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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점점 더 천사를 믿게 되었다. 지상에 성스러움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더이상 믿지도 말하지도 않는 것에 반대하게 되었다. 성스러움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이 우리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신비로운 파장에 관한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에 남을 뿐만 아니라 영혼과 감정, 피를, 삶을, 입술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신비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것을 믿는 것 말고는 삶이 신선해지는 다른 방식은 아직 모르겠다. (12)

 

그런 일이 생길 재료는 이미 우리에게 풍부하다. 빠스깔 끼냐르의 말을 빌리자면 고독없이, 시간의 시련 없이, 침묵에 대한 열정 없이, 두려움에 떨며 비틀거려본 적 없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무엇 안에서 방황해본 적 없이, 우울함 없이, 우울해서 외톨이가 된 느낌 없이 기쁨이란 없다. (15)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나 때문에, 내 말 때문에, 내 속마음 때문에, 나의 생각 없음 때문에 스스로 초라해진다. 나의 말은 세상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그런 날은 나 자신이 세사르 바예호가 말한 '모자 끝에 매달린 제대로 빗지도 않은 가엾은 두뇌' 같았다. 내 정체는 나의 드러나는 개성이 아니라 내 속마음이고 나의 고유한 안정감 또한 속마음의 영역이었다. (41)

 

우리는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종종 초인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을 견뎌야 한다. 삶은 상상 만큼 빛나지 않는다. 이렇게 편안하지 않은 마음으로 노동을 하고 아침을 맞고 바쁘게 일상을 유지하고 살아내는 것이 경이롭기까지 할 때도 있다. 삶이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힘을 내는 인간들이 신비롭다. (44)

 

모든 싸움은 자기 자신의 무거움과의 싸움이고 꼭 필요한 일을 하면서 산다는 느낌, 그것이 삶의 가벼움이라고 생각했다. 평균수명이 늘어난다고 하는데, 그럼 그 살아 있는 시간은 어떻게 써야 할까? 뭘 하면서 살지? 평균수명이 늘어난다는 사실이 마냥 환영할 만한 뉴스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 기간만 연장된다면 난처한 뉴스가 될 것 같았다. (46)

 

책은 내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손에 꼭 붙잡고 있다는 행복감을 줬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겪은 쓰라린 일들을 남들도 겪었을 뿐만 아니라 그 말 못할 가슴앓이를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게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책은 세계와 내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게 우리를 돕는다. 나의 부족한 점을 타인의 진실한 마음에서 찾아 채울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의 삶이 누군가의 꿈이란 것을 알게 해준다. (53)

 

우리가 가장 잘 움직일 때는 언제일까? 사랑과 우정에 의지할 때인가, 돈에 의지할 때인가? 아무래도 돈에 의지할 때인 것 같다. 어느 날 나의 이런 생각이 아무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져 나는 무시무시한 철퇴를 맞고 지옥에 떨어져 화염불에 휩싸이면 좋겠다. 그럼, 나는 그곳을 내 스타일의 지옥으로 알고 기꺼이 응분의 댓가를 치르고 웃으면서 지내겠다. 그러나 아직 내 눈에는 사랑과 우정, 아름다움, 기쁨을 통해서 가볍게 살 수는 있으나 사랑, 우정, 아름다움, 기쁨을 차가운 현실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면서 사는 것은 댓가를 치르는 일이란 것 또한 아는 사람의 품위와 우아함만이 고독하게 빛난다. 그들은 용감하게 선택하고 댓가는 치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기억하자. 삶은 총합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한폭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란 것을. (54)

 

좋은 책과 만나는 어떤 특별한 순간, 서러운 마음도 자아도 사라지도 '이건 진짜다, 진짜 멋지다'라는 마음과 가벼운 한숨, 벅찬 가슴만 남는다. (60)

 

