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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음 동호회
우리는 공들여 고른 단어들로 허공에 우아하게 저글링을 하다가 관객 없는 무대에서 갑자기 뛰어내리는 피에로다. 나이를 먹듯 꾸준히 가난해지는 자기 언어의 잔고를 매일 지켜보는 회계사이고, 자신의 정직과 허세 양쪽으로부터 소장을 받고 힐난을 당하는 피고소인이다. '우리의 적은 반찬이다. 빨래다'라고 하면 웃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그것들 때문에 우리가 종종 현실의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숨긴다. 우리의 슬픔은 유머를 덧씌워 우그러뜨리지 않고는 표현되거나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는 거울을 보고 웃지만, 누군가가 우리를 보고 웃거나 반대로 처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싶어진다. (12)
강의가 끝나고 질문시간이 됐는데, 어떤 엄마는 자기 아이가 학교에서 권해준 책을 잘 읽지 않는다며 상담을 부탁했고, 또 어떤 사람은 남편과 자주 싸우는데 사랑한다는 말에 그림을 곁들인 편지를 써서 주면 남편 마음이 풀릴까 물었어요. 글쓰기나 그림 그리기에는 관심이 없지만 시어머니에게 책을 만들어드리면 어떨까, 점수를 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나온 사람들도 있었고요. 그랬더니 강서빈 작가님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고 읽어보세요, 그림을 그려보세요, 이기적이 되세요, 하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아주 부드럽게 말씀하시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14)
'너와 멀어진 건 아마도 네가 육아로 바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는지도 몰라. 나는 너에게 언제나 귀찮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남자 없이는 살지 못하는 친구들과 하나씩 멀어지면서 깨달은 건, 나는 사실 늘 들러리에 불과했다는 것.' (18)
아이 없이 처음 밟아보는 광장은 넓었고, 저녁 바람은 매섭지만 시원했다. 우리는 지난밤의 시사 프로그램과 최근에 본 영화와 고등학생들이 쓴 선언문과 우리의 다음 책 얘기를 하며 걸었다. 아무도 저녁 반찬 얘기를 하지 않았다. (22)
승혜와 미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건 이상한 말이었다. 더 이상 정직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몹시 편리하게 책임을 방기해버리는 말이기도 했다. 너무도 불공평한 말이었다. 그러나 승혜에게는 한 사람과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 이전에, 조금 더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 마지막으로 꼭 해야 하는 칼질 같은 말이기도 했다. (32)
지금 승혜의 눈두덩이 빨갛게 부어 있는 이유이자,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부재중 전화를 남겨대면서도 막상 전화가 걸려오면 받지 않는, '나는 상처가 났어, 너한테 그걸 보여주고 싶어, 그런데 낫기는 싫어, 다만 네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랄 뿐이야'식의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는 이유의 원천이 되는, 일련의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때. (37)
승혜는 사실 미오와 사귀는 동안 그런 일이 한 번은 일어나지 않을까 막연히 상상했었다. 그리고 다소 통속적인 그런 상상은, 승혜에게는 그 자체로 미오와 하는 사랑이라는 각본을 완성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했다. 세상에 고결하고 우아하기만 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어느 사랑에나 유치함과 찌질함이라는 불순물이 섞여들기 마련이라고 승혜는 생각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는 법이고, 성숙한 사람은 연인의 과거를 자신의 것처럼 받아들이고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일 것이라고, 짐짓 결연하게 마음에 새기며 초등학생처럼 다짐하는 자신의 귀여움에 스스로 도취되어 싱긋 웃기도 했다. 승혜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날 그 자리에 헤어진 연인과 마주보며 서 있는 미오의 얼굴에 떠오른 슬픈 웃음이 상상했던 각복보다 몇 배쯤은 더 각별해 보인 것이었고, 또한 승혜 자신이 그 미소에 짐작보다 몇 배쯤 격렬하게 반응한 것이었다. 미오의 그 미소 속에는ㅡ승혜 마음의 가장 유치한 부분을 동원하여 말하자면ㅡ'대체할 수 없음'이 선명히 들어 있었다. 손에는 말아 쥔 마이크와 남은 프린트 무더기를 들고, 그날 별로 신경을 써서 입고 나가지 못한 탓에 여기저기 구겨진 검은색 폴로 티셔츠와 낡은 청바지를 입고, 화장도 하지 못한 채 옛 연인을 마주하고 서 있는 미오의 얼굴에 떠오른 건, 분명 자신의 초라함을 무참해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45)
