는 위안? 지금 각자가 어떻게 살든 최종적인 결론은 누구에게나 같다는 위안? 아니다.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은 다른 단어였다. '신비'였다. 그에게는 인간이라는 한 생명체가 이 세상에 작은 아이로 태어나 어른이 되고 사랑하고 온갖 고통을 받고 살다가 덧없이 사라질 줄 알면서도 그러고도 또 영혼이란 것이 있어서 뭔가 느끼기도 한다는 것이, 자신의 집이라고 믿는 곳에 매일매일 돌아간다는 것이, 자신의 삶이라고 믿는 것을 살아보려고 바둥댄다는 것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37)

 

살면서 수없이 많은 신비에 놀란 그지만 그때만큼 삶의 신비에 놀란 적도 없었다. 나와 함께 살려고 그토록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에 부드러움이 한가득 차올랐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과 따뜻함을 맛볼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의 후반기 삶, 그의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고 그가 그토록 이해할 수 없었던 빛나는 것ㅡ태양이 되었다. 

나는 저 사람 만나서 사람답게 사는 게 뭔지 알게 되었어. 바다는 내가 일하는 곳, 내 직장, 내 삶의 터전, 내가 내 자유를 지키는 곳이었는데 둘이서 하니까 놀이터도 되더라고. 맘 맞는 사람이랑 둘이서 있으니까 일터가 놀이터가 되기도 하더라고. 그게 사람답게 사는 거더라고. (43)

지형이도 떠오르고, ㅂ부장님도 떠오르고. 

 

그때 그물에 뭐가 걸렸는지 저쪽에서 아내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와, 도다리 나왔다. 아유, 눈 좀 봐. 너무 이뻐."
어부가 아내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두 사람이 좁은 뱃전에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짧은 순간 나는 두 사람의 몸 위로 사랑의 요정이 푸드득푸드득 강력하게 날갯짓하는 것을 보았다.
어부가 그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편지를 보냈을 때 그녀는 왜 전화를 걸었을까? 두 사람의 감정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어떻게 서로를 믿게 되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두 사람 모두 물고기의 눈을 볼 줄 안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물고기의 눈에는 생선회 이상, 매운탕 이상의 더 깊고 아름다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다는 어떻게 이것들을 다 만들었을까? 그 비밀을 안고 있는 물고기의 눈은 두 사람의 눈을 깨끗하게 빛나게 했다. 아내도 남편을 따라서 물고기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물고기야, 미안해. 고마워." (45)

 

 


배지근해지다

그는 결혼 후 충북 음성의 금광에 가서 큰돈을 벌었다. 그 시절에 음성은 굉장했다. 꼬마 녀석들은 다이너마이트 터지는 소리에 잠이 깨기 일쑤였고 한몫 잡은 사내들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러 나돌아 다니곤 했다. 나는 음성이 그런 곳이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들었다. 그 후 자료를 찾아보니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일어났을 때 한국에도 금광 바람이 돌풍처럼 불었는데, 특히 충북 음성의 무극광산은 1956년부터 1997년까지 15톤의 금이 나왔다고 한다. (52)

나도 처음 알았네..

 

할머니를 만난 지도 어언 10여 년이 흘러갈 무렵, 나는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의 17마일 드라이브 해변에 앉아 있었다('17마일 드라이브'는 17마일 내내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나는 유칼립투스 향기가 숨 막힐 정도로 가득한 길을 지났고, 머리에 꽃을 꽂은 꽃 같이 이쁜 이마를 가진 젖소를 보았고, 형형색색의 선인장이 가득한 절벽 위에 서 있는 사슴 떼와 뿔을 맞대고 싸우는 두 마리 버팔로, 모래사장에 포대 자루처럼 누워 있는 여섯 마리 바다코끼리를 보았다. 나는 내가 그 풍경을 사랑하고 또 사랑할 것임을, 영원히 사랑할 것임을 처음 보자마자 알았다. (59)

17마일 드라이브. 
읽는 내내 나도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눈맛, 무게 제로

