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SMALL
이들과 베테랑 아나운서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초짜였으니까. 초짜는 누가 잘하고 못하는지를 구분할 능력이 없다. 20년 차 베테랑 아나운서나 일정 수준에 도다한 아나운서 준비생이나 비슷해 본인다. 그저 나보다 잘하기만 하면 그저 감탄하게 된다. 자신의 내공이 쌓여야 상대방의 내공을 간파하는 법이니까. (14)

 

"근데 결과는 왜 이모양일까? 분명히 맥락을 다 이해했다 싶은데 점수는 잘 안 나와."
"왜 그런 것 같아?"
"나도 너무 이상해서 교수한테 항의를 했어. 발표 때 그렇게 칭찬을 해주시더니 이 점수가 대체 뭐냐고."
"그랬더니?"
"객관식 시험 점수를 알려주시더라고. 근데 나 외우는 거 싫어하잖아."
형은 한심하다는 듯 한숨 섞인 말투로 나를 불렀다.
"야."
"응."
"헛소리 말고."
"응?"
"이제 너 스스로 너를 한번 증명해봐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사람이 말이야, 한번 뭔가를 이뤄내면 그 힘을 발판으로 쭉 계속 잘하게 되는, 뭐 그런 게 있거든."
"응."
"문제는 네가 아직 스스로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어떤 성과를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인 것 같아."
"아닌데, 있는데."
"뭔데?"
"런던에 있을 때 스타벅스에 알바로 취직한 거 엄청 자랑스러웠거든."
"그런 거 말고, 인마."
"하긴 그렇지. 초등학교 이후로 인생이 줄곧 어두웠지."
"그건 네가 재능이나 실력에 비해 자신감이 없고 자좀감이 모자라서 그래."
"그런가?"
"나는 말이야, 1등 하다가 2등 하잖아? 그럼 잠이 안 와. 열받아서."
"잘 알고 있지. 형은 장기를 둬도 이길 때까지 두잖아."
"그렇지."
"그게 네가 독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너무 일찌감치 실패와 포기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도 같아."
"음."
"딱 한 번, 단 한 번 그 성취감을 느끼고 나면 사람이 욕심도 좀 생기고 목표도 좀 단단해지고 그러거든? 잔말 말고 언론사 시험 그거 죽을 힘을 다해 한번 매달려봐. 네 자신을 네 맘에 들게끔 한번 증명해봐."
"증명하면 뭐가 달라지나?"
"네가 너를 진짜로 믿게 될 거야." (30)

 

면접面椄. 한자를 풀면서 서로 대면하여 만난다는 뜻이다. 면접관과 면접자는 서로 관찰을 하고 대화를 나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서로'란 거다. 그런데 면접자는 흔히 그 지점을 망각하고 상대에게 자신을 맞추려고만 애를 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진짜 면접, 서로 관찰하는 면접의 현장은 실로 팽팽한 기싸움의 향연이다. 이 기싸움에서 이겨야 비로소 면접관의 눈에 띌 수 있다. (63)

 

시청자들은 기가 막히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낸다. 말하는 내가 자유롭다 할 적에, 그때의 말이야말로 싱싱하게 살아 시청자들에게 건강함으로 가닿을 것이다. (66)

학생도 마찬가지.
그런 의미에서 정말로 진심은 전해지는 것이라 할 수밖에.

 

 

