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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로베리 필드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들은 언제나 내게 그렇게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 앞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안달하는 일은 언제나 창피하고 조금쯤 비참했다. (22)

중학교 시절 쯤, 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는 일을 잘 받아들이는 지형이 옆에서 나는 어쩔 수 없는 일을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일 수 없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시간이 쭉쭉 흘러, 어쩔 수 없는 일을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이는 사람이 됐다. 그것도 아주 잘.

 


시차

그는 오로라를 찍기 위해 북극에 갔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 도착했을 때 그를 놀라게 했던 완벽한 고요에 대해서. 발 밑에서 눈이 부서지던 소리와 바닷새의 날갯짓 소리 말고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던 완벽한 침묵의 순간에 대해. (47)

 

 


여름의 정오

그 순간이 문득 떠오르네요. 그뒤 우리는 레리스의 집에서 초현실주의자들을 종종 만났어요. 한번은 싸르트르가 끄노에게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어요. 끄노는 이렇게 답을 했어요. '청춘을 가진 적 있었다는 느낌.' (67)

 

나는 이 모든 것이 타까히로를 만나러 가라는, 내가 그 실재를 짐작할 수 없으나 가끔은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는 어떤 존재가 내게 보내는 암시라고 믿고 싶었다. (70)

 

그와 함께 갔던 것이 틀림없던 그 까페, 다큐멘터리에 등장했던 그 까페를 나는 여행책자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 가봤자 타까히로를 다시 만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외국인 연인의 모국어로 처음 배운 사람처럼, 낯선 언어로 쓰인 지하철역 이름을 천천히 발음해보았다. (71)

어떻게 이런 비유를 하지? 
정말.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 서울은 내게 너무 크고 복잡했다. 대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은 모두, 원래부터 그런 삶에 익숙해 있었다는 듯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새로운 삶에 적응해갔다. (75)

 


첫사랑

그렇지만 신입생들이 다 같이 우르르 몰려가 듣던 전공필수 강의가 끝나고 텅 빈 강의실에 홀로 앉아 있거나 하굣길,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보며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보면 문득문득 나의 존재가 지닌 밀도라는 것이 얼마나 희박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겨우 스무살을 지나고 있을 뿐이었고 살아가야 할 날이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많았는데, 그것은 정말 피로한 일이었다. (10)

 

 


참담한 빛

도대체 이 여자는 무슨 생각인 걸까? 이런 고백을 느닷없이 털어놓는 이유가 대체 뭘까? 그것도 나한테? 불행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시도 때도 없이 닥쳤다. 중요한 것은 불행을 극복하는 방식이라고 정호는 굳게 믿었다. 불행을 감당하지 못하는 약해빠진 사람이라면 넌덜머리가 났다. (175)

 

 


높은 물때

신입생 시절에는 많은 지방 출신 학생들이 그러듯 많은 지방 출신 학생들이 그러듯 수도권 출신의 중산층 아이들이 갖고 있는 특유의 자신감과 세련됨에 약간의 열등감을 느꼈다. (195)

어.. 되게 오래전 마주했던 감정이 갑자기 떠올랐다.
아마 18살 때겠지? 19살을 앞둔 겨울방학. 
처음으로 똑똑한(다고 느껴지는) 친구들을 만났다. 동생도 있었지만 대부분 나와 동갑이었다.
그들은 영어를 잘했고, 경제를 잘했으며, 대관절 뭐든 잘하고 능숙해보였다.
주변과 적응하느라 신기해하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지금 돌이켜보면 그렇지도 않았을텐데). 
그게 20살이 되어 보통의 대학생 새내기가 느끼는 감정과 비슷할까? (정아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것 같기도.)
그 감정은 진짜 새롭고 신기해서,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어쩌면 그 후로 줄곧 그 감정이 싫고 낯설어 피해온 것 같다(혹은 피하는 상황을 선택해온 것 같다).

또 마주하는 날에는 씩씩할 수 있기를.

