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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우리 모두 타인들의 욕망이 지긋지긋하다. 설령 이 욕망 중 일부는 오랜 기간 부당한 차별과 억압에 짓눌려 있었음을 얼마간 이해하더라도, 왜 하필 지금이라는 말인가. “사지 멀쩡한 사람들도, 서울에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도 다 일하고 사랑하고 행복하기 어려운 시대다”라는 말은 곧 ‘사지 멀쩡’하지 않거나 좋은 대학을 안 나온 사람들의 욕망을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8)

욕망을 빼앗는 비굴한 방법.


우리는 여러 종류의 조건과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두드러지는 몇 가지 차이로 나눠진 집단을 수평적으로 가로지르는 공통점도 무수하다.
이를테면, 나는 ‘스카이캐슬’ 같은 곳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30대와는 결코 가까워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얼마간이라도 장애가 있고, 그가 장애로 인한 차별을 숨기기보다 용기 있게 고백하고 함께 맞서고자 한다면, 우리 사이에 놓인 아득한 계급적 차이는 희미한 것이 된다. (중략)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고 대학생이고 남성이며, 여성이고 성소수자이고 기독교인이고 난민이다. 노동자이고 동시에 노인이다. 우리의 가치관, 각자의 차이에 따른 주장은 자주 충돌하지만, 우리가 차이를 직시하고 그에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에 솔직하게 맞서는 과정은 새로운 연대로 이어진다. 수없이 교차하는 조건과 정체성 속에서 우리는 사실 하나의 욕망을 공유한다는 점을 깨닫게 될 수도 있다. (9)

쉽게 혐오하기 어렵게 만드는 방법.
연대, 혹은 이어져있음을 알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내가 말하고자 한 바는, “네 주제에 남들 하는 대로 다 하고 살려고 욕심내면 안 된다”라는 말을 직간접적으로 들어온 사람이라면, 이 세속적이고 덧없는 욕망을 품어보는 일이야말로 전복적이고 저항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바로 그 “모든 것을 다 해본 후에 삶이 덧없음을 깨닫는” 일이야말로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에게 고르게 배분되어야 할 귀중한 삶의 기회가 아닌가? (13)

전복적이고 저항적인 행위. 그렇지 다시 빼앗아 오는 거겠지, 욕망을 욕심을.

“모든 것을 다 해본 후에 삶이 덧없음을 깨닫는” 귀중한 삶의 기회를 소중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또 함부로 빼앗아 온 게 아닐까 하는 반성이 일었다.
그렇지. 쓸지라도 경험해보고 삼켜야하는 일들이 있는 거지.

내가 분명히 알게 된 한 가지는 장애인은 장애를 결코 극복할 수 없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순간 이미 장애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19)

“불쌍해.”
스치듯 들리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나는 조용히 한쪽 구석 자리로 가서 내가 불쌍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꺼내 들었다. 이 정도의 책이라면 나름대로 대중성도 있고, 수준도 있어 보이니 나를 포장하기에 더없이 좋다.
‘봤냐. 나는 이 정도의 소설을 지하철에서 읽는 사람이야. 너 따위에게 불쌍하다는 말을 들을 이유가 없어.’ (29)

단단한 유쾌함이 묻어나오는 부분.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속상함을 삼켰을까.

그렇다. 사람들은 대개 악의가 없다. 그저 나를 못 보았을 뿐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아래쪽을 잘 보지 않고 살기 때문에, 자기 시선보다 1미터 정도 아래에 있는 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설사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게 느껴진다고 해도, 그게 물건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경제주체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보통 앞만 보고 걸어간다. 그 앞에서도 자신과 일상적으로 관계를 맺는 익숙한 존재들만을 지각한다. 아래쪽에서 꿈틀거리는 존재들은 바쁘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그다지 고려할 대상이 아니다. (35)

질병은 아이를 성숙하게 하는 법이다. 성숙한 아이에게는 그만한 크기의 고통이 있다. (45)

와니니가 떠오르기도 하는 부분.
이번 모임에서도 이야기하면 재밌겠다.
늘 ‘성장’이라는 키워드가 중심이 되는데, 그러면 여지없이 ‘고통’이 다음 주제가 되곤 하니까.

