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생애의 모든 날을 그러모아 ‘평생’이라 부른다면 빛나는 날은 그저 기껏해야 며칠, 길어야 몇 주밖에 안 될지도 모른다. 이전에 나는 가능한 한 찬란한 날만 골라 서 있고 싶었다. 특별한 날은 특별해서, 평범한 날은 평범해서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날은 작고 가볍고 공평하다.
17;
“어렵고 슬펐고 혼자였”던, 그 시절은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고 상처인 줄도 몰랐다. 어느 아이에게나 슬픔은 있는 거니까. 뭐라고 정의하기도 어려워 ‘슬픔이라고 부르지도 못하는 감정’을 아이들은 겪으며 자라나니까. 사라진 줄 알았던 그애가 다시 나타났을 때 당혹스러웠다. 책에 고개를 처박고 울면서, 그애가 빨리 사라져주길 바랐다. 아이는 바로 가지 않았다.
18;
클로드 퐁티는 스스로 사랑을 배우고(그렇다, 사랑은 배우는 것이다), 스스로 상처를 돌보았다. 그 과정에서 그가 겪었을 고통과 번민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상처는 사라지는 게 아니므로 아물 때까지 돌봐야 한다. 슬픔도 사라지는 게 아니다. 잠잠해지는 거다. 그러니 어린 시절의 내가 당시의 슬픔을 손에 쥐고 다시 돌아온다 해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잠잠해지도록, 슬픔을 달래야 한다.
21;
그 이상한 머플러? 지금 내 목을 감싸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그의 머플러를 두르고 길을 나서는 것을 좋아한다. 십수 년 전 그와 내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을 때,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때, 그의 목에 감겨 여기까지 따라온 물건이니까. 애틋하다.
26;
그들이 손을 잡고 떠나는 모습을 보는데 깊은 안도와 함께, 알 수 없는 불안이 밀려왔다. 뱃속에서 누군가 비질을 하듯,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뱃속에서 누군가 비질을 하듯,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멋진 표현을 만났다.
34;
“결국 옷은 내가 머무는 가장 작은 공간이잖아?”
옷을 ‘공간’으로 해석하는 친구의 발상에 진심으로 감탄했따. 나를 온전히 담고 있는 작은 공간, ‘나만이 머무는 작은 방’으로서 옷은 얼마나 특별한가? 옷 안에서 내 몸과 정신은 날마다 하루를 ‘같이’ 사는 것이다.
40;
과거는 개의 얼굴에 지도를 그린다. 슬픈 얼굴은 슬픈 과거를 암시한다. 개는 영원한 사랑에 목을 맨다. 그런게 없을지라도, 아니 없다는 게 밝혀진 뒤에도 ‘다른 영원’을 필요로 한다. 침울한 고양이보다 침울한 개가 많은 이유는, 개는 ‘깨진 영원’에 상처받는 종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목을 매는 개는 스스로를 위해 그러는 거다. 그러니 개 앞에서 충성심을 논하며 추켜세울 일이 아니다. 충성심, 그건 당신의 개가 드러내는 자기 사랑에 대한 믿음, 영원성, 나르시시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41;
고양이는 쉽게 마음을 접을 수 있지만, 개는 자꾸 열리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그것을 끝끝내 유지한다. 개의 마음은 단심이다. 사랑에 몸을 날리는 개들을 누가 말릴 수 있을까? 고양이는 타자를 주시하고, 개는 자아(와 자기 주인)을 중시한다. 개는 당신을 멀리 떨어뜨려놓고 생각할 여유도 능력도 없다.
46;
스무 살 때다. 그날은 유난히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젊었으므로 슬픔도 더 젊었다. 택시를 타자마자 맹렬히 울었따.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우는 나때문에 곤란했을 게 분명한 택시 기사가 건넨 말들, 안타까워하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왜 그렇게 울어요? 너무 슬퍼서요. 뭐가요? 모르겠어요. 무슨 일 있어요? 그냥 일이, (흑흑) 자꾸만 많이, (흑흑) 일어나요. 울지 마세요. 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나가요. ‘지나가요’라고 말하던 그의 나직한 말투가 기억난다. 고등학교를 갓 나온 어린애가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택시에 타더니, 꺼이꺼이 목놓아 우는 광경이라니. 이 난감한 광경의 장본인이 나다. 그는 내가 한참 울도록 내버려 두더니 갑자기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생략)
그런데 그가 별안간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돈은 됐으니 앞으로는 울지 말고 다녀요, 나를 다독이던 그의 말. 그 다정함에 감명받아 나는 또 울기 시작했다. 집으로 들어가는데도 자꾸 눈물이 나왔다. 눈물이 폭포처럼 흐르던 시절이다.
