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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진심으로 반가운 건 첫 재회의 순간뿐이다. 막상 우연이 아닌 인위적인 방법으로 다시 만나야 한다면 부담스럽고 재미없을 것 같다. 현재보다 과거를 공유해야 하는데 거기엔 대화의 한계가 있다. 과거 시절 즐거웠던 에피소드를 하나둘 끄집어내고, 그 시절에 알고 지낸 공통 지인들에 대한 근황을 공유한다. 대화 소재는 머지않아 바닥나기 쉽다. 그렇다고 현재의 생활을 공유하기엔 그만큼 서로에게 이젠 관심이 없거나 공통분모가 없다. 자기 상황을 얘기하다 보면 자칫 자랑이나 자기 연민으로 들리기도 한다. [각주:1]

 

과거에 아무리 오랜 기간 우정과 추억을 나눴던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내게 현재 기쁨을 주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다. 관계는 현재진행형이다. 늘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관계를 다져나가는 성의를 보여주는 사람만이 시간이 흘러 현재의 관계에서도 살아남는다. 그러니 과거에 친분을 맺은 기간이 아무리 길었어도 지금 점차 멀어져가는 사람들에 대해 무리한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각주:2]

 

 

왜 신뢰감을 느끼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상대가 본질적으로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심이 깊고, 포용력이 있고, 입이 무겁고, 편견에서 자유로우며, 인생 경험이 많다. 나이와 상관없이 정신적으로 어른인 사람들이다. 내가 만나본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대부분 독립적인 개인이었고, 자신의 소신이 있는 만큼 타인의 다양한 생각을 존중할 줄 아는 유연한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든든하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들과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양보다 질. 피상적이고 공허한 수다보다 본질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신뢰감과 친밀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는 일은 분명 행운이다. 그런 소중한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각주:3]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은 바로 얼굴을 알아보는 법이다. 사람이 풍기는 어떤 느낌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까. [각주:4]

 

줌파 라히리는 말한다. 겉으로는 부족함이 없어 보여도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결핍과 고통을 가지고 있고, 최선의 노력으로도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슬픔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고. [각주:5]

 

일반 사회에 나가서는 쉬쉬 숨기고 살아야 하는 감정을 그곳에서는 마음껏 눈치 보지 않고 표현할 수 있었다. 모두가 같은 종류의 고통을 겪었기에 형식적인 위로는 필요가 없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절로 이해하고 이해 받고 있다고 실감했다. [각주:6]

 

 

아이들은 하물며 참 별것도 아닌 일에 쉽게 행복해지는 재능을 타고 난다. 그게 또 전염성이 강하다. 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덤으로 행복해진다.

"엄마 오늘 학교에서 좋은 일이 있었어."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게 말을 꺼냈다. 들어보니 그 '좋은 일' 이라는 게 고작 선생님께 상으로 막대사탕을 하나 받았다거나 친구와 지우개를 바꿔 쓰기로 했다거나 하는, 내 관점에서는 사사롭기 짝이 없는 수준의 것들이라 울컥 느닷없이 감동받게 된다. 소박한 일에 한없는 기쁨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은 어디로 다 흘러가버렸을까? [각주:7]

 

나는 인간이 내면에 저마다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 취약성(vulnerability)을 몹시 애틋하게 생각한다. 평소엔 강한 척, 괜찮은 척 담담하게 살아가다가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속의 연한 부분을 드러내고야 마는 솔직함도 좋다. [각주:8]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와 내 친구를 응대했다. 과도하게 친절하지도, 억지 미소 짓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시간을 들여 나무 테이블을 관찰하고 만져볼 기회를 주었다. [각주:9]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면을 쓰고 회사를 다녔지만 속으로는 점점 곪아가고 있었다. 일은 어떻게든 해나가면 되었지만 인간관계는 내 힘만으로는 어쩔 수가 없을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너무 억울하고 힘들어서 회사를 그만 둘 생각을 몇 번이고 했다. [각주:10]

 

차곡히 쌓인 시간의 먼지를 털어내며 이메일 서간집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그만 나는 빵 터지고 말았다.

 

1998년 1월 20일

이제 곧 나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 다가와. 그리고 1월 28일은 너의 스물일곱 번째 생일이지. 우린 이제 이십 대 후반이야. 아아악!

 

세상의 종말이라도 오는 것처럼 친구와 나는 비관했고 비장했다. 이십 대 후반의 나이를 진심으로 두려워하며 그 나이를 넘기면 사랑할 남자도 더 이상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이었다. 타임머신이라도 있다면 타고 가서 그 시절의 스물다섯 살 임경선에게 말해주고 싶다.

초조해하지 말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인생은 이제 겨우 막 시작한 거라고

앞으로도 너에게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뭐라구요? 이 지겨운 연애를 또 해야 된다구요?"

곧 스물여섯 살이 될 임경선은 아마도 뒷목 잡으며 입에 거품을 물었을 것 같지만.[각주:11]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면 결혼하고, 그런 마음이 들지 않으면 하지 않으면 된다. 결혼 그 자체가 아니라, 결혼할 상대가 중요한 것이다. [각주:12]

 

'우리는 비굴하게 굴면서까지 제품을 팔 생각은 없다.'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애교를 부리거나 굽신거리지 않는 특유의 당당한 태도는 자아가 단단하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기에 당해낼 수가 없다. [각주:13]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이 쓴 <한겨례> 카럼의 한 구절이 위로가 되어준다.

"삶은 할 일로 채워지는 것이지 안정과 성취는 실상 존재하지 않는 관념이다."

멈추고 만족하며 안주할 수 있는 지점은 애초에 어디에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각주: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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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른 과오에 비해 지나친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심각한 후유증을 낳는다. 교사가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 친구들 앞에서 벌을 주거나 공개적으로 망신과 창피를 주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 과정에서 아이의 인격이 무시되기 십상이지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외면적인 규제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도 내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는 어렵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아이는 반성하려 하지 않는다. 잘못에 대한 지적을 머리로는 받아들이지만 가슴에서는 반발심이 솟구치기 때문이다. 성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직장에서 부하 직원의 과오를 까발리고 비난하는 상사는 업무 성과는 높이지 못한 채 앙심만 살 가능성이 높다. [각주:1]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모멸은 '모욕'과 '경멸'(또는 멸시)의 의미가 함께 섞여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모욕은 적나라하게 가해지는 공격적인 언행에 가깝고, 경멸 또는 멸시는 은연중에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에 가깝다. 모욕에는 적대적인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는 반면, 경멸에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모욕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무심코 경멸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모멸은 후자의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멸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라고 할 수 있다. [각주:2]

 

어느 언어에나 외국어로 쉽게 옮길 수 없는 단어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 가운데 가장 까다로운 단어가 무엇인지 선정해달라고 의뢰한 것이다. 그 결과 아프리카 콩고의 'Ilunga'란 단어가 꼽혔다. 그 의미는 '어떤 공격을 하더라도 처음에는 용서하고 두번째도 인내하지만 세번째에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각주:3]