결국, 내게 가장 부족했던 삶의 기술 중 한가지는 구별 능력이었다.
충동과 선택은 다르고 딴죽걸기와 비판적 사고는 다르고 트집과 저항은 다르고 실망과 절망은 다르고 억압과 자기절제는 다른 것이다. 둔감함을 초연함이라 하고 어떤 갈등도 피하느라 자기도 지키지 못하는 것을 착하고 성격이 좋다고 하면 곤란하다. 그저 그렇게 산 것을 평화로운 삶이라 부르고 게으름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라고 부르고 가졌던 꿈을 포기하는 것을 철들었다고 부르면 곤란하다. 나르시시즘과 자기발견을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 만족과 자기를 좋아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해도 곤란하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는 것을 개성인 줄 알아도, 우리의 허영심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을 문제가 많은 상황이라 불러도, 자신의 심리상태를(일시적 감정, 흥분상태를 포함해서) 보편적, 윤리적 기준인 것처럼 주장해도 곤란하다. (67)

 

어떤 말은 말하는 사람 자신의 힘까지도 뺏어버린다. 나의 경우 나에게 가장 관심이 없는 것은 과거의 나다. 인생의 한때 삶에 대한 아무런 질문도 없었다. 그냥 남들이 사는 대로 살면 되는 줄 알았다. 질문이 없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조차 멍청한 대답을 하거나 가장 무난해 보이는 남의 생각과 말을 따라했다. 나의 정체성은 앵무새였다. 그러나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아침에 왜 일어나는가 같은 질문이라도 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나 자신에게 충실했더니 아주 진부한 한 인간이 나타났다. 지금도 너 자신에게 충실하라는 말을 아주 무서워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달라는 말도 무서워한다. 남들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었을 때 나는 괴물은 아니었지만 애물단지였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말은 깊숙한 내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기준에 맞춰져 있기 마련이라서 내적 태도가 없는 말들은 공허할 뿐이라는 것을 안다. 질문이 없다면 대답도 없고, 질문이 있다면 더 나은 대답은 가능하다는 것 또한 안다. 그리고 또 아는 것이 조금 더 있다. 내가 하는 말들이 공허할수록 내 삶도 그렇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73)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작가님 말 맛도 좋고!!!!!! 메시지도 좋잖아요!!!!!!! 
이럴 수가!!!!!!!!!!!!!!!!!!!!!!!!!!!!!!!!!!!!

 

다행히 책은 말로 이루어진 지상낙원이다. 그 지상낙원에서 나 자신을 위해 따온 언어의 열매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현실이 그래. 그게 세상의 이치야.
그러나 그때는 현실의 이름으로 무엇을 없애버리려 하는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 다 똑같지 뭐. 별 수 있나? 
사상 최악의 평준화.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다른 인간도 끌어내리는 말. 말한 사람이 아무런 구별 능력이 없다는 자백으로서만 쓸모 있는 말. 차라리 이에 비해선 '사람 다 저마다 다르지'가 관대한 말.

그래 봤자 아무런 차이도 없어.
사상 최강의 허무주의, 천국도 무너뜨릴 허무주의. 우리의 행동이 아무런 차이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 덕에 열정도 호기심도 없는 사람에게 오늘과 내일은 아무런 차이가 없고 세상은 함정일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용기를 끌어모아 약간의 차이라도 만들어보려고 한다면 그다음 우리는 훨씬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느낄 것이다. 

현실은 안 변해.
사상 최악의 근거 없는 믿음. 현실이 앞으로도 지금 그대로일 것이라는 말인데, 말하는 사람이 보는 눈도 없다는 증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인간에게는 아주 커다란 결함이 있는데, 그 결함은 어떤 상황을 변할 수 없는 것으로 설정하고 그 상황에 자신을 그대로 놓아두는 것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다 썩었어.
현대 생활의 모든 편리함을 누리고 있으면서, 특히 다른 사람의 고독과 투혼으로 이룬 것을 누리고 있으면서 쉽게 해버릴 말은 아니다. 썩어빠진 수많은 것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도 있는 단점을 무럭무럭 키우면 썩은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썩었다고 너는 말한다. 마치 우리는 그렇지 않은 듯이.' 
잊지 말자.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냉소주의를 통해서만 무기력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결론부터 제시하는 말.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들 위험이 있는 말. 

