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SMALL
시간의 궤적
그날 언니와 나눈 대화는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사실을 나에게 일깨워주었다. 그러니까, 어떤 이와 주고받는 말들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12)
나의 삶에서는 쭉 지형이었다. 그런 사람이.
우리의 대화를 잊지 못해서 존재를 잊지 못했던 게 아닐까. 너도 나도.
그사이에 언니는 여러 경로로 만난 몇 명의 외국인 남자와 데이트를 했다. 하지만 외국인과의 연애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는데, 나는 언니가 사실은 한국어로 소통할 수 있는 남자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그렇지만 주변에 있는 한국 남자들은 죄다 유부남이었고, 그래서 언니는 자신의 직장을 버리고 파리까지 따라올 만큼은 언니를 사랑하지 않았던 그 유부남에게로 자꾸만 되돌아갔다. "괜찮아요, 언니. 사람에겐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요." 어떤 기억들이 난폭한 침입자처럼 찾아와 '나'의 외벽을 부술 듯 두드릴 때마다, 이러다가는 내가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우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17)
언니의 마음, 견고하지만 연약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하며, 누구에게도 속박되고 싶지 않지만 그런 자신을 이해해줄 누군가를 갈망하던 언니의 마음속 모순들은 빛과 어둠처럼 일렁이며 언니를 특별하게 만들었고, 나는 그것을 아는 사람이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안주를 지향하지만 탈주를 동경하고, 고독을 좋아하지만 타인과의 결함을 원하는 나의 모든 면을 언니가 알고 있듯이. (18)
나는 내 앞에 남은 밥을 천천히 씹어 먹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건너다보았다. 창 너머에는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살이 접힌 채 해변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파라솔들은 불 꺼진 케이크의 초같이 보이기도 하고, 날개가 꺾인 새들같이 보이기도 했다. 잿빛 어둠 속에서 파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짙푸른 물결이 이쪽으로 다가오다 부서지는 모습이 보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황금색으로 빛나던 장소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바람이 불면 파라솔의 몸체가 흔들렸고 이제 끝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끝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고 옅은 슬픔 같은 것이 가슴 안에서 서서히 퍼졌다. (33)
진짜 가슴이 서늘해지는 감정과 때.
그리고 언제나 틀린 적이 없었다.
이 소설집에서 제일 좋았던 단편 '시간의 궤적'.
정아랑 운동하러 나가기 전 잠깐 읽었던 단편인데, 아주 오래간 남아있었다.
여름의 빌라
일본문학 석사까지 마친 내가 학업을 포기하고 독일로 남편을 따라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신은 무척 안타까워했습니다. "남편이 유학 가면 아내가 학업이나 일을 포기하는 것이 한국에서는 평범한 일이에요." 당신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응접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내가 말했을 때 당신은 나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습니다. "주아, 너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 자유가 있단다." 당신의 말이 내게 던졌던 파문. 고백하자면 나는 그후로 선택의 순간이 올 때마다 주문처럼 당신의 말을 떠올리곤 했어요. 남편의 유학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 늦게나마 일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51)
나에게도 주문이 될 것 같은 당신의 말.
지난 2016년 12월 이후 당신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쉽게 폭력 앞에서 소멸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고요. 하지만, 주아. 당신은 그렇게 덧붙였습니다.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68)
흑설탕 캔디
오래전, 스스로 너무 늙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아직 새파랗게 젊던 시절에 할머니는 늙는다는 게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퇴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굳는 속도에 따라 욕망이나 갈망도 퇴화하는.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알았다.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어김없이 인간이 평생 지은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이 인간을 늙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음은 펄떡펄떡 뛰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는데 육신이 따라 주지 않는 것만큼 무서운 형벌이 또 있을까? 꼼짝도 못하는 육체에 수감되는 형벌이라니. (198)
아주 잠깐 동안에
여주의 무읖을 베고 얼굴을 올려다보거나 여주를 무릎에 누이고 내려다보노라면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만으로 한 존재의 마음이 이토록 환하고 충만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배운 사람처럼 행복해졌다. (210)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중에는 캠퍼스 내의 우편취급국에서, 주말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다녀야 했던 그녀는 그에게 계층의 차이에 대해서 처음으로 깨닫게 해준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를 꽤 좋아했지만,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롭던 첫번째 여자친구의 철없는 해맑음이라든지 격의 없음, 불행에 대해 골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유효해지는 낙관적인 모습이 떠오르면, 하루하루 전력을 다해 살면서도 쫓기는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마음을 털어놓는 것 같지만 최후의 최후에 이르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 두번째 여자친구와 함께 있는 것이 쓸쓸해졌고, 자기 자신은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가 궁금해졌다. (225)
아 정말 작가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글로 표현하지?
