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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몸은 지나치게 건강해 따로 저금을 하지 않아도 매일 엄청난 이자가 붙는 통장처럼 무럭 자랐다. 그래서 나는 될 수 있는 한 더 큰 피로, 더 큰 낭비를 찾아 헤맸고, 일종의 '항시 흥분 상태'였다. 체력뿐 아니라 감정적인 면에서도 그랬다. 그 시절 나는 누굴 좀 많이 좋아하고 싶었는데, 특별히 '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아무나 한 명 얻어걸려라, 그러면 내 감정과 용돈을 다 쏟아부어주마'하는 마음으로 주의를 두리번거리고 다녔다. 연애란 게 꼭 좋은 것들로 구성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나는 뮤직비디오 속 인물들처럼 근사한 비애도, 처참한 아픔도 한번 빠짐없이 느껴보고 싶었다. (17)
"메리 크리스마스! 허허허허!"
팟캐스트 진행자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흉내를 내며 첫인사를 건넸다. 순간 살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남자 혹 자기만 유쾌하고 다른 사람 기운은 쏙 빼놓는다는 그 '활달하고 재미없는' 사람은 아닐까 걱정됐다. (33)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계는 만날 줄 몰랐고 만날 리 없는 것들이 만나도록 프로그래밍돼 있다 했던가. 2006년에 쓰고, 2007년에 묶은 소설을, 2012년 봄 누군가가 녹음한 파일로 듣고 있자니 어쩐지 오래전 멀리 부치고 잊어버린 편지를 돌려받은 기분이었다. 내가 나로부터 답장을 받은 느낌. 그런데 그 외 나머지 말, 나머지 기억, 나머지 내 봄, 내 어둠, 당신의 계절은 모두 어디 갔을까. 어쩌면 그것들은 영영 사라진 게 아니라 라디오 전파처럼 에너지 형태로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다 드물게 주파수가 맞는 누군가의 가슴에 무사히 안착하고, 어긋나고, 보다 많은 경우 버려지고, 어느 때는 이렇게 최초 송출지로 돌아와 보낸 이의 이름을 다시 묻는 건지도. (43)
2002년, 이문동엔 유명 프랜차이즈 제과점이 없었고, 그가 동네를 헤맨 끝에 들고 온 건 크림에 색소가 많이 들어가고 빵에서 쉰 행주 맛이 나는 '야매' 아이스크림 케이크였다. 우리는 술집에서 머리를 맞대고 앉아 숟가락으로 곰돌이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모두 열심히 파먹었지만 끝내 다 먹지는 못한 것으로 기억한다. 동기들이 여느 때처럼 시끌벅적 떠들며 잔을 기울이는 동안 그는 풀 죽은 채 '배스킨라빈스 걸 사 왔어야 했는데'라는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곰돌이는 한쪽 눈과 코가 파인 채 빙그레 웃다 점점 울 것 같은 얼굴로 녹아내렸고. (중략)
어느 날 오랜만에 이문동 제과점 앞을 지나다 그때 생각이 났다. 한 사내가 밤새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겨우밤이.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 얼굴 여기저기가 움푹 파인 채 천천히 녹아 흘러내기며 미소 짓던 곰돌이도. 그제야 나는 '배스킨라빈스 걸 사 왔어야 했는데'가 얼마나 다정한 말인지 새삼 깨달았다. 강북의 후미진 부엌 어딘가에서 '진짜 아이스크림 케이크'와 '진짜 비슷한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진짜 노력했을 제빵사처럼. 그 무렵 그렇게 조금씩 어딘가 모자라고 우스꽝스럽고 따사로운 무엇이 나를 키우고 가르친 건 아니었을까 하고. (49)
하지만 그런 마음과 별개로 시상식이라는 작은 축제를 둘러싼 풍경은 범상하고 우스꽝스러웠다. 그것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그랬다. 나는 수상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나도 잘 모르는 소리를 하며 한껏 폼을 잡았다. 하지만 중간에 코르크 마개가 부서진 와인을 따기 위해 젓가락과 숟가락을 동원해 합심하는 지인들 곁에 앉았을 때, 아버지가 얹어준 고기를 꿀꺽 삼키며, 문학이란 어쩌면 당신들을 초대한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여기까지 기꺼이 와준 당신, 바로 그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문학은 하나의 선善을 편드는 문학이 아니라, 이제 막 사람들 앞에 선 당선자의 허영, 그 헛폼 안에조차 삶의 이면을 비출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손들어주는, 여러 개의 팔을 가진 문학이었다. 그 팔 안에서 나는 여전히 실수하고, 깨닫고, 배우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전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어리석어, 같은 실수를 다시 하며 살아간다. 말과 글의 힘 중 하나는 뭔가 '그럴' 때, 다만 '그렇다'라고만 말해도 마음이 괜찮아지는 신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팔이 많아 아름다운 문학을 이따금 상상하며 말이다. (52)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시상식을 마친 날, 어머니는 살짝 취기 어린 얼굴로 기분 좋게 말씀하셨다.
