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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눈이 크게 떠지고 세상이 활짝 열리는 놀라운 기적이니까. (11)

 

텔레파시와 필라테스, 치킨과 키친 사이에 흐르는 그 희박하지만 나름 그럴듯한 유사성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그렇게 애매하게 닮은 단어를 용케 떠올리고 과감히 실험해본다는 것 자체가 가히 천재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기억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선 대체로 공백이 잘 채워지지 않고, 의심이 많아 알고 있는 것도 잘 말하지 못하는 나로선 그런 유연한 사고와 대범한 실행이 늘 놀랍고 부러울 따름이었다. (29)

 

내 안에도 다시 그런 마음들이 피어나면 좋겠다. 잘 몰라도 용감하게 도전해보는 마음. 틀리면 다시 배우고 익히려는 단단한 마음. 실수를 실험으로, 실패를 실현으로 바꾸는 용감무쌍한 마음이 절실히 필요한 요즘이다. (32)

 

그랬다. 그렇게 하루 종일 신나게 웃을 수도 있는 날이었다. 애초에 마음만 제대로 먹었다면, 그렇듯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는, 그랬어야 마땅한 소중한 생일날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좋은 기분을 다른 누군가가 선사해 주기만을 기다린 걸까. 내가 언제 진짜로 웃을 수 있는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나인데. 내가 어떤 선물을 가장 좋아하고, 어떤 하루를 보내야 가장 기쁜지 제일 속속들이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나인데. (44)

 

아이들이야말로 여름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즐길 줄 알았다. 여름이 오면 아이들은 땀이 나든 말든 가벼운 옷차림을 날개 삼아 어디든 자유롭게 누비고 다녔다. 더위를 핑계 삼아 시원하고 달콤한 간식들을 양껏 먹을 줄도 알았다. 푹푹 찌는 날이면 거침없이 물가로 달려가 흠뻑 젖도록 노는 패기가 있었고, 비가 오는 꿉꿉한 날이면 기꺼이 상념에 젖어 고요한 시간을 보내는 재미도 놓치지 않았다. 아이들은 여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즐길 줄 알았다. 여름의 주인은 바로 아이들이었다. (89)

 

지금 생각해도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런 물건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유년을 새롭게 경험하는 느낌도 든다. 모든 게 지금보다는 천천히 흘러가고, 조금은 더 다정하게 느껴졌던 그때가 되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물론 그 시절을 다 지나와 비로소 안전한 자리에 이르러 추억하게 된 입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실제 그 시절을 무사히 살아내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으니깐. (103)

 

그 시절 우리에게 문방구는 그저 필요한 물건을 사는 곳만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상점이 어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데 반해, 문방구만큼은 늘 아이들의 욕구를 최우선으로 하는, 어쩌면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거의 유일한 가게였으니까. 돈만 있으면 아무 때고 혼자서도 당당하게 들어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 있는 곳, 또 돈이 없더라도 언제든 새롭고 다양한 물건들을 마음껏 엿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문방구였다. 그리고 문방구는 부모나 선생처럼 우리를 돌보고 보살필 의무가 없는 어른과 처음으로 관계를 맺어보는 특별한 장소이기도 했다. (117)

 

기가 막혔다. 온종일 집에 갇힌 어린이들은 마트에 갔던 일상을 전생처럼 되짚어보며 놀라고 있는데, 어른들은 여전히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보고 싶은 거 다 보면서 아무데나 아무렇게 잘도 돌아다녔다. 그러다 바이러스의 확산세가 높아지면 애꿎은 어린이들만 다시 손발이 묶였고, 결국 피해 보는 건 늘 어린이들뿐이었다. (154)

 

그제야 나는 그간 친구들이 그토록 나누고 싶어 했던 게 정말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건 바로 작은 생명이 스스로 몸을 일으켜 세계와 만나고 반응하고 교감하는 모든 순간의 아름다움, 그렇게 온 힘을 쏟아 정말 한몫의 인간으로 자라나고야 마는 성장의 경이로움이었다. 결국 친구들은 자신이 만난 아이들이 고스란히 통과한 모든 기적을 내게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순간을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충만한 기쁨을 나와 기꺼이 나누려 했던 것이다. (117)

 

 

영화 <우리들>, <우리집>은 워낙 많이 들어서 나 또한 '봐야지' 생각하는 영화 순위 중 상위에 둔 것들이기도 하다.
그런 영화를 만든 감독의 책이라니, 안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책은 사실 조금 실망했다.
아니, 실망이란 표현이 맞나? 내가 이 감독을 잘 아는 것도 아닌데, 내가 느낀 아쉬움이 '실망'이라는 표현으로 귀결되는 게 맞나?

어쨌든, 책은... 다소 휘발적인 내용이 많았다.
일부러 가볍게 쓰신 것일 수도 있지만, 영화 <우리들>을 만든 감독 윤가은의 책을 기대하고 본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크다. 조금 더 깊고 조금 더 진한 이야기를 바랐던 것 같다.
중간에 그만 두고 싶은 적이 몇번 생길만큼 지루했는데, 그래도 나를 끝까지 부여잡은 것은 '혹시 몰라'하는 마음.
'감독님이 뒤에는 아주 찐하고 근사한 인사이트를 담았을 거야!'와 같은 희망.
그리고 책 두께가 얇으니, 아까워서 다 읽어 보자는 심산도...

어쨌든 다 읽고 나니,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예술가의 책으로 낸 목록이 보였다.
요조의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오 비슷하네.
내가 기대하고 읽었다가, 뻔하고 가벼워서 무미건조했던 책.
아쉬움이 매우 컸던...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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