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야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를 묻는 시간, 가만히 앉아서 글자에 일상을 가두는 시간이. 일어난 일을 나열하다보면 불분명하던 감정도 한군데로 고여 어떤 단어가 되었다. 엉켜 있던 생각을 정리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결말에 닿기도 했다. 일기를 쓰면서 울기도 졸기도 했다. 미소 지을 때도 있었다. (10)
제야는 제니가 부러웠다. 글을 잘 쓰는 제니도 부러웠지만, ‘싫어요’라고 말하는 제니가 더 부러웠다. 어른들은 제야를 보고 맏이라서 의젓하다고 했다. 제니에게는 막내라서 철이 없다고 했다. 제야는 그런 식의 구분이 싫었다. 그런 말로 자기를 ‘싫어요’라는 단어에서 멀리 떨어트려놓는 것만 같았다. (38)
멍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온 제야는 씻으려고 옷을 벗다가 팬티에 묻은 갈색 얼룩을 봤다. 처음엔 피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생리를 배워서 알고는 있었지만, 생리가 시작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진짜 알게 되는 것의 간극은 크고 깊었다. 새빨갈 줄 알았는데. 팬티가 흠뻑 젖도록 새빨간 피가 쏟아질 줄 알았는데. (48)
자고 있는데 집에 도둑이 들었다 치자. 도둑은 나보다 힘이 세고 주변에 흉기 될 만한 것이 널려 있다 치자. 일어나서 도둑이야 소리 지르면 도둑이 나를 죽일 것 같아서, 도둑이 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치자. 그래서 내가 아주 귀중한 것을 도둑맞았다면, 그건 내 잘못인가? 목숨을 걸고 싸워서 도둑에게 제압당했다고 치자. 내가 다치고 부러졌다고 도둑은 도둑질하지 않을까? 저항하다가 내가 죽었다고 치자. 도둑은 도둑질하지 않을까? 내가 소리 지르거나 죽도록 반항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가만있었으니까 도둑은 아무 잘못이 없나 다들 그렇다고 말한다. 도둑보다 도둑맞은 내 잘못이 크다고. 네가 도둑맞을 짓을 했다고. 나는 몰랐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무서웠다. (50)
내가 본 그 어느 비유보다 훌륭한 비유다.
임신중절을 가르칠 때에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자료라고 생각한다.
자료 정도로 폄하할 따위의 내용이 절대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이 화두가 누군가의 살에 닿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내 인생이 서너개쯤 되는 줄 아는 사람들. 이미 일어난 일을 어쩌겠느냐고 말하면서, 이번 생은 이대로, 이대로 재수 없게, 미친 사람들, 그런 일이 어떻게 운이고 재수인가. 그에게만 생이 한번뿐인 듯 실수 하나로 인생을 망칠 수 없다고... 그 사람은 이미 망가진 사람이다. 스스로 망가져서 나까지 망친 사람이다. (84)
좋아한다고, 좋아해서 그런 것이라고 당숙은 말했지만 제야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당숙이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던 그 순간 눈앞에 제야가 있었다. 좋아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했다. 당숙은 제야를 강간한 게 아니라 여자를 강간한 것이다. 여자 중에도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여자. 자기를 의심하지 않을 여자.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여자.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여자. 남들한테 얘기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여자. 그래서 또다시 강간할 수 있는 여자... 미성년자인 친척 여자. 제야는 그 조건을 충족시켰다. 제니도 마찬가지였다. 날이 밝아올수록 제야는 또렷해졌다. 있었던 일과 들었던 말과 그 의미까지, 곱씹을수록, 제자리를 찾아갔다.
제야는 자기를 지키고 싶었다. 제니를 지키고 싶었다.
제야는 강해지고 싶었다. (109)
고민 끝에 제야는 그편을 선택하기로 했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그런 일을 당할 만한 애가 되는 편을. 더 나은 선택이란 없다. 지옥뿐이고, 지옥뿐이라면, 당숙도 지옥에 있어야 했다. 제야가 가만있으면 아무도 모를 테고 문제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문제는 계속 쌓이고 폭발해서 제야를 죽일 것이다. 제야는 갈림길에서 이쪽과 저쪽을 봤다. 앞길과 뒷길을 봤다. 제야는 엄마를 믿었다. 제야는 엄마가 가라는 길로 가지 않을 것이었다. 그건 믿음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112)
카레에 비빈 밥을 천천히 씹으며, 제야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생각하려고 했다. 어디선가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텔레비전 소리, 사람들 말소리도 웅웅 들리는 것 같았다. 단층 가옥에서만 살아온 제야에게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일상에서 들리는 소음이 무서움의 무게를 조금 덜어주는 것 같았다. 제야는 소리에 집중하며 이를 닦고 세수했다. (147)
스무 살 이후, 나도 가족과 살지 않으면서 종종 안도했던 지점들이기도 하다.
또 이 책을 읽던 단양에서도 마찬가지.
어두워서 까맣던 안방의 침대에서 윗층과 아랫층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웃는 소리, 떠드는 소리에 집중하며 잠을 청했었다.
진짜 어른이 되자. 어른이 되어보자. 그런 생각 했어.
이모는 제야의 손을 잡고 가만히 말했다.
어른으로서 미안해, 제아야. 정말 미안해.
제야는 울고 싶지 않았다. 울면 멈출 수 없고, 밤새 울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면 약해지는 것 같았다. 제야는 벌떡 일어나 앉고 싶었다.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기지개를 켜고 크게 소리를 내고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강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굳은 채로, 무거운 채로 할 수 있는 건 우는 일 뿐이었다. 제야는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155)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제야가 물었다.
이모는 내가 겪은 일 때문에 나한테 잘해주는 거예요?