알고 보니 실망스럽더라고. 
타인도 진실도 순백색 다이아몬드가 아니다. 타인과 진실은 미세먼지와 황사가 많은 공기, 정화시키고 증류시킬 필요가 있는 공기, 불순물을 걸러내고 마셔야 하는 물과도 같은 것. 

네가 자초한 일이야.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질책으로 쓰이는 것은 세계에 불의가 존재한다는 것. 질서가 얼마나 문제덩어리인지 바로 그 문제를 덮게 한다. 

기분 전환하자. 
뭘 해도 기분이 잘 전환되지 않는다면 그때는 기분이 아니라 내가 변해야 할 때이다.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다른 사람이 비참하게 거리에 내몰리고 쫓겨나도 유지되어야 하는 원래 그런 세상은 없다. 장애물은 우리의 선택이 세우는 것이지 운명이 세우는 것이 아니다. 베토벤의 말을 따르자면, 아름다움을 위해서 파괴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방에 훅 간다.
아니다. 한방에 훅 가지 않는다. 수많은 시간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말을 빌리자면 지켜보는 이도 없고 상벌도 없는 평범한 나날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먹고 마시고 잤으며 작은 시간들을 어떻게 쪼개 썼느냐에 따라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권위와 능력이 주어질지 정해진다. 지켜보는 이도 없고 상벌도 없는 평범한 나날을 내가 어떻게 썼는지는 결국 표면에 떠오른다. 마치 한방에 훅 가는 것처럼 떠오른다. 

상투어를 아무 때나 진부하게 남발한 결과는? 우리 시대에 꼭 맞는 진부한 사람이 되어간다. 나의 정체성은 새로운 것 하나 없이, 관찰력도 나에 대한 애정도 없는 타인이 나를 보는 것에 딱 맞아떨어지게 그대로 되어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할 수 있는 한 자신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따라 살라고 했지만 안을 들여댜 보면 최선의 것이 아니라 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중략) 그러나 까뮈가 말한 것처럼 늙을수록 우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사람과 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살아내야 하고 기쁨을 정당화하는 말을, 자신만의 성찰을 찾아내야 한다. 나는 까뮈의 말에 한가지를 더하고 싶다. 자신을 춥고 어두운 감옥에서 해방시킬 열쇠가 될 단어를 찾아내야 한다. 마야꼽스끼는 '나는 말의 위력을 안다. 인간은 영혼과 입술과 뼈로 살아 있으니까'라고 했는데 나도 마야꼽스끼처럼 말의 위력을 알아가고 있다. 우리가 가치를 둔 단어에 다양한 현실이 따라 붙는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85)

 

어느 시대나 세상물정의 이름으로, 그 많은 지식과 경험을 거론하면서 타인의 힘과 희망을 꺾는 일이 고작 다인 사람들은 흔하디흔하다. 이와는 반대로 강한 사람은 어느 시대나 타인에게 힘을 주고 희망을 지퍼올린다. 

나약한 사람은 어떻게든 남의 힘을 꺾고 에너지를 뺏는다. 
약점을 바꾸느니 무기로 사용한다.
내가 너보다 더 힘들어! 그러니 내 말대로 해야 해. 힘듦을 도덕적 우월성의 근거로 내세운다. 
자신의 무게를 남의 어깨에 척 하니 얹어놓는다. 
타인을 축소시킨다. 
인간정신을 빈약하게 한다.
마음은 그대로인데 말만 바꾼다. 

