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으로 살아가면서 종종 그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볼이 빨갛고 내성적인 누군가의 빈틈을 알아보게 해준, 얼굴 까맣고 내성적인 다른 누군가의 동일한 빈틈. 그럴 때마다 생각하게 된다. 비록 학생들에게 카리스마 넘치는 역할 모델이나 근사한 멘토가 되어주지는 못할지라도 내가 지닌 모종의 빈틈 덕분에 타인의 그것을 세심하게 알아차리고 보듬어줄 수는 있을 거라고. 그리하여 싱그럽고 화사하고 당찬 젊음의 틈새에 숨어든, '수줍어 인사 못하고', '소심해서 예의 없는' 몇 안 되는 얼굴들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다독일 것이라고. "내가 너야. 그래서 나는 알아본단다"라며 말이다. (7)
나도 덩달아 쿡 웃음이 나려 했지만 다음 순간 뭉클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꺼이 팔불출이 되어준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대학에 합격했을 때 부모님도 그러지 않으셨다. (28)
나는 그저 꾸역꾸역 단장하던 그녀의 모습에서 꾸역꾸역 성실하고 상냥했던 나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을 뿐이니까. 손거울을 보며 웃어놓고 아마도 다음 장면에서 다시 울 사람에게, 그래서 일순간 동류의식을 느꼈을 따름이니까. 말하자면 그것은 고인 눈물이 마르고 나면 이내 휘발될 피상적인 감상이었다. (39)
아이의 내면이 손으로 만져지듯 전해져왔다. 특히 학원 한문 강사인 영지 선생님을 향한 선망이 그랬다. "선생님 퇴근하실 때까지만 여기 있어도 돼요?"라고 묻던, "선생님이 너무 좋아요"하며 힘을 다해 끌어안던, 명장적진 가운데 선생님이 좋아할 만한 책을 고르던, 떡보자기를 품에 안고 선생님을 만나러 가던, 그런 순간순간의 감정.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여러 인터뷰에서 감독은 <벌새>가 자전적인 이야기를 반영한 영화라고 밝힌 바 있다. 그가 청소년기의 여러 해 가운데 하필 1994년의 기억을 길어 올려 복원한 것은 그해 여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어서, 혹은 그해 가을 큰 다리가 무너져서가 아닌 듯했다. 그 순간들을 그토록 세세히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그해 영지 선생님이라는 한 어른을 알게 되어서일 것이다. 짐작건대 그 미소한 기억들은 흙더미 속에서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라고 묻던 한 아이를 이토록 반짝이는 영화의 감독으로 만들어주었을 테다. 생의 어느 시절에 만난 나의 홀레 아주머니들이 내게 그리 해주었듯이 말이다. 언젠가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어른이 되어줄 수 있기를 그날 밤 잠자리에서 기도했다. (42)
말하자면 그건 시간이 준 선물이었다. 그러니 지속되는 관계 속에서 때론 상대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 당신의 길을 그대로 걸으며 시간의 선물에 신뢰를 가져보면 어떨까 한다. (86)
이 글을 쓰던 중에도 또 한 건의 아동학대에 대해 들었다. 극악한 부모라는 자들에게 더 무거운 형이 언도되길 바라는 청원에 목소리를 얹기보다는 가정폭력을 겪은 아이가 "그러니까 집안 내력이 중요한 거야", "아무튼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사람과 사귀어야 해"라는 식의, 선량한 이웃이 무심코 던진 말과 시선에 상처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손을 보태고 싶었다. 그게 더 옳아서가 아니라 단지 내겐 그게 더 절실하게 여겨져서다. 그 과정에서 분노가 쉽사리 나의 힘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연민 없는 분노가 넘실거리고 예의 잃은 정의감이 너무 자주 목도되는 지금 이곳에서. (92)
거시적인 것에 힘을 보태기에 가끔 마음이 부칠 때, 엄두가 안 날 때, 이 글이 기억날 것 같다.
쉽게 마음을 잃고 놓아버리지 않을 수 있게.
