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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 인생의 슬픔은 일상의 작은 기쁨으로 인해 회복된다는 사실이다. 고(故) 신영복 선생은 말했다.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더라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큰 기쁨이 인내되고 극복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일한 크기의 커다란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8)

정말 다행인 일.
보면서 저절로 끄덕였고, 501팸에게도 낭독해주었다. ㅎ_ㅎ

 

다만 이 책이 독자들에게 자기만의 삶의 법칙을 찾는 계기가 되어 준다면 좋겠다. 그것이아먈로 평생을 벼려 온 자기만의 독특한 삶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10)

평생을 벼려 온 나만의 무기.

 

나이가 들수록 특히 열등감을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나이가 들면 나빠지는 것이 많다. 우선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 생활의 활력도 줄어들다 보니 우울감도 쉽게 찾아온다.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위축되고 사회적인 영향력도 줄어든다. (22)

 

"젊은이들 앞에서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이 있다. 어찌 보면 야속하다. 나이 든 게 큰 잘못도 아닌데 왜 자꾸 젊은이들 눈치를 봐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했던 짓을 돌이켜보면 그들의 심정도 헤아려진다. 다만 아쉬움은 남는다. '좀 더 앉아 있어도 되는데... 좀 끼워주면 안되나.' 그래도 여기서 멈춰야 한다. 이제 모임의 주역은 후배들이다. 나이 들어서까지 주연 자리를 꿰차려는 것은 노욕(老慾)에 불과하다. 노인의 미덕은 단연 절제에 있다. 어쩌면 후배들이 내가 하지 못할 절제를 앞서 도와주는 것이니 얼마나 고마운가.
절제는 연령을 떠나 누구에게나 고귀한 능력이지만, 특히 나이 들수록 배워야 하는 삶의 기술이다. 절제는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아는 능력이다. 그러려면 자각이 있어야 한다. 내가 누구이고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멈춰야 하는 때를 알 수 있다. (40)

 

나는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오랫동안 환자들을 진료했다. 그런데 환자들은 대개 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아마 환자들이 오랫동안 고통을 감수하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외모에 영향을 끼친 게 병력만은 아닌 듯했다. 환자들은 나를 만나면 자기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 아느냐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몸도 여기저기 아프고, 마음도 힘들고, 주위 사람들과 세상도 제 뜻대로 안 된다며 불평을 해댔다. 환자들의 아픈 마음을 잘 듣고 객관적으로 구성하여 되돌려주는 것이 정신과 의사의 역할이기에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자연인으로서 나는 그때마다 한가지를 결심했다. "몸이 아프다고,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주저앉아 푸념하지 말자." (49)

ㅇㄱㄹㅇ.
나도 매번 비슷한 상황에 마주할 때마다 결심하곤 한다.
'멋진 어른'이 되어야지 하고.

 

나이 든 자의 품격이란 무엇일까. 노화를 수용하되, 지금 현재 누릴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즐기는 적극적인 태도가 아닐까. "너희들은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내가 살아 봐서 다 아는데..." 하는 식으로 자기 말이 전부 옳다는 고집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게다. 젊어도 봤고 늙어도 봤으니 나이 든 자의 수용력과 표현력은 한층 더 풍부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아프다고 징징대거나 힘들다고 푸념하는 식이 아니라 좀 더 세련되고 현명한 방식으로 나이 듦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품격 있는 태도일 것이다. (50)

!!!!!!!!!!!!!!!!!!!!!!!!!!!!!!!!!!!!!!!!!!!!!!!!!!!
내가 이걸 읽고, 또 지금 이렇게 타자로도 치면서 떠오른 사람은 '라샘'.
라샘 앞에서는 항상 나는 종알종알 댄다. 머리에는 이야기 해주고 싶은 일들이 쉴 새 없이 떠오른다. 너무 신이 나는 나는 이야기하다가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반면 항상 앞에서 말을 고르고 골라야 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가진 폭이 너무 좁아 혹시 신경을 거슬리게 할까봐 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는 사람.
이 극명한 대조는 아마 위에서 말한 바대로 '젊어도 봤고 늙어도 봤으니 나이 든 자의 수용력과 표현력의 풍부함'일테다.