강한 사람은 누가 봐도 지치고 쓰러질 충분한 이유가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가장 고통스러울 때 가장 훌륭한 생각을 해낸다.
문제에서 출발해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작은 희망도 포기하지 않는다.
상황이 어떻든 자신의 내면에서 더 나은 인간을 끌어낼 줄 안다.
이미 일어난 힘든 일에 짓눌리지 않고 더 나은 일을 위한 재료로 쓴다. 
자신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단련하고 자신을 바꾸는 싸움에서 영웅적이다.
자신의 무게를 남의 어깨에 올려놓지 않으려 애쓴다.
감상적이지 않고 연민과 동정에 기대지 않고 고통에 호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되 기다리는 날이 오지 않을 가능성까지 받아들이고 지금 해야 할 일을 잘 해내려고 한다. 
적응만이 아니라 변화를 말하고 대안을 만들려고 하고 그렇게 사는 삶이 가능함을 보여주려고 한다.
강한 사람 옆에 있으면 에너지가 낭비되지 않고 아주 많은 일들이 쉬워진다. (90)

 

기쁨은 희귀하므로 웃음과 기쁨을 줄 줄 아는 사람이 가장 관대하고 친절한 사람이다. 기쁨은 오래가는 감사의 마음과 관련이 있다. (93)

 

극복된 좌절감, 극복된 두려움, 극복된 우울. 모든 극복된 것들은 삶을 기쁜 마음으로 살게 돕는다. 이런 일은 한번만 일어난다면 두번, 세번 연거푸 일어날 수 있고 이 또한 뜻밖의 좋은 일이다. (극복했다고 생각한 두려움도 언제든 다시 찾아온다. 그럼 또다시 극복하고 또 기뻐할 수 있다.) (111)

 

부모들의 유일한 독창성
"너 왜 이래, 우리가 지금까지 너한테 무슨 끔찍한 짓을 했기에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해?"
"얘야, 다 용서한다. 아버지에게 미안하다고 하렴. 어서 가서 안아드리렴." 
죄책감을 심어준 뒤 이렇게 끝내 감동으로 울리는 것. (121)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ㅠ교사로서 엄청 찔렸음.. 부끄러움..

 

포트노이의 현란한 불평 중에서 특히 이것들이 기억에 남는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벌벌 떨면서는 더이상 못 살겠어요. 
우리 부모님이 삶을 그렇게 겁내도록 만든 게 누구입니까?
아, 활기는 어디서 찾아요?
대담성과 용기는 어디서 찾아요?  (125)

 

1. 삶에 더 많은 사람을 데려오세요. 따뜻함과 소속감,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를 빼면 나머지는 다 거품입니다. 
2. 지루함은 삶의 일부예요. 그걸 견디지 못하면 어린애예요. 
3. 만약 예수가 자비의 메시지를 담은 산상수훈을 전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방울뱀이 되었을 거예요. 젠장, 세상의 규칙은 딱 하나, '친절하라'. (131)

 

그 시간은 참 좋다. 세상은 수없이 힐링을 말하지만 나에게 힐링은 서로의 좋음을 나누는 것이다. 좋은 대화와 좋은 생각을 서로 나누어 갖는 것이다. 나와 남의 관계는 나와 나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좋은 대화는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시선으로 나를 보게 만든다. 나를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는 생각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만든다. 그다음 위 일곱번째 항목에 있는 말을 외칠 수 있다면 정말 사는 맛 날 것이다.
"우리가 함께 해낸 일이 너무 좋다!" (135)

정말 좋다.

