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SMALL

 

입시생으로 혹은 취업 준비생으로서 이제 학생들은, 삶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노력보다는 삶을 그저 살아내기 위한 노력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러면서 그 과정에 들어가는 노력과 시간 자체가 삶이라는 점을 망각하게 된다. 즉 삶을 현재와 동떨어져 전개되는 무엇으로 보도록 길들여진다. 그러나 그들이 탄 급행열차의 종착지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11)

하얗게 벼린 무서운 말.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을 때 충만한 것은 거품 같은 공허 뿐이다. 생각할 수 있는 근력이 없기에,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생각을 대신해줄 강력한 타자를 갈구한다. 그리하여 '진리'를 설파하는 사이비 지식인이나 종교 지도자나 독재자가 번성하게 된다. 장기적인 것, 공적인 것, 엄정한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말초적인 욕망의 충족과 단기적인 이익의 추구와 근거 없는 인정 욕구가 남발하게 된다. (13)

 

공부하는 이가 할 일은, 이 모순된 현실을 모순이 없는 것처럼 단순화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모순을 직시하면서 모순 없는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다. (42)

 

변화란 그냥 생기지 않고 좀 힘들다 싶을 정도로 매진할 때 비로소 생깁니다. 운동할 때를 기억해보세요. 너무 가벼운 무게의 덤벨을 들면 아무런 근육도 생기지 않습니다. 평소보다 좀 더 무거운 무게를 반복해서 들 때 비로소 근육이 생깁니다. 생각의 근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평생 숨을 쉬며 살아왔지요. 그래서 호흡의 달인이 되었나요? 대충 숨 쉬며 산다고 해서 호흡의 달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하는 중에 한없이 편하다는 느낌이 들면, 뭔가 잘못하고 있을 공산이 큽니다. (74)

 

예술가 패티 스미스가 한 말의 변주였던 것 같다.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그저 살기만 할 수가 없어서." (81)

 

지식 탐구를 통해 자신의 어떤 부분이 달라지는가? 지식이 깊어지면, 좀 더 섬세한 인식을 하게 된다. (중략)
대상을 섬세하게 판별하게 되는 일이 꼭 축복만은 아니다. 그에 수반하는 저주도 만만치 않다. 안목이 밝고 섬세해져 대상을 보다 선명하게 보게 되면, 그간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도 감각할 수 있게 되지만, 그간 몰랐던 더러움도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중략)
자신의 독특한 경험에 맞는 섬세한 언어로 자신의 경험을 포착하지 않는 한, 그 경험은 사라지고, 그만큼 자신의 삶도 망실된다. 
섬세함은 사회적 삶에서도 중요하다. 섬세한 언어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타인에게 이해시키고 또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훈련을 할 때, 비로소 공동체를 이루고 살 수 있다. 거칠게 일반화해도 좋을 만큼 인간의 삶이 단순하지는 않다. 거친 안목과 언어로 상대를 대하다 보면, 상대를 부수거나 난도질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런 식의 거친 공부라면, 편견을 강화해줄 뿐, 편견을 고정해주지는 않는다. 섬세한 언어야말로 자신의 정신을 진전시킬 정교한 쇄빙선이다.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싶다면, 다른 세계를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하고, 그 만남에는 섬세한 언어가 필수적이다. 언어라는 쇄빙선을 잘 운용할 수 있다면, 물리적인 의미의 세계는 불변하더라도 자신이 체험하는 우주는 확장할 수 있다. 그 과정 전체에 대해 메타적인 이해마저 더한다면, 그 우주는 입체적으로 변할 것이다. (85)

 

이처럼 무용해 보이는 공부가 가진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아마도 그런 공부가 죽기보다 하기 싫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그토록 하기 싫어한다는 것도 나름 인정해줄 만한 결기다. 공부가 하기 싫은 나머지, 공부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일을 그는 해낼 수 있게 된다. 공부가 싫은 나머지, 숨 막히는 조직 생활도 해낼 수 있다. 심지어 매일 출근도 해낼 수 있다. (88)

