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SMALL
애고 어른이고 우린 도통 아는 게 없었다. 이런저런 생활의 지혜 같은 것은 기가 막히게 잘 알면서도, 자기 삶을 관통하는 아주 결정적인 사실은 모른 채로, 때로는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로도 우리는 그럭저럭 살았던 것이다. 그런 비밀은 모르는 게 나은 때도 많다. 알아봤자 생각은 복잡해지고 골치만 아프고, 어떤 경우에는 자기 삶을 아예 부정하고 싶어지기도 하니까. (22)
나는 이 역시 단박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둠에 대해 자꾸 물었다. 나도 이모처럼 이해하고 싶었으니까. 끈기 있게 대답을 해주던 이모는 결국 화를 냈고 나는 울었다. 울면서도 모르는 게 죄냐고 물었다. 이모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대답이나 설명보다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더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지금 이해할 수 없다고 묻고 또 물어봤자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모르는 건 죄가 아닌데 기다리지 못하는 건 죄가 되기도 한다고. 이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23)
구와 멀어진 후에도 늘 구를 생각했다. 우리가 함께하던 지난날을 생각하고, 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상상하고, 구도 나를 이렇게 생각할까 궁금해하고, 생각은 돌고 돌아 구를 미워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그래서 구 아닌 다른 것, 다른 사람, 학교나 공부 따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 그것들이 재미없다는 생각 또한 하지 못했다. 구에 대한 생각이 서서히 옅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생각이 들어오자,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구는 엄청나구나.
구 대신 들어온 다른 것들이 터무니없고 옅고 가벼워서 구의 밀도를 대신하지 못했다. 구에 비하자면 친구나 공부나 학교 따위 너무도 시시했던 것이다. (51)
지형이도 그랬다.
늘 엄청났다.
그래서 화가 났었고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그게 사실이었다.
터무니없고, 옅고, 가볍고... 으으 몹시도 정확한 표현이라 달리 말 할 게 없네.
밤에 담을 만날고 나갈 때 어머니가 어디 가느냐고 물어보면 그냥 나간다고 하거나 아예 대꾸를 안 했다. 담과 나에 대해 어머니가 심드렁하게 생각하든, 다시 잘 지내는구나 생각하든, 미심쩍은 눈으로 보든 그 모든 생각과 시선이 다 싫었다. 잘 지내든, 못 지내든, 미심쩍든, 어떤 생각도 사실과 미세하게 어긋나는 것만 같았다. (56)
자기가 지금 울고 있다는 것을 담은 알까.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까. 죽으면 다 끝인 줄 알았는데, 몸은 저기 저렇게 남아 있고 마음은 여태 내게 달라붙어 있다. 저 무거운 몸을 내가 가져가고 이 마음을 담에게 남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 마음도 네가 먹어주면 좋을 텐데. 나도 안다. 맑고도 우스웠던 우리의 첫키스와 그 겨울밤을 떠올리던 또 다른 밤도 나는 다 안다. 너와 다른 우주에서 온전히 기억하고 있어.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억뿐이니까.
기억이 나의 미래.
기억은 너.
너는 나의 미래. (64)
어우.... 소름..
최진영 작가님의 다른 모습을 본 기분이다.
<이제야 언니에게>를 작년 이맘쯤 읽고 마음이 얼마간 힘들었어서 자꾸 피하게 된 작가님이었는데, 내 오해였구나.
첫키스와 그 겨울밤을 떠올리던 또 다른 밤이라니...
함께 걷는 밤길은 고요하고도 따뜻했다. 담이와 걸을 때도 좋았지만 우리 사이에 노마가 있으면 묘한 안정감이 더해졌다. 긴장은 잦아들고 이상하게도, 보호받는 기분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는 기분. 어두운 밤이 그런 우리를 감싸안는 느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착해지는 것 같았다. 함께 걸으며 여름에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먹고 겨울에는 붕어빵을 사 먹었다. 봄과 가을에는 꽃과 단풍과 밤바람에 들떠서 무엇을 사 먹을 생각도 못했다. 노마가 집에 들어가 문 잠그는 소리까지 듣고, 담을 들여보내며 내일 보자 인사하고, 집에 돌아와 대충 씻고 누우면 일어나야 할 시간까지 네다섯 시간쯤 남아 있곤 했다. 몸은 고되고 앞날은 곤죽 같아도, 마음 한구석에 영영 변질되지 않을 따뜻한 밥 한 덩이를 품은 느낌이었다. (73)
아마 2020년을 떠올릴 때 내가 드는 기분을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넷의 시간들이 꼭 이것과 같아서, 어떤 이의 흠결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냥 덩어리째 좋아서.
우린 헤어질 수 없는 사이니까. 내게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내린 확신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어느 날 자연스럽게 깨달은 거였다.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네.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하겠네. 어린 날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비슷한 감정을 공유했다. 나쁜 짓도 좋은 짓도 부끄러운 짓도 같이 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 마음에는 비슷한 공간이 만들어졌고, 떨어져 있을 때에도 그것은 같은 울림을 만들어냈다.
처음 만났을 때, 구와 나는 다른 조각으로 떨어져 있었다.
함께 하던 어느 날 구와 나 사이에 끈기 있고 질펀한 감정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우리의 모난 부분을 메워주는 퍼즐처럼, 뼈와 뼈 사이의 연골처럼, 그것은 아주 서서히 자라며 구와 나의 모나고 모자란 부분에 제 몸을 맞춰가다 어느 날 딱 맞아떨어지게 된 것이다. 딱 맞아떨어지며 그런 소리를 낸 것이다.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네.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하겠네.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다만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랑에 가장 가까운 감정. 우리 몸에도 마음에도 그것이 들러붙어 있었고 그것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84)
네 마음이라며 찾아준 사이토 마리코, 단 하나의 눈 송이처럼
나도 우리 같은 글을 찾았어.