그렇다면 그는 아내 탓을 하지 않았을까? 아주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아내를 탓하는 동안에도 알고 있다. 아내를 탓할 일이 아니라고. 그의 마음속에 있는 뭔가가 "당신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것을 거부하게 했다. 뾰족한 못 같은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자제할 때마다 그는 검은 유혹을 뿌리친 듯 아슬아슬한 안도감을 느꼈다. 다행히 언제부터인가 그는 그런 생각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72)

 

이해할 수 없는 일 중 어느 하나가 저에게 일어났을 뿐이에요.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난 거예요. 두 장애아들의 아버지란 것은 제가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예요. 솔직히 말하면 제일 나쁜 건 제가 장애인의 아버지란 게 아니에요. 제일 나쁜 건 저에게 약해질 기회가 많다는 거예요. 이 애는 내 삶이 힘들다는, 언제나 편리하게 내세울 수 있는 핑계일 수 있어요. 얘를 보면 누구나 내가 힘들 거라고 쉽게 생각하니까. 저는 뭐든지 아들 때문이라고 하면 되는 거죠. 저는 장애아들을 둔 아버지에게 친절하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의 선량한 마음을 쉽게 이용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애가 아니어도 사는 건 어차피 힘들어요. 주변에선 저더러 직장까지 그만두고 대단하다고 하지만,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특수학교에 가고 맘이 싹 바뀌었어요. 거긴 중복 장애를 가진 애들도 많고 업고 다녀야 하는 애들도 있어요. 그런데도 부모들이 힘내서 포기하지 않고 아이들 돌보더라고요. 직장을 그만두고 아예 특수교육을 공부하는 아버지들도 있어요. 저는 그런 아버지들이 존경스러워요. 저도 그분들에게 배워요. 그 아버지들을 만났을 때 받았던 충격 같은 느낌을 잃지 않고 살고 싶어요. (78)

 

그들 중에는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인디언들은 카누를 만들고 열흘 동안 바다에 띄우지 않았다. 이유는 삼나무의 독성이 물고기들에게 좋지 않으니까. 나무를 다루는 일을 많이 하는 막노동꾼인 그는 그런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날은 마음의 얼룩이 지워지고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시원한 바람마저 불면 사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83)

 

"인생에서도 무게 제로를 만들 수 있어요?"
제 아내와 제가 사는 것, 혹은 제 친구들과 제가 사는 것이 그렇죠. 우리는 서로가 지고 있는 무게를 알아요. 제 아내도 저도 서로 상대방이 지고 있는 무게를 압니다. 저는 사람을 보면 항상 그 사람이 지고 있는 무게가 보여요. 제 생각에 사람 사이의 균형과 조화란 게 서로의 무게를 알면서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야 둘이 같이 가라앉지 않아요. 저는 바다가 아무리 좋아도 아내가 우울한 날은 가지 않아요.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요. 아내가 무거워지면 제가 가벼워지고 제가 무거워지면 아내가 가벼워지고. 균형을 맞추기죠. (86)

 

반면 타인을 볼 때 그 사람이 지고 있는 무게를 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자신의 고통으로 타인이 지고 있는 무게를 가늠해보는 사람 또한 드물다. 하지만 아주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의 말은 다르다. 그는 영혼에 바다를 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사람이 너무나 드물기 때문에 그는 전설이다. 우리는 이 전설적인 인물과의 만남을 행복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이 행복이 행복인 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남에게 무게를 싣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거리낌없이 무게를 실으려는 사람은 많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타인의 무게를 느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바다로 가지요." (89)

나의 바다.
책과 영화와 지형이, 그리고 정아. 