 


길 위의 친구들

나는 제목만 들어봤을 뿐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안나 까레리나> 같은 소설들을 송은 고등학교 때 읽었다고 말해서 주눅이 들었던 기억도 있다. 도대체 그런 책을 어떻게 읽을 엄두를 낸 거야, 하고 언젠가 물었더니 송은 대수롭지 않은 듯,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돌았어서,라고 답했다. (251)

 

삶에 생로병사가 있듯 사람 간의 관계에도 생로병사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은 한때 내게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은, 모든 관계가 생로병사를 겪으며 자연사하는 것이 아님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나는 지척에서, 우리에게 닿을 것처럼, 밀려왔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고사로 끝나는 수많은 관계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기습적으로, 불시에, 사멸하는 관계들. (267)

지난 ㅂㅇ이 때를 떠올려보면, 나는 그렇게 슬프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가영과 정아와 달리.

관계에 큰 기대가 없었어서 아마 슬픔이 덜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에는 그냥 내가 그런 편의 사람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번 여름을 지나면서 문득 문득 생각이 났다. 나도 친구와 소원해져 슬퍼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정말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친구와의 관계에 단단한 굳은 살이 생겨난 게 아닐까. 
여간해서는 친구 때문에 잘 슬프지도, 잘 영향받지도 않게 되었으니까. 

어쩌면 지형이와의 이별 이후 연애에 대한 태도와도 닮아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ㅇㅇ(와)과도 멀어져보았는데.'
라는 생각은 ㅇㅇ 당사자가 아닌 이상 모두 작고 시시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단단해지면서 무언가 잃어버린 느낌에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돌아갈 수 없지만 돌아가기도 망설여지는 (우정에의) 순수함이 아마 내가 잃어버린 그것이겠지.
고작 몇 년 전인데 아득하다. 그때 나누던 감정들이 무한했던 관계가.
근래 어딘가에 응석부리고 싶은 마음이 마구 일기에, 이전의 나는 어떻게 해소했는가 자문하니 충격적이게도 몇 년 전의 나는 아무 가감없이 그녀에게 쏟았었다.
가끔 가족들에게 듣는 '언니니까'라는 말도 안 되는 논변처럼, 나는 '친구니까, ㅇㅇ니까'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와 그렇게 된 이후 1-2년 정도는 사랑했던 남자친구를 잃은 양 슬펐고. 슬픔이 걷히고 걸러진 이제야 보이는 것은 무조건성이다. 흔히 자녀가 부모에게 그러듯, 나도 그랬다. 우리 엄마아빠 대신 너에게. 
그리고 철썩 같이 믿었던 그 관계는 기습적으로, 불시에, 사멸했다. 

 


국경의 밤

 엄마는 천천히 국경 검문소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엄마가 하도 긴장을 하는 통에, 엄마보다 몇배는 더 겁쟁이인 나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험상궂게 생긴 경찰들이 국경 검문소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너무 무서워 눈을 꼭 감았다.
"어머, 여보, 우리는 이제 체코에 온 거래."
이윽고 엄마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엄마의 말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정말 우리 차는 국경 검문소를 지나와 있었다.
"그러게, 벌써 지나와버렸네."
아빠가 엄마의 말에 동조하며 신기한 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머나.
나는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국경을 넘었다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별일도 없이, 순식간에 국경을 넘어버리다니. 나는 좀더 무섭고 복잡한 국경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295)

내가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넘어가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나도 많이 놀랐었다.
그냥 지하철을 갈아 타듯, 비행기만 갈아타면 되는 거였다. 
아무 일도 없이, 그냥 포르투갈에 도착해있었다. 

이 단편 소설을 읽고 '국경'이라는 개념에 대해 내가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끼친 영향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님 또한 단편 소설에 그러한 뉘앙스로 글을 이어나가셨기도 하고. 
국경에 대해서 그렇다면, 내가 한국에 사는 이상 알아채지 못하는 특정한 개념들이 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진다. 

 

 

 

나는 이 책이 백수린 작가님의 첫 소설집인줄 알았는데, 두번째 소설집이라고 한다. <폴링 인 폴>이 첫 번째 작품집이라고.

그도 그럴 것이, 백수린 "치고는" 이야기들이 다소 납작하다.

아직 어떤 소설집도 <여름의 빌라>를 대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희망적이기도 한 듯. <참담한 빛>에서 시작해 <여름의 빌라>까지 우리는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거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시작하기. <여름의 빌라>를 지나 더 멀리 갈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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