48;
어른 여자. 그게 누구인지, 어떤 여자가 어른 여자인지 나는 모른다. 어른이 더 많은 여자인지, 여자가 더 많은 어른인지도 모르겠다. XX염색체를 지닌 채 장성한다 해서, 모두 어른 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닌 것 같다. ‘알맞은’ 어른 여자는 흔치 않다. 한눈에 보아도 어른과 여자가 고루 섞여, 나무같이 편안히 서 있는 사람. (중략)
나는 그녀가 오래전, 소중한 것을 놓친 적이 있다고 상상한다. 소중한 것을 놓쳐, 미쳐버린 적 있다고. 그로 인해 아름다워졌으리라 상상한다. 그녀는 가끔 꺾인 목으로 시들어 있을 것이다. 시든 채 며칠을 보내다 어느 날 아침, 얼굴을 새로 해 입고 창문을 열 것이다. 찬 공기를 집안으로 들이고, 먼지를 털고, 부스스한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을 것이다. 무엇을 겪었는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입술과 눈 위로 고요함을 불러올 것이다. 손끝으로 무심히 창문을 두드릴 것이다. 토독, 토도독, 창문에서 소리가 나면 그 소리에 귀기울일 것이다. (중략)
어른 여자는 누군가에게 ‘엄마’ ‘언니’ ‘누나’ ‘여동생’ ‘아줌마’ ‘할머니’ ‘이봐요’ ‘여보’ ‘마누라’ ‘여편네’ ‘당신’ ‘여사님’이라고 불릴 수도 있지만 이중 무엇도 어른 여자의 정체성을 규정할 순 없을 것이다. 그녀의 정체는 그저 어른 여자이며, 언제나 자기 자신일 것이다.
어른 여자.
나의 장래희망.
53;
이렇게 모인 우리들, 왜 시를 쓰고 싶은 걸까?
‘왜’라는 물음에 작아지는 게 시 쓰는 일이다. 시의 무용함 탓이다. 시는 어떤 필요에 대한 부응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존재다. 그러니 ‘무얼 위해’ 시를 쓰겠다는 사람도 없다. 시는 쓰는 자도 읽는 자도 애를 써야 흐르는 음악이다. 음악으로 그득 차 있는 시집도 읽는 사람이 활을 잡고 글자를 연주하지 않으면, 이상한 기호로 이루어진 얇은 종이 뭉치에 지나지 않는다. 시의 언어는 다른 방식으로 보고 말하라거나 숨은 그림을 찾아보라고 말한다. 이때 숨은 그림은 ‘스스로 만들어’ 찾아야 하기에 번거롭고 어렵다. 그런데 빠져들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과 충만함을 준다. 쓰는 이도 읽는 이도 열렬해져야 하는 일. 시로 충만함을 느끼고 싶은 이들이 옹기종기 모인다.
55;
가르치는 입장(이란 게 말이 된다면)에서 가장 두근거리고, 두렵게 만드는 사람은 미쳐 있는 자다. 시키지 않았는데 몇 편씩 써오는 사람, 합평 때 나눈 이야기를 자기 방식으로 소화해 다시 써오는 사람, 고친 것을 또 고쳐 오는 사람, 쓰고 쓰고 또 쓰는 사람. 이건 정말 못 당한다. 좋아서 하는 일. 가끔이지만 이런 수강생을 보면 티내지 않으려 해도 심장이 뛴다. 태어나려나봐, 저 사람, 태어나려는 것 같아. 어쩌지, 태어나면 저 사람 빛날 텐데, 빛나다 어두워지기도 할 텐데, 괴로울 텐데, 행복에 겨울 텐데, 도망치고도 싶을 텐데, 어쩌려고 저러나... 걱정 반 기대 반.
정말 그렇다.
그런 사람을 볼 때면 심장이 뛴다.
‘태어나려나봐’ 어쩜 이렇게 알맞은 말을 하시지? 정말 그 탄생 앞에 있는 기쁨이 온 몸을 휘감는다. 그리고 또 내게 건강한 자극이 되기도 한다.