미오가 선언처럼 내뱉었던 '너는 몰라'라는 말에 담긴 무서움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 것인지, 승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 말은 심연의 말이었고, 그것을 똑바로 감당하기에 승혜는 너무 젊었다. 나는 무엇을 모르는 것일까. 얼마나 모르는 것일까. 미오 또한 나를 얼마만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승혜는 무서웠다. 그래서 무서움의 크기만큼 유치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문제삼지 않았던 미오의 차가운 말투나 남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들, 담배를 피우고 길에 꽁초를 버리는 버릇, 경직되고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사고방식 같은 것들을 하나씩 끄집어내 눈앞에 펴 보이며 미오를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 미오 역시 비슷한 행동을 승혜에게 했다. 그동안 자신이 사주었으나 승혜가 잃어버린 자잘한 선물들을 찾아내라고 요구하고, 자기 SNS를 감시하는 행동을 그만두라고 말하고, 너는 사람을 너무 갑갑하게 한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승혜만큼 미오 역시 무서워하고 있었다. 승혜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그 하나하나의 작은 행동들이 아무런 상처도 남기지 않는 것은 또 아니어서, 그렇게 젊은 두 연인은 서로를 물고 뜯고 눈이 빨개질 때까지 울음을 터뜨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54)
마흔 셋
지루하거나 권태롭게 지나간 날들은 별로 없었다. 몇 명인가와 연애를 해보았지만 나 자신을 양보하고 싶을 만큼 좋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누군가를 유혹하고 싶다는 충동으로 온몸의 피가 끓어오른 적도 몇 번 있긴 했다. 하지만 불과 이틀이나 사흘 정도가 지나면 어김없이 전에는 보이지 않던 단점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그 사람에게 쓸 시간과 돈을 차라리 내게 쓰는 것이 현명하겠다는 생각이 선명한 경고음을 울리곤 했다. 나는 언제나 내가 우선이었다. 뒷바라지도 2등 시민 노릇도 희생도 노력도 하기 싫었다. (69)
그렇게 거대하고 절박한 질문들은 아니어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어떤 막막한 심정은 내게도 있었다. 나는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그것의 조각들이 내 몸속을 작은 반딧불들처럼 날아다니다 새벽이 되어서야 꺼지는 광경을 느리게 느리게 지켜보곤 했다. (83)
피클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판관도 아니에요. 객관적 진실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알 수는 없어요. 다만 이 세상이 일방적으로 힘과 권력을 지닌 가해자의 목소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에, 우리는 그동안 소외되었던 피해자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자는 겁니다. 피해자의 편에 서자는 거예요.
선우는 그 말을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 말은 정답이었지만, 선우에게 충분한 답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무언가 후련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 후련하지 않음에 관해 생각하고 있자니 기이한 자책이 밀려왔다. 정답인데 충분한 답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선우가 충분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인 것 같았다. (94)
윤이형 작가님은 어떻게 이렇게 내 마음을 잘 아실까?
내가 영화 <돌멩이>를 보고 한참이나 울고 마음이 아팠던 이유도 이와 비슷하리라.
영화 속 송윤아의 행동은 정답이었는데 충분한 답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에 내가 대신 미안해했고 내가 대신 눈물이 났다.
선우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몸속의 혈관이 밀가루로 꽉꽉 틀어막히는 것 같았다. 제발 그 화제를 피하고 싶을 만큼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선우가 피해도 남편은 그 화제를 계속 입에 올렸다. (95)
이후에 남편이란 사람이 하는 말을 차마 내가 옮겨 쓰기가 싫어서 여기까지만 쓰련다.
아주 대단한 나쁜 말이 아니라, 너무 숱하게 들어서 그래서 정말 밀가루로 혈관을 꽉꽉 틀어막은 듯한 말이라. 그리고 여기서 느끼는 선우의 마음도 너무 잘 알겠어서.
의심하는 용ㅡ하줄라프 1
'모두들 왜 저렇게 들떠 있는 거지? 이겨서 돌아오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도, 어째서 저렇게 진심으로 기대하는 표정을 하고, 정말로 이길 거라고 믿는 거야?'