아~~ 라샘 보고싶다!!!

라고 쓰자마자 스승의 날 기념해서 라쌤께 홍삼보냄 키키
이제는 쌤 은퇴하셨으니까 내 선물 기쁘게 받아주셔서 좋다~~~
쌤 건강하세요 왜냐면 나랑 아직 50년은 더 놀아야 하니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가족 모두가 쉬는 일요일에 녹음기를 옷 속에 숨기고 하루 동안 집안에서 오가는 대화를 녹음해서 들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아이들의 이야기는커녕 내 말소리가 가장 많이 들렸고, 그것도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환자를 대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한답시고 가족회의를 열었을 땐 "음, 좀 더 연구해 보자"는 말로 아이들의 의견을 무시했다. 명백한 꼼수다. 이미 답을 정해 놓고 형식적으로 의견을 물으니 꼼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늘 이런 방법이 통했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매우 민주적인 아버지라며 엄청난 착각에 빠져 살았다. (53)

뜨끔.
학교에서와는 딴판인 내 날 것의 모습.

 

지금도 내가 정말 후회하는 것은 아버지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직접 듣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 인간으로서 아버지가 어떤 삶을 꿈꾸었고, 어떤 좌절을 겪었으며, 그 과정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아버지를 정해진 틀에 갇혀 사는 소시민으로 단정 짓고, 더 이상 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젊은 시절의 내가 어리석고 안타깝게 느껴질 뿐이다.
우리는 부모의 영향을 엄청나게 받으면서도 부모가 왜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는 정작 알지 못한다. 빙산의 일각처럼 겉으로 드러난 부모의 모습만 바라볼 뿐, 숨겨진 빙하는 탐험하지도 못한 채 이별하고 만다. 그러나 부모의 삶을 알지 못하면 내 삶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즉 내 삶을 잘살고 싶다면 그 실마리를 부모의 삶으로부터 찾아야 한다. 한 인간으로서 부모의 숨은 사정을 이해해야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내 모습도 긍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부모의 인생에는 생각보다 많은 힌트가 숨어 있다. 그런데 그 힌트를 발견하는 행운은 부모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눈밝은 자식들에게만 허락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니 부모를 궁금해하자. 부모에 대한 편견을 한쪽에 내려놓고 그들의 인생 이야기에 조금만 귀를 기울여 보자. 이것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야 아버지에 대해 모르는 게 참 많았다는 걸 깨달은 어리석은 아들이 당신에게 주고 싶은 진심 어린 충고다. (58)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아이에게 좋다는 것은 전부 해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다. 그러나 아이가 그것을 온전히 받는다는 보장이 없다. 아이는 아이대로 필요한 것을 흡수하며 자기 세계를 구축해 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를 위해 무언가를 해 준다는 게 과연 옳은가.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부모가 자기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면 자식은 부모의 인생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양분을 취한다. 즉 좋은 부모가 되려고 너무 애쓰지 않아도, 그저 양육자로서 아이에게 해서는 안 될 일만 피해도, 그리고 남은 에너지로 자기 인생을 사는 데 열중해도, 부모로서 역할을 괜찮게 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 (63)

 

아이를 잘 기르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아이와 좋은 관계를 맺으면 된다. 아이와 관계를 맺는 방법은 여타 인간 관계와 다르지 않다. 그저 나라는 사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 좋은 부모라는 상에 억눌리기보다 그저 온전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할 것. 그러면 아이들은 자기 부모의 명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자기 삶을 알아서 꽃 피운다. 그래서 좋은 부모와 나쁜 부모가 따로 없다. 그저 부모만 있을 뿐이다. (65)

교사도 똑같지 않을까.
그리고 어느 관계에나 해당되는 게 아닐까. 온전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할 것.