나도 태어나는 사람이고 싶다.
58;
삼월 중순에서 사월로 넘어가는 시기. 저는 이맘때 ‘봄의 부레’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봄을 봄으로 헤엄치게 하는 부레, 천지에 봄을 ‘둥실’ 띄우는 부레! 아름다운 것들은 대개 이때 돋아나고, 뻗치고 도톰해진다고 믿어요. 가령 어린 나뭇잎들. 아주 쪼끄마한(이 형용사의 앙증맞음을 보세요!) 어린잎이 제법 돋는 시기죠.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돌부리에라도 걸린 듯, 마음이 넘어지는 것을 봅니다. 넘어진 마음이 기대는 것은 역시 이파리들이지요. 그동안 어디에 있었니! 이 작고 귀여운 것들아! 주책과 호들갑을 떨며 감탄하는 것은 제 의지로 어쩔 수 없어요. 어여쁜걸요.
이번 봄에 유난히 내가 느꼈던 마음과 닮아있다.
호텔 앞, 진짜 지난 해에 자란 잎들 위로 새 잎이 순하고도 연한 색으로 자라난 걸 보니 너무너무 귀여웠다. 귀여워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처음으로 꽃이 아닌 어린잎으로 봄을 실감한 날이기도 하다.
59;
이맘때 창문은 ‘막’이 아닙니다. 닫는 도구가 아니라 여는 도구. 나를 세상 밖으로, 세상을 내 안으로 흐르게 하는 연결 고리가 되지요. 창을 통해 제가 보고 싶은 건 장엄한 산도 거대한 바다도 어여쁜 당신 얼굴도 아닌, 한 그루의 나무입니다.
여는 도구ㅠㅠ 맞아ㅠㅠㅠ 바람을 들이려고, 볕을 들이려고, 봄을 들이려고 창문을 연다.
73;
창이 크게 난 카페가 보여 들어갔다. 공책에 떠오르는 생각을 끼적이고,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문득 이 낯선 도시에 혼자 있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었다. 당신과 싸운 후 차곡차곡 빨래를 개듯 할일을 하고, 감정에 휘말려 몸에 행패부리지 않고(감정을 때로 몸을 얼마나 혹사시키는지), 짐을 싸 여행을 떠나온 게 마음에 들었다. 기차역 서점에서 산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반 넘게 읽었는데, 좋았다. 그조차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혼자 걷고, 현재를 부정하지 않는 스스로가 좋았다. 나를 좋아하는 데 사십 년이나 걸리다니! 그조차 마음에 들었다.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데 억지로 ‘둘이’ 예정된 여행을 떠났다면, 이런 긍정에는 다다르지 못했을지 모른다. 둘이 되지 못해 안달인 시간이 있는가 하면 혼자이지 못해 누추해지는 시간도 있다. 인간에겐 햇빛, 음식, 타인의 사랑만큼이나 ‘혼자인 시간’ 역시 필요한 법. 지금 당신도 멀리서, 나처럼 혼자일 거라 생각하니 그조차 마음에 들었다. 아무리 좋아도 오래 붙어 있다보면 종종 상대의 빛을 보지 못한다. 혼자일 때 빛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둘이 될 때, 내 빛남으로 당신을 돌볼 수 있도록. 그 반대가 되어선 곤란하다.
85;
나는 그토록 빛나던 G의 얼굴에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늘이 드리우고, 미간도 좁아질 수 있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우습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했다.
그런 날이 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얼굴의 전혀 다른 표정을 보게 되는 날. 잘못한 것이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잘못한 것만 같은 날. 공기가 쓸쓸하게 느껴지는 날. 내가 아는 얼굴들, 그리고 나를 아는 얼굴들을 떠올려보게 되는 날. 대관절 내가 아는 얼굴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109;
베를린에 온 지 열이틀째. 어쩌면 가장 사치스러운 여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지에서 목숨 걸고 구경하지 않을 자유를 추구한다는 면에서. 무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허둥대긴 싫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놓여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의’ 성공했다. (중략)
별다른 것을 하지 않고 좋은 곳을 찾아다니지도 않았는데, 베를린에서의 시간은 이상할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어쩌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얻기 위해(내 의지대로 시간을 쓰기 위해) 평생을 전전긍긍하며 사는 게 아닐까? 특별한 일이나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은 무엇을 얻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용기이며 선택이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건 두려움 때문이다. 잃을 것과 얻을 것 사이에서 시소를 타며, 이 시소에서 내려오기를 겁내기 때문이다.
