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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가듯 나의 걸음이 마일리지로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내 인생 최고의 흥미진진한 게임으로 여기며 걷는다.
그렇다고 내가 언제나 소풍 가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서는 건 아니다. 어느 날 아침에는 나도 하루쯤은 그대로 이불 속에 파묻혀 있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귀찮음과 게으름을 딛고 일어나 몸을 움직여 걸으면, 이내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멀고 막막해 보였던 세상과 나의 거리가 훅 당겨진다. (10)

 

'마침내 우리가 해냈다'는 기쁨과 에너지로 가득한 쫑파티 현장에서 나 혼자만 유령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뒤풀이를 하던 중 나는 점점 의기소침해졌고, 결국 그 자리에서 도망 나와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23)

술자리에서의 김현아.jpg
ㅋㅋㅋㅋㅋㅠㅠ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길 끝에서 허무함을 느낀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걷기가 주는 선물은 길 끝에서 갑자기 주어지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내 몸과 마음에 문신처럼 새겨진 것들은 결국 서울에서 해남까지 걸어가는 길 위에 흩어져 있었다. 나는 길 위의 매 순간이 좋았고, 그 길 위에서 자주 웃었다.
사람들은 인생살이에서 어떤 기대와 꿈을 품고 살아간다. 나중에는 형편이 나아지겠지, 세월이 지나면 다 괜찮아지겠지, 지금 이 순간을 견디면 지금보다 나은 존재가 되어 있겠지... 어릴 때는 이런 희망과 꿈이 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높지만, 나이들수록 그 폭은 조금씩 줄어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고 뉘우치며 포기하는 단계까지 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길 끝에서 느낀 거대한 허무가 아니라 길 위의 나를 곱씹어보게 되었다. 그때 내가 왜 하루하루 더 즐겁게 걷지 못했을까, 다시 오지 않을 그 소중한 시간에 나는 왜 사람들과 더 웃고 떠들고 농담하며 신나게 즐기지 못 했을까. 어차피 끝에 가서는 결국 아무도 없을 텐데.
내 삶도 국토대장정처럼 길 끝에는 결국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인생의 끝이 '죽음'이라 이름 붙여진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무(無)'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하루 좋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하는 것뿐일 테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대장정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말 한마디로 시작된 천릿길 대장정 끝에는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길 끝에서 무언가 대단한 것을 움켜쥐려고 걸은 게 아니니까. 지금도 나는 길 위의 소소한 재미와 추억들을 모으며 한 걸음 한 걸음 걷는다. 그리고 내가 알게 된 이 작지만 놀라운 비밀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28)

그러니 무서워 말자. 길 끝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은 당연한거니까.

 

모든 게 '기분탓'이라는 건, 사실 내 기분에 '당하는' 사람만 안다.
기분은 무척 힘이 세서 누구나 기분에 좌지우지되기 쉽다. 순간의 기분 때문에 그릇된 판단을 내릴 때가 있고,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단지 기분 때문에, 처리해야 할 많은 일들은 손도 대지 않은 채 맥없이 하루를 날리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런 불쾌한 기분이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경험상 잘 알면서도 당장의 기분에 지배당하는 삶을 산다. 사실 기분은 인생에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당장의 기분을 바꿀 수 있다면, 어쩌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30)

 

만약 나쁜 기분에 사로잡혀서 지금 당장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라면 그저 나가서 슬슬 걸어보자. 골백번 생각하며 고민의 무게를 늘리고 나쁜 기분의 밀도를 높이는 대신에 그냥 나가서 삼십 분이라도 걷고 들어오는 거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기분 모드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다. (34)

 

한때 나는 열정을 잃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나 자신을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 갈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것, 내 보폭을 알고 무리하지 않는 것, 내 숨으로 걷는 것. 걷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묘하게도 인생과 이토록 닮았다. (41)

 

