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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스타 :: 서이제


욕망은 욕망을 불러왔고, 욕심은 끝이 없었다. 큰돈을 만질수록, 더 큰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에 휩싸였고, 성실하게 노동해서 티끌을 모으는 사람들이 우습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벌이었을까. 그 모든 것을 날려먹는 데 걸린 시간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18)


이렇게 말하니, 소설밖에 모르는 삶인 것 같아서 몇 마디 덧붙여볼게요. 집중력 향상을 위해 집에서 혼자 공기놀이를 시작했고, 대세에 역행하기 위해 넷플릭스를 탈퇴했고, 3개월 동안 매일 미역국을 먹어봤습니다. (80)

범상치 않은 글을 쓰는 범상치 않은 서이제 작가님…. ;;


진실을 모호하게 하는 말들을 견디며, 그러나 침묵하지 않고, 침묵을 정정하며, 역시 모호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다르게 말하며 견디는 삶. 그렇게라도 보전하는 ‘말할 가능성’ 속에서 서이제 작가는 독립적으로 살아서 존재하는 말, 이로써 혼자가 아닌 말과 삶들을 꾸려가는 것 같습니다. (80)


이제 인간은 육체만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신체만을 움직여 이동하지 않고, 머리로만 기억하거나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이제 한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어떤 식으로든 카메라의 시선과 연관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83)

지금 우리는 정말 카메라의 시선으로 살고 있는 것 같네.
심지어 기사를 읽어도 그건 내 시선이 아니라, 기자가 카메라로 담고 이를 풀어쓴 시선이구나.
SNS는 두말 할 것도 없고.


소설을 읽는다는 건, 작가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설을 읽는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또 세상을 어떻게 보고 싶어 하는지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88)





미조의 시대 :: 이서수

텅 빈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의 전화는 시간대를 가리지 않고 석양처럼 슬픈 기운을 몰고 왔다. (100)

나는 미조도 아닌데도, 알 것만 같은 감정. 표현이 진하다.

또 저 말버릇. 다 마찬가지라는 말. 그러니 마음의 준비나 단단히 해야 한다는 말. 언니는 그 말을 하면 자기가 되게 어른스러워 보이는 줄 아는 모양인데 사춘기 소녀처럼 보일 때가 더 많았다. (105)

마스크를 꼭 써야 하는 세상이 된 뒤로 엄마는 동네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마을버스 종점가지였던 엄마의 생활 반경은 이제 집 근처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종점에 가본 것도 용기를 내서 한 일이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종점에서 내려 조금 걷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왔지만, 엄마는 바다를 보러 가는 것처럼 들뜬 마음이었다고 했다. 종점이 바다 같았어. 나는 엄마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걸 시로 써보라고 대꾸했다. (109)

낙성대역 인근 전셋집이 눈에 들어왔다. 가격이 얼추 맞았고, 위치도 좋았다. 물론 반지하였지만. 언니 말대로 5천만원으론 지상의 집을 구할 수 없었다. 곁에서 함께 부동산 사이트를 들여다보고 있던 엄마는 바닥에 누워버렸다. 이제 빨래를 어떻게 말린다니. 엄마는 빨래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고작 빨래 문제만 걱정하는 게 이상하게도 안심이 됐다. (111)

냄새의 침입이 공간의 섞임으로 연결되는 상황이 더럽고 치사한 종류의 범죄처럼 느껴졌다.
침해하지 말라고. 이게 어렵나?
각자 그 자리에서 독립적으로. 이게 어렵나?
머리 차일 일 없이. 네가 먹는 반찬 내가 알 일도 없이. 이게 어렵나? (116)

이건 정말 현실적인데 또 나를 그대로 벗겨놓은 듯한 표현..
알아서, 적당히-를 줄곧 외치는 나는 읽으며 내내 고개를 끄덕였고 같이 화가 났다.
무에 대한 화인지는 모르지만 같이 화가 났다.


나는 옆방의 고구마 줄기가 미웠다. 있는 줄도 몰랐던 조용한 식물까지 미워하는 나의 마음은 도대체 얼마나 작아진 걸까. 여섯 평짜리 반지하 방만큼? (120)

왜 우리도 이럴 때 있잖아.
고구마 줄기가 미워질만큼 좁아지고 작아진 내 마음.
그리고 그렇게 작고 못난 내 마음을 바라보는 일 또한 이물스럽기는 마찬가지.


