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작은 바람이 있다면 읽고 쓰는 나날을 기록한 소박한 글들이 온기, 라는 단어와 어울렸으면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고양이가 앉았던 자리만큼의 온기가 되어주었으면. 이상하고 슬픈 일투성이인 세상이지만 당신의 매일매일이 조금은 다정해졌으면. 그래서 당신이 다른 이의 매일매일 또한 다정해지길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는 여유를 지녔으면. 세상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만 같더라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안녕을 빌어줄 힘만큼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을 것이므로. 그런 마음으로 당신에게 이 책을 건넨다. 우리의 매일매일이 다정하다고 섣부르게 믿고 있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다정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다운 사람들끼리 향기로운 차와 빵을 놓고 마주앉아 좋아하는 책에 대해서 아무 근심 없이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그날이 우리에게 어서 다시 오기를 기다리면서. (7)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어떤 힘일까? 나는 삶이 고통스럽거나 누군가의 불행 앞에서 무기력한 마음이 들 때 이 소설 속 빵집 주인이 건넨 한 덩이의 빵을 떠올리곤 한다. 어떤 의미에서 내게 소설 쓰는 일은 누군가에게 건넬 투박하지만 향기로운 빵의 반죽을 빚은 후 그것이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리는 일과 닮은 것도 같다. (22)
몇 해 전, 신촌에 작은 방을 얻어 살았던 적이 있다. 술집들이 즐비한 골목 입구에 위치한 건물의 꼭대기 층 방이었다. 여름에 몹시 더운 만큼 겨울엔 몹시 추운 방이었고, 시도 때도 없이 바퀴벌레가 출몰했으며, 딸려 있는 가구들은 하나같이 촌스럽고 낡아 눈길이 닿는 곳마다 생존을 위해선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을 버리라고 내게 끊임없이 종용하는 우울한 방이었다. (중략) 밤의 흥성함이 휩쓸고 지나간 거리는 대체로 쓸쓸했고, 한낮의 햇살 아래서, 깨진 유리병 조각처럼 서글프게 반짝였다. (62)
대학생 때가 떠오른다. 그리고 낮의 중문 거리도 생각이 난다.
그때쯤 나는, 백수린 작가님의 표현처럼 밤의 흥성함이 휩쓸고 지나간 거리는 대체로 쓸쓸했고, 한낮의 햇살 아래서, 깨진 유리병 조각처럼 서글프게 반짝이는 그 거리를 무수히 마주하면서 ‘술’과 그리고 ‘술과 관련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바닥에 깔린 지저분한 전단지, 쓰레기들을 보며 나는 단정하고 정돈된 대학 안의 거리와 낮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아 갑자기 너무 그립다. 얼른 교수님께 연락드려서 만나뵈러 가야겠다.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곳.
실제로 기시 마사히코 씨를 만나면 나는 쑥스러워 아무 말도 못 건네겠지만, 그와 직접 말해보지 못하더라도 아무런 문제는 없다. 세상 어딘가에 나와 공명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오래전부터 많은 작가들과 이런 식의 특별한 우정을 남몰래 쌓아왔다. (88)
아 맞아. 나도 그런 (일방적인)우정을 몇 가지고 있다.
해를 거듭하며 바뀌기도 하고?
‘공명’을 하는 관계라니. 아 너무 좋은 표현이다.
소설가로서 나는 언제나 서사의 매끄럽지 않은 부분, 커다란 구멍으로 남아 설명되지 않는 부분에 마음을 주는 사람이다. 소설에서도, 그리고 인생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은 그런 지점들이 아닐까? 우리는 삶과 세계를 하나의 매끄럽고 완결된 서사로 재구성하려 애써 노력하지만, 사실은 끝끝내 하나가 될 수 없는 단편적인 서사들을 성글게 엮으며 살아갈 뿐이니까. 그리고 바로 거기,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때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도 없는, 서사와 서사 사이의 결락 지점. 그런 지점이야말로 문학적인 것의 자리일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89)
작업 전, 차를 우리는 시간은 나에겐 기도의 시간이다. 그저 하얀 사각 종이를 사랑했던, 쓰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황홀했던 청순한 마음을 다시금 불러오는 시간.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소설을 쓰기 전에 책상을 치우고, 차를 우리고, 마들렌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접시를 골라 책상 위에 올려둔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의 말이 타인을 함부로 왜곡하거나 재단하지 않기를.
내가 타인의 삶에 대해 말하는 무시무시함에 압도되지 않기를.
나의 글에 아름다움이 깃들기를.
나의 글이 조금 더 가볍고 자유로워지기를.
그리하여 내가 마침내 나의 좁은 세계를 벗어나서 당신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105)
그 때문이겠지만 나와 여동생에게 사과란 지긋지긋한 과일이 되어버렸다. 언제나 손만 뻗으면 닿는 가까운 곳에 있어 특별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은 과일. 가장 가까이 있지만 또 그래서 멀어지게 되는 가족처럼 말이다. (113)
한 생명의 탄생에 대한 기대가, 자꾸만 고개를 들려 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던 밤. 그리고 그런 밤을 떠올릴 때면, 나는 나의 동생에게 이런 말을 귓가에 속삭여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동생아, 잊지 말렴. 아기가 있든 없든,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앞으로도 여전히, 그리고 온전히 너의 것이야. (142)
언젠가 나와 가까운 이가 임신을 하게 되면 전해주고 싶은 말.