홋카이도 여행이 떠오른다.
사치스럽다고 생각하는 한편, 가장 좋았던 여행.
그 여행을 계기로 나도 여행에 대한 시각이 조금은 바뀌었다.
그저 낭만적인 도시, 홋카이도. 삿포로, 오타루.
112;
‘하필’이라는 말 앞에서 나는 늘 골똘하다. 날씨는 가끔 순간을 생각하게 들여다보게 만드는 거울 역할을 한다. 사람의 생각을 정돈하거나 헤집어 엎지른다. 쨍하게 해가 좋은 날도, 눈이 내리는 날도, 폭풍우가 치는 날도 사람을 불러세우고 지금 여기, 나의 모습을 살피게 만든다.
118;
여름 저녁의 나무들은 비밀스럽다. 인적이 드문 곳에 서 있는 나무들은 더 그렇다. 이파리는 더이상 초록빛이 아니다. 집에 돌아와 혼자가 된 사람이 짓는 풀어진 낯빛, 홀가분한 어둑함에 가깝다.
122;
도피하기 위해 자주 책을 들었다. 어릴 때는 무시무시하게 큰 입을 벌린 그림자들이 나를 잡아먹지 못하도록 책 속에 코를 묻었고, 커서는 자잘한 고민과 생활고에서 잠시 놓여나려고 책을 들었다. 책은 잠시 그 세계로 몰입한 순간만큼은 현실에서 나를 떼어놓았다. 내가 현실에서 벗어나려 애쓴 게 아니라, 책이 애썼다. 책이 가진(혹은 이끌어내는) 능동성이 내 피동적 웅크림을 토닥였다. 숲을 베어 작은 종이 묶음으로 만든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서 다시 숲이 되었다.
130;
집으로 가는 길에 생각했다. 나는 적어도 책 속에서 책 밖을 향해 가르치려고 안달난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사실 내가 의사에게 바라는 것은? 아픈 곳을 알아주는 것, 그뿐일지 모른다. 아는 것 말고 알아주는 것.
131;
어떻게 된 거냐. 후배 A가 인간관계로 힘들어하기에 조언을 해주다 나온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네 마음 상태를 솔직하게 말해줄 때다, 논리나 이성에 호소할 때가 있고 감정에 호소할 때가 있는데 지금은 딱 까놓고 네 심정을 전달할 때, 라고 말하는데 A가 걱정하는 거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느끼는데?’라고 말하면 어떻게 해.” 나는 대답했다. <100분 토론>에 나간 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를 따지고 들 게 아니라면, 누군가 본인 감정에 호소하는 이야기를 할 때 절대로! ‘왜’냐고 물으면 안 된다고. 그건 배신이니까! 그런 놈은 입을 아주 꿰매버려야...
맞아. 감정에 호소하고 있는데 왜가 어딨어!!!! 내가 그렇다면 그런거지!!!!!!
137;
녹지 않는 마음이 있다.
풀리지 않는 자물쇠처럼, 맞지 않는 열쇠처럼 덜거덕거리는 관계가 있다. 어느 날은 풀린 척, 어느 날은 잠긴 척하다가 피로해지는 마음. 잘못한 사람은 자기 잘못을 잊은 채 오히려 이쪽을 원망할지도 모른다. ‘용서’라는 말을 매만지며 얼어붙어 있는 이쪽을, 시작도 못한 이쪽의 ‘용서’를 책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밤중에 ‘용서’라는 말을 쥐고,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집행하려 할지도 모른다. 잘못한 사람은 용서를 준비하고 상처받은 사람은 용서를 구하는, 불편한 시차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140;
나는 비 올 때 발이 젖는 것을 싫어한다. 적시는 비보다 건너다보는 비를 좋아한다. 비와 나 사이에 거리가 있어야 좋다. 거리는 평화와 시선을 가져다준다. 비와 나 사이. ‘사이’가 사라지면 시선도 사라진다.
거리는 평화와 시선을 가져다준다. 사이가 사라지면 시선도 사라진다.
내가 부족했던 부분들.