머리가 복잡해져서 세 번째 듣는 일화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는 나를 향해 그분은 "오늘도 부탁해요. 고마워요!"하고 소리치셨다. "저도 감사해요"라고 건성으로 대답하다 이내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왔다. 어디선가 읽은 명제가 떠올랐다. "연민은 쉽게 지친다."
잘 알지 못하는 대상을 향한 즉각적인 연민은 너무나 얕아서 저렇듯 세 번을 넘기지 못한다. 그럼에도 몇 해 지난 지금 드는 생각은, 타인을 위해 기도했던 그 아침의 몇 십 분이 더해진 세상이 그것마저 없는 세상보다는 따스하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얕음을 부끄러워하되 마음 자체에 대해서는 냉소하지 않으려 한다. 성자가 아닌 내가 '고아와 과부의 얼굴로 온 타자'에게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은 참으로 작고 비루할테지만 매번 조금씩 더디게 지치기를. 다음에는 세 번째 아닌 네 번째에, 그 다음엔 다섯 번째에. 그렇게 생을 통해 "연민은 더디게 지친다"는 명제를 만들어가고 싶다. (96)
멋진 이소영 교수님.
언젠가 또 만나뵈겠지.
그때 꼭 말씀드려야지.
너무너무 뵙고 싶었다고.
원룸에 살다 이곳으로 이사한 지 좀 되었다. 이사 후 제일 좋은 점이 아침에 눈 떴을 때 싱크대부터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전에 살던 곳에서는 침대 대각선으로 놓인 개수대의 수세미가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침실'로 들어가 램프를 켠 채 책을 읽다 잠드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는 게 경이로웠다. (97)
투룸형 집, 출장지의 깨끗한 침대, 주말의 외식. 이 정도면 딱 좋다며 스스로의 솝가함에 은근히 자부심을 가졌던 그 조건들은 지금 이 땅에서 누구나 소박하게 누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중략)
가진 자들이 얼마나 더 소유했는지에 분개하지 않는 나는, 덜 가진 이들이 나만큼이나마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얼 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을 놓지 않으려 한다. 말하자면 그건 '만족한 자'의 윤리적 책무가 아닐까. 이를 저버리는 순간 나는 물욕 없음을 내세우며 안빈낙도 운운하는 배부른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100)
더 나아가 비즐러를 변화시킨 것은 '예술과 사랑에 대한 감동'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욕망이었다. 자기가 갖지 못한 타자의 것에 대한 선망과 모방 충동, 그리고 자기동일시. 이름부터 어딘지 예술가다운 게오르크 드라이만의 삶은 본인에게는 고민과 갈등이 가득한 전쟁 같은 것이겠지만 관찰자인 비즐러의 눈에는 그 고민과 갈등마저 무대 위 배우의 그것처럼 멋지고 아름답게 보였을 것이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타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감시카메라로 훔쳐본 비즐러는 그날 밤 휑하고 투박한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와, 성매매 여성과 비굴하고 초라한 섹스를 한다. 아마 그는 이때 아프게 깨달았을 법하다. 욕망하는 대상을 모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바꿔 말해 자신은 결코 드라이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115)
그 무렵 한 후배가 모처를 소개해주었다. 단순한 가게가 아니라 고전음악 애호가의 공감대가 감도는 편안한 장소라고 했다. 찾아가보니 그곳은 과연 음반가게 이상이었다. 클래식을 즐겨 듣거나 혹은 직접 연주하는 분들이 군데군데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구매 압박도 전혀 없었다. 글로만 접해온 살롱문화라는 게 혹시 이런 걸까 싶었다. 그렇게 좋은 곳이었지만,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누구도 내게 눈치 주거나 옷차림을 아래위로 훑어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는 물론 일방적인 감정이었을 수 있다. 글분들에게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문화자본을 나는 갖지 못해서였을 테니까. 하지만 그 미묘한 불편함을 이해할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적지 않으리라 짐작한다. 이는 단지 음반을 살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닌, 혹은 '여름 합숙 가서 염소치즈 먹는대' 식의 익살 차원도 아닌, 한층 은밀하고 견고한 것이었다. (140)
막연한 감정을 이렇게 표현해내는 날카로움.