하지만 인생이란 게 생각처럼 살 수 없을 때가 있다. 하찮은 일 때문에 부장에게 말을 걸어야만 하는 상황이 종종 생기곤 하는 것이었다. '몸이 아파 하루만 쉬겠습니다' '회식을 못 가게 됐습니다' '휴가 다녀오겠습니다'처럼 하찮아도 보고가 필요한 사항들은 적지 않았다. 말을 섞지 않고 싶다고 내 마음대로 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부장한테 보고를 하기까지는 많은 고민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매번 이런 시뮬레이션을 반복했다. 하고 싶은 말을 최대한 줄여 두 문장 정도로 요약해본다. 내 말에 정보가 부족해 부장이 질문을 던지지는 않을까 몇 번이고 말들을 점검해본다. 점검이 끝나야 비로소 부장 책상으로 걸어간다. 부장이 짐짓 놀란다. 얘가 왜 왔지, 부장도 당황스러운 눈치다. 놀란 부장을 보고 나도 흠칫 놀란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어색한 기운이 감돈다. 말을 한다. 하필이면 대부분 양해를 구하는 말들이다. 양해를 구하는 내 얼굴에 짧게 번졌을 비굴한 미소가 죽도록 싫다. "그렇게 해요." 추가 질문도 없고, 덧붙이는 말도 없다. 우리는 몇 년 전만 해도 함께 밥도 먹고 서로를 챙겨주던 선후배 관계였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피우러 옥상으로 올라가니 다행히 친한 선배가 있었다.
"선배, 어렵네요."
"뭐가?"
"부장한테 뭐 부탁할 때 나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얘기하게 되잖아요. 뒤에서는 그렇게 욕하면서 또 필요한 부탁할 때면 웃고 있는 내가 너무 구려요. 참, 어렵네요."
우리는 말없이 연신 담배를 피웠다. (153)

맞아. 참 구린데, 또 어렵고 그렇지.

 

 

결혼은 연애보다 좋았다. 하나보다 둘이 좋았고 별것도 아닌 일로 다투지 않아서 좋았다. 아내는 내 말을 경청해줬고 나는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려 애썼다. 잘 들어주는 이가 곁에 있다는 건 큰 힘이다. 아내 덕에 나는 자존감이 높아졌고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었다. 오래된 애정에 우정이 스며들었고 그 틈에서 의리라는 새로운 감정이 탄생하고 있음을 우리는 함께 느껴갔다. (164)

 

20대는 높고 먼 얘기들이 좋았다. 역사와 진보, 정의, 자유, 민주, 이런 개념들 말이다. 이제는 그런 것들에 대한 관심이 아무래도 덜하다. 부조리에 저항하고 나름의 윤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데 그리 많은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제법 알게 됐기 때문이다. 주워들은 개념과 지식으로 부풀려진 생각과 말은 허망하기 쉽고, 그런 허깨비 같은 개념은 좀처럼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행동하는 사람들의 말은 어렵고 복잡하지 않다. (174)

 

가끔은 그림책을 읽는 건지 체육 활동을 하는 건지 헷갈리기도 하지만 아이가 책과 가까워지는 길이라 생각하면 즐겁기만 하다. 그렇다고 아이가 책과 친해지면 좋겠다는 내 욕심을 들키고 싶지는 않다. 강요한다고 읽는 게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날씨를 얘기하듯이 무심하게 아들과 책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아이와 저만치 떨어져 앉아 각자가 좋아하는 책을 읽는 풍경을 꿈꿔본다. (175)

 

물건마다 새롭고 배울 게 있는데 좋은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은 모두 같았다. 슈트 한 벌을 온전히 손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백 시간 이상이 필요하다. 하루 여덟 시간씩 보름을 꼬박 일해야 옷 한 벌을 만들 수 있다.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 착용감에 지장을 주지 않는 부분은 기계로 만들면 안 될까? 내 질문에 가깝게 지내는 테일러가 이렇게 답했다.
"배운 그대로 계속 만들어야 합니다. 한번 양보하면 계속 양보하거든요. 그게 망가지는 길이에요." (179)

 

세상을 떠난 평론가 황현산 선생의 트위터 글을 묶은 책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난다, 2019)에는 이런 글이 있다. "명랑하기는 성격만으로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명랑하기는 윤리기이도 할 것이다. 늘 희망을 가지려고 애쓰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만 명랑할 수 있지 않을까."(126쪽) (182)

명랑을 일종의 윤리라고 하다니. 
작년, 읽다만 황현산 선생님의 책을 오늘 침대 머리맡에서 꺼내 읽다 자야지. 

