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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은 못참지 !
너무 불공평해. 불현듯 나는 줄곧 내가 그렇게 생각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자 한없이 서글퍼졌다. 열네 살에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나처럼 고통스럽지 않길 바라는 대신 다른 사람도 적어도 나만큼은 고통스러웠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인간이 나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건 내가 처음으로 또렷하게 마주한 내 안의 악의였다. (66)
평상시엔 수줍은 많은 아이가 이따금씩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할 때면 언젠가부터 뱃속이 천둥을 집어삼킨 것처럼 쿵쾅거렸다. 도대체 나는 어쩌다 그렇게 되어버렸던 걸까? (104)
10대의 내가 지형이를 마주쳤을 때 느꼈던 감정, 뱃속이 천둥을 집어삼킨 것처럼 쿵쾅거렸던 그때.
아빠를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랬겠지만 재회한 것이 기쁜 만큼이나 아빠와 같이 있는 것이 어색하고 쑥스러워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건 해나도 마찬가지였는지 아빠가 껴안을 때마다 품에서 벗어나려고 떼를 써서 아빠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셋이 있을 때는 아늑했던 집이 넷이 되자 비좁게 느껴졌다. (105)
"게으른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걸 배우려고 하는 대신 자기가 아는 단 한 가지 색깔로 모르는 것까지 똑같이 칠해버리려 하거든."
"그건 대체 왜 그러는데?"
이번엔 내가 물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지극한 정성과 수고가 필요하니까." (107)
마침내 우리 가족도 행복에 거의 가까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언니가 떠오르면 죄책감이 느껴질 만큼의 행복이었다. 죄책감이 가슴을 쿡쿡 찌를 때마다 속으로 언니에게 말을 걸어야 했을 만큼의 행복.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109)
내 기사는 데스크를 거치면서 매번 선과 악 둘 중 하나의 꼴로 깎여나갔는데, 그런 걸 볼 때마다 내가 지키고픈 무언가도 내게서 조금씩 같이 깎여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113)
어떤 기억은 짐작도 할 수 없는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가 불시에 일격을 가한다. 하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잊어버렸던 그 기억을 한낮의 공원 한복판에서 대체 왜 떠올리고 있는지, 나를 이토록 참담하게 만드는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117)
뿌리가 끊어진 사람들. 파독간호사에 대한 논문과 유튜브 영상을 찾아 읽고 보기 시작하면서, 내 눈에 자주 띈 건 '뿌리가 끊어진 병Entwurzelungskrankheit'이라는 표현이었다. (129)
"거기서 시달렸던 거에 비하면 여기서 있는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지. 박카스 뚜껑 왜 안 따주냐고 소리지르는 할아버지 정도는 귀엽잖아." (142)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영원히 간직할 것처럼 착각하지만 대개 그것들은 서글플 만큼 빨리 옅어진다. 물론 나의 경우에는 그렇게 되기까지 우재의 존재가 도움이 되었을 테지만. 우재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보폭으로 내 삶에 걸어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사실은 내 마음을 환하게 하면서 동시에 어둡게 했다. (166)
우재는 내가 이모와 대화하느라 답장을 보내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 곰인지 개인지 모를 캐릭터가 울고 있는 이모티콘을 몇 개씩 보내왔는데, 그걸 보면 어김없이 피식 웃음이 났다. 한번은 그렇게 웃는 나를 보더니 이모가 의미심장하게 따라 웃었다.
"왜요?" 내가 묻자 이모는 "네가 젊고 예뻐서"하며 바밤바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런가? 오래전부터 나는 내가 이미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다. (206)
지난 주말에 부모님과 칼국수를 먹으러 갔고, 무언가를 엄청 열심히 이야기하는 나를 빤히 보던 아빠가 비슷한 말을 했다. "우리 현아 젊네, 한창이다." "엥? 무슨 소리야?" "얼굴이 피었어. 환~하게."
그 때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조금 망설였다.
이모가 손을 뻗어 내가 아이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모의 손길이 닿자, 나는 오래전 이모의 집 거실에서 있던 어린아이가 되어 이십 년이 훨씬 넘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여전히 언니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걸 때가 있다고. 상실 이후 시간이 때때로 선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라, 쳇바퀴를 돌듯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고.
"이모는 네가 찬란히 살았으면 좋겠어.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 뿐이고 아까운 거니까."
그 순간,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것에 대해선 알지 못했지만 나는 우리가 어둠 속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27)
"해미야,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상대를 바라보잖아? 그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하지만 가끔 그 사람이 나 때문에 느낀 모멸감을 되갚아주기 위해 인적이 드문 새벽 일부러 찾아와 똥을 누고 간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그 똥을 떠올리면 그런 생각이 들어. 아무리 인간에게 한계가 있다 해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토록 모멸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되었던 게 아닌가 하는." (249)
나를 위해 너의 편지를 전해준 아이들의 마음이 나를 며칠 더 살 수 있게 했듯이,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304)
이제는 얼굴에 기미가 생긴 동생과 고구마를 구워 호호 불어 먹으면서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나는, 해나가 나보다 훨씬 어려 언니에 대한 기억도 적을 것이기 때문에 나만큼 슬프지 않으리라 오랫동안 단정해왔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는 걸.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슬픔에서 회복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미안해. 나는 오랫동안 나만 괴로운 줄 알았어."
한참 만에 용기를 내어 사과하자 해나는 웃으면서 "언니, 원래 사람들은 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그중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은 사과를 할 수 있는 거고."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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