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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보다 성숙해 보이는 그 침착성은 공동체 전체가 퍼주는 사랑으로 인한 자기도취를 제어하려는 뜨거운 내적 투쟁의 외적 표현이었을까? (15)

 

그러면서도 나는 계속 그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이런 뻔한 것 이상의 뭔가를 보여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하나의 거죽이 사라지면 또다른 거죽이 올라올 뿐이었다. 이 사람은 존재 대신 무개성을 갖고 있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무개성이 광채를 발하는구나. 그는 자신을 위해 익명성을 고안했는데, 그 익명성이 그 자신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식사 도중에 몇 번이나, 그가 계속 이렇게 가족을 찬양하고 또 찬양한다면 나는 끝까지 가지 못할 것 같다는, 디저트까지 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마침내 이 사람이 익명의 존재가 아니라 미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가 이 사람 위에 올라타 정지를 명령한 것이다. 뭔가가 이 사람을 진부함의 표본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뭔가가 이 사람에게 결고를 한 것이다ㅡ너는 어떤 것도 거스르면 안 돼. (44)

 

우리는 우리의 피상성, 우리의 천박함과 싸워야 한다. 그래야 비현실적인 기대 없이, 편견이나 희망이나 오만이라는 무거운 짐 없이, 최대한 탱크와 닮지 않은 모습으로, 대포도 기관총도 15센티미터 두께의 강철판도 없이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우리는 탱크의 무한궤도로 상대의 텃밭을 깔아뭉개는 대신 우리 자신의 발가락 열 개로 겁을 주지 않고 다가가며, 동등한 사람으로서, 흔히 말하듯 인간 대 인간으로서 열린 마음으로 덤벼든다. 그래도 늘 상대를 엉뚱하게 오해하고 만다. 차라리 탱크의 뇌를 갖는 편이 나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전에, 만나기를 고대하는 동안 오해를 해버린다. 함께 있는 동안에도 오해를 한다. 그러고 나서 집에 가 다른 누군가에게 그 만남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서 또 완전히 오해를 해버린다. 일반적으로 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에, 모든 것이 사실은 이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어지러운 착각일 뿐이며, 오해가 빚어낸 놀라운 소극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다른 사람들이라는 무시무시하게 의미심장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우리가 생각하던 의미는 다 빠져나가버리고 대신 우스꽝스러운 의미만 어른거리고 있는데. 우리 모두 준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서로의 내면의 작용과 보이지 않는 목표는 상상해볼 수도 없는데. 모두가 외로운 작가들처럼 방음장치가 된 어떤 방으로 들어가 문은 잠그고 은둔한 채 말로 사람을 만들어내고, 이렇게 만들어낸 사람들이 우리가 매일 무지로 난도질하는 진짜 사람들보다 더 진짜에 가깝다고 주장해야 하는가? 어쨌든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살아가는 일의 본질은 아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본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 어쩌면 사람들에 관해서 맞느냐 틀리느냐 하는 것은 잊어버리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최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래, 그건 정말 복받은 거다. (62)

 

그 생생한 현재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충만함이 이미 그 당시에도 우리의 감정을 깊이 흔들어놓았다고 생각하면 틀린 걸까요? 그 이후로 어디에서든 그런 자잘한 것들의 바다 속에 완전히 빠져든 적이 있나요? 그 자잘함, 그 엄청난 자잘함, 그 자잘함의 힘, 자잘함의 무게. 여러분이 죽었을 때 여러분 무덤을 채울 2미터 깊이의 흙처럼 여러분의 어린 시절 삶에서 여러분을 둘러쌌던 그 가없이 풍부하고 자잘한 것들.
어쩌면 동네라는 것은 그 정의상 아이가 자기도 모르게 온전히 관심을 쏟아붓는 장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걸러지지 않고 의미가 다가오는 것이겠지요. 사물의 표면에서 바로 흘러드는 식으로요. 그럼에도 오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그 거리, 모든 블록, 모든 뒷마당, 모든 집, 모든 집의 모든 층ㅡ친구네 가족이 사는 모든 아파트의 그 벽, 천장, 문, 창문ㅡ이 하나 하나가 오롯이 개성을 지니고 있던 그 거리에서처럼 완전히 몰입해 본 적이 또 있나요? 우리가 눈앞에 있는 사물의 미세한 표면을 그렇게 예리하게 기록하는 도구가 되어본 적이 또 있나요? (중략)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는 심지어 서로 다른 환경이 각 가족에게 그들 나름의 독특하고 까다로운 인간적 문제를 안겨준다는 것까지도 막연하게나마 이해했습니다. (74)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가 1946년 2월 1일 고등학교 신입생으로 별관에 처음 들어가던 때의 우리 할아버지들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이겠지요. 놀라운 것은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몰랐던 우리가 이제 무슨 일이 있엇는지 잘 알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1950년 1월에 졸업한 동기들에게 이제 결과가 다 나와 있다는 것, 답할 수 없던 질문의 답이 주어지고, 미래가 드러났다는 것, 이것이 놀라운 것 아닌가요? 살아왔다는 것. 그것도 이 나라에서, 이 시대에, 우리로서. 이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75)

 

신 대접을 받을 때 치러야 할 한 가지 대가는 모여드는 신자들의 줄어들 줄 모르는 환상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118)

 