-애란아, 내가 서울 가서 뭘 느낀 줄 아냐?
나는 어머니가 대처에서 무엇을 느끼셨을지 참으로 궁금하였다.
-우리 친목회에선 배운 사람일수록 목소리를 크게 하고 발언을 많이 하는데 거기선 모두가 목소리 삼분지 일만 내고서도 대단한 말들을 하더라. 확실히 지식인들이라 다른 모양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데 맞는 말인가 보다. 그래서 앞으로 나도 목소리를 작게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잘 안 된다고, 쑥스럽게 웃는 어머니. (83)
이 겨울은 내가 번번이 맞는 겨울, 당연하되 익숙해지지 않는 겨울. 그러나 '비로소' 맞는 겨울이다. 그 사실이 특별하지 않도록 지구는 기꺼이 한 번 더 돌아준다. 아마 앞으로도 한참은 그런 식으로 돌 것이다. (117)
글을 쓸수록 아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쥐게 된 답보다 늘어난 질문이 많다. 세상 많은 고통은 사실 무수한 질문에서 비롯된다는 걸, 그 당연한 사실을, 글 쓰는 주제에 이제야 깨달아간다. 나는 요즘 당연한 것들에 잘 놀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려 한다. (124)
인생의 예기치 않은 순간과 마주치고, 무언가를 배우고, 잃어버리며 삶의 앞통수와 뒤통수, 옆통수를 보았습니다. 그 중 최근에 깨달은 한 가지는 유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데뷔 초, 저는 선배들의 이야기가 너무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루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무거운 사람이 아니지'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했고, 스스로 재치에 우쭐거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역사를 공부하고 또 경험하며 때론 농담이 불가능한 시기도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게 동시대인들의 죽음과 연결될 땐 더 그렇다는 것도요. 그러니 만일 언젠가 제 소설에서 명랑한 세계가 가능했다면 그건 제가 특별히 건강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특별히 밝은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찧고 까불며 놀 수 있는 마당을 선배들이 다져줬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내 농담이 선배들의 진담에 빚지고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132)
어둑한 복도와 철제 캐비닛, 낡은 소파같이 단순한 것만 드문 드문 기억납니다. 아마 제가 너무 젊어서, 영원히 살 줄 안 까닭에 순간 따위 소중하게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장소가 없어질지 몰라, 언제든 또 오면 되지 싶어 건성으로 살폈는지도 모르고요. 소설가가 돼 언젠가 이런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그 공간을 돌아보게 되리라곤 상상 못했습니다.
그러니 만일 제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린 제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지금 네가 있는 공간을, 그리고 네 앞에 있는 사람을 잘 봐두라고. 조금 더 오래 보고, 조금 더 자세히 봐두라고. 그 풍경은 앞으로 다시 못 볼 풍경이고, 곧 사라질 모습이니 눈과 마음에 잘 담아두라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을 만난대도 복원할 수 없는 당대의 공기와 감촉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133)
이 부분을 읽으면서, 따라 적으면서 내 자리와 우리 학교와 교무실 그리고 교무부가 떠올랐다.