 

츠바이크는 몽떼뉴의 『에쎄』를 읽으면서 대략 이런 목소리를 듣는다. 
어째서 힘들어해? 그 모든 것은 너의 피부만을, 너의 외적인 삶만을 건드릴 뿐 진짜 내면의 자아는 건드리지 못하는데. 이런 외부의 힘은 네가 스스로 헷갈리지 않는 한 네게서 아무것도 뺏어가지 못해. 분별력이 있는 인간은 아무것도 잃을 게 없어. 시대의 사건들은 네가 거기에 동참하길 거부하는 한 네게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어. 너의 체험 중에서 가장 고약한 것들, 패배로 보이는 것들, 운명의 타격은 네가 그런 것들 앞에서 약해질 때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야. 그런 일들에 가치와 무게를 두고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네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냐? 너 자신 말고는 그 무엇도 너의 자아를 귀하거나 비천하게 만들지 못해. (147)

 

곰브로비치는 일기는 고백이 아니라 자신을 특정한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창조하고 싶어서 쓰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나 자신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위해 나는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려 했다. 그는 고백하는 내용이 아니라 추구하는 것, 그것이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하는 삶과 실제 삶이 얼마나 다르냐'가 아니라 '그녀가 무엇을 찾아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78)

 

나의 경우에도 나 자신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지루하다. 나 자신에게 흥미를 가져보려고 했지만 나의 관심을 끌 만한 점을 아직까지는 단 한번도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나에게도 나만의 슬픔과 우울,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그것을 말로 표현해본 적도 있는데 어찌나 진부한지 그 사실에 더 슬퍼졌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하게 기억도 못한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하는 행동이 좋은 것이기를 원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나는 그렇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라고 설명할 때가 아니라 '나는 앞으로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말할 때가 훨씬 즐겁다.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말을 할 때가 아니라 나를 해방시킬 말을 들을 때, 각자의 입장을 고수하는 말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를 조금씩 옮겨서 점점 더 가까워지는 말을 나눌 수 있을 때가 더 행복하다. 
책에서도  '내 마음이 딱 그래' 나를 대신 표현해주는 말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도 누려봤찌만 그때까지는 없던 나를 새롭게 형성해주는 말을 읽었을 때 기쁨이 더 컸다. 내 생각과 같은 것이 아니라 내 생각보다 더 나은 것을 발견했을 때 기쁨이 더 컸다. (179)

 

사랑과 우정이 있는 한 삶을 고마운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가 힘들다. 사랑과 우정은 '너 말고도 사람 많아!'라는 말이 난무하는 세상에서ㅡ심지어 자기 스스로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버릴 지경인 세상에서ㅡ대체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223)

 

한가지 단서를 드린다면 우리가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 즉 마땅히 했어야 하나 하지 않은 일, 두 눈 질끈 감고 외면한 일이 우리를 수시로 엄습하고 때로는 불쾌하게 하고 수많은 변명과 자기합리화의 편리하고도 옹색한 길로 인도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안데르센 교수가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반드시 했어야 하나 하지 않은 일이 우리의 미래를 만들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아, 그걸 몰랐으면 모를까 알게 되어버렸네, 어쩜 좋아. 아, 그걸 몰랐으면 모를까 보고 말았네, 어쩌지? 아, 그걸 몰랐으면 모를까 읽어버렸네, 어쩌지? (228)

 

"유가족이 벼슬이야?"
대체 누가 이렇게 미운 한국말을 만든 것인가? 돈을 말하면서 우리 마음은 너무 가난해졌다. 욕망은 전혀 관용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슬픈 사람을 공격하면서 자신의 힘을 확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일은 결국 우리 모두의 은밀한 두려움이 되어간다. 
'나도 욕먹는 거 아니야?'
그렇게 우리는 지옥을 품고 산다. (243)

 

나에게만 의미있고 남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고통에 대해서라면 나는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서 가장 큰 도움을 받았다. 고통의 해독제는 원인에 대한 인식이라는 관점에서는 특히 그랬다. 헤르만 헤세는 고통은 자기에게만 무겁고 자기만이 뚫을 수 있는 그림자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라고 했는데 실제로 나의 많은 고통이 그랬다. 그럴 때 사태를 다르게 보지 못하면 마음은 지옥에 머문다.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이해해야지 달라질 가능성이 생긴다. (251)

 