하와이에 가기 전까지 나는 뭐에 그리 쫓겼는지 인생을 여유 있게 즐기는 법도, '쉼'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마음의 안식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종종 여행을 떠났지만, 여행중에도 나는 잘 쉬는 게 아니라 내가 다닌 곳의 흔적을 남기려 안달했던 것 같다. 무엇을 먹고 어디를 가봤고 웬만한 데는 전부 다 돌아다녀봤다는 확인을 받기 위해 여행한 것이다. 이러니 남들이 좋다는 곳에 가도 친구들과 술 한 잔 마시고 나면 '아이고, 잘 놀았다. 근데 얼른 집에 가고 싶네...' 하며 남몰래 허전해하는 수밖에. (49)

 

그래서 하루를 버텼다.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았다.
다음날 다시 생각했다. 그럼 하루만 더 있어볼까. 하루를 더 견디니 나는 조금 더 나아져 있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휴식에도 노력이 필요하구나. 아프고 힘들어도 나를 일으켜서 조금씩이라도 움직여야 하는 거였구나.'
나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은 정말 치열하게 일한다. 그런데 휴일에 꼼짝도 못하고 나가떨어질 만큼 평소 일에 지나치게 매달리기 때문일까? 정작 일은 너무나 열심히 하는데 휴식 시간에는 아무런 계획도 노력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그대로 던져두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치고 피로한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곧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기'는 결과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 피로를 잠시 방에 풀어두었다가 그대로 짊어지고 나가는 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휴식을 취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휴식을 취하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적어도 일할 때처럼 공들여서, 내 몸과 마음을 돌봐야 하지 않을까?
일과 휴식을 어중간하게 뒤섞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을 휴식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 일이 바쁠 때 '나중에 몰아서 쉬어야지'같은 얼토당토않은 핑계를 대지 않는 것. (58)

아아 너무 좋은 말.
나에게 꼭 맞는 말. 정말 그냥 널부러져 있는 게 휴식이 아님을, 사실 나도 안다.
그리고 너는 그걸 어떻게 미리 알았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네 생각이 많이 났다. 너는 항상 나보다 생각이 깊었다. 우린 동갑이었는데도 나는 항상 조금 뒤에야 너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고 너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아마 너도 이 책을 분명히 읽을 것 같다. 너는 책도 좋아하고 하정우도 좋아하니까.
읽으면서 나도 네 생각이 많이 났는데, 너도 하정우가 너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걸 느끼겠지?
그러고보면, 너는 참 비범한 사람이다. 날이 갈수록 더 선명해진다.

 

뭐든 꾸준히 하려면 그것이 '특별활동'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야 한다. (61)

 

오늘 우리가 고단함과 귀찮음을 툭툭 털고서 내딛는 한걸음에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나의 오늘을 위로하고 다가올 내일엔 체력이 달리지 않도록 미리 기름 치고 돌보는 일.
나에게 걷기는 나 자신을 아끼고 관리하는 최고의 투자다. (69)

아아 너무 좋아라!!!!!!!!!!!!!!!!!!!!!!!!!!!!!!!!!!!!!!!!

 

무엇보다 숨이 가쁘고 열이 올라서 도저히 더는 걸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점(死點)이다. 말 그대로 죽을 것 같은 순간. 옷은 땀에 푹 절었고 머리칼은 만신창이다. 몸도 몸이지만 무엇보다 더이상 걷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견디는 것이 힘들었다. '난 아무래도 안 되겠는데' 포기 선언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하지만 그 고통을 문장으로 엮어서 입 밖에 내보낼 힘조차 없다. 그냥 걷는다. 무아지경 상태로 걷는다.
한 보 한 보가 너무나 힘들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귀찮다'라는 생각마저 든다. 고통보다 사람을 더 쉽게 무너뜨리는 건, 어쩌면 귀찮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고통은 다 견뎌내면 의미가 있으리라는 한줌의 기대가 있지만, 귀찮다는 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하찮게 느껴진다는 거니까. 이 모든 게 헛짓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차오른다는 거니까.
아니 대체 하와이까지 와서 내가 왜 이짓을 하고 있는 거지? 뭐를 위해서 내가 이렇게 가고 있는 거지? 10만 보를 걸어서 뭐하자고? 근본적인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 걷자면 계속 걸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걷는 목적을 잃어버렸다.
그 당시에는 다들 이런 고통과 회의에 푹 잠긴 상태로 계속 걸어서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흥미롭게 느껴진다. 하와이에 왔으니 10만 보 걷기에 도전해보자며 다 함께 목표를 설정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걷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그 '의미'란 걸 찾으면서 포기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고통의 한복판에 서 있던 그때, 우리가 어렴풋하게 찾아헤맨 건 '이 길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포기해도 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애초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고, 이 길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스스로 세운 목표를 부정하며 '포기할 만하니까 포기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었던 거다.
이것은 꼭 걷기에 관한 얘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유난히 힘든 날이 오면 우리는 갑자기 거창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의미 없다' '사실 처음부터 다 잘못됐던 것이다'라고 변명한다. 이런 머나먼 여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최초의 선택과 결심을 등대 삼아 일단 계속 가보아야 하는데, 대뜸 멈춰버리는 것이다. (79)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것 최초의 선택과 결심을 등대 삼기.
안보이는 척 하지 말기.