 

그 속에서 삶은 희미하고 왜소해진다. 사람과 삶을 입체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하나의 기준으로만 가치를 매기는 것, 내면세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외형적인 비교에 매달리며 우쭐대거나 주눅 드는 모습이 그것이다. 그러한 마음의 습관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각주:4]

 

'귀'는 '고귀하다'는 뜻이고, 영어로 풀이하면 'noble'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그것은 수(壽), 부(富), 다남자(多男子)와 달리 객관적으로 금방 드러나거나 비교되기 어려운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양의 구속을 받지 않고 질로 평가된다. 당사자를 직접 만나거나 함께 지내면서 그 고매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삶을 가꾸고 마음을 연마함으로써 고귀해질 수 있다. 비록 다른 복을 받지 못했다 해도, 귀(貴) 만큼은 스스로 성취할 수 있다. 그 내용도 매우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학문을 닦음으로써, 어떤 사람은 예술이나 종교를 통해, 어떤 사람은 타인에게 많은 것을 베풂으로써 삶을 고양시킬 수 있다. [각주:5]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요소들을 기준으로 사람의 높낮이를 매기고 귀천을 따지는 것이 우리의 속물적 문화다.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발견하면서 자신의 귀중함을 깨닫고 서로의 존엄을 북돋아주는 관계가 절실하다. 그러한 관계가 자라나는 사회적 풍토를 조성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이를 위해서는 귀천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의문에 부치면서 무엇이 삶의 가치를 높여주는지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각주:6]

 

혼란기를 통과하면서 기존의 지배 질서는 무너졌지만, 귀족적 차별의식은 오히려 보편화되었다. 그래서 한국은 여전히 전통적인 신분 관념이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다. 다만 그 틀이 전근대적인 신분 질서가 아닐 뿐이다. 그 대신 학력, 빈부, 외모, 지위 등이 강력한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차이들을 중심으로 귀함과 천함을 구분하고 자기와 타인을 위아래로 자리매김한다. 감정노동을 혹독하게 만드는 의식구조도 거기에 맞물려 있다.

 

한국인은 상대방의 외모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상해나 살인 등 물리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에는 매우 민감하지만, 무형의 폭력에 대해서는 둔감한 편이다. 오만과 모멸의 사회체제는 그런 무딘 감수성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각주:7]

 

개인주의는 여러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매긴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한국에는 그런 의미에서의 개인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했다. 남에 대해 신경을 너무 곤두세운다. 그것은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뉘는데, 한편으로 타인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보이면서 참견하고 타인의 영역을 침범한다. 다른 한편으로 자기에 대한 타인의 평가와 반응에 너무 예민하다. [각주:8]

 

그렇게 남의 이목에 신경을 곤두세우도록 자라나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일에도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 한 가지 사회적인 징후로, 언제부터인가 '굴욕'이라는 표현을 남용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유명인이 어정쩡한 옷차림으로 등장하면 '굴욕 패션'이라고 명명하고, 잘 팔리던 명품의 매출액이 급감하자 '굴욕적인 현상'이라고 묘사한다. 그냥 스타일이 어수룩한 것이고 단순히 판매가 부진한 것뿐인데, 거기에 자존심을 결부시키면서 모멸감을 강요하고 있다. 그런 풍조가 만연하면서 사람들은 타인을 쉽게 업신여긴다. [각주:9]

 

저마다 그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의 화약고를 가슴에 재워 넣고 있다가 신경질과 화풀이라는 총탄으로 연신 쏘아대는 사회에서 사람다움이 들어설 자리는 매우 비좁다. 타인의 인격을 부정하는 풍토는 결국 자신의 존엄성도 훼손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각주:10]

 

다른 사람을 조롱하고 망신을 주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장 잔인한 학대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굴욕을 강요하거나 부끄러운 부분을 까발리는 행위는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존엄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치욕스러운 경험은 사람을 위축시키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매우 폭력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각주:11]

 

내 눈에는 하찮은 것이라 해도 그 누군가에게는 목숨처럼 소중할 수 있다. 그런데 권력을 가진 자들은 오만에 사로잡혀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려 하지 않는다. 자기 방식대로 간단하게 상황을 해석하고 상대방의 심경을 외면한다. [각주:12]

 

왜 우리는 소통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성실하지 못할까. 우선 내가 그 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거기에는 인간적 오만함이나 사회문화적 통념 같은 것이 깔려 있지 않은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내가 나름대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얼떨결에 무시하게 되는 상황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나의 사례처럼, 상대방을 업신여길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도 다른 일에 마음이 쏠려 결과적으로 박대하게 되는 경우 말이다.

말이라는 것이 참으로 묘하다. 전화로 이야기를 나눌 때 상대방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와의 대화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는 느낄 수 있다. 앞의 사례에서는 키보드 소리가 들려와서 알게 되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말투나 반응의 타이밍으로 직감할 수 있다. 정보 환경이 대화의 몰입을 방해한다. 사회의 속도가 전반적으로 빨라지고 일상의 흐름도 날로 숨 가빠지면서 느긋하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한다. 멀티태스킹에 익숙해져 있기에 종종 다른 일을 하면서 전화를 받는다. 그러다 보니 건성으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소통에는 정성이 중요하다. 정성이란 몸과 마음이 함께 있는 것이다. 지금 몸으로 함께 있는 사람이 내게 온 마음을 기울여줄 때 자신의 존귀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 않고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경청하고, 하나 마나 한 말들만 늘어놓으면 자존감이 상한다. 그렇게 겉도는 만남과 대화 속에서 심성은 자꾸만 건조해지고 냉랭해진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사소한 부주의가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로 받아들여져 섭섭한 감정을 자아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각주:13]

 

사회학에 '예의 바른 무관심(civic inattention)'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공공장소에서는 신경을 끄는 것이 곧 배려인 경우가 많다.[각주:14]

 

철학이나 사회과학에서 '정의'에 대해서는 오래 다루어져왔지만, '품위'에 대한 논의는 아직 생소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정의가 실현되었다 해도 인간적인 품위가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가 꼭 순차적으로 달성되는 것도 아니다. 마갈릿의 말을 더 들어보자. "이상적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정의보다 더욱 시급할 뿐 아니라, 보다 현실적이고 성취 가능한 아이디얼이다." "품위 있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 전략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전략과 아주 다를 가능성도 크다. 품위 있는 사회는 그 자체로 실현할 가치가 있는 이상이다."[각주:15]

 

과잉 친절에 손님들은 기고만장해지고 더욱더 응석받이가 된다. 노동자는 울분을 참느라 속병이 나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진다. 이런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는 잘못된 행동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서양에도 감정노동이 있지만, 우리에 비해 노동자의 권리가 훨씬 잘 보장된다. [각주:16]