 

로마시대의 철학자 보에티우스는 "'너는 잘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에서 해방되어야 잘 살 수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아마 이 말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불멸의 진리일 것이다. (88)

 

 


하쿠나마타타

나는 이렇게 재난참사로 가족을 잃은 슬픈 사람들끼리 만든 조직('펜박penvac'이라는 이름의 조직이다)을 프랑스에서 취재한 일이 있었다. 조직의 목적은 슬픈 사람이 슬픈 사람을 돕는 것이었다. 이런 조직이 만들어진 덕분에 슬픈 사람들은 가장 인간적인 단어 아래 모일 수 있었다. '연대'라는 단어였다. 슬픈 사람들은 그 단어 아래 모여, 그 단어를 임시 피난처 삼아, 다시 인간들 틈에서 짧은 위안을 구하고 어두운 마음을 헤집어 해야 할 말을 찾아냈다. 내가 프랑스에서 들은 연대의 정의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에 속한다. 
"연대"  원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일로 알게 된 모든 것을 당신께 알려드릴게요. 온 힘을 다해 당신을 도울게요. 당신은 나보다 덜 슬프도록요. (99)

연대하는 마음과 연대. 

 

신기하게도 그 앞에서는 사람들이 속내를 잘 털어놓았다. 그는 다른 사람의 슬픔이 이슬 맺힌 새벽 꽃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조심 다뤘다. 나무 테이블은 점점 더 세상의 슬픈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었다. 그 자리에서 가장 슬픈 사람인 그가 슬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가장 슬픈 사람인 그가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그런데 슬픔에 위계질서가 있는가? 그는 자신에게 물어봤다. 아마 아닐 것이다. 각자의 슬픔의 크기는 저마다 우주만큼 광활하다. (100)

 

그가 믿지 못하는 것이 또 있었다.
'세월이 가면 슬픔은 사그라든다고?'
아니었다. 슬픔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슬픔은 사라지는 단어가 아니다. 슬픔은 오겠다는 기별도 없이 제멋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수시로 온다. 눈을 감아도 온다. 슬픔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눈꺼풀은 없다. 슬픔은 거친 밤을 기진맥진 통과하게 만든다. 슬픔은 자신을 진지하게 대하라 요구하는 손님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 슬픔이야말로 딸에게서 엄마가 받은 유산인걸.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슬픔도 눈물처럼 어디론가는 흘러야 한다. (97)

 

 


일기, 동화책, 컵

야채장수 멘토가 이상해요? 저는 인생에서 사회적 지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원래부터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어요. 저도 우리 애들한테 나처럼 살지 말아야 한다고, 성공해야 서럽지 않다고 닦달했으니까요. 어느 날 언니가 그걸 지켜보더니 말했어요. 
"빛이 안 나도 괜찮아. 하지만 따뜻해야 해."
어라, 그 말이 꽤 좋게 들렸어요. 그날 당장 집에 가서 우리 애들한테도 그렇게 말했는데 제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더라고요. 언니는 배움은 짧지만 제 눈엔 누구보다도 인생에 대해 아는 게 많아 보였어요. 
언니는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시할머니부터 모시고 살았어요. 대가족의 맏며느리면서 시장에 와서 장사하는데 저보다 훨씬 힘들 거예요. 언니는 체구도 작고 맨날 아파요. 그래도 언니는 내가 힘들다고 하면 이렇게 말해줘요.
"상대방 입장에 서서 한번 생각해볼래?"
언니랑 있으면 평온해져요. 내가 뭔 말을 하든 언니 입으로 들어가면 더 괜찮은 걸로 변해서 나와요. 언니랑 이야기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게 더 쉬워지지도 않아요. 하지만 언니랑 있으면 사는 것이 더 괜찮은 일이 돼요. (117)

내가 뭔 말을 하든 언니 입으로 들어가면 더 괜찮은 걸로 변해서 나온다니.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게 더 쉬워지지도 않지만, 사는 것이 더 괜찮은 일이 된다니. 

내게도 야채장수 언니와 같은 사람을 꼽으라면, 지형이일까. 라샘일까. ㅂ부장님일까. 

셋이나 떠올릴 수 있다니. 
복이 넘치는 삶이다.