 

인생에는 즐겁고 기쁜 날, 슬프고 서러운 날보다 비슷비슷하게 흘러가는 날이 훨씬 많다. 그런데 반복되는 하루를 지겨워하면 재미없는 인생을 살지만, 하루하루 작더라도 즐길 거리를 많이 찾아내고 만들어 가면 재미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 나는 일상에서 재밋거리를 다양하게, 많이 만들려고 노력해 왔다. (74)

 

나는 "인생의 황금기는 바로 지금"이라는 말을 자주 해 왔다. 아기의 한 살과 노인의 한 살이 얼마나 다를까. 20대의 하루와 80대의 하루가 얼마나 다르겠는가. 인간은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다시 오지 않을 유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이가 몇이든 사는 동안에는 진취적인 사고를 지속해야 하는 이유다.
남은 인생, 쓸모없는 시간으로 여기면 인생이 정말로 쓸모없어진다. 반대로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심정으로 하루를 보내고자 하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나를 재미있게 만드는 일이 떠오른다. 75세에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1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1,600여 점의 그림을 남긴 미국의 화가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인생은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다." (85)

 

당시에는 막다른 골목인 줄만 알았는데, 거기에 샛길이 있었다. 사실 죽음 외에 막다른 골목이 어디 있겠는가. 인생은 끝까지 살아 봐야만 알 수 있다. (93)

 

내 인생은 그다지 계획대로 풀리지 않았다. 무엇을 제대로 해 볼라치면, 의지를 꺾는 장애물이 나타났다. 한때는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나 하는 억울함도 느꼈다. 하지만 주저앉아 전부 포기할 게 아니라면 몸부림이라도 쳐야 했다. 그런데 그런 몸부림이 예상치도 않게 다른 길을 열어 줬다. 내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전혀 새로운 차원을 열어 주었다.
인생을 안다고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끝에 다다른 것 같아도 절대로 끝이 아니다. 어떻게든 해 보겠다는 심정으로 버티면 눈에 보이지 않던 가능성이 열린다. 그래서 인생은 끝까지 살아 봐야 안다. 내가 어느 만큼의 세상을 경험하다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97)

100세를 앞둔 교수도 '인생을 안다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젊었을 적에는 노인들과 대화할 때 늘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하나는 '왜 노인들은 영양가 없는 말을 많이 할까?'이고, 다른 하나는 '왜 목소리가 저렇게 클까?'였다. 대개 노인들의 말은 한 번 시작되면 구구절절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듣는 입장에서는 짧게 마무리될 이야기가 끝없이 길어지니 영양가가 없게 느껴졌다. 게다가 분위기에 적합한 내용이 아니면 듣기에도 민망했다. 한창때는 보석 같은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해 주시던 선배님들이 나이가 들어 중언부언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117)

 

그렇다면 결국 나이가 들면 말문을 닫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냐며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테다. 그렇다. 우선 말을 줄이고,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소통하려면 공통분모가 필요하다. 그리고 공통분모가 넓을수록 대화는 깊어진다. 나이 든 자들과 젊은이들 가운데 공통분모를 만들기에 유리한 사람이 누구일까? 과거와 현재를 모두 경험한 나이 든 자들이다. 젊은이들의 경험을 노인들이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젊은이들의 생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현시대를 젊은이들처럼 깊숙이 들어가 체험하지는 못하더라도, 무엇이 다른지는 알아야 한다. 잘 모르겠다면 다르다는 사실 정도는 인정해야 한다. (121)

 

나는 외할머니와 언제나 말이 잘 통했다. 외할머니는 성품도 인자하셨고, 남녀가 유별한 시대에 사셨음에도 열린 사고를 지니셨다. 그래서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세상사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외할머니의 진취적인 사고방식이 멋있어 보였기에, 나도 나이가 들면 외할머니처럼 늙고 싶다고 꿈꾸기도 했다. 그런데 돌이켜 곰곰 생각해보니, 내가 외할머니와 대화를 자주 나누었던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늘 온화하게 웃으시며 내가 하는 말에 맞장구쳐 주셨기에 자꾸만 이야기를 풀어놓았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 외할머니를 다시 떠올려 본다. 나는 외할머니처럼 나이 들어 가고 있는가. 젊은이와 대화할 때 한 번은 꼭 떠올려야 할 물음이다. (123)

우리 친할머니가 떠오르고, 라쌤이 떠오른다.
절로 '나도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분들.