 

다시 말해서 감정은 팔지만 자존심은 절대 팔지 않는다는 원칙이 존중받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각주:17]

 

감정노동자들을 힘들게 하는 이는 은근히 기분을 상하게 하는 고객들이다. 퉁명스러운 말씨, 안하무인의 태도, 경멸하는 듯한 표정, 자연스럽게 섞여 나오는 반말투...  '심증'은 있으나 '물증'을 잡기가 어려운 상황들이다. 그래서 문제 삼기가 무척 힘들다. 결국 그 부분은 고객들의 양심과 소양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소비자들의 생각과 태도가 변해야 한다. [각주:18]

 

손님이 '나는 왕이로소이다'하면서 스스로를 드높여 상대방 위에 군립하기 위한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어떤 훌륭한 일을 해낸 사람이 겸손의 말로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라고 했다고 가정하자. 그에 대해서 "맞아요. 당신이 뭐 한 게 있나요?"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로 당신은 결점투성이로군요"라고 대꾸한다면 얼마나 민망하고 무례한 일인가. 겸손과 공경은 상호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행해지거나 강요될 때, 그것은 횡포가 된다. [각주:19]

 

'모욕 감수성'이라는 개념을 제안해본다. 젠더 감수성, 장애 감수성처럼 인권 감수성 등은 이제 익숙한 말이 되었다.

결국 감수성의 문제다. 상대방에게 입힌 손해의 명백한 증거가 있는 명예훼손죄와 달리, 모욕죄에 해당하는 언사는 그냥 기분이 좀 상했다는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기 때문에 둔감하기 쉽다.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고 농락의 대상으로 삼는 마음의 습관이 굳어지다 보면 성폭행 등에도 둔감해진다.[각주:20]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이나 느낌은 대부분 문화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것이다. 일부러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습득되는 마음의 회로가 있다.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인간 사회는 순조롭게 작동하지만, 그 질서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부당한 권력, 부조리한 제도, 일상 속에서의 차별과 억압 등은 그 의미체계를 통해서 지속된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지배한다.[각주:21]

 

자원봉사 점수를 따러 곳곳에 파견되는 청소년들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준비가 제대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보니 하나 마나 한 일을 시키게 되고, 누구도 그 노고에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아이들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시간만 때우게 되는데, 그런 푸대접 속에서 스스로를 비하하기 쉽다.[각주:22]

 

그대는 삶을 위엄으로 견디어 낼 수 있다. 마음 좁은 자들만이 삶을 보잘것없게 살 뿐

-라이너 마리아 릴케, <왕의 노래>[각주:23]

 

공간은 마음이 담기는 그릇이다. 몸이 어디에 머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상태가 된다. 뿐만 아니라 구성원들의 생각, 사회적 관계, 권력의 구조 등을 반영하거나 재생산하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도시의 구조나 취락의 형태가 당대의 우주관을 함축하는 것, 주거지의 공유 공간이 이웃들 사이의 소통을 촉진하는 것, 조직 내의 지위에 따라서 집무실의 크기가 다른 것 등이 그 증거다. 자존감도 공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의식하든 못하든, 생활환경은 인간의 정체성에 중요한 변수가 되는 것이다. 품위 있는 삶이 가능하려면 적절한 물리적 조건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각주:24]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극한 상황에서도 노예로 전락하지 않으려는 그 몸부림은, 매일 샤워를 할 수 있고 온갖 화장품으로 외모를 가꾸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당신을 지탱하는 힘은 무엇이냐고. 타인에게 당당하고 스스로의 위엄을 지니고 있냐고. 몸을 아끼면서 그 안에 얼을 담고 있느냐고.[각주:25]

 

사람은 타자에게 매우 의존적인 동물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느냐가 하루하루의 풍경, 내가 살아가는 세계의 색깔을 결정한다. 아무것도 아닌 말이나 표정, 몸짓 하나에 희비가 교차하고 행복과 불행의 화살표가 바뀐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치명적인 무기를 갖고 있다. 누구를 괴롭히겠다고 작정한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나 무심코 지은 표정이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다.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더라도 사회적인 불구자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각주:26]

 

우리가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시장에서 교환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것은 정체성이나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사랑, 배려, 존경, 지혜, 열정 등을 화폐로 저울질할 때 존재는 우스워지고 만다. 앞의 이야기에서 친구가 돈으로 용서를 구하려 할 때 느끼는 뜨악함의 본질은 바로 거기에 있다. 시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듯한 세상이지만, 그런 정도의 '순수함'은 거의 모두에게 아직은 남아 있다고 믿어도 되지 않을까.[각주:27]

 

돈을 아무리 많이 받는다고 해도 내어줄 수 없는 것이 많다. 그 목록이 길수록 잘사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각주:28]

 

돈이 너무 많은 일을 좌우하고 돈 때문에 모멸감을 맛보기 일쑤인 현실에서, 나의 자존을 세우기 위해서는 돈보다 더 소중한 것에 착목해야 한다. 돈의 논리로 포섭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삶의 근원적인 가치에 눈떠야 한다. [각주:29]

 

원주민에게 최수의 수단은 형제를 상대로 자신의 인격을 방어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약점을 들춰냄으로써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 된 듯한 기분에 젖어든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착각이며, 그럴수록 점점 무력해지고 모멸감에 더욱 취약해진다. [각주:30]

 

우스갯소리 삼아, 한 가지 특이한 단체를 소개하겠다. 미국에 있는 'The Procrasination Association'으로 '미루는 사람들의 협회'라고 풀이할 수 있다. 어느 사회에나 일을 자꾸 미루는 사람들이 있다. 타고난 천성일 수도 있고 경험 속에서 몸에 밴 성향일 수도 있다. 그런데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중시되는 세상에서 미루는 습관은 치명적이다. 미루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낙인이 찍히기도 하고 불이익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자기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협회를 만든 것이다. 세상이 너무 빨리 돌아가서 자기들이 문제시되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오히려 느긋하게 미루다 보면 더 좋은 발상이나 기회를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미루는 습관을 가지고 자꾸만 뭐라고 하지 말라면서 자기들의 생활 방식을 지켜내려는 것이 그 협회의 설립 취지다. 그런데 이 협회를 결성하기로 합의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발기인 대회조차 지금까지 계속 미루고 있다고 한다.[각주:31]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한다.'[각주:32]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관계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억지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다. 내가 못난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수치스럽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뒷담화를 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신뢰의 공동체가 절실하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의 결점에 너그러우면서 서로를 온전한 인격체로 승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각주:33]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는 사람들은 그렇듯 자존심이 무너지는 상황에 쉽게 노출된다. 또 한 가지 문제는 그 지위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자신은 언제까지나 특별한 존재로 대우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각주:34]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내가 드동안 그다지도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문득 깨어나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나의 수모를 말없이 감내하던 그의 선량함이 비로소 의연함으로 비치기 시작했다.[각주:35]