그녀의 열정, 출구를 찾지 못해 고통받는 진실한 마음이 진부한 행복관과 만났기 때문에 어리석어지고 말았고 열정도 거짓 열정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위기의 순간마다 한번도 새로운 모습을 보이질 못했다. 그래서 나보꼬프는 그녀의 잘못은 간통이 아니라 진부함이라고 했다. 
사는 것같이 살기 위해서 내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플로베르는 '엠마 보바리는 나다!'라고 했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 역시 엠마 보바리였다. 열정, 행복이라 하면 다 좋은 것인 줄로만 알고 살다가 그때 처음 어리석은 열정, 진부한 행복관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돌발적으로 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남자, 새로운 여자, 새로운 직업, 대체물을 찾을 것이 아니라 행복관을, 사랑관을, 꿈을, 욕망을 바꾸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주 신선한 충격 속에서 알게 되었다. 그때 참 기분이 좋았다. 마치 몸속 노폐물의 정체를 알게 된 것처럼. 어찌나 기분이 좋았던지 내가 불과 몇시간 전까지 고통스러워했다는 것까지 잊어버릴 정도였다. 에이드리언 리치가 말한 대로 행복이란 그 말에 얼마나 자주 발이 걸려 넘어졌던가! (253)

 

카프카는 <성>에서 결코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측량기사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가 그렇게 들어가고 싶어했던 <성>은 아주 별로인 곳이었다. 그래도 측량기사는 성에 들어가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측량기사는 우리에게 놀라운 진실을 알려줬다고 쿤데라는 말한다. 우리는 너무 별로인 곳도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성>의 주제는 측량기사는 성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는 게 아니라 측량기사와는 딱 반대로 살라는 것이다. 측량기사가 결코 하지 않은 일을 하라. 즉 당신이 갇혀 있는 마음의 성에서 탈출하라. (254)

 

안똔 체호프가 말한 대로 나는 뭐 대단한 일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찮은 웅덩이, 피상성, 속물성 때문에 괴로웠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안똔 체호프가 알려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의 답을 찾는 것은 스스로의 도덕성을 찾는 것과도 같다. (255)

 

타니까와 슌따로오는 그것이 얼마나 힘들었느냐를 떠나서 그것이 나를 만든 것은 확실하다고 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혼란스러운 시절을 내 인생으로부터 없애버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257)

 

카프카는 익사하지 않도록 고개를 들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의 고통은 나에게만 너무 무겁고 남에게는 넘 가볍다고 했다. (중략) 
쉼보르스카는 삶이 뜻대로 안될 때 그때 영혼이 생긴다고 했다. 
슬라보예 지젝은 자신이 고통을 겪지 않으려면 그런 고통이 세상에 없어야 하므로 다른 사람 누구도, 아무도 고통을 겪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략)
사실, 내가 개인적으로 많은 작가들에게 가장 많이 배운 것은 고통에 대한 태도들이었다. 자신의 고통을 과대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고통에 놀라는 대신 그동안 다른 사람의 고통에 얼마나 무감각했는지에 놀라는 것이 맞는다는 것과 고통스러운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가장 큰 실망감을 주었던 일도 그 일 없이는 다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는 것에 대해서 배웠다. (260)

 

그러나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책의 저자로는 도스또옙스끼이고 실존 인물은 세월호 유가족들이다. (중략) 그들 덕분에 내가 태어났고 아직 살아 있음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내가 그들에게 들은 바를 기록한다면 누군가 "이 책은 천국에서 쓰인 거야?"라고 물을지 모르겠다. (265)

 