 

도저히 나가서 걸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날, 혹은 걷다가 체력이 달려서 집으로 당장 돌아가고 싶었던 날, 그런 순간들을 견디게 만든 것은 결국 걷기를 다 마치고 돌아올 때의 성취감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그러니 어쩌면 한 걸음 한 걸음은 미래를 위한 저축 같은 것이다. 지금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이고 오히려 괴롭기까지 하지만 훗날 큰 감동과 의미를 선물해주니까. (81)

 

죽을 만큼 힘든 사점을 넘어 계속 걸으면, 결국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조금 더 걸을 수 있다. (82)

 

나처럼 걷기가 습관처럼 몸에 붙지 않은 경우라면 날씨나 계절에 따라 밖에 나가서 걷는 일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특히 엄동설한의 한겨울에는 밖에 나가는 일조차 엄두가 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단 걸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폭우나 폭설이 내리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날씨나 계절의 변화에 위축되어 특정한 어느 계절에는 걷기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걷는 것이 한없이 고통스러울 것만 같은 '한겨울 걷기'에도 숨은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103)

 

개봉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보이는 오점은 시간을 되돌려 바로잡을 수가 없다. 내가 연기한 캐릭터는 영화 속에서 영원히 그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고된 촬영 현장의 요건들이나 그 시절 나의 개인적인 어려움은, 나의 얼굴로 영화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캐릭터와 그 영화를 볼 관객들 앞에 작은 핑곗거리도 될 수 없다. (114)

비슷한 맥락에서 아이들에게 나도 영원히 그 상태도 기억되겠지?
어떠한 이유도 핑곗거리가 될 수 없다.

 

사람들이 던지는 이런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좋은 예술과 안정적인 삶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좋은 작품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하지는 않는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 만큼 좋은 삶을 살기도 쉽지 않다. 나는 다만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건강한 삶을 살려고 노력중이다. (118)

 

한 걸음씩 진보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하루에 단 하나의 점만 캔버스에 찍어나가도 10년이 지나면 나의 시간이 집적된 작품이 완성되어 있지 않을까? 단순한 비유이지만, 나는 예술에서 시간을 견디는 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때로는 두렵고 또 때론 지루한 이 모든 과정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결과에 휘둘리지 않고 꾸준히 작업해나가는 것이다. 나는 일희일비하지 않고, 꾸준히 작업하고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120)

 

일탈도, 치기도 없는 약간은 재미없는 삶이라 누군가는 말할지 몰라도, 나의 이런 하루가 나는 마음에 든다. 지금 여기서 동이 터올 때까지 매일 축배를 들기엔 아직 나는 갈 길이 한참 먼 사람이기 때문이다. (122)

 

남을 웃기면서 나도 웃는다. 내 유머가 사람들을 웃게 할 때, 나는 내가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고 좋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안심이 된다. (127)

 

