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SMALL
스카이넷과 터미네이터는 나타나지 않고, 당신도 어쩌면 일자리를 잃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 다른 업계 사람들까지 인공지능의 등장 앞에서 안전과 일자리를 지키려 필사적으로 노력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설사 터미네이터를 막고 일자리는 지키더라도 어떤 인간적 가치들은 그 과정에서 틀림없이 부서질 것이다. 사실 그런 인간적 가치를 무너뜨리는 데에는 그리 대단한 성능의 인공지능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파괴가 일어난 뒤에야 그 가치들의 정체를 뒤늦게 알아차릴 가능성이 높다. (26)
이 3단은 그보다는 다른 프로기사들이 온라인에서 두는 바둑을 보며 AI 추천수를 살피는 공부를 했다. 그러면서 일류 기사들이 두는 수와 인공지능이 추천하는 수가 다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전까지 박정환, 신진서, 이세돌 같은 기사들은 너무 강하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그들조차 AI 추천수는 잘 맞히지 못해요. 그렇다면 '내가 이걸 통해서 공부하면 가능성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게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는 요소가 됐던 것 같아요."
이 3단은 언론 인터뷰에서 "초일류들을 만나도 너희가 AI보다 더 세겠느냐는 생각으로 싸운다. 이젠 하나도 무섭지 않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86)
2025년에 대도시에서 스마트폰을 쓰는 것은 선택의 문제라할 수 없다. 스마트폰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결합해 '스마트폰-환경'이라 불러야 할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은 이제 비행기나 기차를 탈 때 길고 복잡한 수속을 거쳐야 한다. QR코드로 주문을 받는 식당에서는 종업원을 불러 부루퉁한 표정에 대고 사정을 이야기해야 한다. 친구들과 식사를 한 뒤 밥값을 갹출할 때는 그 자리에서 즉시 하지 못하고 집에 가서 하겠다고 말해야 한다. 친구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당신을 쳐다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스마트폰 없이 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대고 해서 '스마트폰을 쓸지 말지는 순전히 현대인 개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사람은 차별받는다. (108)
인간은 그런 개념어와 비유에 기대어 세계를 파악한다. 언어는 도구다. 그 도구에 기대지 않는 인공지능이 언어라는 도구에 기대야만 하는 인간들보다 더 훌륭하게 과제들을 수행할 때, 언어에는 균열이 생긴다. 우리는 '그 말이 무슨 뜻이냐'를 비로소 제대로 묻게 된다.
하나 더 예를 들어보자. 바둑계에서 흔히 썼던 '기세'라는 용어에 관한 얘기다. (128)
AI 시대에 인간은 예술적인 성취는 거둘 수 없고 스포츠적인 성취만 이룰 수 있다. (169)
나는 한 세대 뒤면 사람들의 현실 인식이 인공지능과 단단히 결합되어 있으리라고 예상한다. 한 세대 뒤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인공지능보다 2020년대의 대중이 인공지능에 보인 반응을 오히려 더 낯설게 여길 것이다. 2020년대에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토템 몇 가지는 그때는 이미 무너져 있을지도 모른다. 개인의 창의성이라든가 고유성, 혹은 다른 개념들이 완전히 부서지거나, 기묘하게 왜곡되거나, 균열이 나 있을 것이다. 바둑계에서는 그런 일이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다. (189)
기본소득이나 로봇세는 이런 문제의 해결책이 될까?
나의 직업은 소설가이며, 나는 그 직업을 사랑한다. 그런데 소설 쓰는 인공지능이 등장하면 인간 소설가의 시장 가치는 추락한다. 생계를 걱정하는 내게 정부가 해법을 제시한다. 정부는 나더러 전처럼 소설을 계속 쓰라고 한다. 그렇게 소설 한 편을 완결하면 여태까지 내가 다른 책을 발표했을 때 벌어들인 금액을 지급하겠다고 한다. 그 재원은 인공지능을 이용하는 다른 기업으로부터 로봇세를 걷어 마련하겠다고 한다.