 

결국 우울증을 앓았고 병원에 다닐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가 저만의 우울증 탈출법을 찾았어요. 세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번째 방법은 일기를 쓰는 거예요. 젊었을 때도 일기는 좀 썼는데 쓰다 말다 하다가 우울증을 앓기 시작한 뒤부터는 비교적 규칙적으로 썼어요. 그냥 평범한 노트에 써요. 그렇게 쓴 노트가 벌써 몇 박스 있어요. 시장에서는 온갖 악다구니가 벌어져요. 마늘값, 양파값, 쪽파값 같은 사소한 것들로 얼마든지 죽기 살기로 싸울 수가 있어요. 시장에선 별사람 다 만나요. 별말을 다 듣고. 3초만 참으란 말도 있는데 그게 잘 안 돼요. 밤에 돌아와서 일기에 써놓고 며칠 뒤에 읽어요.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힘들잖아요. 그런데 며칠 뒤에 일기를 읽으면 반드시 돌아봐져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그때는 나도 속이 좁았구나, 그건 사소한 일이었구나. 그런 게 다 보이죠. 쓰고 다시 읽는 것은 사소한 일은 사소한 일이고 중요한 일은 중요한 일로 여기고 살게 해줘요. (119)

 

언제나 느끼지만 종이는 신비로운 공간이다. 종이 위에 뭔가를 적는 순간 종이는 다른 것이 된다. 글이 적힌 종이는 두 가지 시간을 살게 한다. 하나는 과거, 하나는 미래. 나는 그처럼 출판할 목적이 아니라 혹은 좋아요 버튼이 목적이 아니라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둘 글을 쓰는 사람에게 애정이 있다. 돈과 시선과 관계되지 않은 자기만의 창조적인 일을 해보는 것 자체가 자율적인 인간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쓰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표현할 단어를 모색하게 된다. 오늘 있었던 일을, 감정의 복잡함을 어떤 단어로 표현할지 자기가 결정한다. 어떤 문장으로 끝맺을지도 자신이 결정한다. 내적인 자유다. 독립성을 무엇보다도 중시한 모네가 수련과 정원 호수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를 그리면서 "여기서는 적어도 남들과 닮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좋네. 내가 경험한 것만 표현하면 되니까"라고 한 말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삶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믿고 사랑하라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 우리는 쓰면서 어렴풋하게, 그래 바로 이거야 혹은 이것인가 봐 같은 자기만의 해답 비슷한 것을 '감 잡을 때'가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찾아낸 해결책이 좋은 것이라면, 그것이 올바른 것이었음이 밝혀질 날을 기다린다. 그렇게 종이 위에 쓴 것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123)

아. 
내가 블로그를 하고, 일기를 쓰는 이유를 이렇게 정확하게 담아낸 글이라니..

맞아. 정말로 나는 내적인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 그리고 자율적인 인간이고자 글을 쓴다. 단어를 고른다. 
그리고 삶에서 잘 모르겠는 것들에 대한 어렴풋한 감을 잡을 때, 그것을 믿고 기다린다. 올바른 것이었음을. 

 

 

두 번째는 동화 읽는 마음인데, 동화의 세계에서는 대체로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나쁜 놈은 벌을 받는다. 나쁜 마녀는 얻는 게 없고 탐욕은 대가를 치르고 아이들에게 잘못한 어른은 후회하고 아이들의 눈물은 보상을 받는다. 읽는 어른이나 듣는 아이나 그것이 흡족하고 옳고 바람직한 결론이라고 느낀다. 이렇게 우리는 최초의 도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뭔가에 대한 합의를 하게 된다. 이게 보통 사람의 상식이고 이 상식에 근거해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한다. 그런데 이 평범한 상식은 어느 순간부터 시험에 처한다. 나쁜 사람이 벌 받지 않고 탐욕스러운 사람은 더 큰 이득을 취하고 착한 사람은 바보가 된다고 느껴진다(세월호 이후에는 '어른들 말 잘 들어라'라는 말도 시험에 처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에 근거해 행동해야 한단 말인가? 어른들은 너도 나이 들어봐, 살아보면 알게 된다고 한다. 과연 그렇게 살아도 될까? 그렇게 뿌리 뽑힌 채 살아가도 괜찮을까? 
그런데 부조리한 현실의 무게에 맞서서 자신의 고유함,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냉소주의, 상황주의, "세상은 원래 그래", "남들도 다 그래"란 체념을 뚫고 자기 삶을 사는 것도 이 지점에서다. 그래서 어른들에게는 '다시 배우기'가 필요하다. 삶의 애매함, 복잡함, 모순, 혼란, 불확실을 다루는 법을 아프게 배워야 하고 살면서 배운 것 중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을 나누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일을 해내는 사람은 드물고 현재 우리 사회에 어른들의 성장 이야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른들에게 말할 때는 잘 설명해주어야 한다니까요." 희망이 있다면 우리가 무엇이 좋은 이야기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그 안에 도덕을 품고 있다. 제 자식 잘되라고 동화를 읽어준다는 말은 좋은 이야기가 안내자가 되면 거기서 나쁜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다는 순수한 믿음과 관련이 있다. 그 믿음이 야채장수 언니의 내면에 있다. (126)