처음에는 이런 디테일한 조리를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걷기와 마찬가지로 요리도 한번 해보면 일종의 관성이 붙어서 계속하게 된다. 내가 먹는 밥에 나의 시간을 들이는 일은 짐작보다 훨씬 충만한 일이다. (148)

맞아. 요리도 정말 한 번이 무섭지, 하다보면 자연스레 내가 먹을 식사를 준비하게 된다.
요즘은 조금 시들해졌지만..ㅋ

 

당연히 내게도 그런 날이 있다. 눈을 떴을 때 온몸이 천근 만근처럼 느껴지는 날. 그런 날은 마음도 울적해서 도로 눈을 감고 이불 속에서 꼼짝도 하고 싶지가 않다. 때로는 그런 날이 하루로 그치는 게 아니라 다음 날, 또 그다음 날로 하염없이 늘어지기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집 안에만 머물고 싶은 날. 집밖이 왠지 낯설고 오직 내 방만이 안전하게 느껴지는 날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아침이면 나는 생각을 멈추고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다. 몸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생각이 무거운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조금씩 달래고 설득해 일단 누운 자리 밖으로 끌어낸다.
이때 '걸어야 하는데... 얼른 씻고 나가서 밀린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등등의 생각으로 나 자신에게 압박을 가하면 역효과다. 일어나기 더 싫어질 뿐이다. (155)

 

아침이면 침대에 누워서 하게 되는 생각들이 있다.
'조금만 더 누워 있자. 오늘 딱 하루만이야... 아, 그런데 나는 항상 왜 이모양일까?'
이런 생각들에는 언제나 지고 만다.
그럼 이 부정적인 생각들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와는 정반대의 건강한 생각들을 해야 할까? 이를테면 아침 운동의 좋은 점에 대하여?
'아침에 운동하면 건강해지고 하루를 성실하게 시작할 수 있으니 그만 일어나자! 넌 할 수 있어!'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지친 내 몸을 소외시키고 다그치는 이런 얘기는 피로한 나에게 먹히지 않는다. 내 경험상으론 그보다는 단순한 행동과 결심히 훤씬 더 힘이 세다.
일단 몸을 일으키는 것.
다리를 뻗어 한 발만 내디뎌보는 것. (157)

다리를 뻗어 한 발만 내디뎌보는 것.
샤이니쌤도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푸시업 한 개만 하라고.
같은 맥락이다 전부.

 

흔히 '번아웃' 혹은 스트레스증후군으로 불리는 이런 상태에 빠지면 당장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순한 육체 피로로 여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누워서 쉬려고 한다. 극단적으로 지쳤을 때, 의외로 많은 이들이 계속 먹거나 종일 자거나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거나 하는 식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는 방법'을 택한다. 하지만 이러면 분명 쉬긴 쉬었는데도, 통 나아지는 게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는 날이 닥쳤는데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왜 푹 쉬었는데도 여전히 피곤할까 의아해하면서 말이다.
물로 육체 피로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내버려두면 어느 정도 회복된다. 격하게 움직인 부위의 근육을 잠시 쉬어주면 이내 활동 가능한 상태로 돌아온다. 하지만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면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단언컨대 무작정 가만히 누워 있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나 역시도 '꼼짝도 안 한 채 이불 둘러쓰고 싶은 순간'이 없는 건 아니다. '이렇게 힘든데 뭘 더 어떻게 움직여?' 의구심부터 든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힘들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되뇌게 되었다.
'아, 힘들다... 걸어야겠다.' (163)

 

이 무렵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나의 오만함과 교만함이었다. 2005년 <용서받지 못한 자>의 주연을 맡은 이래로 <베를린>에 이르기 까지 그간 나는 과분한 칭찬을 받았다. 배우로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졌고, 이젠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자리까지 와 있었다. 그런데 촬영 현장에 가면 이상하게 늘 힘들었다. 언젠가부터 감독의 지시와 방향성에 100퍼센트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현장의 흐름과 스태프들의 기대에 그저 따라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직 나 자신만이 감지하는 내면의 미세한 흔들림이었지만, 스스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뭐지? 내가 왜 이러지?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직접 연출을 해봐야겠다는 것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이미 나는 6개월간 영화감독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여행이나 휴식이 아니라 연출이야.'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171)

여행이 아니라 공부였다. 나는.