 

불교에서 전해지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석가가 어떤 승려에게서 욕설을 들었는데, 그에게 화를 내는 대신 질문을 했다. "만일 그대가 손님에게 대접하려고 음식을 내놓았는데 그가 그것을 먹지 않는다면 누가 먹는가?" 승려는 자기가 먹는다고 했다. 그러자 석가는 이렇게 말한다. "방금 그대가 내게 욕을 했지만 나는 먹지 않았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만일 나도 욕을 했다면 주인과 손님이 함께 식사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나는 그대가 내놓은 음식을 들지 않을 것이다." 상방이 화를 낼 때 화를 내지 않으면, 나를 이기고 또한 그를 이기는 것이다. [각주:36]

 

우리의 일상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사소한 것들이 하루의 기분을 좌우한다. 예를 들어, 양보 운전을 했는데 상대방이 아무런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으면 화가 난다. 일기예뽀가 빗나가는 바람에 우산 없이 비를 흠뻑 맞으면 세상이 미워진다. 직장 상사의 짜증 섞인 잔소리에 사표 쓸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도 오랜만에 친구의 안부 인사를 받고 생기를 회복한다. 그날따라 화장을 잘 받은 피부에 기쁨을 느낀다. 이웃집에서 가족들끼리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또는 참혹한 삶을 이어가는 난민들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면서 위로를 받는다. 인간은 하루에도 오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하는데, 그 생각들의 종류만큼이나 감정의 색깔도 다채롭게 스쳐 지나간다. [각주:37]

 

실존주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롤로 메이는 조언한다. 자극과 반응 사이의 자동 회로를 차단해보라고. 거기에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고. 간단한 원리지만, 실행은 결코 쉽지 않다. 몸을 단련하듯 꾸준히 연습해서 조금씩 체득해야 하는 요령이다. 불교에서는 오랫동안 그 방법을 탐구해왔다. 어떤 감정이 일어날 때 거기에 매몰되지 말고, 감정 자체를 주시해보자. 내가 지금 이렇게 느끼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의 감정과 거리두기가 가능해진다. 어떤 사건이나 상대방의 언행이 나의 반응(행동)을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키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 상황에서 생겨나는 감정을 객관화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반응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 [각주:38]

 

멋있는 사람은 통상적인 감정의 문법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다. 저 사람 분명히 소리를 버럭 지를 거야 하고 긴장하며 지켜보고 있는데, 의외로 담담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매력적이다. 누가 보아도 화가 나는 상황이지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무섭다.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외부의 자극에 속절없이 휘둘리지 않는 내공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각주:39]

 

그러한 평정심을 갖게 되면 누군가가 내게 가하는 모욕이나 공격에도 덜 흔들릴 수 있다. 내가 엄청나게 잘못한 것이 아닌데 격앙된 반응을 보이는 사람,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며 다그치는 사람, 타인에 대한 시기와 경멸로 일관하는 사람들에게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 그 대신 상황 자체를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상대방에 대해 너그러워질 수 있다. 그리고 자비심을 가질 수 있다. '저 사람 지금 많이 아프구나. 다른 사람한테 저렇게 할 정도니 자기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모질까.'

타인에게 하는 말은 곧 자기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 자기를 혐오하기에 남을 함부로 대한다는 것을 알면, 연민이 싹튼다.[각주:40]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 우선, 다소 왜곡되어버린 그 개념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는 오히려 불명예스럽다고 볼 수 있는 퇴직을 '명퇴'라고 명명하는데, 명예의 본뜻은 무엇인가. 부와 권력과 함께 맹렬하게 추구되는 명성인가. 명예는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희소재가 아니다. [각주: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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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한다는 것은 약점이다. 사랑이 내 몸에 거주하는 것은 축복이지만 연결되고 싶은 욕망은 지옥이다. 이 마음 자체가 '을'인데 만일 성별, 나이, 계급, 외모 같은 자원에서도 차이가 난다면... 그 괴로움, 그 부끄러움,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견딜 수 없다. [각주:1]

 

사람들이 고통받는 이의 호소를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일가. 무지일까, 의지일까. 현실이 먼저고 규범을 부차적 문제여야 한다. 문화와 윤리, 사회적 가치는 인간의 경험에 근거하여 지속적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가장 취약한 사람의 고통을 볼모로 기존 통념을 수호하려는 것은 인간이 지닌 최고의 악마성이다. 당위적인 윤리는 없다. 목적은 변화를 통해서만 성취되어야 한다. [각주:2]

 

구조와 개별 남성이 변해야 하는데, 남성성으로 조직된 가족, 사회, 국가, 시민사회가 먼저 변할 리 없다. 누리는 자 입장에서는 지금 상태가 좋고 성 차별은 어디서나 '상식'과 '미풍양속'으로 합의되기 때문이다.'사자'의 자신감은 자기들은 칼자루를, 여자는 칼날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변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시인은 고뇌한다. 이때 변화는 저항이 아니라 자기 채찍질이다.[각주:3]

 

 

간단히 말해, 구조는 개인에게 미치는 작용이고 그 구조에 대한 개인의 행위성을 반작용이라고 할 때, 구조에 편승한 이들의 변화는 약자의 예상치 못한 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들'이 기대하는 익숙한 패턴을 파괴하는 것이다. [각주:4]

 

시간 차 비극의 제일은 무엇일까. 며칠 전 "사랑의 반대말은 사랑이다. 사람들마다 각자 사랑의 개념,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부모 자식 간에 사제 간에 연인 간에 갈등이..." 이런 하나 마나 한 장광설을 늘어놓던 내게 친구가 말했다. "너는 아직도 그러고 사는구나, 사랑은 그런 게 아냐. 사랑한다, 사랑했다. 이게 서로 반대야." 꽝! 나는 아는 것도, 한 일도 없구나.[각주:5]

 

"내게 설명해줘"는, 책의 6장 "'유기'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들" 중 소제목으로 나온다. "왜 나를 버렸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 이에 대한 상대방의 태도는 다음 중 하나다. "나도 몰라, 나도 그게 알고 싶어." 혹은 "이유는 네가 더 잘 알잖아."