내 마음... 내 마음은 담이 잘 알지. 잘 알고 짚어주지. 담을 생각하자 속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음을 간신히 붙잡고 있던 거중기가 고장 난 것 같았다. 담은 내 마음에 다른 여자가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마음에... 누나가 들어왔나? 담은 나의 가족과 친구에 대해서도, 그리고 노마에 대해서도 잘 안다. 잘 아는 것을 넘어 우리는 그것들을 함께 겪었다. 그래서다. 그래서 담을 만나기 겁났다. 담이 왜 내게 다가왔는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담이 다가왔는지 내가 다가갔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우리 사이에는 '왜'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누나와 함께 있을 때면 나는 가끔 허공에 대고 물었다. 왜, 대체 왜. 당신과 내가 어째서. 남녀가 만나는데 타이밍 말고 무슨 이유가 더 있느냐고 누나는 말했다. 그랬다. 우리는 남녀 사이였다. 담과 나보다 누나와 나 사이가 그런 정의에 훨씬 어울렸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이유가 필요했는데, 이유가 필요하다며느 그게 과연 사랑일까. (101)
걱정이 담긴 충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 내겐 그런 여유가 없었다. 타인의 말을 구기거나 접지 않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여유. (106)
담이 생각을 매일 했다.
나는 담에게 들을 과거가 없었다. 함께 겪었으니까. 겪을 때마다 감정을 공유했으니까. 그때 우리 열한 살 여름에 개천에서 같이 피라미 잡다가, 라고 담이 얘기를 꺼내면, 너 신발 한 짝 떠내려가서 그거 잡는다고 우리 둘 다 죽을 뻔했을 때? 라고 다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설명 없이도 대화는 성큼성큼 나아갔고 감정은 절로 드러나 꾸밀 필요 없었다. 침묵이 어색하거나 불편하지도 않았다. 누나가 열다섯 살 생일에 남자애랑 맥주를 마시고 놀이터에서 토하다 졸다를 반복하다가 옆집 아줌마한테 걸려서 집에서 쫓겨날 뻔했다는 얘기를 했을 때는, 생일마다 담과 만들어 먹던 팬케이크와 공장에서 퇴근하던 길에 담과 같이 강변에서 처음 마셔본 맥주와 미끄럼틀 밑에 우리만의 집을 지어놓고 부부 놀이를 하던 날들을 동시에 떠올렸다.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 있어 좋았고, 그게 참 소중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눈앞의 누나를 보면, 그 사이 세월이 삼십 년 쯤 흘러버린 것만 같았다. 산을 수십 개 넘고 강을 수백 개 건너도 도무지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담을 두고 온 것 같았다. (108)
누나에게 담이 얘기를 제대로 한 적 없었다. 누나는 나와 아주 친하게 지내던 여자애 정도로만 담을 알고 있었다. 그 정도로도 담을 질투했다. 하지만 느꼈겠지. 내게 아주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돈 말고도 내 마음을 좌우하는 '어떤 것'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그랬을 것이다. 누나가 알고 있는 내 처지나 누나가 짐작할 수 있었던 내 미래가 아니라, 누나가 모르는 '어떤 것'이 누나를 지치고 단념하게 했을 것이다. (118)
또 멘델스존이 좋았다. 마트에서는 종일 꽝꽝 거리는 음악이나 깔깔 웃는 라디오를 틀어놓았다. 하주 종일 꽝꽝과 깔깔을 듣고 있으면 신경이 예민해지고 몸이 무거워졌다. 그래서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냉동고 뒤에 있는 작은 공간에 앉아 엠피쓰리에 이어폰을 꽂고 들었다. (134)
헤어진다면, 어쩌면 구의 말대로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집도 사면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불행할 것이었다. 구를 잃고 얻은 삶이니까. 아주 작은 불행만 닥쳐도 구를 떠나서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테고, 조금이라도 행복할 때면 구가 생각나 그 행복을 모른척 하려고 할 것이었다. 불행해도 행복해도 구를 생각할 텐데,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앗다. 구를 생각하면서 살기는 싫었다. 구와 같이 살고 싶었다. (151)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온갖 나쁜 것들이 빠져나왔대. 근데 거기 희망은 왜 있었을까. 희망은 왜 나쁜 것을 모아두는 그 항아리 안에 있었을까. 이 얘기를 담에게 꼭 해주고 싶었는데 해주지도 못하고 나는 죽었다.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 같은 거니까. 이 말을 왜 해주고 싶었냐면, 나는 아무 희망 없이 살면서도 끝까지, 죽는 순간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그건 바로 담이 너 때문에. 희망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 (167)
구와 구의 삶에 대한 증명은 담 아닐까.
그리고 그 증명의 완수를 위해 구를 삼켰다. 먹었다.
죽은 구를 먹어서, 내 안에 존재하게 한다.
하여 내가 사라질 때 구도 사라질 수 있게 된다.
어느 쯤엔가는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다시 요원해지는 기분이다.
구랑 담이랑 노마랑 셋이 순한 마음으로 더 오래 지냈음 좋았을 텐데.
책을 읽는 내내 구가 됐든 담이 됐든 내 얼굴은 자꾸만 울상이 됐다.
반응형
LIST
':::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 브래디 미카코 (0) | 2021.11.10 |
---|---|
별것 아닌 선의 :: 이소영 (1) | 2021.11.08 |
소설 보다 가을 2021 :: 구소현, 권혜영, 이주란 (0) | 2021.11.01 |
아내 대신 엄마가 되었습니다 :: 후지타 사유리 (0) | 2021.10.06 |
휴먼카인드 :: 뤼트허르 브레흐만 (0) | 2021.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