언니는 소주를 연거푸 두 잔 마시더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미조야, 너 그거 아니? 인간을 육체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간이지만, 정신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대야.
뭐라고? 나는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가 되짚어보았다.
나의 정신을 죽이고 있는 건 시대라고. 이 시대. 사람들이 좋은 웹툰보다 나쁜 웹툰에 더 많은 돈을 쓰는 이 시대가 내 머리카락을 빠지게 하고 있어. (125)

그래서 현 시대, 이 시대, 인류세는 제 정신 하나 지키기 이렇게 힘든 걸까.
그렇다면 시대와 멀어진 채 살면, 정신이 건강할까?
그래서 자연인이 각광받나?



근데 미조야, 여긴 여전히 뭔가를 만들어내는 젊은 여성들로 가득한 거 같다. 미싱도 가발도 실은 그대로인 거야. 내가 아무런 대꾸도 안 하자 언니는 소주 두 잔을 연거푸 비우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림을 잘 그려서 망한 거 같다. (127)

저는 소설 속 인물에게 경험을 갈무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방법으로 쓰기와 읽기를 행하게 할 때가 많습니다. 명상이나 운동 혹은 충조처럼 맛집을 방문하거나 공단을 구경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으나, 저에겐 쓰기나 읽기 만큼 와닿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충조보다 시를 쓰는 엄마나 일기를 쓰는 미조, 짤막한 메시지를 쓰는 수영이 삶을 더 잘 견딜 수 있는 인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쓰기와 읽기를 숨쉬기만큼이나 중요한 행위로 생각합니다. 직접 겪은 일이나 타인으로부터 들은 말, 목격한 광경이 뇌리와 가슴에 박혀 사라지지 않은 적이 무수히 많은데, 쓰기와 읽기를 통한 해석으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고 있습니다. 어쩌면 현실의 또다른 재현일 뿐일 수도 있지만, 긍정적인 방향의 내적 변화를 수반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저는 내적 변화를 겪지 않는 인간에 대한 불신이 큰 편이어서 쓰기와 읽기를 통한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책과 글쓰기는 저에게 지구만큼이나 소중합니다. (144)

상동.
그리고 우리 독서모임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반가운 <작가의 말>을 읽고 나니, 괜히 이서수 작가가 미더워졌다.




쿄코와 쿄지 :: 한정현

자, 드디어 다시 이름입니다. 태어난 직후 모부가 지어준 이름은 김경녀. (151)

아무리 현대 소설이라 한들, 젊은 작가가 쓴 소설이라 한들, 모부라고 표현한 글은 처음인 것 같아서. 반갑다.


“대체 너네 오빠는 널 왜 때리는데?” 처음이었습니다. 나의 질문도, 내 말에 혜숙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던 것도요. 물론 폭력 앞에서 인간은 그 두려움에 압도되어 침묵하기도 한다는 걸, 그때는 몰랐지요. (155)

영화 <벌새>가 생각났다.
친오빠가 여동생을 그렇게 무지하게 때릴 수 있다는 걸 나는 처음 알았기도 했으니까.


미선이  또한 그런 영성을 보는 시선이 복잡했지요. 사실 영성이나 미선이의 그 잠잠한 속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지요. 그즈음 나는 아마, 인간의 마음이란 이렇게 하나인 듯 붙어 있어도 결코 알 수 없는 부분이 생겨버리는 것이라고, 영소가 먼 훗날 ‘생겨버리고야 말았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 사이에도 각자의 무언가가 생겨버리고 만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시작은 아마도 … 네, 우리는 가끔 고해성사 가는 미선을 따라가곤 했는데요. 그날은 혜숙과 저만 따라갔습니다. 영성은 제 아빠를 따라서 양복을 맞추러 간 날일 거예요. 헌데 영성이네 부모님은 그 애가 종종 내 옷을 입어본다는 건 알고 있을까요? 그런데 왜 나는 그런 영성이를 떠올리면 마치 누군가 내 심장을 밟는 것처럼 마음이 아파올까요? 이런 생각을 한편에 담아두고서, 또 한편으로는 베로니카 자매님은 오늘 무슨 죄를 고했을까,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157)

미선은 다음 날 영성에게 선의가 항상 선의로 남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말했어요. 잠시 입술을 말던 미선은 이런 말도 덧붙였습니다. 좋은 환경에 있는 사람이 갖는 정의가 약한 사람들에게는 가끔 독이 될 수도 있다고요. 약한 사람들은 보호받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라고요. (160)

아동학대 신고와 관련해서 항상 부딪히는 지점.
나에게 정의가 정의가 아닐 때도 있다. 아주 가끔.