그러니 이 축사는 50년간 작가들과 긴 이야기를 나눠준 여러 부서 분들과 선생님들께 드리는 작은 목례입니다. 때로 서투르거나 괴팍하고 까다롭거나 다정하고, 가난하고 외로운 작가들의 문장 위를 함께 걸어주고 '이 문제도 내일 같이 이야기해보면 좋겠군요'라고 말해준 이들이 만들어낸 반백 년, 그 아득한 시간 앞에 드리는 박수입니다. (136)
허공에 옅게 퍼지는 마을 종소리는 언제나 좀 이상한 느낌을 준다. 아마 내게 종소리가 오래전부터 어떤 순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로 몸에 새겨져 그런 듯하다. 집 앞의 학교 종은 어릴 때 내가 반복해 들은 종소리와 같은 음으로 운다. 단 여덟 개의 음표로 단조롭고 나른하게, 반음 플랫된 상태로 운다. 기진맥진한 권투 선수가 다시 링에 올라야 할 때 울리는 '땡' 소리처럼 단도직입적인 게 아니라 체조 선수가 허공에 풀어놓은 리본처럼 운다. 마치 '시간'이 아닌 '시간의 테두리'를 흔들어 보여주듯. 그래서인지 아무 때고 학교 종과 무방비로 만나면 내 안에 애써 고정해놓은 어떤 울타리가 넘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여러 가지 것들이 넘어온다. 그렇게 밀려오는 것 안에 정확히 뭐가 들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감정인 것도 같고 감각인 듯도 하고 정서 또는 기억인가도 싶다. 다만 내가 확실하게 알아챌 수 있는 건 그렇게 바깥에서 들어온 뭔가가 내 안에 마련해주는 '빈 공간'이다. 들어와 자리를 '채우거나', '차지하는' 게 아닌 '자리 자체'를 만들어주는. 고요하고, 고유한 상태를 독려해주는 무엇. 그 기분이 익숙해 내가 이걸 언제 느껴봤더라 고민했더니 답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문장들. 좋은 문장들을 읽었을 때. (140)
학교 종소리를 들으면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이렇게 ?????? 표현하시지???????
진짜 좋다-를 넘어서서 경외로움.
누군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건 그 문장 안에 살다 오는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문장 안에 시선이 머물 때 그 '머묾'은 '잠시 산다'라는 말과 같을 테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사는 동안 읽는 글이니 그렇고, 글에 담긴 시간을 함께 '살아낸'거니 그럴 거다. (141)
글을 쓰다 엔터키를 치면 마법처럼 종이 한 장이 더 생긴다. 누군가의 문장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을 때 우리 마음에는 빈 공간이 생긴다. 옛날 사람들의 문장이 우리 이야기가 되고, 나의 삶이 내 것이 되는 정갈한 자리가. (143)
그녀와 나는 여덟 살 차다. 셈이 정확한가 싶어 약력을 들춰보니 틀리지 않다. 그녀를 만난 지 3년이 다 돼가는데, 지금도 나는 종종 그녀의 나이를 묻는다. 그때마다 그녀는 성실히 답해주고 나는 또 금방 까먹는다. 내가 잘 잊는 탓도 있지만 그녀가 잊게 해주는 덕이 크다. 원래 덕德이란 원인과 결과를 헷갈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153)
라샘, 다정씨, 희지니땜이 이에 속하는 내 친구들.
그렇다고 그녀와 세 번째 만났을 때 어색하지 않았단 얘긴 아니다. 도무지 '소심하다' 따위의 공통점 갖고 친해질 리 없는 인간사였다. 그런데 왜 자꾸 만났냐고 묻는다면 할 말 없지만, 세상엔 왜 자꾸 만나는지 모르면서 계속 만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친하지 않았기에 누구도 먼저 일어나잔 말을 못 해, 막역한 이들보다 더 오래 이야기 한 적도 있고, 가깝지 않았기에 서로 계산하겠다고 몸싸움을 할 때도 많았다. 이런 선물경쟁 역시 원시 부족의 특징일 터. 우리는 관계의 벽에 구멍을 뚫는 방법으로 가장 미련하고 고전적인 방식을 택한 건지도 몰랐다. (155)
그녀는 농담을 잘한다. 새침한 듯 보이나 소탈하고, 자기 말을 하기보단 다른 사람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다. 배려와 절제가 몸에 뱄고, 뭘 주장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편이다. 직장 생활이든 글 쓰는 일이든 엄살이 없고 근면하며 다독가다. 가끔은 어떤 이와 신나게 우스갯소리를 한 뒤 대화가 아닌 사교를 했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녀와는 어깨에 힘을 푼 채 동네에서 캐치볼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녀에게는 잔잔한 재치, 자리에서 꼭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울적해하지 않는 사람의 재치가 있다. (160)
아 나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의 특성이다.