나는 전과 같은 일을 하면서 수입은 두 배로 벌게 되는 셈이다. 그러면 소설가라는 나의 일자리는 지켜진 것일까? 이 가상의 미래 상황에 미래의 나는 만족할까? 아닐 것이다. 소설가라는 직업이 지켜졌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저런 상황이 오면 솔직히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할 거 같다. 나 말고 다른 소설가들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렇게나 글을 써도 우리가 받을 돈은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쓴다. 누군가 '안녕하세요'라는 문장을 10만 번 반복한 문서를 장편소설이라고 우기고 정부의 지원금을 받는다. 나는 '어서오세요'라는 문장을 10만 번 반복한다. 그러면서 자기혐오에 빠진다. 그건 소설이 아니며, 소설가의 일도 아니다.
이러한 시나리오를 조금 변형해 보자. 내게 돈을 지급하는 곳이 정부가 아니라 인공지능을 이용해 소설을 출간하는 출판사라고 하자. 그 출판사는 내게 문학 출판에서 인간 소설가는 너무 중요한 존재라며, 자신들의 인공지능을 도와달라고 한다. 인공지능이 만든 이야기에 의견을 더한다든가, 제목 아이디어를 낸다든가, 문장을 다듬는다는가, 교정을 해준다든가 하는 업무다. 내가 그런 사소한 업무를 하면 출판사는 굉장히 고마워하며, 내 노력 덕분에 소설이 엄청나게 달라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대가로 전에 내가 소설가로서 벌던 금액의 두 배를 지급한다.
이 가상의 미래 상황에 미래의 나는 만족할까? 인간 소설가로서의 내 일자리는 지켜진 걸까? 이때도 나는 만족하지는 않을 것 같다. 특히 그 출판사가 인간 전문가를 고용한 대가로 정부의 고용 지원금을 받는다거나, 모든 기업이 의무적으로 인간을 고용해야 한다는 법률이 있는 상황이라면 더 그럴 것 같다. 내가 낸 아이디어나 의견이 최종 겨로가물에 반영되지 않을 수 있으며, 실제로도 별로 반영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더 그럴 것 같다. 물론 그렇더라도 일자리가 아예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말이다.
나는 소설을 쓸 대 무엇이 중요한지 안다.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안다. 아무리 옆에서 누군가가 '당신은 중요한 존재'라고 말해도, 내가 소설을 쓸 때 중요한 일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는 소설을 쓸 때 중요한 존재가 아닌 거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2013년 '불쉿 직업(bullshit job)'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고, 몇 년 뒤에 그 개념으로 책을 썼다. 그레이버는 현대 사회에는 통째로 사라져도 세상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직업, 종사자들조차 속으로는 쓸모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불쉿 직업'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전체 일자리의 40퍼센트에 육박하며 현대 사회의 몇 가지 구조적 원인 때문에 점점 늘어나는 중이라고 한다.
불쉿 직업은 힘들고 보수와 처우가 형편없어서 인기 없는 일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레이버에 따르면 그것은 '쉿 직업(shit job)'인데, 그런 쉿 직업들은 불쉿 직업과 반대로 사회적 가치와 의미가 있으며, 종사자들이 사라지면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환경미화원이나 건설 현장의 잡부가 대표적 사례다. 반대로 보수와 처우가 괜찮고 노동 강도가 높지 않은데도 의미가 없는 일이라면 불쉿 직업이다. 그레이버는 인사관리 컨설턴트, 커뮤니케이션 코디네이터, 홍보 조사원, 금융 전략가, "불필요한 위원회의 문제를 처리할 직원위원회에 참석하는 것을 일상 업무로 하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그 예로 들었다. (222)
그레이버는 불쉿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비참함을 느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호함과 강요된 시늉" 때문에, "스스로가 원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감내할 만한 가치가 없는 고통"을 받기 때문에, "자신이 해를 끼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비참하다.
이미 19세기에 도스토옙스키가 그레이버에 앞서 같은 관찰을 한 바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유형 체험을 바탕으로 한 중편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화자는 유형수에게 완전히 무의미한 일을 시키는 게 가장 참혹한 형별이라고 말한다. 벽돌을 만들고 땅을 파고 집을 짓는 일은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시키면 죄수는 고되더라도 거기에 열중할 수 있다. 심지어 죄수는 그 일을 잘하고 싶어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감옥의 모든 죄수들은 자연적인 요구와 자기 보존의 감정 때문에 자기의 일과 기능을 가지게 된다"라고, 죄수 중 많은 사람이 "훌륭한 장인이 되어 세상에 나가곤 했다"라고 썼다. 그러나 흙더미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쌓게 하고 다시 원래 장소로 옮기게 하는 것처럼 쓸모없는 일을 시키면 인간은 그 무의미함과 모욕과 수치를 견디지 못한다. 그는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으며, 잘해야겠다는 의지도 잃는다.