ㅋㅋㅋㅋ진짜 글 재밌게 쓰신다. 위트가 넘치다 못해 흐른다.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막스 베버가 한 말을 들려주고 싶다. "토론하면서 출생증명서의 생년월일을 들먹이며 이기려 드는 상대를 나는 참아본 적이 없다. 상대가 스무 살이고 나는 오십이 넘었다는 사실 하나로 내가 더 성취하고 더 배웠다고 할 수 없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다. 관건은 삶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단련된 실력, 삶의 현실을 견딜 수 있는 단련된 실력, 내면으로 감당해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이다." 
어렸을 때는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 그 시절만큼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어떤 쾌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먹고 자고 싸고 움직이고 쉬는 일이 시원하기를 바란다. 그것도 어느 정도는 배워서 되는 일이다. 그리고 감정이 머리와 가슴속을 잘 지나가게 하는 습관을 들이고 싶다. 이 정도다, 어린 시절에 기대하는 공부는. 이것만 잘되면, 나중에 쓸데없는 불안에 시달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청소년기에는 타고난 육체적 역량을 최대한 펼쳐보는 체험을 하고 싶다. 이것도 어느 정도는 배워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꼭 해봤어야 하는데 해보지 못해서 안타깝다. 잘 먹고 들소처럼 뛰었어야 하는데, 너무 오래 누워 있었다. 외국에 살 때 부러웠던 것은, 교육자들이 청소년의 체육교육에 지극한 관심과 공을 들인다는 사실이었다. 
외국어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외국어는 단지 여행 도구나 취직 기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국어로만 이루어진 세계와는 현격히 다른 의미 세계에 접속하는 열쇠다. 외국어를 배워보아야, 자기가 구사하는 언어만큼 생각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물론 외국어를 못해서 좋은 점도 있다. 못하는 외국어로 욕을 먹으면, 큰 욕에도 별로 상처받지 않는다. 
단순히 외국어뿐 아니라 한문이나 라틴어 같은 고전어도 배우고 싶다. 한문을 모른다고 한국어 생활에 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언어생활이 깊어질 수 있는 확실한 기회 하나를 놓치게 된다. 한문을 모르면 짐승들끼리 인지상정이라며 서로를 위로하게 된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운전, 요리, 각종 수리의 달인이 되고 싶다. 생활의 편의도 편의지만, 연애하는 데 아주 쓸모 있을 것 같다. 운이 좋아 대학생이 되고 나면, 의무적인 인성 교육 따위는 받고 싶지 않다. 참고 받는 인성 교육이라면, 인성은 나아지지 않고 인성 교육이라는 미션을 하나 클리어했다는 느낌만 남을 것 같다. 남을 착취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이고 싶다. 왕자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흑화되고 싶지 않다. 
기초체력을 안 쌓으면 나중에 감기에 자주 시달리듯, 지적 기초를 안 쌓으면 지적 감기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운 좋게 대학에 들어갔다면,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를 고루 잘 배우고 싶다. '양방(양적 방법론)'과 '질방(질적 방법론)'은 좀 나중에 배워도 된다. 일단 '썰방(말하고 쓰는 법)'을 잘 배워야 한다는 학교 전설이 있다. 설득할 줄 알고 설득달할 줄 알기를 바란다. 자신이 틀렸다는 게 판명되었다고 갑자기 미친 척해서 모면하려 들지 말기를 바란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아주 아주 최고급의 교양 강의를 들어보고 싶다. 들으면서 샘물 같은 기쁨을 느껴보고 싶다.
직장 생활 부적응자로 판명되거나, 책 읽기를 비정상적으로 좋아하거나, 수중에 돈이 있으면, 자칫 대학원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 대학원의 교육목표는 대학의 교육목표와 다른다. 아무도 떠먹여주지 않는다. 정답이 있는 주어진 문제만 풀어온 사람은 이 단계에서 좌절할 것이다. 자기 스스로 연구 질문을 던지고, 리서치 계획을 세우고, 집행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 부분을 모르겠어욤... 기분이 찜찜해욤... 토끼의 간을 주세욤." 이렇게 지적 옹알이를 할 수 있는 때는 지났다. 순간의 통찰이니 뭐니 하는 '지랄병' 하지 말고, 연구자들이 누적해온 지식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연구자의 길을 가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 객관성을 위해 도덕적 결단을 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그러한 도덕적 결단 없이는 탐구와 인식의 객관성이 확보될 리 없다. 자칫 자기가 보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기고, 자기가 못하면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기 쉽다. 인식론적 객관성을 존중하는 자세가 몸에 익으면, 누가 봐도 못생긴 아이를 두고 예쁘다고 강변하는 부모에게 엄연한 사실을 말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머릿속 모든 것을 입 밖에 내야 할 필요는 없다. 
졸업 전에 한 번쯤은 엄한 선생을 만나볼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과제를 많이 내주고 날카로운 비평을 해주었기에 결코 흠뻑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그로 인해 배운 것이 많아 용서하게 되는 엄한 선생을 만나는 것도 행운이다. 엄한 선생 없이는 애매한 재야 고수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재야 고수가 프로 선수에게 '처발리는' 영상이 널려 있다. 학문의 길은 재야 고수의 길보다 잔인하다. 자신은 결국 공부에 적합한 지력과 소명 의식이 없는 것으로 판명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장기 프로젝트는 없다. 
그러다 보면 중년이 된다. 이때 조심해야 한다. 세상에는 약을 팔러 다니는 사람이 많다. 특히 예언가들을 조심해야 한다. 검증하려야 검증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남발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믿는다고 그 진릿값을 보장할 수는 없다. 프랑스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헛소리를 믿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여전히 헛소리라고. 그동안의 무식을 일거에 날려버릴 벼락같은 통찰, 일종의 인생 역전 만루 홈런을 치게 해주겠다는 약장수들을 조심해야 한다. 공부는 산삼을 찾는 과정이 아니다. 기립성 저혈압 환자를 갑자기 포복형 고혈압 환자로 만들 수는 없다.
중년이 되면, 차라리 결핍을 받아들이는 게 낫다. 결핍이 오히려 가능성을 만들기도 하는 법이다. 청장년 시절의 어떤 결핍이 오히려 자원이 되어 있기를. 그래서 결핍으로 고통받기는 했지만, 결핍이라는 것을 아예 모르고 사는 인생이고 싶지는 않았다고 나직하게 중얼거릴 수 있기를 바란다.
노년이 되면 체력이 현격히 저하된다. 그때 가서 새삼 구해야 할 나라 같은 게 있으면 너무 피곤할 것 같다. 꾸준히 공부를 해왔다면, 공부가 이미 습관이 되어 있을 것이다. 공부를 하기 위해 매번 결단을 내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단에 필요한 에너지를 절약하여,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배우는 거다. 수중에 돈이 있으면 기꺼이 지불하면서. (95)