그리고 나또한 임신하는 때가 온다면 다시 읽고 싶은 말.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열정이나 도취를 쉽게 떠올리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청춘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게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본다. 넘치는 건 젊음뿐, 상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릴 여유는 조금도 갖지 못해 서로를 오독하는 시기를 지나야 우리는 사랑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고도. 공고한 ‘나’의 성을 허물고 타인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 마침내 사랑은 그 눈부신 폐허에서 시작할 테니까. (157)
이탈리아에서의 체류 기간이 끝나면 귀국해 연인과 가족을 이루며 살 예정이었던 그녀는 판에 박힌 일상을 평생 살고 싶지는 않다는 자신의 욕망을 깨달은 후, 모두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안정적인 직업을 지닌 자상한 애인에게 최근 이별을 고했다.
10여 년을 함께한 애인과의 결별 후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지 모른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두려워. 그렇지만 난 원했던 삶을 살아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더 두려워.” (170)
나도 언제나 용기 있는 사람이고 싶다.
우리는 살면서 사랑하려 애쓰거나, 그러지 않거나 두 가지밖에 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렇다면 가능한 한 나는, 언제나 사랑의 편에 서고 싶다. (193)
아 나도 언제나 사랑의 편에 서고 싶다.
퉁퉁 부은 손을 말아 주먹을 쥐어본다. 나는 내 몸을 어떻게 대해왔나. 시간이 아깝다고 바디로션 바르는 일조차 건너뛸 때가 대부분이라는 걸 나는 기억해낸다. 일에 쫓기면 가장 먼저 잠을 줄이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끼니를 대충 때우기 일쑤였다. 그러고 보면 언제나 나는 내 몸에게 모든 걸 양보하라고 요구했던 것은 아닐까? 가죽 가방 하나만큼도, 구두 한 켤레만큼도 나는 내 몸을 아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서글프게 깨닫는다. 어쩌다 이렇게 살게 되었을까? 내가 원했던 것은 날마다 다른 구름의 빛깔에 감동하고, 바람의 결을 느끼며, 꽃그늘 아래 앉아 계절이 깊어가는 것을 찬찬히 응시하는 삶이었을 텐데. (중략)
나의 몸을 어떤 성취를 위해 쓰고 버리는 도구처럼, 누구가에게 내보이고 평가받아야 하는 전시품처럼 여기며 살고 싶지는 않다. 내 몸을 살뜰히 아끼면서, 귀한 손님을 대접하듯, 간만에 해후한 연인을 맞이하듯 애틋하게 보살피며 살고 싶다. 웅크렸던 어깨를 펴고 커다랗게 기지개를 켠다. 늘 그 존재를 망각해왔던 무릎 뒤의 주름, 처치 곤란한 듯 대해왔지만 사실은 제법 귀여운 것도 같은 볼록한 아랫배, 언제나 긴장되어 통증으로 ‘있음’을 호소하는 나의 오른쪽 어깨와 목의 근육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그동안 무심했던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담아. 몸을 돌보는 일은 그렇게 마음을 돌보는 일을 닮아간다. (212)
올해 내가 정확히 마주한 지점이기도 하다.
그결과 목과 허리가 아파 몇 달을 누워 지내야했고 오래 슬펐다.
그럼에도 다행히 그것을 계기로 내 몸을 아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건강을 위한 선택을 하기 위해 무지 애쓰는 중(?)이다. ㅋㅋ
마음의 눈은 어째서 이토록 형편없는 근시인 것인지. 우리는 어떤 일이 눈앞에 직접 닥쳤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에 촘촘하게 얽혀 있는 수많은 다른 선들을 볼 수 있다. 어떤 일이든 쉽게 금을 긋고 선과 악, 옳고 그름 중 하나를 택하라고 소리 높여 말하는 이들은 대부분 멀찍이 떨어진 강의 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217)
아. 마음의 눈은 형편없는 근시라는.. 어쩜 이런 표현을 할까?
너무 좋은 문장을 담아간다.
<디어 라이프>를 다시 읽으며 소설을 읽고 쓰는 일은 나의 내밀한 고백에 “사람들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단다”라고 읊조려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소설이 그런 것이라면, 당신과 내가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들인 한 인생은 아직 친애할 만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228)
맞다. 소설을 읽는 일이 나에게도 “사람들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단다”라고 읊조려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행위다.
그래서 소설을 좋아하게 되었고, 꾸준히 좋아하는 것 같다.
예전에는 몰랐지. 그저 나 이외의 누군가의 파고를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마음이 컸으니까.
소설은 아마 그러한 이기심을 깨는 데에 아주 좋은 도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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