142;
나는 시에서 “갇히는 것 중 제일은 빗속이야”라고 쓴 적 있다. 그 마음은 지금도 오롯해서, 이따금 비 내리는 산장에 머무는 상상을 한다. 비에 발이 묶여 한 사흘을 오도 가도 못하는 일을 꿈꾼다.
산장에서, 콩나물죽을 끓여 그 뜨거운 것을 호호 불어 먹을 것이다. 감자를 몇 알 골라 쪄먹을 것이다. 파슬파슬한 감자에 손가락으로 소금을 집어먹으며 옛 생각에 빠질 것이다. “심심하냐? 심심하면 소금 먹어라.” 싱거운 농담을 던지던 내 젊은 아버지를 생각할 것이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보며 ‘큰일인데,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에도 없는 걱정을 하는 척할 것이다. 지루한 소설을 읽다 잠을 잘 것이다. 낮잠에서 깨어나면 밤인지 낮인지 구별이 어려운 ‘그저 빗속인 곳’에서 머물 것이다. 새벽녘에 잠깐 비 그치면, 빗방울들이 모여 잇는 창문에 손가락을 대볼 것이다. 미끄러지다 터져버리는 빗방울들의 죽음을 지켜보다, 시를 한 편 쓸 것이다. 완성하지 않고 쓰다 덮어둘 것이다.
153;
주머니가 가벼워져 마음이 누추해지려고 할 때마다, 연필을 들고 작성해보려는 목록이 있다.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것들의 목록!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는 세상이지만 물질로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실력’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작가의 글솜씨나 화가의 그림 실력, 수영선수의 수영 실력, 발끝으로 도약하는 발레리나의 춤동작, 피아니스트의 유려한 연주... 누군가 오랜 시간을 들여 연마한 기술, 자기 인생을 걸어 쌓은 전문성은 돈으로 가질 수 없다. 좋은 날씨, 마음의 평화, 우아한 태도 역시 돈으로 살 수 없다. 늙지 않는 생각, 다정한 마음,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동시에’ 나를 사랑하는 일, 가족의 신뢰, 친구들의 우정은 어디에서도 살 수 없다.
정말 소중한 건 물질적 가치로 쉬이 교환이 안 된다. 그런 건 마음과 시간을 들여 찬찬히 가꾸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어디에서도 팔지 않는다. 진짜 가난한 사람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만 가진 자일지도 모르겠다.
누추한 마음을 일으키는 사각 사각한 방법.
진짜 가난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진짜 부자는 되기가 어렵겠지만, 진짜 가난한 사람은 안 되어야지.
154;
아침이다. 다른 곳이다. 이 두가지 사실만으로 뇌가 반짝인다.
좋은 호텔에 묵을 때면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진다. 낯선 장소에서의 기분좋은 긴장, 시트의 감촉,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 내겐 특별한 계획도 없다. 다리 사이에 시트를 말고 누워 하품을 하고 눈을 끔뻑인다. 태평히 지나가는 아침 시간. 욕실로 가 오줌을 누고 양치를 한다. 세수는 하지 않고 눈곱만 뗀다. 아무 옷이나 꿰어 입고 식당으로 내려간다. 여행지에서 호텔 조식을 먹는 일, 먹고 올라 와 침대 위에서 좀더 뭉그적거리는 일을 나는 퍽 좋아한다.
아아ㅠㅠ 나도 너무 좋아하는 일.
그래서 매일 매일 숙소를 옮기는 여행보다는 한 숙소에서 오래 머무는 편을 더 선호한다.
154쪽의 글을 옮기다보니, 작년의 코타키나발루 여행이 떠오른다. 공주와 나는 정말 뭉그적 뭉그적한 여행을 했다. 심심하면 수영하고, 심심하면 책을 읽고, 심심하면 낮잠을 잤다.
아아아아아아 그립다 ! !!!
휴식이 필요한 일을 하자. (ㅋㅋㅋㅋ급작스런 전개)
165;
내게 카페는 집과 세상 사이에 돋아난 쉼표, 헝클어진 생각을 정돈하는 곳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글을 쓰는 곳, 책을 읽거나 빈둥거리는 곳이다. 하루 중 가장 느긋한 시간을 골라 ‘영혼을 부려놓으러’ 들르는 휴게소랄까. 현대인의 실내 공원, 일상의 작은 사치를 누리는 장소! 카페의 적당한 잡음이 좋다. 낯선 이들에게 둘러싸여 누리는 익명성, 오롯이 혼자이면서 전체의 일부가 되는 일도 즐겁다.