"내게 설명해줘!"는 탈식민 정신분석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인 '피해자의 정체성' 콤플렉스를 요약하는 문구이다. 피식민자는 이 질문에 시달리기 마련인데, 이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지금의 나는 상대방으로 인한 결과(피해자)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고통뿐인 권력 관계의 지속을 보장할 뿐이다. 학대당하면서 스토커가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끝내는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원인을 찾고 싶은 심리에서는 누군가가 '끝냈다'고 생각한다. 왜 나를 때릴까? 왜 나를 떠났을까? 왜 내가 아닌 그(그녀)지? 이건 우문도, 문장도, 질문도 아니다. 그냥 잘못된 진술, 나를 괴롭히는 지배 담론이다. 트라우마는 '가해자'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를 이해하려는 순간 시작된다. [각주:6]

 

주변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끔찍한 이유는 자기 가족과 공동체의 안녕이 타인을 억압하는 데 달려 있다는 사회적, 개인적 믿음 때문이다. 누군가 유복하려면 누군가는 야만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혐오로 괴로워하는 타인의 존재는 자신이 정상임을 증명한다. 자신의 안위는 타인의 파멸 위에서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이다.[각주:7]

 

악과 싸우는 것은 일단은 반(反)악일 뿐, 그것이 곧 선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혁명을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악인에 맞서지 마라."는 악인과 상대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까.[각주:8]

구조, 즉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성에 대한 분석을 제외하면 악에는 이유가 있다. 악은 간단하다. 어떤 '나쁜' 일을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있어서 한 것뿐이다. 이는 보통 사람들이 행하는 소소한 악도 설명해준다. 사이코패스의 존재나 '어린 시절 학대'같은 원인은 없다. 반례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각주:9]

 

인간이 옆에 있는 사람을 '함부로 하는'이유는, 시간(미래나 과거)을 매개로 한 권력욕 때문이다. 오지 않을 미래의 권력을 위해 현재 소중한 사람을 버리는 영화 속의 광해군이나 존재하지 않는 엄마와 과거에 살고 있는 나난, 어리석기 한량이 없다. "지금, 여김"를 살면 소유 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삶 자체를 누릴 수 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1904년에 썼다. 그는 지금이라는 불분명한 시대에 근대적 시간관의 불행을 이미 알았나 보다. [각주:10]

 

'무능한 잉여'의 유일한 자원은 생각하는 능력뿐이다. 필독을 권한다(경제적 공포, 비비안느 포레스테).[각주:11]

 

가끔 학부모를 대상으로 대안 교육 콘텐츠 강의를 하는데, 내가 가장 강조하는 이슈는 '공부해라'의 의미다. 이 말 들으면 공부하기 더 싫어진다는, 누구나 아는 이유도 있지만 입시 공부는 동기, 몸의 훈육, 목표 의식에 체화된 '당사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공부하라는 말을 듣는 학생이라면, 이미 공부가 자기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사랑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하는 게 사랑인가? 공부도 마찬가지다. 하라고 해서 하게 되는 게 아니다. 사랑과 공부 모두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양도 불가능한' 한 사람, 개체의 몸에서 일어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각주:12]

 

'모공'은 글자 그대로 전략과 공격에 관한 것이다. 전통적인 해석은 물리력보다 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적을 멸하는 것만이 승리가 아니다. 상대를 상하게 하지 않고 항복을 받아내는 장수가 명장이다.

굴복(屈伏), 허리를 엎드리고 무릎을 꿇다. 신체적 비유가 불편하긴 하지만 "싸우지 않고 굴복시킨다."는 전략은 약자에게 유리한 것이다. 권력과 자원, 물리력 모든 면에서 열세인 약자는 머리를 쓰는 수밖에 없다. 전략, 논리, 나아가 인간적 감화로 상대방을 자기 모순에 빠뜨리는 것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서로 당연하게 설정하고 있던 전선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기존의 사고방식, 싸움 주제를 생소한 것으로 만들어 적을 인식 분열 상태로 만든다. 그러기 위해서 약자는 자신이 약자라는 인식과 더불어 자각이 다른 앎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이 약자의 인식론적 특권이다. 강자는 자기 생각을 약자에게 투사하지만, 똑똑한 약자는 두 가지 이상의 시각에서 자신과 상대방을 모두 파악한다. [각주:13]

 

특히, 남성은 결핍을 결핍한 완전한 존재다. 자기 위치를 알기 어렵다. 물이 흐르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일 때다. 큰 물줄기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클 때다.

그나마 대안은 24시간 긴장, 타인 존중, 말 줄이고 경청, 자기 몸을 작게 하기, 중단 없는 주제 파악 ... 나부터.[각주:14]

 

그에게 메일을 썼다. "선생님은 퇴근 후 집에 가족이 있으면 덜 외로운가요? 저는 그 반대거든요. 저처럼 '아내'가 없는 사람은 종일 일하고 집에 들어갈 때 누군가 있는 것이 완전 공포거든요. 녹초가 된 몸으로 또 집안일을 해야 하니까. 여관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에요. 제겐 가족이 외로움을 덜어준다기보다 일거리예요. 저는 혼자 있을 때 안 외로워요."[각주:15]

 

그러다가 전날 밤 감탄했던 제주도 구좌읍 하도리의 별들이 밥상으로 떨어지는 듯한 충격과 깨달음이 왔다. 24시간 타인의 끼니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일상. 왜 세상은 가사 노동자를 존중하지 않는지, 나는 왜 평생 '초월적'이지 못하고 반찬거리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한지, 왜 사람들은 내 글이 사소한 이슈를 다루는데도 어렵다고 '강조'하는지... 크고 작은 수수께끼들이 해명되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세상 그 누가, 이 권력을 포기하겠는가. 식사 준비의 번거로움, 귀찮음, 먹는 사람의 평가, 남은 음식과 치우기 걱정은커녕 아예 그런 발상 자체와 무관한 삶. 누가 이 자연스러워보이는 권리와 '마음의 평화', 자유를 포기하겠는가. [각주:16]

 

하지만 나는 저자의 시선과 약간 다르다. 그녀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만일 남자 요리사였다면 열광하는 추종자를 거느린 성인이 되어 그를 기념하는 축일이 생겼지 않을까?"였다. 물론 스타 요리사의 성별도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그 많은 설거지는 누가 했을까?'이다.[각주:17]

 

 

동물 세계에도 성폭력이 있다는 주장은 유구하다. 성=생물학이라는 통념인 듯한데, 당연히 둘 다 아니다. 이런 경우 나의 기운은 소중하므로 "이런 책을 읽어보세요."하면 그만이다.[각주:18]

 

한국이 일본에게 좀 무관심하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가해자는 뻔뻔한데 한쪽의 지나친 '피해의식'은 좌절, 절망, 원한을 순환하는 나르시시즘으로 추락하기 쉽다. [각주:19]

 

많은 비평가들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논하는 부분은 특이하게도 부록인 "장인 기질론"이다. 지식인을 화이트칼라로 여기는 것은 앎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오해다. 이런 인식이라면 절대로 공부를 잘할 수 없고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자료 조사, 인터뷰, 독서, 집필... 논문 하나를 위해 수천 쪽의 자료를 읽는 것은 기본이다. 체력과 끈기가 관건이다. 연구는 고된 노동이다. [각주:20]

 

사회적 약자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부당한 질문을 받는 사람이다. "너 빨갱이지?" "폭력적이지?" "게으르지?" "더럽지?" ...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신으로부터 면허라도 받았는가?[각주:21]