 

그렇다고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거절을 너무 어려워해서 무리한 부탁까지 들어주게 되면 관계에 탈이 난다.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산뜻하게 거절하는 법을 배우고 연습해야 한다. 나는 그 방법의 하나로 "싫어요"를 "안 돼요, 왜냐하면"으로 고쳐 말하자고 늘 강조해 왔다. "안 돼요"에는 객관적인 근거가 따라오기 때문에 거절당했다는 느낌이 덜하고, 그 근거가 타당하면 앙금 없이 새로운 대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158)

 

나이 들어 돈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저축도 중요하지만, 돈에 대한 내공도 함께 쌓아야 한다. 돈은 언제나 수단일 뿐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돈이 우리의 지배를 받아야지, 우리가 돈의 지배를 받아선 안 된다. 돈을 움켜쥐고 말 잘 듣는 신하처럼 부려야 옳다.
그리고 돈 까짓것 없어도 괜찮다는 배짱도 함께 키우면 좋겠다.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매우 검소하셨다. 제철 나물로 반찬을 만들고 오래된 옷도 기워 입으셨다. 돈이 없어도 크게 구애받지 않으셨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절을 다니시며 마음공부를 실컷 하셨다.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잘 사셨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돈과 맺는 가장 건강한 관계가 아닐까 싶다. 돈이 우리의 자유를 증대시키도록 해야지, 자유를 꺾게 두어선 안 된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는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생활의 지혜로움에서부터 나온다. (169)

 

생각해 보면 사모님의 말씀은 정직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 말을 섭섭하게 여겼다. 내가 나를 용서한다는 뜻은 사모님의 정직한 표현을 멋대로 해석해서 미움과 앙심을 지녔던 그 옹졸함을 스스로 용서한다는 뜻이다. 그러고 났더니 촌스러운 사과가 비로소 마음에서 놓여났다. 진작 내려 놓았으면 훨씬 자유로웠을 텐데. (198)

나도 그런 일이 많을텐데. 
근래에는 서운해지려고 할 때 이 구절이 떠오른다. 그리고는 덜 서운한 방향으로 마음을 고쳐먹곤한다.

 

죽음과 생이별이 늘 지근거리였으니 살아 있음 자체가 기적이었다. 나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80년 인생을 누구나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나 살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214)

 

감정을 조절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다. 감정 조절은 일어난 감정을 억지로 누르거나 무시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런 태도가 오히려 감정의 폭발을 불러일으킨다. 화병이 대표적인 예다.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의 진짜 의미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감정을 증폭시키지 않고, 사건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의 근육을 키운다는 뜻이다. (268)

 

다만 나는 일상에 숨어 있는 행복을 최대치로 찾아 누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어차피 내일도 출근길 교통지옥에 시달릴 것이고, 과중한 업무량에 상사와 갈등할 것이며, 아이를 돌보느라 진을 빼고,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잠들 것이다. 삶의 방향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을 거라면 결국은 피할 수 없는 하루다. 그렇다면 기왕이면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해 보는 건 어떨까. 출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새로움을 발견할 수도 있고, 상사에게 커피 한 잔을 권하며 부드러운 아침을 맞이할 수도 있다. 아이와 함께 요리와 설거지를 할 수도 있다. 어차피 할 일이라면 최대한 즐겁게 해 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반복되는 일상을 즐겁게 버티는 비결이자 추억거리를 많이 만드는 방법이다.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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