아이들은 목말을 탔고, 어른들은 꽃다발에서 꽃을 한 송이씩 뽑아 용기사들에게 던지며 환호했다. 작위 수여식이 끝나면 연회가 열렸고, 이 도시의 시민이라면 용과 인간 누구에게나 공짜 고기와 술, 신선한 과일이 아낌없이 베풀어졌다. 한 주도 빠짐없이 열리는 이 성대한 축제가 갈에게는 어떤 불안을 숨기려는 허영과 광기의 경연으로만 보였다. (187)
지금 이걸 보고있으니, '결혼식을 말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내 소명은 너야, 사실은 그런 생각을 듣고 싶었다. 그렇게 뻔하고 낯간지러운 생각을, 이상하게도 듣고 싶었다. 같은 구석구석을 다 답사하기에는 너무 넓은 대륙과도 같은 이파의 마음에서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꼈다. (217)
님프들
나는 준의 입에서 나온 아우슈비츠라는 단어에 상상의 돌을 매달아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가라앉히려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가 나와 번갈아 아이를 보고 집안일을 하는 동안 책임감과 행복함을 느끼기는 커녕 실은 영혼을 마모시키는 온갖 사소하고 잡스러운 노동에 질려 알게 모르게 저 비명을 소리 없이, 수도 없이 질러왔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가 우리의 결혼을 짐으로 느끼고 있다는 생각, 이 생활이 그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죽이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는 생각이, 그것이 나의 잘못은 아니지만 나의 잘못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집요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284)
-네.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았어요. 내가 죽으면 준도 그대로 사라지죠. 그렇게 억울하게 죽었는데.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이 세상은 이렇게나 넓은데, 준을 아는 사람들은 고작해야, 한줌? 준 없는 세상이 제겐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자꾸자꾸 준을 만들어요.
-그래서, 지금은 의미가 좀 생겼나요? 준이 많아진 뒤로.
-계속 살아가기로 했으니까요. 세상에 사랑이 부족하다고 살기를 그만둘 수는 없잖아요. 저는 다른 사랑을 발명했어요. 사랑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사람이 적어요.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적어요. 혐오를 사랑할 수는 없어요. 혐오하는 사람들한테 우린, 소음이나 먼지나 비닐 같은 것밖에 안 되겠죠. (286)
수아
인간인 걸 증명하라고 한대. 규인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설희가 물었다.
-그 로봇들 말이야. 막다른 골목 같은 데서 혼자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구석으로 몰아넣고 네가 로봇이 아니고 인간인 걸 증명해보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네가 아무 주인도 섬기고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해봐'라고 한대.
그걸 어떻게 증명해? 설희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너무 형이상학적인 얘기 아니야? '주인'이라는 개념부터 지나치게 추상적이잖아. 뭘 어떻게 해야 그런 걸 증명할 수 있는 거야?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맥락에서 말하는 건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그만두었다. 명치끝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인가? 오직 나 자신만을 주인으로 섬기는가? (317)
내가 가르치는 애들 기말 과제 중에 재미있는 게 하나 있었어. 규은이 맥주병을 입에서 떼며 말했다.
-뭔데?
-소설인데, 진짜 선한 노인이 나오는 이야기야. 주인공이 어떤 칠십대 할아버지인데, 정말 젠틀하고, 동네 아이들한테도 너무 상냥하게 대해주고. 뭐 특별하거나 훌륭한 일을 하는 건 아니야. 상처를 하고 혼자 살아가는 사람인데, 그냥 일상의 모든 행동을 진심을 다해서 하는데...
-너 갑자기 왜 우니.
-그 소설 문장들이 생각나서 그래... 진짜 잘 썼더라고.
-얼마나 잘 썼으면 선생이 우냐. 걔 A 받았겠네.
-그냥, 선한 인물을 현실에서 보기가 너무 힘들잖아. 소설 속에서만 가끔 볼 수 있잖아. 그게 너무 좋으면서 마음이 힘든 거야. (327)
역사
베이고 잘리고 짓밟히던 기억이 우리의 근원이었으므로, 우리는 늘 겁내고 위축되고 옹송그렸다. 약했다. 어느 한계 이상으로 삶의 반경을 넓힐 수 없었다. 그래, 나는 그게 불만이었다. 그 불만이 나의 죄였다. (349)
이것이 나의 끝일지도, 나는 또다른 우리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다만 살아 있다는 것, 그건 그렇게 하찮은 일이 아니었다.
당신들은 우리를 끝낼 수 없다. (352)
진짜 윤이형 작가님은 내 마음 속 최고의 작가님.
사랑해요. 정말.
하루빨리 다시 작가님이 글을 써주시면 좋겠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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