 

사람들은 다양한 대상에 중독되어 있다. 중독되지 않은 몸은 드물다.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긍정적 중독(일, 공부, 운동...)인 경우 문제가 덜 될 뿐이다.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중독자의 의지 부족이나 인격적 결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대상이 위로와 즐거움을 주거나 삶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중독은 생존을 도와준다(~없이는 못 살아). 그러니 지나친 수치심이나 굴욕감, 좌절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런 감정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중독은 누구나 겪는 삶의 고단함에 대한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대응일 뿐, '문제가 아니다'.[각주:22]

 

폭식은 먹는 행위 자체에 대한 중독이다. 배고파서, 맛있어서,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심리적 허기 때문에 먹는 것이다. 심리적 허기는 아무리 먹어도 포만감이 없다. 위는 한정되어 있는데 음식은 계속 들어온다. 몸이 이 고통을 어떻게 견디겠는가.[각주:23]

 

과거엔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지금은 위협이 되는 것. 작가는 중독을 통나무에 비유한다. 인생에서 완전한 기쁨이나 완벽한 절망은 없다. 한때 나를 구원했던 것(사람, 생각, 조직...) 이 나를 억압하는 시기가 온다. 이것은 나의 성장 때문일 수도 있고 대상의 변질이나 상실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그것들과 헤어지거나 최소한 거리를 두어야 생존할 수 있다. 내게 이 이야기는 분리의 어려움에 대한 비유였다. 20년 된 관계, 30년 된 생각, 사라진 이들과 헤어져야 한다. [각주:24]

 

인생이 강물이 아니라 사막을 혼자 걷는 일이라면, 애초에 물에 빠지는 사람도 없다. 우리가 선택한, 그립지만 괴로운 대상들은 사막을 지나가다 잠시 스친 풍경들이다. 조우했을 뿐 오아시스에서 만나 한참 이야기를 나눈 사이가 아니다. 인생에 오아시스가 없다고 생각하면 익숙한 것들의 막강한 존재감이 다소 상대화된다. 중독보다는 생존의 힘이 세다고 믿는다. 천천히 조금씩 이별할 수 있다. [각주:25]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말처럼 근거 없는 말도 없다. 우울도 감기도 가벼운 병이 아니며, 질병으로서 우울증과 감기의 작동 방식은 매우 다르다. 굳이 비유한다면 에이즈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완치 개념을 적용하기 힘든 질병이다. 잠복성, 만성 질환, 치명성, 외로움, 사회적 낙인...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심각한 면역력 저하다. 신체가 외부 자극에 대처할 수 없는 상태. 면역성이 사라지면서 부드러운 미풍조차 사포로 미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우울증 환자의 증상은 인새으이 본질이 순간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각주:26]

 

나는 이제까지 '미봉책'을 제대로 꿰매지 않은 상태로 알고 있었다. 완전히 봉합하지 않는 미봉(未縫), 혹은 미봉(未封)인 줄 알았던 것이다. 마치 야구공의 빨간 실 땀 자국처럼 확실히 꿰매 그 자국이 선명한 것이 좋은데, 미봉책은 그렇지 못한 어중간한 대응 방식, 불충분한 처리라고 생각했다.

아뿔싸! 사전적 의미의 미봉책은 미봉책(彌縫策)이었다. 미(彌)와 봉(縫), 모두 꿰매거나 깁는다는 뜻으로 흔적과 자국이 남는 것은 그 자체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본질적 해결이 우월하고, 미봉책은 속임수나 일시적 방도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의미가 강한 단어다. 아무런 표시가 남지 않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 찬사인 이유다.[각주:27]

 

미국의 전설적인 노동운동가 지미 호파는 마피아 보스 알 카포네를 만난 뒤 부러운 듯 말했다. "그의 손은 하얗고 부드러웠다." 이 말은 내가 반복해서 생각에 담그는 글귀 중 하나다. 몸, 특히 손은 일상의 노동과 계급을 상징한다. [각주:28]

 

늘 화가 나 있는 사람, 자주 화를 내는 사람, 표현하지 않는 조용한 사람이 있다. 모두 한 사람의 모습일 수 있다. 사회적 인간은 아무에게나 화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사람과 참는 사람의 차이보다, 대상에 따라 '화풀이' 여부가 정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진짜 문제는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화를 나게 하는 사람 아닌가? [각주:29]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 몸이 나다. 타인을 판단할 필요가 있다면 그냥 그의 행동을 보면 된다. 행동이 그 자신이다. 이 말은 인간의 행불행은 개인의 결과(내 탓이오)라거나 부와 권력의 소유가 허무하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인간은 타인과 사물은 물론 자신도 소유할 수 없다. 가장 간단한 증거는 누구나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무엇을 소유할 수도 없고 누구로부터 버려질 수도 없다. 인간은 행동일 뿐 대상도 주체도 아니다. 그렇다면 버림받았다고, 모욕당했다고, 빼앗겼다고 분노할 이유도 줄어든다. [각주:30]

 

내 무능력도 원인이겠지만 사유는 힘든 일이다. 생각할수록 공부할수록 무지의 공포는 비례 상승한다. 나 자신이 작아지고 우울해진다. 우울은 공부의 벗.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사회는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각주:31]

 

세상사 그 무엇이든 이해하기 쉬운 일이 있겠는가. 사람들은 서로 이해해 달라고 싸운다. 사람마다 각자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가 있다. 이해는 공부, 습득, 인지와 혼재되어 있다. "제발 나를 이해해 달라.", "이 문장을 이해하겠니?" 전자는 수용에 가깝고, 후자는 학습에 가깝다. [각주:32]

 

그러니 이해는 난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영역이다. 이해의 영어 표현이 좋다. 이해하려는 대상 아래 서 있으려는 겸손한 마음, 이것이 첫 번째 자세다. 이해는 사랑과 지식을 아우른다. 사랑은 수용이다. 상대를 수용할 때 이해는 따라온다.

이해는 아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선입견이든 지식이든 기존의 앎을 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것은 절대 우리 몸에 들어오지 않는다. 충돌은 앎의 지름길이다. 먹지 못할 떡을 두 손에 든 사람들이 있다. 절충은 아는 방법,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앎 자체와 가장 거리가 먼 행위다. 욕심일 뿐 지식도 정보도 아니다.  [각주:33]

 

간혹 매우 총명한 이들과 조우한다. 나는 그들의 '비법'을 알고 있다. 이해는 영혼이 순수한 사람의 특권이다. 대상에 대한 사랑. 이해하고 싶어서 기득권을 포기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자신을 보수하지 않는다. [각주:34]

 

말로는 '미안'이지만 어감에 따라 '미안하지 않은 미안'도 많다. 면피, 내 불편 해소, 건성, 달래기, 위기 탈출용, 조롱, 습관적 감탄사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가식과 뻔뻔함을 사과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미안함에 관련한 표현은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네가 불쾌했다면 미안해."다. 이럴 땐 차라리 '싸우자'는 게 예의다. 진짜 미안할 대는 할 말이 없거나 멀리서 오랫동안 미안해한다. [각주:35]

 

낙오자 취급은 '엘리트'였던 그녀의 자아에 사망 선고가 되었다. [각주:36]

 

의욕, 삶의 방향, 목적. 사람은 결국 '무엇'때문에 산다. 삶의 의미는 인간이 묻는 것이 아니다. 삶이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는 몸부림이, 내가 생각하는 의미 있는 삶이다. 승부나 성공 패러다임과 달리 의미는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어서 아무도 속일 수 없다. 자신과 마주할 수밖에 없으니 인생에 몇 안 되는 정의다.