 

헛소리를 일삼는 상대에게 자비심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아, 저 사람이 체력이 달려서 저러는구나, 라고 생각하면 된다. 체력이 달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집중력이 떨어진다. 사고력이 저하된다.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헛소리를 하게 된다. 발표하다 말고, 느닷없이 "어미야, 팔다리가 쑤신다!"라고 소리 지르게 된다. 다른 직종에서도 그렇겠지만 학자에게 헛소리는 치명적이다. 헛소리를 하지 않으려면 체력 관리를 해야 한다. 체력이 필요하기로는, 듣는 이도 마찬가지다. 체력이 달리면, 헛소리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져서 상대에게 상냥하기 어렵다. (97)

 

그다음에는 운동을 해야 한다. 공부의 결과는 오래 걸려서 나타나는 데 비해, 운동의 결과는 상대적으로 빨리 나타난다. 늘어나는 근육을 보면서, 지식도 그처럼 늘어나기를 기대해보는 거다. 운동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푸는 데도 유용하다. 학인이라면, 음주가 아닌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운동을 격렬히 하다 보면 잡념이 사라지니, 머리를 잠시나마 쉬게 할 수 있다. 그뿐이랴, 운동은 사고능력과 관련된 백질 부위의 수축을 막아 두뇌를 건강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103)

 

유학을 가면 반가운 고독이 기다린다. 이제 고국에서보다 훨씬 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중략) 그렇다면,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능력이야말로 성공적인 유학 생활의 관건이다. 자신이 구태여 타향까지 와서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종종 상기하고,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열정을 유지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통해 건강을 잃지 않고,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기객관화 능력을 키우고, 타인에게 크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누가 뭐라고 하든, 누가 시키든 말든, 제시간에 일어나 상하지 않은 음식을 찾아 먹고, 자기 공간의 청결을 유지하고, 산만한 정신을 수습하여 공부에 임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습관이 되어 하루하루가 자연스럽게 굴러가도록 해야 한다. 유학은 혼자 고독하게 임하는 장기 레이스이므로. (109)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노래했다. "덧없는 삶을 사는 우리는 왜 애써/많은 것을 추구할까? 어찌 낯선 태양이/끓는 곳을 찾아갈까? 고향을 등진다고/자신마저 등질 수 있을까?" (112)

진짜 무서운 말2. 
결국 삶에서의 상수는 늘 나일 수밖에 없다. 