외부에서 누군가를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은 한없이 친절하고 헌신적이지만 자신이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않는 법이다. 그저 잠시 자기 세계의 문제들을 미루어두고 새로운 공간의 정취를 즐긴다. 도시인들이 여름 한때 시골 마을에 찾아와 풍경을 즐기며 순박하고 한적한 삶에 향수를 느끼지만 그 마을에 정착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에게 그곳은 ‘풍경’으로 남아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그 풍경을 현실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바람처럼 휘몰아쳐왔다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외지인들의 방문은 삶의 빈자리들을 뒤로하고 다시 현실을 힘겹게 살아내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오히려 외지인들의 친절함이 자신을 다른 세계의 인간으로 전제했을 때만 나올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더욱더 멀어지는 두 세계의 간극만을 체험할 뿐이었다.
재활원은 자원봉사자들에게 하나의 풍경일 뿐이었다. 내게는 그곳이 삶의 전부였지만 각자의 공간에서 일을 하고, 연애를 하고, 영화를 보고, 섹스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팍팍한 일상의 대를 잠시 벗겨내기 위한 ‘풍경’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곳을 찾아오는 많은 외지인에게서 그것을 느꼈다. 그네들은 친절하게 말을 걸고 내 생활을 도와주곤 하지만, 그때 우리가 나눈 많은 이야기들은 그네들의 삶에 스며들지 않고 한순간 숭고한 영혼 정화의 방편이 되었다가 사라질 뿐이었다. 나는 자원봉사자들의 친절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누구와도 진실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았다.
대도시의 젊은이가 배낭여행을 하며 잠시 찾은 시골 마을의 아이와 한때를 즐겁게 보낼 수는 있어도, 그 아이가 젊은이의 일상 속에 파고들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아이는 자신의 삶에 잠시 찾아든 그 도시인의 말투, 몸짓, 냄새, 친절함에 빠져든다. 그것은 결국 상처가 된다. 나는 상처를 두려워한다. (66)


그러나 이런 식으로 특별한 날 일회적으로 행해지는 봉사 활동은 누군가에게 시의적절한 도움으로 이어지기가 쉽지 않다. 봉사자들이 찾아오는 바로 그날에 맞춰 필요한 도움이 언제나 대기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종종 봉사자들의 마음에 훈훈함을 담아주기 위해 우리 같은 ‘봉사를 받는 사람들’이 의무를 지기도 한다. 나는 이날도 내게 주어진 의무(사회를 정화하고 훈훈함을 불어넣어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킬 의무)를 충실히 따라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내용을 찾아내 학습 도움을 받았다. (71)

그럴 수도 있겠다.
봉사를 하러 간 게 아니라 봉사를 요구하러 간 셈이 될 수도 있겠구나.
그들에게 ‘봉사하는 나’를 충족시킬 수 있게 강요한 것이 될 수도 있겠구나.


외로운 사람을 상대하기는 힘겹다. 자신의 복잡하고 바쁜 일상을 살아가야 할 사람에게 자기만을 바라보는 외로운 존재가 있다는 것처럼 어깨가 무거운 일이 있을까. 한 사람의 세계를 온전히 책임지기에 현대인은 너무나 바쁘고 약하다. 어쩌면 나는 그녀가 나를 떠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준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특별히 그녀에게 잘못한 일은 없는 것이다. 그녀 역시 내게 잘못한 일은 없다. (83)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20대 이후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된 듯하다. 그러나 10대의 우리는 좁은 공간과 억압된 자유 안에서도 상대를 사랑할 수 있었다.
나는 10대들의 사랑을 긍정한다. 아마도 이때가 인간이 거의 유일하게 오로지 상대의 존재 하나에만 빠져들 수 있는 시기가 아닐까. 사춘기의 섬세하고 떨리는 감수성은 비현실적인 로맨스를 가능하게 한다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각자의 자원을 교환하는 20대 이후의 연애 시장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장애인이 기회를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86)



이렇게 우리의 탈출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내가 ‘탈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재활원 생활이 끔찍했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그곳은 안락하고 즐거운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안락함과 즐거움에 익숙해진다면, 우리는 평생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97)