똘스또이의 <부활>에는 자신의 인생을 '그것이 아님'으로 설명하는 셀레닌이라는 법무부 관료가 나온다. 그는 젊은 시절 너그럽고 총명한 모범생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 목표는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관직에 들어갔다. 그런데 관직은 그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그는 현실이 평소 자기가 바라던 것과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즉 '그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주위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 그냥 그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는 결혼도 거절하면 상대방 여자가 상처받을까봐 했고 그러다보니 서로를 이해하려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럴싸하게 보이는 데 치중하게 되었다. 그는 가정생활도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더 큰 '그것이 아님'은 다른 곳에 있었다. 진실이란 인간 개개인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고 집단에 의해서만 인식되는 것이란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가장 큰 '그것이 아님'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허위를 행하고 있다는 자각 없이,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면서, 세상은 원래 그런 거라면서, 개인은 하나의 작은 물방울에 불과하다고 자체평가하면서 아무런 기쁨과 위안을 주지 않는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에 평온하게 안착할 수 있었다. (270)

 

이 이야기는 똘스또이가 쓴 다른 작품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생각나게 한다.
이반 일리치 삶의 소신은 인생이란 모름지기 편안하고 기분 좋고 즐겁고 고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고상함은 이런 거다. 그는 검사다. 자신이 파멸시키기로 마음만 먹으면 누가 되었든 그대로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갈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권력 의식을 생생하게 느끼면서도 자기처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법원에 온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친구처럼 편하게 대한다는 인상을 주도록 신경을 쓰고 그런 평판을 듣는 걸 즐기는 것, 법정에 들어설 때나 부하 직원들을 만날 때면 분명하게 전해져오는 자신에 대한 예우를 팽팽하게 즐기는 것. 자신과 격이 맞는 사람들과의 저녁 식사나 파티, 동료들과 나누는 담소, 식사, 카드놀이로 이어지는 생활. 이반 일리치는 결혼도 아내가 될 여자를 너무도 사랑해 그녀에게서 자신의 인생관을 함께 나눌 무엇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여자를 아내로 얻는 것이 기분 좋고 자신보다 더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한다는 느낌 때문에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버틀런트 러셀이라면 이렇게 사는 삶을 고상함이라고 절대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인생 중반쯤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런 말을 한다. 나의 하루는 습관과 타성으로 계속되며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내가 매일 하는 일과 매일 겪는 즐거움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절망감을 잊게 된다. 그러나 혼자서 아무 할 일 없이 있을 때는 나는 내 삶이 목적도 없고 나머지 생애를 바칠 만한 새로운 아무런 목적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감출 길이 없었다. (272)

 

"사는 거,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어디서
뭘 하며
누구와"
이것이야말로 삶을 사는 데 가장 중요한 질문들이다. 특히 안정감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문제는 안정감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안정감을 줄 수만 있다면 덥석 얼른 잘 따져보지 않고 선택할 가능성이 높은 가장 중요한 질문이란 것이다. 너무 중요해서 대충 대세에 떠밀려 선택하게 될 수 있는 질문들이다. (289)

 

"(생략) 그런 이야기 하면 너무 착한 척한다고 욕먹지 않을까요?"
누군가 착한 척이라고 부르는 것이 한때는 선한 행동, 사랑이라고 불렸음을 잊지 말자. (294)

 

헤르만 브로흐야말로 문학의 예언자였다. 모리스 블랑쇼의 말처럼 이제 인간들은 성격 차이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사건들 때문에 격돌하는 것도 아니고 가치들 때문에 싸운다. 인간들은 각각 표방하는 가치를 연기한다. 그 과정에서 저마다 실제보다 더 정의에 관심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제 사실이 아니라 추상적인 힘이 싸운다. 그리고 가장 낮은 가치가 가장 높은 가치를 누른다. 점점 세번째 범주의 사람이 늘어난다. 가끔 우리는 어떤 무책임한 사람이 자신이 한 일을 전혀 사과하지 않는 데 놀란다. 너무 뻔뻔하다거나 저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놀랄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은 비난이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성공이 지배하는 세계 내부에 철저히 속해 있으면, 누군가를 파멸시키는 이야기도 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릴 일이 아니라 합리적인 일로, 사리와 논리에 맞는 일로, 효율적인 일로, 세상의 이치에 맞는 일로 변모한다. 그 세계에는 그 세계의 합리성과 논리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진실로 자기 행동의 의미를 절대로 모른다. 그는 고통스럽지 않고 평화롭다. (296)