스위드는 삶이 가르쳐줄 수 있는 최악의 교훈을 배웠다. 삶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배우게 되면 행복은 두 번 다시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없다. 행복은 인위적인 것이 되며, 그나마도 자신과 자신의 역사와 고집스럽게 거리를 두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갈등이나 모순에 온화하게 대처하던 착하고 다정한 남자, 공정한 적과는 무슨 싸움을 하더라도 분별력 있게 다양한 자원을 활용하던 자신만만한 운동선수 출신의 남자는 공정하지 않은 적, 즉 인간관계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악과 만나는 순간 그것으로 끝이 나버리고 만다. 겉으로 보이는 그대로 천성적 고귀함을 타고났던 사람은 너무 많은 고통을 겪는 바람에 다시는 순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스위드는 두 번 다시 과거의 스위드적인 방식을 만족스럽게 신뢰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두 번째 부인과 세 아들을 위해, 그들의 순진하고 온전한 상태를 위해 있는 힘껏 과거와 달라진 것이 없는 척한다. 초연하게 자신의 공포를 억누른다. 가면 뒤에서 살아간다. 평생에 걸쳐 인내를 시험하게 된다. 폐허 위엣 펼치는 공연. 스위드 레보브는 이중생활을 한다. (132)

 

순종하며 산다는 것은 위험이 일어날 가능성을 낮추며 살겠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아내, 아름다운 집, 자기 사업을 깔끔하게 경영하고, 까다로운 노인네도 여유 있게 잘 다루고. 스위드는 정말로 그의 방식의 낙원을 살아내고 있었다. 이것이 성공한 사람들이 사는 법이다. 그들은 훌륭한 시민들이다. 그들은 이것이 행운이라고 느낀다. 그들은 고마움을 느낀다. 신은 그들을 굽어보며 미소를 짓는다. 문제가 생기면, 적응을 한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해 그것이 불가능해진다. 아무도 누구를 굽어보며 미소를 짓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적응할 수 있겠는가? 여기 불가능한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인생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것에도 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있다. 하지만 누군들 앞으로 벌어질 불가능한 일에 대비가 되어 있겠는가? 누가 비극에, 그리고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고난에 대비가 되어 있겠는가? 아무도 그렇지 않다. 비극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의 비극ㅡ그것은 모든 사람의 비극이다. (140)

 

나는 성급하게도 가장 사려 깊지 못한 결론, 즉 단순해 보이는 건 실제로도 그렇게 단순하다고 결론을 내렸던 빈센트에서의 저녁식사 분위기를 몰아내고, 우리 모두가 미국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모범으로 추종하려 했던 소년을 나의 무대에 올려놓았다. (143)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미덕 자체가 악덕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가 기억하는 그의 과거에는 순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이 실제로 하고 싶은 말보다 더한 것이거나 덜한 것임을 알았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이 사람들이 실제로 하고 싶은 것보다 더한 것이거나 덜한 것임을 알았다. 그래, 사람들이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면 뭔가가 달라졌지만, 사람들이 의도한 대로 달라지지는 않았다. (150)

 

원숭이와 고릴라도 뇌가 있고 우리도 뇌가 있죠. 하지만 원숭이와 고릴라에게는 이것 한 가지, 바로 엄지가 없습니다. 그 녀석들은 우리처럼 엄지를 다른 손가락들과 마주보게 할 수가 없죠. 인간의 손의 아래쪽에 있는 손가락, 어쩌면 이게 우리와 다른 동물을 구별해주는 신체적 특징일지도 모릅니다. (203)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얼마나 많이 하든, 얼마나 자주 피아노를 언급하든 소용이 없었다. 아무도 그녀 말을 믿지 않았다.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 보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는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냥 하이힐에 수영복 차림으로 애틀랜틱시티를 돌아다니는 것 말고도 장학금을 탈 방법은 많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녀는 늘 사람들에게 자신이 미스 뉴저지가 된 진지한 이유들을 말했지만, 아무도 귀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미소를 지었다. 그들에게 그녀는 진지한 이유가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진지한 이유를 갖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가 저들을 위해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얼굴 뿐이었다. 그러면 그들은 "아, 저 여자, 저 여자한테는 얼굴밖에 없어"하고 말하고는 걸어가버릴 수 있었다. (294)

 

건물의 녹슨 비상계단은 누가 디디면 저절로 무너져내릴 것처럼 보였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 도로로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능은 화재가 날 경우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거기 쓸모없이 매달려 삶에 내재하는 크나큰 외로움을 증언하는 것으로 바뀐 것 같았다. 스위드가 보기에 다른 의미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외로움을 증언하는 것이 그 건물의 가장 중요한 의미였다. 그래, 우리는 외롭다. 몹시 외롭다. 그리고 늘 우리 앞에는, 지금보다 더 짙은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처리할 방법은 없다. 외로움을 뜻밖의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막상 경험할 때는 깜짝깜짝 놀라게 되지만. 자신을 뒤집어보려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 결과 안이 안에 있어 외로운 대신 안이 밖으로 나온 채로 외롭게 되는 것일 뿐이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메리, 네 어리석은 아버지보다도 더 어리석은 메리 심지어 건물을 폭파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단다. 건물이 있어도 외롭고, 건물이 없어도 외롭단다. 외로움에 대해서는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어. 역사상 어떤 폭파 운동도 거기에는 흠 하나 내지 못했지. 인간이 만든 폭약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도 그것을 건드리지는 못한단다. 내 멍청한 아이야, 공산주의에 경외감을 품지 말고, 보통의, 일상적인 외로움에 경외감을 품어라. 노동절이 오면 밖으로 나가 네 친구들과 함께 외로움의 더 큰 영광을 향해, 슈퍼파워 가운데서도 슈퍼파워를 향해,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을 향해 행진해라. 거기에 돈을 놓고, 내리를 하고, 그것을 숭배해라. 말을 더듬는 아이, 분노에 찬 아이, 멍청한 아이야, 카를 마르크스에게, 호찌민과 마오쩌둥에서 복종하여 고개를 숙이지 말고, 위대한 신 외로움에게 고개를 숙여라!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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