말하자면 나는 학창 시절 상흔이라고 부를 만한 아픔을 겪은 게 아니고 그저 한 친구와 감정의 엇갈림을 한 번 경험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작은 영화가 큰 호응을 얻었던 바로 그 이유처럼, 그런 경험은 나만의 특수한 것이 아니라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누구나 겪었을 원형적인 아픔이다.
그럼에도 왜 그 하나의 기억에 이제껏 매여 있었을까. 혹시 스스로를 위한 변명 아니었을가. 예전에 그랬었다고, 이번에 또 그랬다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말이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미래의 일을 질투하고 과거의 업을 따라갔"던 것이다. 다시 말해 상흔이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던 게 아니라, 나 스스로 자기연민의 고치를 만들어 거기 숨고자 기억을 붙잡고 되새김질했던 셈이다. (150)
원형적인 아픔이라니.
아 진짜.. 기가 막힌 표현.
그 애착은 과연 찰나적이었지만, 나를 실망시키거나 공허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관계의 밀도가 영원히 동일하지 않다고 해서 기억들이 휘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즐거움으로, 고마움은 고마움으로 영원히 남는다. 핏줄이 아니고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 단위'가 아니어도 그렇다. 내 혈액 안에 이 순간 알알이 녹아 흐르는 '팔 쓸고 등 눌러준 약손들'과 '선생님 서랍 속 메디락'처럼 말이다. (167)
돌이켜보면 늘 그랬던 것 같다. 사람을 막연히 동경하는 것은 상대의 매력과 장점 때문일지라도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연히 보게 된 빈틈을 통해서였다. 누군가의 세련된 매너에서 어색함을 감추려는 몸짓을 읽었을 때, 냉소 이면에서 뜨겁고 서투른 열정을 보았을 때, 강인해 보였던 이가 실은 심약한 '새가슴'임을 느꼈을 때.
가끔 그게 안 되기도 한다. 이해관계가 대립할 경우 누군가의 단점이 빈틈임을 알아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한편 아예 빈틈을 찾을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이리 보고 저리 살펴도 근사하기만 한 거다! 짐작하건대 내 고집스러운 선망이 그의 약함마저 멋짐으로 채색했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충돌하는 이의 빈틈을 연민하고, 선망하는 이의 빈틈을 알아차릴 수 있으면 한다. 그리고 자신의 빈틈에도 조금 너그러운 마음을 품으면 좋겠다. (183)
그 후 나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을 부풀리고 과장하며 주도권을 쥐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의 욕망과 리듬을 존중하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을, 하나하나의 선물을 인생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배울 줄 아는 것, 그리고 자만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은 채 똑같은 선물을, 똑같은 기쁨을 상대방에게 줄 줄 아는 것이다. 요컨대 단순한 자유다. 세잔은 무엇 때문에 생빅투아르산을 '매 순간' 그렸겠는가? 그것은 매 순간의 빛이 하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이란 그 모든 비극에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그렇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이매진, 2008
미래가 오래 지속되는 것이라면, 그 모든 비극에도 여전히 삶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아픈 배움들이 너무 늦은 것은 아니기를. 오늘보다는 내일 더 사랑하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192)
나에게도 사랑의 다른 이름은 자유.
이 점에서 지형은 내가 가장 큰 자유를 누리도록 있는다. 해주는 게 아니라 있는다, 그저 옆에서.
그악스럽게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 역시 서로에 대해 그러리라. 그렇게 믿으려 한다. 약한 척하더니 생명력 하나는 끝내준다며 함부로 냉소하는 대신 안도의 숨을 내쉴 거라고 말이다. 바닥에 머리 처박고 울던 그대가 스르르 다시 고개를 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대견하다며 햇볕 같은 웃음을 그대 위로 쪼여줄 것이다. (217)
학생 시절부터 각별했던 이들과 오랜만에 즐겁게 웃었는데, 기분 상하거나 슬플 일 하나 없었는데, 헤어져 돌아오던 길에 심장이 에여왔다. 가만히, 정적 가운데 내면에서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 관계가 예전 같을 수 없을 것임을,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우리는 매끈하고 예의 바르게 서로에게서 점차 멀어질 것임을 예감했다. 그 예감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생각하면 표현하고 싶어질 테고, 표현하면 소중한 감정이 휘발될 것 같아서. 생각을 끄기 위해 라디오를 켰다. (238)
매끈하고 예의 바르게 서로에게서 점차 멀어지는 일.