 

새로운 도전 앞에서 나라고 어찌 두려움이 없었을까. 하지만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계속 무난하게 이어가는 것은 그때의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고꾸라지고 자빠지더라도 내 앞에 가로놓인 어떤 선을 넘어서고 싶었다.
연출, 이것을 지금 해내야만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174)

 

영화감독이란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로구나. 각 파트에서 알아서 하게끔, 자연스럽게 굴러가게끔 조율하고 가이드하면 족한 것이구나. 굳이 제일 앞에 나서서 모니터 가려가면서 목청 높이고 스태프들에게 지시할 필요가 없는 거로구나. 새삼스레 감독의 일에 대해 깨달은 것이다. (182)

교사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치만 자리를 비워주고, 아이들에게 온전히 맡기기가 왜이렇게 ㅠㅠ힘들까. 엉엉. 나는야 욕띰댕이 턴탬미,,

 

사람들의 반응이 냉랭할수록 어떻게든 더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꼰대'라고 부른다. (183)

 

하지만 나는 별 뜻 없이 한 말도, 일단 입 밖에 흘러나오면 별 뜻이 생긴다고 믿는 편이다.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비난에는 다른 사람을 찌르는 힘이, 칭찬에는 누군가를 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말을 최대한 세심하게 골라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내보내야 한다. 입버릇처럼 쓰는 욕이나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날선 언어를 내가 두려워하는 이유다.
말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태도는 한 사람의 생각과 성격을 보여주는 척도인 동시에, 그 말을 들은 상대방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한숨과 짜증과 불가능으로 점철된 말은 듣는 사람을 맥빠지게 하고, 상황이 정말 최악이라는 느낌을 전염시킨다. (186)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남 탓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물론 그가 쏟아부은 노력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나만이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작고 얕은 마음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책임을 밖으로 돌릴수록 나에게 남는 것은 화나고 억울한 마음뿐이다. 그 상태는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러니까 남 탓은 나를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다. (192)

 

 

독서와 걷기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그럴 시간이 없는데요'라는 핑계를 대기 쉬운 분야라는 점이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하루에 20쪽 정도 책 읽을 시간, 삼십 분가량 걸을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206)

 

나는 한 사람 안에 잠재된 여러 가지 능력을 일생에 걸쳐 끄집어내고 활짝 피어나게 하는 것이 인생의 과제이자 의무라고 본다. 그런 과정이 결국 나를 완성해주는 것이라 믿는다. (217)

 

나는 한번 결정한 일은 자신 있게 밀어붙이는 편이다. 하지만 누군가 나 자신을 믿느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자신감을 가지는 것과 자신을 확신하는 상태는 얼핏 비슷하게 들리지만 전혀 다른 문제 같다. 만약 어떤 일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다면 후회나 미련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열심히 보낸 시간 자체가 나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감이란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열심히 한 일을 신뢰하는 데서 나오는 힘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223)

 

이렇듯 나의 감각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바뀌는데 어떻게 나에 대해 확신할 수 있겠는가? 사람의 마음이라고 다를까? 나의 감각과 마음은 순간순간 바람의 흐름처럼 변한다. 그런데 연기와 그림은 이 감각과 마음을 활용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할 때 막연한 느낌이나 주관에 치우치지 않도록 나 자신을 계속 점검한다. 누군가와 생각이 다를 때도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현재 나의 기분이나 마음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이니까. 또 내가 그렇다면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이 믿고 기댈 수 있는 시간을 쌓아가는 것뿐이다. 나는 내가 지나온 여정과 시간이 자신감을 가지고 일을 해나가지만, 결코 나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않는다. 어쩌면 확신은 나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오만과 교만의 다른 말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226)

 