나는 AI 시대가 공허의 시대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한다. 평범한 인간들이 가치를 잃어버리고, 가치로부터 소외되는. 현대인은 종교로부터 멀어지면서 인간 외부에 객관적 가치가 있다는 믿음에서 멀어졌다. 현대 주류 경제학이 노동가치설을 폐기하면서 우리는 어떤 일에 내재적 가치가 있다는 믿음에서도 멀어졌다. 이제 무신론자와 자유시장주의자가 함께 합의할 수 있는 가치는 시장 가격인데, 그것은 도덕적 규범이나 사회적 가치와는 상관없는 개념이다. 이제 우리는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일을 하면서도 적당한 급여를 받을 때, 그 일에 왜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지 잘 설명하지 못한다. (225)
근대 들어 과학기술의 현기증 나는 발전 속도에 놀란 이들 중 몇몇은 언젠가 힘들고 성가신 일은 모두 기술이 처리해 주고, 인간은 옛 귀족처럼 고상하고 즐거운 일만 하며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었다.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던 이들 중 가장 유명하고 권위 있는 인물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로 꼽히는 존 메이나드 케인스다.
케인스는 1930년에 <우리 손자 손녀들이 누릴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짧은 에세이를 썼다. 그 글에서 케인스는 "100년 후 선진국의 생활수준이 4배에서 8배는 더 높아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다들 어느 정도는 일을 해야 할 것"이라면서도 "일주일에 15시간만 일해도 아주 오랫동안 경제적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맹목적으로 부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많을 것"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칭송하고 독려할 의무를 더 이상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2030년까지는 아직 몇 년 남았지만, 우리는 케인스의 예상이 빗나갔음을 안다. 생활수준은 케인스가 예측한 것보다 훨씬 더 높아졌다. 예일대의 국제개발경제학과 교수인 파브리지오 질리보티는 2030년이 되면 127개국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1930년에 비해 17배 향상될 거라고 추정한다. 선진국뿐만 아니라 통계를 얻을 수 있는 모든 국가의 성장률을 다 합해서 계산해 봤더니 전 세계 경제가 연평균 2.9퍼센트씩 성장하는 추세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시간은 케인스의 예측만큼 드라마틱하게 줄지는 않았다. 1930년보다 노동시간이 줄긴 줄었지만 주 15시간 근무는 여전히 꿈같은 소리로 들린다. 게다가 통계로 확인할 수 있는 노동시간 단축조차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 의심이 간다. 누구의 노동도 아닌 노동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발전한 기술을 적용해 노동량을 줄인 현장, 예컨대 키오스크를 도입한 식당을 생각해 보자. 식당 직원의 노동량은 줄었지만 과거에 식당 직원이 하던 일을 키오스크 도입 이후에는 손님들이 각자의 여가시간에 한다. 음식 주문 업무를 여전히 누군가가 하고 있지만, 통계상으로는 누구의 노동으로도 계산되지 않는다. 현대인들이 개인적으로 짊어진 자기계발이라는 과제도 그렇다. 내게는 그것이 수입이 없는 노동처럼 느껴진다. (242)
김홍중. (2022). 플랫폼의 사회이론: 플랫폼 자본주의와 알고리즘 통치성을 중심으로. 사회와이론, 7-48.
그런데 나는 다른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 지금 중요한 질문은 'AI 시대에 애니메이션 회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혹은 'AI 시대에 소설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아닌 것 같다.
애니메이션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왜 AI 회사가 좌지우지하는가?
프로기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방식을 AI 회사가 함부로 규정해도 되나?
문학작품을 읽고 쓰는 방식을 인공지능이 멋대로 바꿔도 되나? (271)
하호정 4단은 역시 프로기사인 남편 이상훈 9단과 알파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알파고 때문에 바둑 산업이 파괴되고, 프로기사의 권위가 낮아졌죠. '내가 사랑했던 바둑이 이제 왜 숫자로 평가받는 건가'하고 슬펐죠. 그런데 모든 일에 장단점이 있잖아요. 알파고가 준 충격 자체는 슬프지만 알파고가 보여준 수를 모르고 죽었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아요. 그만큼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수가 많았으니까요. 우리가 '알 사범님'이라고 하잖아요. 그 수를 몰랐던 무지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이 이야기를 해준 다음 날 하호정 4단은 내게 메시지를 보내 생각이 바뀌었다고 전했다.