 

나쓰메 소세키의 <쿠사마쿠라>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산길을 오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치를 따지면 모가 나고, 정에 치우치면 휩쓸리고, 고집을 피우면 옹색해진다. 이래저래, 사람의 세상은 살기 어렵다." (118)

진짜 어렵지. 너무 정확한 말이어서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일정 궤도에 오르고 나면 공부하는 순간순간이 쾌락이니, 적극적이 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126)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 독서습관이 생기지 않는다면, 독서 모임을 만들어서 정기적으로 책을 읽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공부를 두고 내기를 하는 것은 어떤가? 책을 안 읽어오면 벌금을 내게 하는 것을 어떤가. 그 벌금을 모아서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선생님에게 선물을 사서 드리기로 하면 어떤가. 선물을 하기 싫은 마음에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될 것이다. (127)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미쳤어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무 빵터졌다. 

 

여유가 필요하다는 말이 곧 자신을 편한 상태에 두라는 뜻은 아니다. 어렵게 손에 쥔 여유를 가지고 과감하게 험지로 떠나야 한다. 너무 안온한 환경에 자신을 방치해두면, 새로운 생각을 할 역량 자체가 퇴화해버릴 것이다. 뇌과학자들에 따르면, 유충 시절에 물속을 떠다니는 멍게는 뇌가 있지만, 성체가 되어 적당한 장소에 고착된 멍게는 자신의 뇌를 먹어버린다고 한다. 이제 안정되었으니, 떠돌아다니는 시절에나 필요했던 기관을 폐기해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멍게가 아니므로 흥미로운 험지를 기꺼이 찾아다녀야 한다. 과제가 많기는 해도 영감이 넘치는 강의, 낯설지만 자극이 넘치는 장소, 까다롭지만 창의적인 인물을 찾아 그 자장 안에 있어야 한다. 물론 그곳이 험지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익하고 재미있는 강의는 대개 많은 과제가 따르고, 흥미롭고 탄성을 자아내는 환경은 위험하기 마련이며, 창의적인 사람은 예민하거나 괴짜인 경우가 수두룩하다. (137)

나는 멍게가 아니다 !!!!!!

 

책을 왜 읽는가? 어떤 이는 사회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책을 읽는다. 프랑스의 비평가 에밀 파게는 말했다. "독서의 적은 인생 그 자체다. 삶은 질투와 경쟁으로 뒤흔들리고, 우리를 독서를 통한 자기 성찰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리하여 질투와 경쟁으로 뒤범벅이 된 사회, 그 모래 지옥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책은 다른 매체보다 훨씬 더 독자에게 집중력과 몰입을 요구한다. 숨죽여 책에 집중해 있노라면, 세상이 고요해지고, 독서가는 참평화를 얻는다. 미국의 작가 수전 손택은 말했다. "독서는 제게 유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 세상이 못 견디겠으면 책을 들고 쪼그려 눕죠. 그건 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에요." (140)

 

프로포절이 계획서라고 해서, 계획을 통해 결국 완성한 결과물보다 더 느슨하거나 미숙한 글이어서는 안 된다. 계획서는 계획서 나름대로 갖추어야 할 완결성이 있다. 계획이 미숙할지언정, 계획서가 미숙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누가 프로포절을 읽고서, "이건 대충 쓴 계획서에 불과하잖아!"라고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누가 프로포절을 일러 "이건 계획서에 불과하잖아!" 비판한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프로포절은 계획서에 불과하고, 그는 미친 사람에 불과하니까. (190)

 

공격적인 논평과 예리한 논평은 다르다. 예리한 비판은 제기해야할 순간에 불필요한 공격성을 드러내면, 그것은 미성숙의 표지일 뿐이다. 비분강개할 장소는 따로 있다. 맛없는 디저트를 파는 카페랄지, 마스킹을 하지 않는 극장이랄지. 학술적 토론의 장에서 감정의 표출은 그다지 쓸모가 없다. 자기 기분이 상했다는 것과 상대 주장이 틀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사안이다. (209)