사람들이 외로운 이유 중 하나는 자신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데 있지 않을가.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에 몰두하는 사람은 덜 외롭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죽는 것. 모든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이다. [각주:37]

 

운동은 립싱크나 대필이 불가능하니 윤리의 마지막 영역일지 모른다. [각주:38]

 

연습은 정신력으로 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연습된 몸으로 정신(적 실수)을 '없애는' 방식이다. 연습, 연습, 연습. 그런 경지의 노력은 명예와 금전적 보상만으로 불가능하다.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다. [각주:39]

 

모 신문에 게재된 채현국 선생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치유란 사람의 매력 그 자체의 효과이지 '시대의 멘토'가 '해주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의 언어는 모두 깊고 힘이 있었다. . [각주:40]

 

하지만 이 책만큼 노동과 공부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을, '자기 선택'으로 극복한 '신인류'를 구체적이고 진지하게 묘사한 책도 드물다. 아이들은 빵점을 받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며, 가장은 가혹한 노동에 종사한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폭발 직전이고, 일본 주부들의 남편에 대한 최대 봉사는 남편의 존재 자체를 견디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은 불쾌감을 견디면서 서로에게 대가를 요구한다. 저자는 불쾌감을 일종의 화폐로 보는데, 다른 비인간성과 교환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불행하다. [각주:41]

 

나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적에 이미 그것을 알았다. 밥상에는 깍두기를 먹는 사람과 깍두기 국물을 먹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것이 역할이든 윤리든 취향이든 그냥 버릴 수 없는 아까운 '깍두기 국물'의 세계를 아는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각주: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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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는 자그마한 자기 방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자기만의 자그마한 방 - 시험이 지금까지 그에게 가져다준 유일한 축복이었다. 그 안에서 한스는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지배자였다. 여기서 그는 피곤과 졸음, 두통과 싸우며 시저와 크세노폰, 문법과 사전, 그리고 수학 숙제와 씨름하며 기나긴 저녁 나절을 보냈다. 때로는 공명심에 불타 고집을 부리며 끈덕지게 밀어부치기도 했고 때로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도 이 방에서 그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즐거움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시간들을 보냈었다. 그것은 자부심과 도취, 승리감에 가득 찬, 꿈과도 같은 기이한 시간들이었다. 그때에 그는 학교나 시험,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을 뛰어 넘어 보다 높은 존재의 영역을 꿈꾸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뺨이 두툼하고 평범한 학교 친구들과는 다르다는, 더 나은 존재라는 예감이 한스를 사로잡았었다. 언젠가는 속세에서 벗어난 높은 고셍서 우쭐대며 이들을 내려다보게 되리라는, 건방지면서도 행복에 겨운 예감이었다.[각주:1]

 

 

아버지는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생기를 되찾았다. 쾌활하고 다정다감한, 만사에 능한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주의 수도에 발을 디디고는 2, 3일 정도 머물게 된 소도시인의 감격,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스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불안해졌다. 시가지를 바라보는 순간부터 답답하고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낯선 얼굴들, 뻐기는 듯이 높게 치솟은 휘황찬란한 건물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뻗어 있는 길, 철로 마차 그리고 길거리의 소음이 한스를 겁에 질리게 했을 뿐 아니라 괴롭게 만들었다.[각주:2]

 

집에 돌아온 한스는 곧바로 책상에 앉았다. 그러고는 mi로 끝나는 동사들을 다시 한 번 죽 훑어보았다. 그는 라틴어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유를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리스어는 조금 달랐다. 한스는 그리스어에 깊이 빠질 만큼 그 언어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단지 그리스어로 된 글을 읽기 위해서였다. 특히 <크세노폰>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산뜻하게 씌어져 있었다. 모든 것이 맑고, 귀엽고, 힘차게 울려퍼졌다. 거기에는 멋들어진 자유 정신이 담겨 있었다. [각주:3]

 

한스는 거리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자신이 마치 벌써 몇 주 동안이나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또한 더 이상 여기서 도망칠 수 없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고향의 정원과 잣나무가 우거진 푸른 산, 강변의 낚시터가 마치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듯했다. 그리고 오래전에 한 번 본 듯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 오늘이라도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곳에 머물러야 할 의미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쨌든 한스는 시험을 망치고 말았다.[각주:4]

 

한스는 반 시간 가량이나 창턱에 걸터앉아 깨끗이 닦여 있는 마룻바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신학교나 김나지움이나 대학에 가지 못하게 될 경우에 어떻게 될지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아마 치즈 가게나 사무실의 견습생으로 일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여지껏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고, 색안경을 기고 바라보았던 바로 그 가련한 여느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귀엽고 영특한 소년 한스의 얼굴이 분노와 고뇌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분에 겨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침을 뱉은 뒤에 옆에 놓여 있던 라틴어 시선집을 집어들고, 벽에 힘것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비를 맞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각주:5]

 

길가에 늘어선 보리수와 햇살 아래 펼쳐진 시장터가 시야에 들어왓다. 모든 것이 예전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더 아름답고, 의미깊고, 즐겁게 보였다. 그가 시험에 합격하다니! 더군다나 2등으로 말이다! 처음에 느꼈던 기쁨의 소용돌이가 서서히 걷히고, 차츰 감사의 메아리가 울려퍼졌다. 이제 그는 마을 목사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그는 상급 학교에 올라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치즈 가게나 사무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각주:6]

 

한스는 10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머리와 팔다리가 편하면서도 나른하고 피곤했다. 무척 오랜만에 맛보는 느낌이었다. 아름답고 자유로운 여름날들이 위로와 유혹의 날개를 펴며 한스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산책이나 헤엄, 낚시질, 그리고 몽상에 젖은 나날들이었다. 단지 1등이 되지 못한 것이 그를 불쾌하게 했다.[각주:7]

 

마을 목사와의 일을 떠올릴 대마다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는 생각이 더욱더 굳어져 갔다. 신학교에서도 다른 학우들보다 앞서기 위해서는 야망과 인내심으로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스는 꼭 그렇게 되고 싶었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 걸까? 그것은 한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각주:8]