"저는 AI가 없던 시절이 훨씬 좋은 걸로 의견을 바꿀게요. 낭만의 바둑을 두던 예전이 그리워요. 전에는 어떤 새로운 수를 연구할 때 거기에 사람들의 노력과 열정이 배어 있었거든요. 그렇게 찾은 새로운 수에 환호하고 연구를 거듭하며 성장해 갔죠. 우리 인간이 비록 불완전하지만 그 속에서 성장해 가는 낭만이 있었는데, 알파고 이 자식 이후에는 뭔가 서늘해져 버렸네요. 기술이 발전하면서 많은 사람이 몸은 편해지는데 영혼은 시드는 것 같고, 지금의 바둑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해서 의견을 번복합니다." (281)
2022년 컬래버레이션스 제약이라는 미국 제약회사의 신약 개발 연구팀은 약물 탐색용 인공지능을 이용해 생화학무기 후보 물질을 찾은 사례를 국제학술지 <네이처 기계지능>에 발표했다. (중략)
신약용 고분자를 찾는 인공지능과 생화학무기 후보 물질을 찾는 인공지능은 실제로 동일하다. '신약 개발에 도움을 줄 혁신적인 인공지능'이라는 말은 '생화학무기 개발에 도움을 줄 혁신적인 인공지능'이라는 뜻도 된다. 앞에서 던진 질문을 반복해 보자. 바둑계를 테스트 베드 삼아, 프로기사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신약 개발에 도울 줄 혁신적인 인공지능을 만드는 일은 옳은가? (283)
나는 이 사실 자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구글은 그냥 기업이 아니다.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스콧 갤러웨이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글은 한마디로 '현대인의 신'이다. 구글은 "우리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모두 알고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며 사소한 것에서 심오한 것까지 온갖 질문에 대답해 준다.", "그 어떤 기관도 사람들이 구글에게 보이는 믿음과 신뢰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 신은 자신은 사악해지지 않을 거라며, 옳은 일을 할 거라며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그러나 실제로 옳은 일을 하지는 않으며, 옳은 일이 뭔디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 변덕스러운 신에게 바둑계 정도 규모의 공동체를 뒤흔들고 바둑계 종사자들의 가치의 근원을 박살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신은 그 일을 할 수 있으며, 주저 없이 그렇게 행동한다. (285)
시장이 아닌 공공 영역에서 우리는 보통 시민이 권리를 위탁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기업을 감시하거나 활동을 제한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구글을 감시하거나 구글의 활동을 제한할, 그런 힘을 지닌 국가나 주 정부가 지금 어디에 있나? 2024년 러시아는 구글에 2간 루블의 벌금을 매겼다. '간'은 10의 36제곱이며, 2간 루블을 미화로 환산하면 2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달러(2 뒤에 0이 34개 붙었다)가 된다. 다들 이 조치를 농담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러시아가 구글로부터 이 벌금을 징수할 방법도 없다. (287)
우리는 오이디푸스의 잘못이 뭔지 설명하지 못하면서, 오이디푸스가 괴로워하는 것에 슬퍼하면서, 그러면서도 오이디푸스가 괴로워해야 한다고 느낀다. 즉, 오이디푸스의 고통은 우리가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자기 자신이 괴로움의 원인인 사람에게, 내게는 미래 기술보다 차라리 중세 수도사인 토마스 아 켐피스의 조언이 더 적절하게 들린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항상 준비되어 있어서 어디에서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은 어디로 도망치더라도 그것으로부터는 도망칠 수 없다. 당신이 어디에 가더라도 자기 자신과 함께 있으며, 어디에서도 당신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 당신이 기꺼이 십자가를 진다면 십자가가 당신을 지고 희망의 땅, 모든 고통이 끝나는 땅까지 당신을 안내해 준다."