와 두번을 썼는데, 날아가는 건. 좀 심해서, 찍음.
(티스토리를 모바일로 사용할 때, 인용 기능 제대로 점검 안 하나? 분명 지금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안되겠다. 그냥 안 먹혀서 인용 기능 사용안하고 써야지. 아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아아아!!!!! 답답했다)



그러나 나는 그래서는 안 됐다. 슈퍼 장애인이 되어야 할 내가 모욕감을 느껴 좌절한다면 자격 미달 아니겠는가. 나는 모욕에 익숙해져야 했다. 장애인은 모욕을 견딜 수 있는 강력한 정신력을 갖추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걸 모욕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네 장애를 생각해볼 때 그건 모욕이 아니다’라는 의미인지, 그건 누구에게도 모욕적이지 않다는 뜻인지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만약 전자라면 장애인이 모욕을 감수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대야 할 것이다. (123)


무엇보다 나는 장애를 이해한다는 것이 반드시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와 지식을 몸에 익히거나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한 헌신과 배려에 기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133)


그렇다. 나는 장애인이 맞다. 그러나 내가 장애인이라는 사실과 “나는 장애인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나는 장애인 중 50퍼센트가 초등학교만 졸업하는 대한민국에서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이었다. 나의 자부심과 나의 꿈 앞에서 도다시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추락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장애와 아무런 관련 없이 살 수 없을까. 그냥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는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내가 장애인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의 능력, 직업, 학식, 유머, 경쾌함 같은 것을 갖출 수는 없을까. (144)


50세의 나이에 법대에 입학해 화제가 되었던 한 지체장애인은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외쳤다.
“우리의 요구를 듣고 학교에서는 ‘장애가 특권이냐’라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이게 특권입니까? 그렇다면 내 장애랑 바꿉시다.” (160)


질병은 몸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며 만성적이지는 않더라도 어느 때나 겪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순간이라도 질병에 걸리면, 어느덧 세상의 시계가 저만치 앞으로 달아나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168)

그렇다.
작년 가을쯤, 갑자기 목이 너무 아파 누워만 있게 됐던 나는 그때 내가 그렇게 미웠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누워만 있어야 하는 비생산적인 시간들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책도 마음대로 못 읽고, 운동도 마음대로 못 하는데. 나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평안히 일상을 영위하는 것 같았다.
특히 무거운 것을 들지도 못하는데, 그때 번쩍 번쩍 들어줌으로써 나를 도와준 정아의 몸 그리고 신체가 그렇게 탐이 났었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질병 치료와 몸의 치유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나는 치료되지 못했지만, 치유되었다. (171)

치료와 치유의 개념.
물리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의 차이일까?
명징한 차이를 단박에 내놓지는 못하겠지만, 무엇을 말하는지는 잘 알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주변에 평생 동안 치유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그럼 ‘난치병’도 중요한 의제이겠지만, ‘난치유’도 중요하게 대두될 수 있겠다.
치료의 주체가 의사라면, 치유의 주체는 누구일까. 나? 혹은 그런 나를 압도할 경험, 사건?



나는 그저 ‘전시’되었다. 그들의 모임에서 나는 일종의 간판이었다(위장이었을지도?). 그들이 모임을 유지하면서 가꿔온 화초 같은 존재였다. 우리 어머니의 존재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어머니는 감사하기 위해서, 나는 전시되기 위해서 그 자리에 불려나간 것이다. ‘정상 세계의 중심’에 사는 그 사람들에게 나의 존재는 하나의 위안이요, 뿌듯함이요, 그들의 삶을 정화시켜주는 화초였을 것이다. (207)

지난 달 갔던 가정 방문이 떠올랐다.
그런 걸 바라고 간 건 아닌데, 이 글을 읽으니 그 날의 시간이 떠올랐다.
그래서 내가 불편했었나보다.
어렵다.