진짜.
해설-나의 작은 세계에서 벗어나서(황예인)
그런가 하면 언니와 헤어져 돌아올 때마다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근사한 세계로 데려갈 무언가를 곧 만나게 될 것만 같은 예감"에 가슴이 벅차오른다.(나의 작은 세계가 확장되리라는 기대에서 오는 희열감. 이는 백수린의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다. "작은 반도 출신인 내게 당신들과 함께 보냈던 며칠의 시간은 내가 세계 시민으로 거듭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줬던 거죠<여름의 빌라>", "그녀가 갈망하던 것은 무엇이었나. 뭔가 특별한 것, 고양시켜주는 것, 그녀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줄 그 무언가<흑설탕 캔디>"와 같은 대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 인물들의 움직임을 추동하는 것은 '나'의 세계를 벗어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온기를 얻고 사랑을 받는 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그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270)
나도 그렇다.
베레나는 비좁은 세계를 유지하려는 안간힘 때문에 발생한 폭력이 친밀했던 관계를 망가뜨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마 테러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듯이, 상대 또한 연약한 존재라는 걸 상상하지 못하기 떄문에 발생하는 폭력 말이다. (277)
이처럼 줄곧 그녀는 이룰 수 없는 일에 매달리기보다 "단계에 걸맞은 역할을 수용하는 것이 성숙한 태도"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아무래도 '성숙함'을 자신의 인생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는 욕망의 추구가 아니라 조정의 방식을 선택하게 되지 않겠는가? 욕망이란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이를 두고 현명하다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에 기댄 채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는 이와, 충족의 실패 후 비로소 이 사실을 인정하는 이 중 어느 쪽이 정말 성숙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견디는 일과 받아들이는 일, 즉 체념과 수용의 차이를 깨닫게 된 그녀는 이제야 그 시작의 발걸음을 내딛게 된 참이다. (285)
손녀는 노년에 결코 가능할 법하지 않은 연애를 주요한 사건으로 구성하여 희생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통념적인 할머니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어낸다. 그리고 손녀의 꿈속에서 그 이미지는 이렇게 완성된다. 손바닥을 펼쳐 안에 든 것을 보여달라고 보채는 손녀에게 그는 "이건 내 것이란다"하고 단호히 거절하며, 퇴화하는 육체 속에서도 생생한 욕망을 가진, 여전히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특별한 서사"로 만들고자 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결국 이 이야기는 사랑하는 할머니를 이해하고 기억하기 위한 것이기도 할 테지만, 무엇보다 평범함 뒤에 숨어 살기를 종용받는 손녀 자신, 바로 그런 젊은 여성들을 위한 것이기도 한 셈이다. (286)
작가의 말
전 세계적으로 목도하고 있듯이 이해는 오해로, 사랑은 혐오로 너무 쉽게 상해버리고, 그런 생각을 하면 어둡고 차가운 방에 홀로 남겨진 듯 슬프고 또 무서워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살기 위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이해와 사랑 말고는 달리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여전히 믿고 있고, 이 소설들 역시 그런 믿음 속에서 썼을 것이다. 나에게는 성급한 판단을 유보한 채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직시하고 찬찬히 기록하는 것이 사랑의 방식이므로. (289)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 나는 당신이 안온한 혐오의 세계에 안주하고픈 유혹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사랑 쪽으로 나아가고자 분투하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나는 이 여름, 그런 당신의 분투에 나의 소설들이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줄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다. (290)
박기은이 좋아하던 작가님인데, 나도 이제야 좋아졌다.
아직 내가 읽을 수 있는 백수린 작가님의 책이 너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하고 기쁘다.
반응형
LIST
':::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할머니에게 :: 윤성희 외 (0) | 2020.09.04 |
---|---|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 백수린 (0) | 2020.09.03 |
몬스터 콜스 :: 패트릭 네스 (0) | 2020.08.25 |
잊기 좋은 이름 :: 김애란 (0) | 2020.07.29 |
요즘 아이들 마음고생의 비밀 :: 김현수 (0) | 2020.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