‘영혼을 부려놓으러 들르는 휴게소’라니. 크.... 진짜 자까님..... 과연 시인이십니다.....
168;
물론 책보다 재미있는 일은 세상에 많다. 침대에 누워 땅콩을 까먹으며 텔레비전 보기, 카페에서 친구들과 수다 떨기,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사람들의 동정 살피고 댓글 달기... 다 재미있지만 ‘혼자 구석에 앉아 책장에 코를 박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흥미롭고 짜릿하다. 책 읽는 자만이 누리는 특별한 산책이 있는 것이다. 독서는 한자리에서 멀리 다녀오는 능동적인 행위다.
ㅇㄱㄹㅇ
175;
독서, 음악감상, 영화 관람을 취미로 내세우기엔 좀 미흡하다. 콘텐츠를 ‘읽고 듣고 보는’ 행위는 현대인의 본성에 가까워졌으니까.
정말 그렇다.
어쩌면 지금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그 나이의 나보다 훨씬 ‘읽고 듣고 보는’ 행위와 친근하다.
176;
사랑하는 이의 등뒤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듣는 것도 취미다. 밥을 먹을 땐 음식이 내려가는 소리가, 말을 할 땐 뱃고동처럼 왕왕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따뜻하고 편편한, 나만의 산잔등이라 생각한다.
아.. 낭만적이야.
언젠가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난다 대박.) 나도 등뒤에 귀를 대고 가만히 있어보았던 것 같은데, 위에 적힌 것에 덧붙여 또 좋은 점을 꼽자면 사랑하는 이의 냄새를 가장 가까이서 맡을 수 있다는 것. 따뜻한 그만의 냄새가 내 볼을 타고 전해질때 나른한 행복감을 느꼈던 것 같다.
185;
며칠 전 경비실 앞을 지나다 경비 아저씨가 “네가 있어 행복해”라는 가사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박수치는 모습을 보았다. 경비실에 놓인 작은 텔레비전을 보며, 아저씨는 박수를 치고 혼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만사가 시뜻해 시무룩하게 걷던 나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아 당황했다. 아저씨가 무안해할까봐 못 본 척 얼른 지나갔다. 욕망도 소란도 없이, 자신의 처지에 감사하며 순하게 늙는 일이란 얼마나 귀한 일인가. 좁은 공간에 있으면 답답하고 우울하겠지, 추측했던 내 판단이 틀렸다.
나도 읽으며 눈물이 핑 돌았다.
텍스트에 담은 감정 외에 담지 못한 감정도 함께 따라 온 것 같았다.
197;
다음날.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화장대 위엔 삼십 년이 된 단추가 붙은 뜨개 지갑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삼십 년이 된 물건이야 얼마든지 있겠지만, 달랐다. 단추를 보고 있자니 낯모르는 여자아이의 팔랑이는 원피스 자락이 떠오르고, 그 원피스가 무색하게 훌쩍 자라 성년이 됐을 여성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녀가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겪었을 지난한 시절이 떠오르고, 그 시간에 깃든 내밀한 슬픔이 떠오르고, 그녀를 따라 부지런히 자랐을 어린 여동생이 떠오르고, 여동생이 나중에 커서 나처럼 미천한 시인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느라 언니의 원피스에서 단추를 떼어낼 시간이 떠오르고, 느릿느릿 뜨개질을 했을 손의 움직임이 떠오르고, 인영이 없던 나를 ‘비로소’ 만난 작은 단추의 운명이 떠오르는데! 도대체 이게 슬픈 일이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진짜 나도 너무너무 슬펐다.
이것이 왜 슬픈지 표현하기는 참 어려운데, 이게 정말 슬프다.
그래서 이 산문에 담긴 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먹먹해졌고 목은 눈물이 가득차 무거웠다.
':::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페스트 :: 알베르 카뮈 (0) | 2020.06.01 |
---|---|
어짜피 살 거라면,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드는 법 :: 이근후 (0) | 2020.05.15 |
2억 빚을 진 내게 우주님이 가르쳐준 운이 풀리는 말버릇 :: 고이케 히로시 (0) | 2020.05.01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0) | 2020.05.01 |
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0) | 2020.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