어떤 고통은 삶에서 제거해야 하는 얼룩이 아니다. 그 고통은 삶의 일부이며, 우리 삶은 순백이 아니다. 순백이어서도 안 된다. (298)
그러는 사이 통신 기술은 외로움을 견디는 바로 그 힘과 다른 사람과 건강하게 연결되는 그 방식 자체를 훼손하고 왜곡한다. 통신 기술은 외로움이라는 개념을 변질시켰다. 외로움은 이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다고 해서 풀리는 문제가 아니다. 외로움은 이제 탁하고 막연하게 편재하는 문제다. 그리고 우리는 그윽하고 감미로운 고독을 잃어버렸다. (301)
간단한 질문을 하나 던져본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독자 중에서 내일 당장 실연을 당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살면서 단 한 번도 실연을 당하지 않는 삶이 좋은 삶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루지 못하는 사랑에 빠지는 경험 역시 삶에서 제거해야 하는 얼룩이 아니다. 고통스럽겠지만, 그런 고통이 있는 삶이 더 좋은 삶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술을 개발하면 과격하고 유아적인 해결책을 추구하게 된다. 실패할 확률이 없도록 파트너와 연결해 주는 매칭 기술이라든가, 구매자를 향한 사랑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 안드로이드 연인이라든가. (302)
과학자들은 과학이 중립적이라고 말하며 과학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논의를 피한다. 기술자들은 기술은 도구일 뿐이며, 쓰는 사람이 그 용도를 정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은 틀렸다. 기술은 하나의 사상이다. 흔히 칼이 요리사의 손에 들어가면 조리 도구가 되고, 강도의 손에 들어가면 무기가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칼은 오히려 매우 예외적인 기술이다. 총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두 가지 뿐이다. 사람을 쏘거나, 사람을 쏘겠다며 위협하는 것. (304)
오웰은 기술 문명의 미래에 대해 6년 전 케인스가 쓴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가 인간의 자질로 찬미하는 것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재앙이나 고통이나 어려움에 맞서는 과정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 그런데 기계적 진보의 경향은 재앙이나 고통이나 어려움을 제거하는 것이다. (310)
오웰이 예언자라면 구약성서에 나오는 의미의 예언자였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는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잘못된 행동을 바꾸지 않으면 끔찍한 재앙이 올 거라고 동시대인들에게 경고하는 사람이었다. (316)
우리는 현실감을 잃어버린 뒤에야, 기술로 인해 객관적 현실이라는 개념이 무색해지고 증강현실 기기 이용자들이 모두 주관적 현실 속에서 사는 때가 되어서야 현실감이 어떤 가치였는지 이해하게 된다. 2020년대는 '공통 현실'이라는 게 존재한 마지막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 (322)
나는 사람이 기술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파악하는 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불확실성 역시 소중한 가치임을 우리가 너무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게 아닐까 우려한다. 사람은 불확실한 상태에서만 결단할 수 있다. 그리고 결단을 통해서만 성장하고 운명에 맞설 수 있다. 모든 정보를 아는 상태에서 최적의 해답을 고르는 것은 결단이 아니라 인지능력 테스트다. (324)
기술 통제와 기후위기 대응은 그 필요성을 우리가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는 점도 같다. 기술 통제와 기후위기 대응은 모두 경제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지지를 쉽게 얻지 못한다. 경제 성장은 좋은 삶의 열쇠라기보다는 효과가 엉망인 마약성 진통제에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깊은 관성 속에서 거기에 매달린다. 그래서 기술 통제와 기후위기 대응은 모두 거대 기업과 시장 논리를 상대해야 한다. (335)
삼권분립은 몽테스키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다. 몽테스키외도 자기 생각들이 독창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부심을 꽤 느꼈는지, <법의 정신> 속표지에 "어미 없이 태어난 아이"라고 썼다. (338)
내 생각에는 인공지능이 아직 할 수 없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있다. 좋은 상상을 하는 것, 우리가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 그렇게 미래를 바꾸는 것이다.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시 <인빅투스> 마지막 구절을 조금 변형해 책을 마무리하도록 하자.
우리는 우리 운명의 주인이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선장이다.
아직까지는. (340)
반응형
LIST
':::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철학은 이렇게 공부한다 :: 클레어 손더스 외 (0) | 2026.06.25 |
|---|---|
| 소설 보다 봄 2026 :: 김채원 외 (0) | 2026.06.23 |
| 마일리지 아워 :: 최유나 (0) | 2026.04.07 |
| 안녕이라 그랬어 :: 김애란 (1) | 2026.03.30 |
| 미국의 목가 1 :: 필립 로스 (1) | 2026.03.2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