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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듀엘 :: 김현
상민은 어린 석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석찬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석찬을 순식간에 철들게 한 것이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한 사람과의 삶이었다면 어땠을까. (44)
석찬은 기다렸다. 사랑하는 이를 함께 떠나보낸 이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상민이 깨우치길 바랐다. 상민의 묵묵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석찬은 상민에게 전화했고, 문자메시지를 보냈고, 장문의 편지를 썼다. 너를 괴롭히지 말고 너를 괴로워 해. (58)
상민은 여자를 살폈다. 여자 역시 상민의 표정을 읽는 듯했다. 두 사람에게는 할 말이 있었고, 못 할 말도 많았다. 홀로그램석에 앉는 이들 중에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상민은 죽음을 데리고 다니는 이들을 하나의 생존공동체로 만드는 슬픔의 언어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음성이었고, 몸짓이었고, 무엇보다 눈빛이었다. (61)
한 사람이 죽을 때마다ㅡ죽는다고 상상할 때마다ㅡ산 사람이 겪는 '투명한 죽음 경험'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소리 없이 잠든 짝꿍의 발등에 손을 올려보면서 자주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73)
그들이 '한집 짝꿍'이 됨을 약속하기 위해 함께 쓰고 읽었을 글의 일부를 짧게 인용하고 싶다.
용: 저도 걸음이 빠른 편이지만,
소: 제가 정말 걸음이 빠른 것처럼,
함께: 서로가 익숙한 삶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며 서로를 이해하겠습니다. (73)
정원사들 :: 윤이형
사람에게 인정이란 무엇일까. 왜 혼자서도 괜찮다고 마음을 다잡아도 가끔은 참을 수 없이 누군가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는 것일까, 찔리고 피가 나고 붕대를 감을 일이 생길 걸 알면서도. (100)
지금 생각하면 너무 바보 같지만, 그가 상처받을 거라는 생각 조차 하지 못했어요, 저는. 그냥 그런 정원이 내 안에 있다고, 뒤늦게 그걸 알게 된 게 너무 기뻐서, 그걸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알리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하지 못해서. (101)
에디 혹은 애슐리 :: 김성중
어머니는 크고 벅찬 문제일수록 납작하게 눌러서 당장은 버틸 만한 것으로 바꾸어놓는 편이 좋다고 일러주었다. (120)
내가 좋아하는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어느 책에서 이와 유사한 상태에 대해 쓴 적이 있다. 도시에 있으면 못 견디게 시골로 가고 싶고, 막상 시골에 가서 지내다 보면 숨 막히게 도시로 가고 싶어지는 것, 완벽하게 행복한 순간은 도시에서 시골로, 시골에서 도시로 가는 이행의 시기에만 존재한다는 역설에 대한 묘사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130)
오래전에 나는 용어들을 좋아했다. 용어를 사용하면 나의 특수함과 절절함, 혹은 적나라함을 가려줄 수 있어서 좋았다. '트랜지션을 할까 말까 퀘스처닝 중이야'라는 말이 '성전환수술을 할까 말까 죽도록 고민하고 있어'를 대체하는 것이 좋았다. 나를 해방시켜준 그 단어들은 내가 단독자의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젠더들은 이미 지구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용어들은 전문적이고, 전문적인 것은 익명적인 느낌을 주었다. (131)
아감벤의 말대로 우리 중의 누군가 호모사케르ㅡ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 생명ㅡ로 허용되는 순간 그 다음에는 장애인, 외국인, 여성, 아이, 노인, 그 박의 누구나 희생자로 표적을 삼는 세상이 가능해진다. 모든 사람이 이 죽음에 강력하게 항거해야 하는 이유다. (144)
라디오를 좋아해? :: 최정화
어떤 사람들은 아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문제가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무감각하고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생활의 한 부분이라는 거, 그게 서로를 아프게 하는 거지. 편견이라는 것.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게 편견일까?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눈으로 그저 자연스럽게 보고 행동하는 게 편견이야. 우리 상황도 마찬가지잖아. 우리한테는 너무 아픈 문제인데 다른 사람들은 자기 기준에서 보고 쉽게 말하지. (195)
남들이 한순간 사랑에 빠지듯 한순간 미움에 빠지곤 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절실하게 미움을 앓고 그 마음에 배부른 채 오래 시간을 보냈다. (213)
XOXO :: 최진영
하지만 내 삶에서 그것들은 점점 희박해졌다. 이미 끝난 소풍인데, 다들 집으로 돌아갔는데, 나만 홀로 남아 보물이 적힌 쪽지를 찾아 헤매는 것도 같았다. (255)
집으로 돌아오며, 전날 오후부터 그날 새벽까지 지속된 우리의 대화를 생각했다. 잔잔하고 낮은 분위기를 받쳐주던 기분 좋은 긴장감이 떠올라 심장이 저렸다. 어쩌면 너무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서인지도 몰라. 사람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어서인지도 몰라. 네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누구였더라도, 저녁이 오고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도록 깊은 이야기를 충만하게 나누었다면 나는 거듭났을지도 몰라. 하지만 다른 사람과 그러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259)
나는 내 또래 기혼 남녀의 사정과 상황을 잘 알았다. 결혼생활, 양육, 부부관계, 고부갈등, 맞벌이 부부의 어려움과 고뇌를 마치 나의 일처럼 이해했다. 주변에서 얘기도 많이 듣고, 뉴스에도 나오고, 드라마에도 나오고, 온갖 매체에 다 나오니까. 하지만 그들은 나의 삶을 몰랐다. 때로 프리랜서 독신 여성의 어려움을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건 네가 선택한 삶 아니야? 그들은 '그러니까 결혼을 해'라는 말을 너무 쉽게 했다. 그들에게 나는 능력도 없으면서 결혼을 미루는 철없는 여자거나, 까다로운 조건으로 남자를 고르는 이기적인 여자거나, 어떤 남자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불쌍한 여자였다. 그러니까, 철없거나 이기적이거나 불쌍한 여자. 너에게는 나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너와 있을 때는 나를 펼칠 수 있었다. 너는 나를 이해하기 전에 사랑했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공이었다. (267)
너는 쓸쓸하게 웃으며 조금만 더 두고 보자고 했다. 그즈음 내 마음에는 아주 작은 생채기가 났다. 금방 나아 흉터가 될 줄 알았는데, 낫지 않고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붉은 피와 흰 고름이 흘렀다. 가끔 나쁜 냄새를 풍겼다. 네가 그 냄새를 눈치챌까 봐 두려웠다. (271)
우리의 사랑은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하는 것. 할 수 없거나 하지 않을 때 그것은 거기 없다. 너의 가족이 나를 보고 미소 짓는다면 나도 미소 지을 것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면, 나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볼 것이다. 우리가 이상한가요? 당신들도 이상합니다. (280)
가까워지면 사랑에 빠질 것이므로 일부러 외면하는 사람이 있다. 사랑하는 마음은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다. 당신의 '괜찮다'는 말에 상처받을 때가 있다. 누군가를 배반하는 방식으로만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깎이거나 패이지 않고, 당신이 당신으로 잘 지내기만을 바랄 뿐이다. 실제로 나는 매일 당신에게 구애한다. 당신이 밉거나 당신에게 실망했을 때도 구애를 중단하지 않는다.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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