이 모든 것은 선량하고 숭고한 외피로 둘러싸여 있지만 사실 “너의 안쓰러움을 내 능력으로 감싸 안고 싶다”라는 자기 우월성의 쾌락에서 촉발되는 것이다(물론 실제로 선량한 의도에서 출발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요즘 너무 살기 힘들다”라는 친구의 고백에 “꽃동네에 가서 장애인들을 보고 오면 힘이 날 것이다”라고 충고해주는 사람들은 명백히 누군가를 모욕하는 것이지만,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인간들을 만나 자기 존재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것은 너무나 큰 유혹이다.
이렇게 사회 곳곳에 모욕이 스며든다. 구경하는 자들, 즉 정상 세계의 거주민들은 끊임없이 전시되는 비정상 세계의 거주민들을 필요로 한다. 꽃동네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고 와야지만 비로소 자신의 ‘정상성’에 안도할 수 있듯이, 정상성은 ‘비정상’을 규정하면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213)

마음이 들킨 기분.
어쩌면 무수하게 뱉어내는 어떤 이의 징징거림을 무던히 듣고 있을 때, 나 스스로 이처럼 자위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장애인에게 순수와 구걸의 의무를 지워 이 사회의 공동체 문화를 미화시키려 한다면, 봉사활동 점수나 봉사활동을 통해 얻는 사회적 평판은 바로 ‘봉사의 대상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대상이 되는 것이 봉사를 하는 것보다 백배는 더 어렵고 헌신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216)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를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217)


정상의 세계와 비정상의 세계를 동시에 살던 내 대학 생활은 장애인의 인권을 말하는 고매하고 진보적인 대학생과 그 이면에 있는 추하고 손상된 것을 부정하려는 또 다른 내가 혼재된 채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 ‘진실’과 대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피할 수 없는 곳에 이르렀다. 그에 대한 나의 대응은 ‘야한’ 장애인이 되는 것이었다. (211)


장애는 여성, 남성과 구별되는 제3의 성이다. 많은 장애 여성들이 자신의 개인사를 서술할 때 첫 생리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그들에 따르면 첫 생리를 한 날 가족과 주변의 반응은 “몸도 성치 않은 게 생리까지 시작했으니 이제 끝장이다”, “주제에 여자라고”, “왜 이렇게 빨리 시작하는 거야” 등이었다고 한다. 딸아이의 첫 생리일에 꽃과 선물을 사준다는 ‘세련된’ 부모가 늘어나는 시대에도 장애인의 성적인 성숙은 아파트에서 키우는 강아지의 성대처럼 불필요하고 귀찮은 것으로 인식된다. (중략) 장애인은 보호와 시혜라는 틀 안에서만 존재를 드러내왔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든 품을 수 있는 욕망, 욕심과는 거리가 먼(멀어야 하는) 사람들로 인식되었다. (240)

나도 아차 했던 순간.
장애를 제3의 성, 혹은 무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원초적인 욕망 혹은 욕구들을 나도 모르게 고차원의(?) 것이라고 오해했나보다. 부끄럽게도 장애인은 가족을 만들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음.. 정말 부끄럽게도 나도 모르게 그렇게 쉽게 재단해버렸다.
정말 욕망과 욕심과는 거리가 멀거나 멀어야 하는 사람들로 인식했었나보다. 크게 반성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험을 감행하지 못하는 젊은이의 뒤에는 그들의 결코 젊지 않은 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과감히 학과 공부를 집어 던지고, 국경을 넘고, 학점이나 ‘스펙’ 따위는 상관없이 재즈나 춤 같은 예술 분야에 뛰어들고, 창의적인 사업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의 상당수는 자신의 젊음만을 책임지면 되는 이들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고 우리 대다수는 그런 젊은이가 아니다. (298)


그러나 앞으로 내게 다시 무엇인가를 쓸 기회가 온다면 나는 증언을 넘어 변론을 하고자 한다. 그 변론이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나의 몸, 당신의 몸, 내 친구들의 몸 그리고 우리 모두의 몸이 가진 자유가 될 것이다. (309)

공교롭게 정말 김원영씨는 다음 책을 내었고, 제목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 20대 친구의 논변은 많은 것을 오해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특별한 사회적 연대를 통해 차별 철폐 정책이나 복지 제도를 실시하는 이유는 ‘지독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공한’ 사람들과는 별 상관이 없다. 내가 이 책 이곳저곳에서 예로 든 스티븐 호킹과 헬렌 켈러, 오토다케 히로타다 같은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장애를 넘어서는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낸다. 인도의 천재 수학자 라마누잔은 어떤가. 그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가난한 인도에서 태어났으나 수학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과 노력으로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내가 말하는 공동의 노력은 라마누잔을 위한 것이 아니다. 라마누잔만큼의 재능은 없지만 수학에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었던, 그러나 옥스퍼드는커녕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져야 했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312)


