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SMALL
그만두는 사람들
그만두고 싶다는 사람과 함께할 때가 나는 편안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금세 친밀감을 느꼈다.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신입생 때 나처럼 문학에 대한 열정을 온몸으로 뿜어대는 동기들이 가장 좋았듯이. (27)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
어떤 웃음은 타인을 향해 수천 개의 화살처럼 발사되었다. 앉으려던 나의 뒤쪽에서 짝궁이 내 의자를 뺐을 때, 넘어진 나를 향해 주변 아이들이 일제히 웃었던 것처럼. 어떤 웃음은 핏방울처럼 바닥으로 똑똑 떨어졌다. 또 다른 아이가 또 다른 아이의 의자를 뺐을 때, 넘어진 아이가 뒤통수를 움켜쥐고 함께 웃으며 일어서는 것처럼. 그때 그 아이는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리면서도 웃었다. 친구들의 숙제를 매번 대신해주던 내 친구는 숙제를 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그런다며 애써 웃음을 만들어냈다. 체력장으로 오래달리기를 하던 날 가장 느리게 뛰어가는 아이는 마지막까지 가장 느리게 뛰어갔다. 아이들은 한 바퀴나 그 아이를 앞서 뛰며, 그 아이에게 밝은 웃음과 함께 힘찬 응원을 보냈다. 엄마는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할 때면 담임이 무슨 말을 하든 간에 입을 가리고 추임새를 넣듯 웃었다. 가족들 앞에서는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130)
마피아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해주세요
다른 선생님들은 교사가 되자마자 승진을 준비하거나 소개팅을 하며 결혼을 준비하거나 부동산이나 주식을 시작했지만, 저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안 하기로 했으니까요. 현재를 즐기기 위해 살기로 했으니까요. 넉넉한 월급이 있었고, 퇴근 후의 삶과 방학 기간이 있어서 얼마든지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었어요. VIP석 티켓을 끊어 뮤지컬을 봤어요. 한 공연을 열 번도 봤어요. 구구단처럼 공연 대사를 줄줄 읊게 되자, 더는 보기가 싫어졌어요. 와인바에서 와인을 종류별로 마셨고, 1:1 필라테스 레슨을 받았고, 방학에는 해외여행도 다녔어요. 그렇게 5년 정도 보냈더니 더는 할 게 없었어요. 뭘 해도 구구단처럼 될 테니까. 매년 똑같은 현재가 반복되어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싫은 건 아니에요. 성의 없게 수업을 하는 것도 아니에요. 최선이 반복되어도 매번 같은 자리에 서 있다는 것뿐이에요. (163)
내가 나의 시간을 교묘한 핑계들로 소외시켜요. 미래를 바라보며 고시 공부에 매진했을 때에는 미래에 묶여 있는 것 같았는데, 현재를 즐기는 현재 역시 현재에 묶여 있을 뿐일 줄은 몰랐던 거예요. 같은 반 학생들과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은 점점 늘어나요. 학생들은 해마다 바뀌지만 언제나 같은 나이에 멈추어 있고, 사진 속 내 모습이 변해가는 건 내 눈에만 보여요. (164)
칼질을 반복하면 칼질이 칼질처럼 안 느껴지는 때가 옵니다. 그럴 땐 내 손목도 내 손목이 아니게 되고, 내가 당근인지 칼인지 손목인지 모르게 됩니다. 그때 손끝을 베기 쉽습니다. (166)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문경과 아란은 꿈 이야기를 너무 많이 나누었다. 꿈이 있는 문경을 아란은 너무 많이 응원해왔다. 꿈꾸던 것과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된 문경에게 어떤 반응을 표현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망설임을 감추려고 노력할수록 무언가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은 것에 대해 해맑게 축하를 하기에는 문경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았다. (206)
나와 상아가 떠올랐다.
단영
누군가 한심하게 굴거나 누군가를 무시하고 싶거나 누군가에게 화가 날 때에도 효정은 한결같이 이 미소를 사용햇다. 아란은 그때까지만 해도 효정의 미소를 미소로 읽었다. (262)
효정은 모른 체했다. 부드럽게 웃으며 눈감아주었다. 여자들은 그 점을 못 견뎌 했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는지. 효정의 침묵을 야속해했다. (263)
단편 중 '초파리 돌보기'는 정말 읽는 내내 눈물이 나서 혼났다.
특히나 소설의 마지막 문장,
"이원영은 다 나았고, 오래오래 행복하다." 를 한참 바라보았다.
오래오래 행복했다가 아닌 행복하다로 맺음되는 이 문장에 대하여.
반응형
LIST
':::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금니 깨물기 :: 김소연 (0) | 2022.06.17 |
---|---|
애쓰지 않아도 :: 최은영 (0) | 2022.06.17 |
선생님, 오늘도 무사히! :: 김현수 (0) | 2022.06.09 |
The Having :: 이서윤 (0) | 2022.06.08 |
순례주택 :: 유은실 (0) | 2022.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