편혜영 작가님이 너무 궁금해진다. 자연히 그녀의 글도 궁금해지고.
그녀와 만나는 동안 그녀에게 자주 듣지 못한 말 중 하나는 옛날이야기였다. 나는 그게 서운하다기보다 그녀가 자기 속에 어떤 '아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짐작했다. 어느 선생이 인간의 심연을 '신도 들여다볼 수 없는 골짜기'라 표현하셨던 것처럼. 드러내지 않는 것, 아낄 것이 있는 작가는 그만큼 다른 것도 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지 싶다. (161)
맞아 시시콜콜하게 자기 이야기하는 사람보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들어주어서 본인 안에 무엇을 '아끼'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사람이 좋다.
담 아래서 홀로 볕을 쬐면서 나는 생각한다. 미성년과 성년, 노인과 아이가 말을 섞는 담벼락 아래 짧은 우정. 그런 것이 정말 가능하다면, 모두가 벗이 될 수 있다면 둘 중 더 큰 사람은, 더 넓은 사람은 사실 어른인 쪽이라고. (163)
삼엽충
지구 최초로 눈目을 가진 생물. 세상을 처음 바라본 자. 화석으로 존재함. 종류도 가지가지. 배에 잡힌 주름은 시인이 웃을 때 구겨지는 눈가 모양과 닮음. (168)
책장을 열면, 당신의 인물들이 기우뚱한 욕망을 안고 내 쪽으로 절름거리며 다가온다. 나는 이들을 잘 알아본다. 허영이 허영을 알아보듯, 타락이 타락을 알아채듯 제법 간단히. 어떤 악惡은 하도 반가워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아는 체할 뻔하기도 한다. 이들의 절뚝거림이 이들의 불편이자 경쾌다. 그 엇박 안에서 어떤 흠欠은 정겹고, 어떤 선善은 언짢아, 당신의 인물들은 이윽고 한 번 더 사람다워진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할 적의 그 '한길', 그 '사람 속' 앞에서, 언제고 겸손하고자 했을 한 작가의 모습을 떠올린다. 만일 어느 작품 속 인물이 평편하지 않고 울퉁불퉁하게 표현됐다면, 부조리한데 그럴 법하고, 전적으로 지지할 순 없으되 한편으론 이해할 수 있게 그려졌다면, 그건 그 작가가 유능하기보다(혹은 그 능력에 앞서) 겸손하기 때문에 이뤄진 일이라고 믿어서다. (176)
여름내 숙소와 연구실을 오가며 단순한 나날을 보냈다. 규칙적이고 단조로운 생활. 이른바 소설가에게 필요한 두 가지가 충족되었다. 글을 쓰다 목이 말라 아래층 부엌으로 향하면, 개수대 위로 세계 각국의 '생각'에 중독된 인간들이 먹고 버린 커피 찌꺼기가 한가득 쌓인 게 보였다. 왠지 정이 가는 쓰레기였다. (212)
어떤 문장 아래 선을 그으면 그 문장과 스킨십하는 기분이 든다. 종이 질과 연필 종류에 따라 몸에 전해지는 촉감은 다 다르고 소리 또한 그렇다. 두껍고 반질거리는 책보다 가볍고 거친 종이에 긋는 선이 더 부드럽게 잘 나가는 식이랄까. 어디에 줄 칠 것인가 하는 판단은 순전히 주관적인 독서 경험과 호흡에 따라 이뤄진다. (238)
책을 읽다 문득 어떤 문장 앞에 멈추는 이유는 다양하다. 모르는 정보라. 아는 얘기라. 아는 얘긴데, 작가가 그 낯익은 서사의 껍질을 칼로 스윽 벤 뒤 끔찍하게 벌어진 틈 사이로 무언가 보여줘서. 그렇지만 완전히 다 보여주지는 않아서. 필요한 문장이라. 갖고 싶어서. 웃음이 터져. 미간에 생각이 고여. 그저 아름다워서. 그러다 나중엔 나조차 거기 왜 줄을 쳤는지 잊어버릴 때가 많다. (239)
나는 내가 줄 그은 책과 잘 헤어지지 못한다. 거기 남은 연필 자국이 왠지 저자와 악수한 뒤 남은 손자국 같아. 가끔은 책 위에 남은 무수한 검은 선이 아이스링크 얼음판에 새겨진 스케이트 날 자국처럼 보인다. 정신적 운동이랄까. 연습의 흔적. (240)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강의실 밖 화사함과 Y의 결석, 4월 신록과 국립박물관 연필 위 만발한 꽃이 떠오른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설명하던 Y의 들뜬 문장도.