사실 배우로서든 감독으로서든 새 영화를 시작할 때 나는 늘 두렵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나를 주저앉히거나 새로운 시도를 아예 못하도록 막지는 않는다. 또한 성공과 실패란 단순히 흥행의 그래프만으로는 확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허삼관>은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나의 실패작'은 아니다. 내가 <허삼관>을 연출하면서 받은 선물들은 물질로는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229)

 

우리는 실패한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타인의 평가가 내 기대에 털끝만큼도 못 미쳐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길게 갈 일'이라고. 그리고 끝내 어떤 식으로든 잘될 것이라고.
나는 아직 감독의 삶이라는 긴 도정의 초입에 서 있다. 중간 지점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넘어지거나 꽃다발을 받거나 하는 일들은 어쩌면 크게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른다. 일희일비 전전긍긍하며 휘둘리기보다는 우직하게 걸어서 끝끝내 내가 닿고자 하는 지점에 가는 것, 그것이 내겐 소중하다. (231)

 

슬럼프에 익숙해져야 한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넘어지고 좌절하는 날들에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이러한 슬럼프를 많이 겪어보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경험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러한 슬럼프들은 나를 더 휘청거리게 하고, 다시 일어서는 데 더 오랜 시간을 소모하게 한다. 내가 아직 견디고 배울 힘이 남아 있을 때 찾아온 슬럼프는 실패가 아니라 나를 숙련시켜주는 선생님이다.
곧바로 현장에 나가 일을 시작하고 남들보다 빨리 거창한 성과를 내는 건 중요하지 않다. 충분히 담금질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 담금질의 시간은 내게 슬럼프란 녀석이 방문 했을 때, 비로소 황금의 시간으로 변할 것이다.
각자가 겪을 슬럼프의 시기와 양상은 저마다 다를테지만, 우리 모두에게 슬럼프는 언제든 찾아온다. 슬럼프란 불운한 누군가에게 느닷없이 떨어지는 재앙이 아니라, 해가 나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처럼 인생의 또다른 측면일 뿐이다.
슬럼프란 선생님은 평생에 걸쳐 계속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나에게 슬럼프는 인생길의 장애물이 아니라 나를 겸허하게 만들어 주는 스승이다. (276) 

 

후배들이 그런 고민을 털어놓을 때면 가슴이 아프다. 내게도 당연히 그런 시간이 있었다. 정해진 스줄도, 무대도 없기에 아침에 일어나면 당연히 아무런 할 일이 없었다. 만날 사람도 없고, 약속도 없다. 더 가혹한 건 이런 날들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무기력과 우울의 늪에 빠지기 딱 좋은 시기다. (284)

하정우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누구에게나 있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한 부분.

 

지금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곧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혹시 내가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는 건 아닌지 수시로 주변을 돌아봐야 한다. (286)

고통받고 있는 것과 내가 노력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
당연한건데 ㅠㅠ 정말 잊고 산다.

 

살아가면서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해온 노력이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님을 깨닫는 순간들을 수없이 맞게 될 것이다. 정말 최선을 다한 것 같은 순간에도, 틀림없이 그 최선을 아주 작아지게 만드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엄청난 강도와 밀도로 차원이 다른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새로운 날들이 기다려진다.
작업은, 작품은 정직하다. 몸을 움직힌 만큼 정직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걷기처럼, 작품과 작업도 결코 '야료'를 부리지 않는다.
나는 그 정직성을 믿는다. (286)

나두.

 

가끔 내가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면 덜컥 무서워질 때가 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어떤 힘이 이끌어 내가 여기까지 큰 탈 없이 오게 되었을까?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이 감사한 만큼이나 때로는 겁이 난다. 그동안 단지 운이 좋았던 것만 같아서, 그런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싶어서... (289)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 기도의 내용이 조금 바뀌었다. 요즘 나는 기도할 때 내 소원을 열거하지 않는다. 그저 신이 내게 맡긴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도록 두 다리의 힘만 갖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고민하고 머리를 굴려봤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렇게 기도한 이후로 이상하게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무슨 일에든 더 담대해질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내게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무모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부지런하게 갈 뿐이다. (291)

 

 

나의 2019년 5월의 인생책.
땅땅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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