잠시 골몰하던 영성이가 곧 고개를 크게 끄덕입니다. 나는 영성이의 그 짧은 침묵과 금남로 뒤편의 여자들을 보며 너무나 쉽고 빠르게 혀를 차던 아버지가 선명하게 대조되는 것 같았어요. 그러자 나 또한 함께 끄덕일 수 있었어요. 곧이어 미선이도 큰 숨을 내뱉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네, 그렇게 혜자, 미자, 영자 그리고 나 경자까지 모두 자 자 돌림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우정으로 만들어진 가상 아들들의 공동체. 그런데 얼마 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생각해요. 굳이 우리가 또 그놈의 아들 될 이유는 뭐지?
“너네한테 아들을 권하고 싶진 않어. 아들 되기 전에 인간 되는 거 고려해보는 게 어때?”
그렇게 갖고 싶다던 흔한 여자 이름을 갖게 된 영자가 다시 한 번 이런 말을 했고,
“그럼 최종적으로 인간 자?”
미선이는 그럼 이거는, 하는 표정으로 물었을 때, 이번엔 내가 다시 말했습니다.
“스스로 자,는 어때?”
영자가 미소를 짓네요. 혜숙이는 오,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미선이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때까지 실제 아들 자로 개명 신청이 완료된 것은 나 경자, 하나뿐이었거든요. 차라리 이 기회에 스스로 자로 모두 정정 신청을 마치면 되겠다고, 다들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아들들의 공동체를 통과하여 최종적으로는 스스로의 공동체로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168)

스스로 자, 에서 나도 같이 “오” 감탄했다.
스스로의 공동체라니. 어감도 의미도 전부 씩씩해서 좋다.


“하지만 엄마. 엄마는 그곳에 없었잖아?”
그래요. 나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럼 엄마. 엄마는 대체 어디에 있었어?” (183)

하지만 나는 그렇다치고 영소는 대체 무슨 예감이었던 걸까요?
“나와, 정말 상관이 없는데, 엄마. 그렇지?”
영소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중략)
“그런데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걸까, 엄마.” (188)

폭력은 그렇게 약한 존재에게 늘 자신을 파괴하는 방식의 자기 증명을 요구한다. 과도는 괴롭힘이 심해질수록 크기가 커져서 나중엔 식칼이 되었다. 과도는 괴롭힘이 심해질수록 크기가 커져서 나중엔 식칼이 되었다. 아마, 엄마에게 그 식칼을 들키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도…
“아, 엄마. 아빠도 자살했다며!”
식칼을 발견하자마자 싱크대로 달려가 던져버린 엄마가 전생의 업모를 꺼내 들기 시작했을 때였다. 내 말에 엄마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엄마는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동요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엄마가 좀 달랐다. 너, 너. 너희 아빠는. 너희 아빠는. 조금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런 말을 중얼거리던 엄마.
“전혀 죽고 싶지 않았어. 살고 싶었어. 그 아이는 너무나 살고 싶었어.”
거기 있던 모두가 그냥 살고 싶었던 거야. 엄마가 그렇게 말했을 때, 왜였을까. 나는 다시 물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해? 아니면 미안한 거야? 엄마는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192)

그 어떤 삶도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211)

배수아 작가의 문장을 가져와서 “배수아 작가의 구절처럼 말은 삶을 앞서서 간다. 나는 이 말을 예술이 삶보다 더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술로 새로이 펼칠 수 있는 삶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로 읽는다”라고 하신 부분이요.
저도 배수아 작가의 그 말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이 소설 속에서 이름에 대한 제 생각이 그 구절에 대해 말씀하신 평론가님의 견해와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말과 예술, 이 둘 중에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앞서거나 정복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통해 다른 세계로 나아갈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제 소설 속 이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에요. 이름은 삶을 증명할 수도 있고 삶을 확신하게 할 수도 있고, 어떤 순간에 삶을 앞서 나가서 나 대신 증명해주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또 다른 때에는 이름이 누군가를 그 틀에 가둘 때도 있고 단순히 그저 기호일 때도 있고요. 그러므로 이름보다 중한 것은 있지만 없고, 또 없지만 있고, 그러나 그렇기에 중요하고 하지만 항상 중요한 것은 아니고. 저에게 이름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인 것 같아요. 이 소설 속에서 경자의 “이름보다 더 중한 것”이란 말도 그런 의미로 썼던 것 같고요. 저에게 그런 것이 있다면 그건 역시나 마음일 것 같아요. (218)


아휴 마지막 단편은 지하철에서 읽었는데, 읽는 내내 눈물이 너무 나서 혼났네. 에구.
5.18은 경상도 출신인 나에게는 사실 교과서에서만 봤던 다소 추상적인 사건으로서만 있었는데.. (그리고 더 슬프고 싶지 않아서 아주 의식적으로 외면했던 부분도 있었다) 이제는 마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슬픔을 편취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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