나는 우리 세대 또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분노’라고 생각한다. 끝없는 긍정과 낙천적인 생각, 타인에 대한 사랑은 언제나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분노해야 한다. 사람들은 보통 분노를 증오와 착각한다. 증오는 타자에 대한 감정적인 혐오이고 복수심이다. 증오는 폭력만을 낳을 뿐 증오하는 주체의 상태를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분노는 이와 다르다. 분노는 부정의에 대한 합당한 저항이고, 그 저항 속에서 우리 자신의 욕망과 열정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분노하는 삶은 사랑하는 삶만큼이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확장시킨다. 그래서 나는 분노란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욕망과 잠재력을 추동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시작된 욕망은 우리의 상상력과 공동의 노력을 통해 현실이 된다. 우리는 분노하되, 증오하지 않을 수 있다. (315)


공연팀은 나의 재활학교 동창들, 서울대 총연극회 학생들을 중심으로 꾸렸다. 내가 늘 꿈꾸어왔던 공간, “두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모습이 이 공간에서 구현되는 듯 보였다. (319)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특별히 상처를 주거나 차별적 효과를 내는 언어표현은 사용하지 않는 태도,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ectness은 한국 사회에서 논쟁의 대상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문화가 지나쳐 표현의 자유를 과잉되게 제한하거나, 실질적인 차별의 구조나 사람들의 의도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타인을 비난하는 용도로만 정치적 올바름이 이용된다는 주장도 귀 기울일 부분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면, 장애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말들이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는 충분히 타당하다. 무엇보다, 어떤 사회집단이 스스로에 관해 언급되는 표현들을 토론하고 어떤 용어가 더 바람직하다는 합의에 이른다면, 그 합의를 존중하는 것은 곧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문제나 타인의 처지에 관심이 많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미 십여 년째 논의되고 있는 장애에 대한 적절한 표현들에 둔감함을 드러낼 때, 그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시작일 수 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일상에서 장애를 연상하는 특정한 용어들, 이를텝면 병신, 결정장애인 등의 표현이 올바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구체적인 의견을 쓰지는 않았다. 각각의 표현들이 적절한지 아닌지는 누가, 어떤 상황에서 말하는지 그 맥락이 중요하며, 각 용어마다 얼마간 논쟁의 여지는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금지어 목록을 만들기를 원치는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장애에 관해 고민하고 용어를 토론한 사람들이 공공기관, 언론사 등에 제안한 목록들이 없지 않으며, 거기서는 병신, 결정장애인, 벙어리장갑 등의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별한 의견이 없다면 이를 존중해주는 분들이 많기를 바란다. 하지만 어떤 의견이나 입장에 기초해서, 이를테면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로서, 특정한 근거를 가지고 이 말을 사용할 수도 있다. 분명한 이유가 있고 이 이유가 설멸가능하다고 믿을 때에 한해 이런 표현을 사용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저 습관을 제약받는다는 이유로 ‘병신’이라는 말을 고수해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328)

이 책을 읽고 우리가 가장 쉽게 시작할 수 있을 지점이기도 한 부분.
때로는 ‘맛깔’나는 표현을 버리기 아쉬울 때가 있다. 그런데도 멈칫, 하게 된다. 그리고 그냥 PC하게 언어를 고른다.
재미는 없을 수 있겠지만 대화를 하고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이 가볍다.
사실 줄곧 내가 타인에게 요하는 기준도 결국 이 PC함일지도 모르겠다.
일기장에 쓰면 될 법한 표현과 생각은 그렇게 일기장에 배설하라는 것.
굳이 공적인 대화, 공적인 상황에 그것을 흘릴 이유가 정말이지 1도 없다.


혐오 표현 대체
정리되어 있는 것들을 찾다가, 김해 무지개다리 사업에서 만든 ‘문화다양성을 해치는 말 모음집’을 발견!
시사점 있는 표현도 꽤 많고, 디자인도 예뻐서 수업 자료로 쓰기에도 좋을 듯.
이번 독서 모임에서 나도 사용해야지.
이것부터 사용하지 말자, 우리가 김원영씨의 책을 읽고 존중의 의미를 담은 첫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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