아.
이 부분 너무 좋아 오래도록 읽었다. 정아에게도 소리내어 읽어주었다. 

 

 


꽃이 폈어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농장을 찾은 나는 트럭이 집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인부들이 느티나무들을 뿌리째 뽑고 있었다. 마당에는 낡은 수건을 목에 맨 아빠가 삽을 들고 땀을 닦고 서 있었다. 나는 아빠에게 달려갔다. 
"아빠 무슨 일이에요? 왜 나무들을 뽑는 거예요?"
나는 그때 아빠의 입에서 나온 대답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곧 어린이날이니까."
"나무들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심어주려고."
"왜요?" 
"애들이 축구하다가 나무 그늘 아래서 땀도 식히고 선생님한테 야단맞으면 나무 뒤에 숨어서 울기도 하고 친구랑 싸워도 나무에 기대면 좋잖아. 아무리 서러워도 어디 기댈 데가 있으면 눈물은 그치게 돼 있어." 
그 말을 들을 때 아빠의 얼굴에서 나무에 기대 눈물을 참던 소년을 잠깐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뒤로 이 이야기는 내 마음이 수시로 기대는 이야기가 되었다. (142)

세상에...

나무들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심어주는 일을 생각하신 것도.
아이들에게는 나무가 필요하다는 것도.
전부 쿵 쿵 쿵. 내 마음에. 

 

인간이 가진 힘 중 수치로 가장 측정하기 힘든 것 중 하나가 회복력이라고 들었다. 측정하기는 힘들지만 상처받았던 사람들의 회복력이 눈에 띄게 강해지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대체 그때가 언제일까? 갑자기 다른 사람 혹은 다음 세대, 혹은 다른 생명을 생각할 때, 그때 인간은 놀랍게 회복된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회복력은 다른 생명도 구하고 자기도 구하는 엄청나게 귀한 힘이다. (145)

 

 


유리창

우리는 오리오 파머에게 배울 것이 있다. 그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존재다. 우리도 그처럼 이 세상의 모든 취약한 것, 위기에 처한 것을 구해내고 말리라는 강철 같은 의지로, 마음 약해지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꿋꿋하게 나아가야 한다. 우리를 꿋꿋하게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많은 것들과 함께, 아무 할 일이 없다는 한가한 목소리에 맞서면서 빨리 올라가야 한다. (200)

 

 


목소리, 이름, 우리, 인생의 전문가

점점 더 많은 총기 사건의 생존자들이 우리를 찾고 우리에게 와요. 나는 다른 사람에게 힘을 주려고 하면서 힘을 얻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222)

 

사실 이상한 말이지만,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데 나는 트라우마가 아주 싫지는 않아요. 덕분에 나는 훨씬 관대한 사람이 되었고 인간에 대해서 다른 방식으로는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웠어요. (225)

가장 아프고 힘든 일이, 내게 아주 깊이 남아 무늬를 만들기도 한다. 
다른 누군가와 결코 동일하지 않은 결과 무늬를. 