가끔 마주하는 일 앞에서 궁금해졌던 것. 
'부끄럽지도 않나?'
블랑쇼의 말이 옳다면, 그렇겠다. 그럼 남은 우리 교육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긍정할 것이 필요하다. 긍정할 것이 많지 않은 사회에서 무엇을 긍정하느냐는 한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태도이다. (298)

 

파울 첼란은 '주문되지 않은 것이 우리를 드러낸다'고 했는데 책 읽기야말로 그런 시간이었다. 아무도 내게 책을 읽으라고 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나의 선택으로 읽었다. 자율적인 책 읽기는 자율적인 인간을 탄생시킨다고 했는데 그런 일이 내게 벌어진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책은 우리의 정신이 성숙해지는 것을 기다려준다.
(중략) 책은 읽는 데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시간을 아끼는 습관을 갖게 해주었고 쓸데없이 떠들썩한 자리를 피하게 해주었다. (323)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 가장 좋아하는 책은 여러모로 공통점이 있다. 늘 하는 이야기만을 하고 또 하는 것과 오직 내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것을 피하게 해주었다. 더 가치 있는 고민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가장 좋은 벗과 책들은 나를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초연하게,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대담하게 살도록 이끌어주었다. 가장 좋은 책들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을 이야기하다가 어느 순간 짐작도 못한 페이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현실에서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책과 사람은 내 속을 들여다보게 만들었다기보다는 내 속으로 들어왔다. 없던 나를 만들게 했다. 나를 어딘가로 끌고 가기도 했다. 책이 있던 자리에 사람이 오고 사람이 있던 자리에 책이 겹쳐지고 그곳에 내 삶이 섞여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를 고치는 데는 하루 24시간으로는 어림없기 때문에 남몰래 바빴다. 어쨌든 뭔가가 달라져야만 한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으므로 속이 상했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내 앞길을 개척해보려 한 것, 책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우정으로 내 미래를 만들어보려고 한 것은 아무리 돌아봐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다. (325)

 

<일리아스>에서 죽어가는 전사 디오메데스가 마지막 순간 친구들을 향해 손을 뻗은 것처럼 나는 나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손을 뻗을지 안다. 인간은 하루하루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방향성, 경향성과 함께 모험하는 존재라고 믿게 되었다. 이 믿음이 나를 지키는 한 나는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미래가 알고 싶다면 필요한 것은 예언이 아니라 지향점이다. (325)

 

그러나 우리 삶의 이야기는 책을 덮고 나서 시작된다. 책 읽기는 살기 위한 준비, 예열 과정이다. 책 읽기를 현실적인 일로 만드는 것은 삶과 작업 속에서다.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에서나 가능했던 것들이 현실에서 시도해볼 만한 일로 생각될 때 갑자기 몸부터 변화하는 것, 이 기쁨과 놀라움을 기다리면서 책을 읽는 것이다. 그중에는 내 자신이 더 많이 변하는 것도 반드시 포함된다. (326)

 

다 끝났다는 말이 야기하는 나쁜 결론은 얼마든지 있으므로 어떤 실패도 실수도 고통도 그것이 당신의 마지막 결론이 아닐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들을 재료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보기를 간절히 바란다. 모든 나쁜 일을 좋은 일로 만들어보기를 바란다. 
우리가 변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놀라운 것은 어떻게 변하지 않고 한결같이 나쁠 수 있냐는 것이다. (333)

 

 

나랑 죽이 잘 맞는 친구와 오래 수다를 떤 기분. 
책 곳곳에 '맞아 맞아'하며 호들갑 떤 흔적이 가득하다. 

또 이 책에서 특별히 재미있던 점은, 정혜윤 작가님이 이렇게 시니컬하면서도 재치있는 분이었던가?
나는 그의 일면만을 알고 있었나보다. 
덕분에 많이 웃었습니다.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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