아아, 우리들의 신부님. 선망이란 단어를 욕망으로 잘못 이해하셨던 것일까. 웃음이 터져 나와서 말을 못 잇던 내게 신부님이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봅니콰?"
그날 저녁,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단번에 "외국에서 오신 그 할아버지 신부님?"했다. 언젠가 자신이 고해성사 도중 울먹거렸더니 "울지 말코 또박또박!"하며 야단쳤다는 거다. 울다 말고 웃음이 터졌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그랬다. 단어를 고르고 골라 문장화했던 무거운 상념이 일순간 풍선처럼 펑 터지면서 마음이 둥실 가벼워졌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당시 나는 '잘못'을 고백한 게 아니었다. 죄를 성찰하고 통회하는 대신, 감춰둔 고민들을 난해한 어휘와 수사로 치장한 후 종교의례의 외피를 빌려 그저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던 것 같다. 하늘에 계신 분 역시 속셈을 모르셨을 리 없다. 그건 올바른 고해 방식이 결코 아니었지만, 떠밀어내는 대신 그분은 어르고 달래며 '내가 좀 웃게 해줄까?' 윙크했던 게 아닐까. 신이 선물한 웃음 한 조각. (260)
조력자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창 상담 모드로 들어서 있던 나는 무방비상태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선생인데, 뭐든 내 쪽에서 해주어야 하는데 하며 울먹였다. 위로의 순간은 도둑처럼 왔다. 도움과 조언을 내줄 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던 중에, 뜻밖의 상대로부터 기습적으로. 손윗사람의 표정과 자세로 나는 아이처럼 울었다. (263)
위로의 순간은 도둑처럼 왔다니.
이교수님 덕분에 법문학이라는 세부 전공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법이라는 명징한 영역에 대해서도 문학이 자리할 수 있구나. 함께 할 수 있는 거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교수님은 시인 같다고도. 혹은 문학평론가 같다고.
법문학은 어떤 것일까.
법과 문학이 만나면 무엇을 만들어내며, 어떤 이를 도울 수 있는 걸까.
현실이라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자본주의 어린 시선으로 내 학문을 바라보았음을 반성했다.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아이들은 좋겠네.
이렇게 멋진 교수님을 학부 시절 만날 수 있다니.
찻물 끓이고 서랍 안에서 과자 꺼낼 때의 표정을 나는 모른다. 유체이탈해 스스로를 본 일이 없으니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이들이 품었던 느낌이 내가 조문 가서 섭내 교수님을 보며 가졌던 감정과 닮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그 생각을 하면 왠지 행복해진다. 우리가 세상 안에서 서로 관계 맺으며 '지금 저 모습으로 저 사람을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더 많이 만났으면 한다. 그런 사소한 게 무슨 소망이냐 할 테지만, 일생 동안 품을 바람 중 하나다. (272)
말미 어디쯤이었을 것 같은데, 문학적인 자신의 글체를 다듬느라 매번 고생한다는 부분을 보고 왠지 모를 (앞선) 동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왠지 든든한 학인을 만난 기분이 (혼자, 그리고 몰래) 들었다.
참 만나고 싶은 분들도, 만나야 할 분들도 많다.
그래서 더 놓을 수 없다고 운동화 끈을 한 번 더 동여매듯 생각했다.
덧.
책의 뒷 표지에 홍성수 교수님의 추천사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 교내 독서모임 도서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를 받고 보니 뒷 표지에 추천사가 있다.

전자는 내가 구입한 책이고, 후자는 내가 추천한 책.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결이 있기는 한가보다, 하고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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