 

 


돌고래, 아더 사이드, 스틸 뷰티풀

우리는 대부분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검은 물살 위에서 이리저리 외롭게 흔들린다. 그래서 '아더 사이드'는 우리 모두의 단어가 될 수 있다. 무엇을 원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현실의 다른 측면을 보고, 다른 사람들을 보고, 다른 이야기를 들어봐야 비로소 지금과 다른 삶이 가능하다. '아, 난 이것을 원하는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은 한 개인의 삶에 일어나는 강렬한 해방적 순간이다. 
'스틸 뷰티풀'은 변주가 가능하다. 아무리 많은 일이 일어났어도 아름다운, 슬프지만 아름다운, 덧없지만 영원한, 슬프지만 기쁜. 내 마음의 고독이 찾던 이야기들은 모두 이 말과 관련이 있다. 몇 번이고 곱씹어볼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던 날들은 사랑스러운 일몰에 대한 기억처럼, 어느 아름다웠던 별이 가득한 밤의 기억처럼 끝없이 떠오르는 마음속 풍경이다. 우리의 어둠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아름답고 빛나는 이야기뿐이다. (256)

 

우리의 운명을 어렴풋이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 모두 시적인 것이라면, '시란 무엇인가'는 '인간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257)

 

이 시를 읽고 나자 나는 새미도, 새미를 돌봐준 사람들도 되고 싶어졌다. 새미가 되고 싶은 것은 새미가 목줄을 물어뜯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목줄을 물어뜯는 것은 도전해볼 가치가 있는 일이다. 목줄을 물어뜯어봐야만 '너 자신이 되어라!'라는 도전적인 지혜를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이 어떤 목줄을 물어뜯었는지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새미를 돌봐준 사람들이 되고 싶은 것은 그들이 새미를 행복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살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유사 이래 인류 최고의 기쁜 자기발견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너를 행복하게 했단 말이지, 대단하다!"
나는 시 속에서, 그리고 시적인 순간들을 만나면서 달라지고 싶다. 현실을 변신의 장소인 것처럼 살고 싶다. 특별한 이야기의 힘을 믿고 우리에게 마법 같은 힘이 있음을 믿고 세상에 기적이 존재함을 믿고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감히 믿으면서 살고 싶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믿어야 자신도 달라질 수 있다. 나는 그 가능성의 증거가 되고 싶다. "누가 그래? 내가 예전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260)

 

 


에필로그 :: 우리의 좋은 결말을 위해서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인간이 인간일 때 얼마나 우아할 수 있는지는 알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 지금과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낭비하지 않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우리의 입은 크게 봐서 세 가지다. 먹는 입, 말하는 입, 사랑하는 입. 현재는 주로 먹는 입만 보여주는 시대다. 앞날에 출구가 없다고 느껴질 때 문화는 과하다 싶게 먹는 것에 몰두한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말하는 입, 사랑하는 입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폴란드 기병>이란 소설에서 읽었던 한 문장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이 글의 취지에 맞게 변형해서 소개하면 이렇다.
"나는 네 입이 좋아. 네 숨소리가 좋아. 네가 그렇게 부드러운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너 혹시 알고 하는 말이야? 내가 들려준 것이 너의 이야기란 것." (262)

 

우리가 곧잘 그 사실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지만 세상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언제나 가장 좋은 이야기로 힘을 내고, 가장 좋은 이야기와 함께 여러 가지 압력에 맞서 싸우면서 따뜻하면서도 깊게 대담하면서도 섬세하게 살 수 있게 된다면 기쁠 것이다. 현실을 살되 마음의 한쪽에 뭔가를 품고 현실의 일부분을 바꿀 수 있다면 기쁠 것이다. 저마다 이 문제 많은 현실의 '해결자의 목소리'가 된다면 기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여러 모습 중 가장 좋은 모습이 우리의 미래가 된다면 정말 기쁠 것이다. (263)

 

 

 

내가 읽은 정혜윤 작가님(혹은 피디)의 책 중 가장 좋았다.
내 주변에는 정혜윤 작가님의 팬이 꽤 있는데, 나도 그렇다고 선뜻 이야기할 만큼 좋았던 책이 없어서 못내 아쉬웠다. 
그런데 이제 정혜윤 작가가 좋다는 그들에게 '나도 그랬다'며 말할 책을 만난 것 같다. 
인터뷰집과 비슷한데, 내가 모르는ㅡ혹은 내가 너무 잘 아는ㅡ아무개의 인터뷰여서 비슷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자꾸 그리고 자주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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