 

끝으로, 자신의 주장이나 비판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고 해서, 크게 상심할 필요는 없다. 활자화된 주장은 똑똑함이나 멍청함을 대대로 홍보하는 최고의 수단이니, 언젠가는 자신의 똑똑함이나 멍청함을 제대로 이해해줄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김선재의 시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읽는다. 
"단수와 만난 단수는 복수가 된다/단수와 헤어진 단수는 여전히 단수다/그러니 아무것도 잃은 것은 없다/구름과 어제가 지나갔을 뿐." (214)

 

누군가 한 사람이 너무 오래 일방적으로 말해서 토론이 망하는 경우도 있다. 말하는 것 자체에 중독된 나머지, 영원토록 말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을 하지 않는 때는, 말하기 위한 에너지를 보충할 때뿐, 그 외의 시간에는 대체로 말을 하고 있다. (225)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무 웃겨 

 

초유의 온라인 강의는 잘 적응했는지.
어렵다. 지금은 위기상황의 미봉책일 뿐이니까. 제대로 동영상 강의를 하려면 상당히 많은 노력과 자원을 들여서 시나리오도 짜고, 로케이션도 가고, 그런 투자를 통해 수업을 구성해야 한다. 동영상 강의의 효과에 대해서도 유보적인 입장이다. 사람이 강의 콘텐트 전달을 통해서만 배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콘텐트 전달은 책으로 하면 된다. 강의는 서로 얘기를 나누고, 헛소리도 하고, 의도하지 않은 엉뚱한 얘기로 번지는 과정에서 더 배우는 면이 있지 않나. 남녀 간의 만남도 한번 사귀어보자고 정면으로 스펙 교환할 때 사랑이 싹트는 게 아니라 의외의 순간에 사랑의 감정이 생기듯, 배움의 순간도 원래 준비해온 콘텐트를 단순 전달하는 데서 생기지 않을 경우가 훨씬 많다고 보고, 그런 것들을 허용하는 수업 구성을 해왔다. 지금 환경에서 가장 큰 도전은 그런 게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몇 달 동안 학교에 안 가도 되는 아이들을 보며 '학교란 무엇인가' 싶었다.
학교라는 환경 자체가 중요하다. 캠퍼스에 들어가는 자체가 바깥세상과 다른 영역에 진입하는 것이다. 공부의 과정 중 지식 콘텐트 전달에서 배우는 건 굉장히 일부분이다. 그 여백에서 전해지는 게 교육의 핵심일 수 있다. (253)

'그 여백에서 전해지는 게 교육의 핵심'이라니. 진짜 멋진 말이다.

 

공부에 매진해본 사람만이 제대로 쉴 수 있습니다. 당겨진 활시위만이 이완될 수 있듯이, 공부라는 긴장을 해본 사람만이 휴식이라는 이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것은 부끄럽지 않지만, 공부를 안 해서 제대로 못 쉬는 것은 부끄럽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할수록 쉬는 일은 쉬워집니다. 평소에 걷기만 하는 사람은 걷는 일이 휴식이 될 수 없겠죠. 늘 누워 있는 사람은 걷는 일조차 고역이겠죠. 그러나 마라톤을 하는 사람에게 걷는 일 정도는 휴식입니다. 평소에 책을 별로 안 읽는 사람은 책 읽는 일이 휴식이 될 수 없겠죠. 평소에 아무것도 읽지 않는 이에게는 읽는 것 자체가 고역이겠죠. 그러나 평소에 어려운 책을 읽는 이에게 어지간한 독서는 다 휴식이 됩니다. (중략)
휴식의 초심자들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 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사람의 의식은 어딘가 몰입할 대상을 찾고, 그러지 못할 때는 불안해지거나, 권태를 느끼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기 보다는 산책을 권합니다. 음악이나 팟캐스트를 듣지 않고 그냥 걷기만 하는 것이 효과적인 휴식 방법입니다. (266)

 

 

이제 다음달(11월)이면 김영민 교수님을 드디어 뵌다!!!!!! 꺅 신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너무 궁금하고 뵙고 싶은 분.

반응형
LIST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