주말 동안 조금은 지치고 낡은 영혼이 무언가 씻기는 기분이다. 조금 더 내가 순해진다.

 

 

새로운 세대가 밀려오니 문화는 바뀌어야 옳겠다. 점심과 저녁을 다 같이 먹고, 하루가 멀다 하고 술 마시던 때를 떠올리며 '우리는 끈끈했거든' '그때가 좋았어' 하는 생각은 자유지만 입 밖으로 내는 건 다른 문제다. 그때가 그리 좋았으면 좋았던 사람끼리 또 하면 된다. 출석 체크는 곤란하다. 일도 섬세하게 지시해야 한다. 후배 전부를 휴대전화 대화방에 모아놓고 무계획적으로 일을 시키면 안 된다. 개인이 원하는 일을 주고, 성과를 내게 돕고, 섬세하게 평가해야 한다. 그래야 개인과 조직이 어우러질 수 있다. 90년대생의 모든 게 이해되는 건 아지만 그래도 나는 우리 사회가 이 방향으로 변해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집단은 그리고 조직은 개인만큼 윤리적일 수 없다는 걸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투명하고 공정하고 윤리적인 개인이 더욱 많아지고, 그런 개인들이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그런 개인들이 아직 너무 많이 모자라다. (205)

 

쉽게 말해 여전히 명함 문구에 집착하고 있는 셈이다.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어도 나를 지배하는 이 인정 욕구의 덫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저자의 조언은 다음과 같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김영사, 2020) 넷플릭스를 봐라. 좋아하는 영화를 봐라. 커피를 마셔라.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을 사라. 경제적 부담이 없는 선에서 내가 좋아하는 걸 즐길 것. 대신 내가 좋아하는 일에 빠진 만큼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갈구하지 말 것!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날을 세우지 않아도 돼요. 노력하되, 애쓰지는 말아요. 인지하되, 의식하지 말아요. (...) 당신 인생의 반을 사람으로 채우려 하지 마세요. 그게 누구든 말입니다. (209)

 

세상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하면서도 왜 어떤 부모는 아이에게 부정적인 냄새를 물려주는 걸까? 저자는(<엄마 심리 수업>, 윤우상, 심플라이프, 2019) 그 이유를 엄마의 무의식에서 찾는다. 과거 소심하게 살았던 엄마의 무의식은 아이의 소심한 면만을 보게 하고, 과거 산만했던 엄마의 무의식은 아이의 산만한 면만을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내 아이는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하는 절박한 마음이 만들어내는 슬픈 반복. 저자는 무의식의 덫에 빠져 아이의 기질을 거스르면 절대 안 된다고 강조한다. 

 

죽음은 철저히 혼자가 되는 고독한 절차이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과거 이 세상에 태어났던 모든 이가 죽었다는 사실이고 또 지금 살고 있는 모든 이가 머지않아 모두 죽어가리라는 명징한 사실뿐이다. (220)

 

 

 

전종환 아나운서의 인스타그램은 참 재미있다.
트위터에 올릴 법한 짧은 몇 줄로 웃음을 자아낸다. 게다가 '뼈'도 있다. 
그 웃음과 통찰에 대한 기대로 찾아 읽은 것이 이 책이다.
(출처는 보영이가 선물로 주었다. 보영이의 출처는 영주샘께서 선물로 주셨다. 즉 이 책은 선물의 선물, 선물^2이다.)

아마 그의 2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넓고 거칠게 다룬 책이라 어쩔 수 없었겠지만, 기대보다 무척이나 얕다. ㅠㅠ

아주 대단한 것을 바랐냐면 그건 또 아니지만, 음... 아나운서 준비생이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 그의 성인 대부분은 아나운서 혹은 기자의 삶이기 때문.)

무튼, 잘 읽었어요! 범민 아빠.

문지애, 최현정 아나운서의 책도 대기 중인 지금..
음. 조금 더 기다렸다가 추천이 들어오거든 읽겠다. 

 

반응형
LIST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