학교 선생들을 무정하다거나, 고루하다거나, 혹은 영혼조차 없는 속물이라고 욕하지 마라! 아, 그렇지 않다. 긴 세월에 걸ㅊ펴 아무런 성과 없이 자극에 무덤덤해져 버린 한 아이의 재능이 싹트기 시작할 때, 그 아이가 나무 칼이나 돌팔매질이나 활쏘기와 같은 어리석은 놀이를 그만두고, 앞을 향하여 힘껏 발걸음을 내디딜 때, 멋대로 자라온, 통통한 뺨을 지닌 아이가 진지한 학습을 통하여 섬세하고, 진지한, 거의 금욕적인 아이로 탈바꿈할 때, 그 아이의 얼굴에 연륜과 학식이 더해 가고, 그의 눈망울이 목표를 향하여 더욱 깊어질 때, 그리고 그의 보드라운 손이 점점 더 희어질 때, 학교 선생의 영혼은 기쁨과 자랑에 겨워 활짝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학교 선생의 의무와 그가 국가로부터 받은 직무는 어린 소년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자연의 조야한 정력과 욕망을 길들임과 동시에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것이다. 또한 그 아이에게 국가적으로 공인된 절제의 평화로운 이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현재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시민이나 임무에 충실한 관료라 할지라도 학교에서의 이런 교육이 없었다면, 마구 날뛰는 난폭한 개혁가나 쓸데없는 상념에 사로잡힌 몽상가가 되었을 것이다! [각주:9]

 

 

고향과 부모님의 집을 떠나 낯선 학교에 가는 것은 여간 흥분되고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각주:10]

 

함께 어울리는 동아리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우정과 반감의 표현이 보다 뚜렷해졋다. 같은 고향에서 온 동향인이나 같은 학교를 다니던 동창생들이 어울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새로운 친구를 찾아 나섰다. 도시 아이들은 시골 아이들과, 산골에 사는 아이들은 평지에 사는 아이들과 사귀려고 했다. 그것은 다양한 만남을 통하여 자신의 부족함을 메꾸려는 은밀한 욕구이기도 했다. 서로를 찾아 나선 젊은 생명체들은 희미하게나마 미지의 세계를 더듬기 시작했다. 평등 의식과 더불어 스스로 일어서려고 하는 강한 의지가 불타올랐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잠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자기만의 개성을 키워 나갔다. [각주:11]

 

마침내 일행은 국도에 다다랐다. 그리고 황급히 수도원 안으로 들어섰다. 거기서 교장 선생을 앞세우고 모든 교사들이 죽은 힌딩어를 맞이했다. 만일 그가 살아 있었다면, 이러한 명예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선생들은 언제나 죽은 학생을 살아 있는 학생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잠시나마 돌이킬 수 없는 모든 삶과 젊음에 내재하는 소중한 가치를 가슴 깊이 되새겨보는 것이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년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면서도. [각주:12]

 

금고형에 처해진 뒤로 그에게 강요된 고독은 늘상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배겨나지 못하던 그의 예민한 감수성에 쓰라린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각주:13]

 

학교 선생은 자기가 맡은 반에 한 명의 천재보다는 차라리 여러 명의 멍청이들이 들어오기를 바라게 마련이다. 어진 과제는 무절제한 인간이 아닌, 라틴어나 산수에 뛰어나고, 성실하며 정직한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더 상대방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되는가! 선생이 학생 때문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학생이 선생 때문인가! 그리고 누가 더 상대방을 억누르고, 괴롭히는가! 또한 누가 상대방의 인생과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더럽히는가! 이러한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볼 대마다 누구나 분노와 수치를 느끼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각주:14]

 

그럼, 그래야지.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각주:15]

 

누구보다도 분에 겨워 한 사람은 교장 선생이었다. 허영심에 사로잡힌 교장 선생은 자기 시선이 미치는 엄청난 힘에 대하여 커다란 자부심을 느껴오던 터였다. 그래서 그는 무서우리만치 위협적인 눈을 부릅뜨고 한스를 쳐다보았지만, 한스는 언제나처럼 비굴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교장 선생은 벌컥 화가 치밀어올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스의 미소가 교장 선생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만 것이다. [각주:16]

 

교장 선생으로부터 아버지, 그리고 교사들과 복습교사들에 이르기까지, 어린 소년들을 키우는 의무에 충실한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바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한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이 오기와 타성에 젖은 성향을 억지로라도 다시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그 동정심 많은 복습 교사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야윈 소년의 얼굴에 비치는 당혹스러운 미소 뒤로 꺼져가는 한 영혼이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불안과 절망에 싸인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각주:17]

 

교장 선생뿐 아니라, 한스도 자신이 두 번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신학교니 학문이니 야심에 찬 희망이니 하는 것들도 이제는 모두 끝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한스가 그것 때문에 슬퍼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스의 마음은 실망스럽게도 아버지의 바람을 저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에 우울하고 어두워졌다. 지금 한스는 그저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푹 자고, 마음껏 울고, 한없이 꿈에 잠기고 싶었다. 그리고 이 모든 번민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혼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 집에서는 그러한 희망이 실현되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각주:18]

 

예전에 신학교 학생이었던 한스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날마다 밖으로 돌아다녔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이웃과 어울릴 수 있었지만, 그는 전혀 내키지도 않았고, 몸도 무척이나 피곤했기 때문에 일부러 교제를 피했다. 의사는 그의 건강을 위해 물약, 간유, 달걀과 냉수욕을 권했다.

하지만 무엇 하나 한스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각주:19]

 

두 사람 모두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나지막이 물었다. "너, 무슨 일이지?" "아무것도 아냐" 그녀가 한스에게 <너>라고 불렀을 때, 그는 마치 그녀의 손이 자신의 살갗을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마치 머나먼 밤하늘의 저편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한테 뽀뽀해주겠니?"

그녀의 밝은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가 몸으로 내리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울타리를 두른 나뭇가지들이 약간 밖으로 불거져 나왔다. 은은한 향내를 풍기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한스의 이마를 스쳤다. [각주:20]

 

한스는 제법 새까매진 자신의 손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입은 옷은 다른 동료들이 기워 입은 시꺼먼 작업복에 비하면 아직까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새파랗게 보였다. 한스는 자기 옷도 머지않아 그처럼 다 낡아빠진 옷이 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각주:21]

 

언제 어디서나 듣게 되는 진부한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기를 즐긴다.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들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훌륭한 동업조합의 명예를 길이 빛내기 때문이다. [각주:22]

 

그때부터 한없이 들떠 있던 흥겨운 기분도 차츰 가라않기 시작했다. 한스는 자신이 거나하게 취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술을 마셔대는 것도 더 이상 즐겁지가 않았다. 저 멀리서 온갖 불행이 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버지와의 한바탕 말다툼,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작업장에 출근해야 하는 일. 차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각주: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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