"밑줄 치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은데 그럴 수 없어 한글 문서에 옮겨 적은 후 출력해서 밑줄을 마음껏 쳤어요."
누군가 쓴 문장이 그렇게 좋을 수도 있구나. 그 문장과 꼭 만나야 할 사람이 그 문장을 만났구나. 그 친구의 메일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247)
언젠가 두보가 쓴 저 <곡강>을 두고 학생들에게 얘기한 적이 있다. 단순히 '꽃잎이 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삶과 그렇게 떨어지는 꽃잎 때문에 '봄이 깎인다'라고 이해하는 삶은 다르다고. 문학은 우리에게 하나의 봄이 아닌 여러 개의 봄을 만들어주며 이 세계를 더 풍요롭게 감각할 수 있게 해준다고. 종이를 동그랗게 구기면 주름과 부피가 생긴듯 허파꽈리처럼 나와 이 세계의 접촉면이 늘어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그새 나의 봄이 조금 변했음을 느낀다. 우리의 봄이, 봄이라는 단어의 무게와 질감이, 그 계절에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에, 봄에서 여름으로 영영 건너가지 못한 아이들 때문에 달라졌다는 걸 깨닫는다. (250)
이해란 비슷한 크기의 경험과 감정을 포개는 게 아니라 치수 다른 옷을 입은 뒤 자기 몸의 크기를 다시 확인해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작가라 '이해'를 당위처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지만 나 역시 치수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불편하다. 나란 사람은 타인에게 냉담해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그렇게 애쓰지 않으면 냉소와 실망 속에서 도리어 편안해질 인간이라는 것도 안다. 타인을 향한 상상력이란 게 포스트잇처럼 약한 접착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해도 우리가 그걸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런 얇은 포스트잇의 찰나가 쌓여 두께와 무게가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우리가 우리이기 전에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알려주는 말들. 그리하여 나와 똑같은 무게를 지닌 타자를 상상토록 돕는 말들을 생각했다. (253)
최근 관절수술전문병원에 입원하신 시어머니 병문안을 갔다 어머니 침대 발치에서 내게 빌린 '소설'을 읽는 시누를 봤다. 공용 냉장고를 여닫을 때마다 김치 냄새가 나고, 환자 대부분이 노인이라 휴대전화 벨소리가 지나치게 큰 6인실 병실에서. 방문 목사의 기도 소리와 텔레비전 소음, 환자들의 응석과 시기 속에서 시누는 '형부와 처제의 치명적인 사랑'을 그린 소설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걱정한 것과 달리 그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좀 안심이 됐다. 병실에서 누군가를 돌보는 게 얼마나 어렵고 고된 일인지 알아. 형광등을 켜고 끄는 일조차 내 마음대로 못 하는 공용공간에서 가장 그리운 게 사생활임을 알아 그랬다. 때론 독서만큼 내밀하고 사적인 행위도 없으니까. (253)
얼마 전 '미개未開'라는 말이 문제 돼 그 뜻을 찾아봤다. '사회가 발전되지 않고 문화 수준이 낮은'이라는 뜻이 먼저 등장했지만 그 아래 '열리지 않은'이란 일차적인 뜻도 눈에 띄었다. 앞으로 우리는 누군가 타인의 고통을 향해 '귀를 열지 않을' 때, 그리고 '마음을 열지 않을' 때 그 상황을 '미개'하다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262)
앞으로 '바다'를 볼 때 이제 우리 눈에는 바다 외에 다른 것도 담길 것이다. '가만히 있어라'라는 말 속엔 영원히 그늘이 질 거다. 특정 단어를 쓸 때마다 그 말 아래 깔리는 어둠을 의식하게 될 거다. 어떤 이는 공책에 세월이란 단어를 쓰려다 말고 시간이나 인생이란 낱말로 바꿀 것이다. 4월 16일 이후 누군가에게는 '바다'와 '여행'이, '나라'와 '의무'가 전혀 다른 뜻으로 변할 것이다. 당분간 '침몰'과 '익사'는 은유나 상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본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본 것이 이제 우리의 시각을 대신할 거다. 세월호 참사는 상狀으로 맺혔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콘택트렌즈마냥 그대로 두 눈에 들러붙어 세상을 보는 시각, 눈目 자체로 변할 것이다. 그러니 '바다'가 그냥 바다가 되고 '선장'이 그냥 선장이 될 때까지, '믿으라'는 말이 '믿을 만한 말'로, '옳은 말'이 '맞는 말'로 바로 설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걸까. 지금으로서는 감도 오지 않는다. (264)