잘해주는 게 아니라 걱정하고 아끼는 거야.
너무 노력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노력해야 해. 이모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은 노력해야 해. 소중한 존재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래야 해.
노력은 힘든 거잖아요. 제야가 중얼거렸다.
마음을 쓰는 거야. 억지로 하는 게 아니야. 좋은 것을 위해 애를 쓰는 거지.
제야는 일기에 이모의 말을 썼다. 언젠가는 이모의 말을 이해할 수 있길 바랐다. (161)
웃으며 깨달았다. 내겐 눈과 귀가 하나씩 더 생겼구나. 남들에게 없는 조직이 하나씩 더 생겨서, 그 일을 겪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볼 수는 없게 되었다. (163)
어떤 사람은 제야를 무시했다. 어떤 사람들은 제야를 겁주거나 깔보기 위해, 무언가를 못하게 하려고 ‘여자애가’ ‘여자가’ ‘어린애가’ ‘어린 여자가’라는 단어를 썼다. 화가 날 때 제야는 아이슬란드어나 핀란드어로 대꾸했다. 아는 단어만 연결한, 아무 의미 없는 문장에 사람들은 멈칫했다.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화를 냈다. 제야는 밤에 혼자 다니지 못했다. 걸으면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지도 못했다. 친절한 남자를 의심했고 무례한 남자를 무서워했다. 길거리에서 움직일 수 없어 이모에게 여러번 전화했다. 감을 잃지 않으려고 문제집을 풀었다. 매일 일기를 썼다. 제야는 하루하루를 살았다. (169)
한숨이 날 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아직 젊다. 지금도 나는 부자지만 앞으로 더 부자가 될 거야. 무슨 일 있을 대는 젊고 돈 많은 솔로 이모를 생각해. 두려울 게 없을 것이다.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 이모의 말을 적어둔다.
나는 절대 이모에게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도망칠 생각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다. 이모에게는 늘 웃으며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이모도 웃게 할 것이다. (174)
그렇게 겉돌 필요는 없지 않나. 다들 네 상처는 이해해. 너랑 잘 지내고 싶어하고.
제야는 문자를 한참 쳐다봤다. 상처는... 아니었다. 상처에는 완료나 흔적의 느낌이 있엇다. 그것은 기생충처럼, 병균처럼, 생물처럼 산 채로 제야를 간섭했다. 지나간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불쑥 일상에 끼어들어 제야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196)
자랑 아니면 비난뿐인 대화. 당신들은 당신들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다. 자식 말고 당신 인생은 어디 있지? 내 얘기도 그런 식으로 하겠지. 노가리 땅콩 씹듯 심심풀이로 난도질하겠지. 그렇게 할 말들이 없나? 공허한 인생들.
나는 내 인생 최대 불행이 강간당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내 인생 최대 불행은 이런 세상에, 이런 사람들 틈에 태어난 거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른이라고 고개 숙여 인사해야 하고 어른이 하는 말이니까 들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싹수가 노란 거고 애당초 글러먹은 애가 되는 거고. 당숙이 악마여서 나를 강간한 게 아니다. 여기서는 그게 강간이 아니니까 강간한 거다. 당숙이 당당한 건, 가해자면서 희생자인 척 구는건, 이 세계에서 아주 당연한 문법인 거다. 여기 사람들은 ‘강간’이나 ‘성폭행’의 의미를 모른다. (206)
그는 나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기만하는 편이 훨씬 쉬우니까. 그는 쉬운 인생을 살 것이다. 나는 여태 애썼다. 다시 애쓸 것이다. 나는 애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절대로, 그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217)
난 늘 당숙을 생각하고 당숙에 내게 한 짓을 생각해. 그것만을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는 중에도 그 생각은 지속적으로 한다는 말이야. 그건 평생 내게 붙어 있을 거야. 지난 일이 되지 않을 거야.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현재형일 거야. 그만 잊으라거나 지우라고 말하는 건, 그만 살라는 말과 같아. (225)
제야는 왼쪽 벽에 손을 대고 걸었다. 때로는 달렸다. 미로의 길을 다 걸어야 할 만큼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출구에 닿을 것이고, 이제 제야에게는 출구가 중요하지 않았다. 왼쪽 벽에 손을 대고 걷는 동안 들여다보는 자기 마음이 중요했다. 언젠가는,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눈으로 타인의 마음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들이 무릎을 세우고 일어설 수 있도록, 왼쪽 벽에 손을 댈 수 있도록, 그들의 오른손을 잡고 싶었다. 그리고 평생, 타인의 마음을 바라보는 눈으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제야는 정말 그러고 싶었다. (233)
시간은 삶을 통해 끝없이 번져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흐르기만 하는 것이 시간이라면, 시간이란 결국 죽음과 같은 것이 아닐가. 그러니 불행은 죽음이 아니고, 죽음도 불행이 아니다. 불행은 사는 일이 무서워지는 일, 삶이 공포로만 남는 일. 말하자면 시간이 얼어붙는 일. 얼어붙은 채로 사는 일. (243)
소재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더 펴기까지 오래 걸렸던 책.
읽으면서 내내 속상했고 눈물이 났고 화가 났다.
그리고 너무 사실적인 제야의 마음에 나조차 어찌할 바를 몰랐다.
책을 다 덮고서야 주인공의 이름과 제목이 눈이 들어왔다.
제야 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성이 이씨였다. 그리고 제니라는 여동생이 있는 언니다.
‘이제야 언니에게’
이제야라는 언니에게 쓰는 글 혹은 이제서야 언니에게 쓰는 글.
그 어느 쪽이든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나도 이제야 언니에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으니까.
이제야 언니에게... 나도 여기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제야 언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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