"저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건, 더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었어요."
그 말 앞에서 나는 좀 놀랐다. 그러고 그 '놀랐다'라는 사실 때문에 내가 철저히 그녀의 고통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노력한들 세상에는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이 담긴 타인의 몸이 있다는 걸 알았다. (266)
그러다 그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2년 전 이자영씨를 떠올리며 내가 가까스로 발견해낸 건 만일 우리가 타인의 내부로 온전히 들어갈 수 없다면, 일단 바깥에 서보는 게 맞는 순서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러느라 때론 다리가 후들거리고 얼굴이 빨개져도 우선 서보기라도 하는 게 맞을 듯했다. 그러니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이해가, 경청이, 공감이 아슬아슬한 이 기울기를 풀어야 하는 우리가 할 일이며, 제도를 만들고 뜯어고쳐야 하는 이들 역시 감시와 처벌 이전에, 통제와 회피 이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그때 우리가 누군가의 얘기를 '듣는'다는 건 수동적인 행위를 넘어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다만 뭔가를 자주 보고, 듣고, 접했단 이유로 타인을 쉽게 '안다'라고 해선 안 되는 이유도,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과 불행을 구경하는 것을 구분하고, 악수와 약탈을 구별해야 하는 까닭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269)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어두운 밤의 하얀 테두리를 좋아했다."
어두운 방에 쪼그리고 앉아서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의 테두리를 구경하는 꼬마 아이. 그런 아이의 가슴은 우물처럼 깊게 파여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많은 것이 고일 것이다. 마르지 않는 샘이 될 것이다. 글은 그 후에 쓰면 된다. (287)
'배제와 멸시, 모욕과 살육의 전통이 있지요. 그것은 역사나 제도뿐 아니라 내 피 안에도 있습니다. 나는 내게 그런 것이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 종종 책을 읽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다른 불이 필요하다는 걸, 다른 매체가 알려주는 것과는 또다른 방식으로 배우려고 말입니다.' (292
요 며칠 나를 쥐고 흔든 건, 재난의 풍경이 아니라 폐허에서 드문드문 피어나는
인간 내면의 풍경이었다.
이상한 사람들.....
다른 사람이 아파하면 자기도 아픔을 느끼는 이상한 사람들.....
그 초록이 하도 파래, 나는 울었다. (297)
맞다.
진짜 공포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 혹은 부족한 것은
공포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라 선善에 대한 상상력이 아닐까.
그리고 문학이 할 수 있는 좋은 일 중 하나는
타인의 얼굴에 표정과 온도를 입혀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니 '희망'이란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용기 있는 사람들이 발명해내는 것인지도 모르리라.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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