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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ㅠㅠ으악.. 날아갔다...
기억을 더듬어.. 적어본다.. ㅠㅠㅠㅠㅠㅠ

 

그러니까 인생은 이해할 수 없어서 불쌍한 것이다. 문제를 푸는 사람 자신이 문제의 구성 성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 수가 없는데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풀어야 하니까 더 불쌍한 것이다. 체호프가 러시아어로 '아, 인생이여'라고 할 때 우리는 한국어로 '아이고, 인생아'라고 한다. 불쌍해서, 죽일 수도 없을 만큼 불쌍해서. (7)

 

베를라우가 쓴 것으로 짐작되는 다른 짧은 시 한 편에는 '약점'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거기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당신에겐 한 가지도 없었지만 내겐 한 가지 있었지. 그건 내가 사랑했다는 것."(1951.1.28.). (21)

 

욥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인간은 자신의 불행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견디느니 차라리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 헤매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내 아이가 어처구니없는 확률(우연)의 결과로 죽었다는 사실이 초래하는 숨막히는 허무를 감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이 모든 일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섭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 살아 있는 자를 겨우 숨쉬게 할 수 있다면?
신은 그때 비로소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력히 입증하는 증거 앞에서 오히려 신이 발명되고야 마는 역설.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은 인간이 오히려 신 앞에 무릎을 꿇기를 선택하는 아이러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아이를 잃은 부모가 갑자기 독실한 신앙인이 된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무신론자에게 신을 받아들이는 일이란 곧 사유와 의지의 패배를 뜻할 뿐이지만, 고통의 무의미를 견딜 수 없어 신을 발명한 이들을 누가 감히 '패배한'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신을 발명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생각이 없다면 말이다. (44)

 

한 시인의 삶이 객관적으로 보기에 불행한 편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타인이 주관적으로 확언하는 말을 하는 것은 부주의한 일이다. 당사자가 '나는 불행하다'고 말한다 해서 타인이 아무 때나 '그는 불행하다'라고 말할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당사자가 그 말을 할 때에는 설사 신세한탄의 형식을 취한다 해도 그것이 자기 직시의 효과를 발휘해 자신의 현재를 극복하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겠으나, 타인이 그런 말을, 그것도 그를 그 불행에서 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의사도 없이 할 때는, 그런 말이야말로 그가 미래의 다른 자신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꺾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67)

 

그러나 누구도 시인들만큼 잘 묻기는 어렵다. 나는 그들로부터 질문하는 법을, 그 자세와 열도와 끈기를 배운다. 그것이 시를 읽는 한 가지 이유다.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 (87)

 

제2비가의 후반부에서 릴케는 "아티카의 묘석에 새겨진 인간의 몸짓"을 보라고 권유한다. '아티카의 묘석'을 검색하면 나오는 것은 상대방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린 연인들의 모습이다. "거기서 사랑과 이별이 마치 우리의 경우와는 다른 소재로 만들어진 듯, 가볍게 두 사람의 어깨 위에 얹혀 있지 않는가." 언젠가 릴케는 문제의 묘석을 실제로 보았고, 거기 부조된 고대의 연인들("절제하고 있는 그들") 에게서 '절제하는' 사랑의 역설적 깊이를 보았다. 그가 말하는 '절제'란 사랑이 탕진되지 않도록 가장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는 기술일 것이다. (89)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쥐고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염려하는 사람이다.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97)

염려, 발명.
이렇게 정확한 단어를 고르다니..

 

인간이 아프게 인간적일 때, 자연은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113)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기왕 살 것이라면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끔찍한 욕망이 내 안에 있다는 발견에서도 올 것이다. 세상이 생육신의 지조를 칭송하면 할수록 그는 제 안의 잠재적 배신자와 지긋지긋한 싸움을 해야 했으리라. 싸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기혐오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이후 세조를 관례적인 문장으로나마 치하하기도 했고, 국가 주도 불경 언해 사업에도 참여했으며, 세조에게 도첩을 받아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받기도 했다. 이를 두고 변절이라고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조금 흔들렸다고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122)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 <나란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진정한 나를 찾느라 번민하는 이들, 혹은 너무 많은 나 앞에서 자신을 위선자라 자학하는 이들에게, 이 일본 소설가는 그냥 우리에게 여러 개의 나가 있음을 인정하는 편이 낫다고 조언한다. '나'란 나눌 수 없는 '개인(in-dividual)'이 아니라 여러 개의 나, 즉 '분인(dividual)'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러 사람을 언제나 똑같은 '나'로서 만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누군가와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다보면 그 앞에서만 작동하는 나의 어떤 패턴(즉 분인)이 생긴다는 것. '나'란 바로 그런 분인들의 결합이라는 것.
이런 관점으로 '사랑'과 '죽음'이라는 사건을 바라볼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런 나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를 잃는다는 것은 그를 통해 생성된 나의 분인까지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 사람과만 가능했던 관계도 끝난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다시는 그때의 나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131)

지형이 앞에서의 내가 제일 마음에 든다. 
아마 나를 제일 예쁘게 봐주고, 제일 현명하게 봐주어서 때문이겠지. 
그리고 그 시선만큼 나는 살아낸다.

그래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에 신중을 기한다. 
내가 담고 싶은 것을 고르고 골라, 바라보아야 할테니까. 

 

내 속에는 많은 내가 있다. 고통과 환멸만을 안기는 다른 관계들 속의 나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나를 버텨주기 때문이었다. 단 하나의 분인의 힘으로 여러 다른 분인으로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라밍 죽을 때 나 중에 가장 중요한 나도 죽는다. 너의 장례식은 언제나 나의 장례식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후반부는 자기 자신을 장사 지내는 사람의 말이다. 
이런 말을 덧붙이자. 언제나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 이 말과 비슷한 충격을 안긴 것이 히라노 게이치로의 다음 말이었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저 말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됐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132)

 

지난 2016년 1월 21일에 황동규 시인을 만나 두어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그 내용을 정리해 매체에 보냈다. 글을 쓸 때는 미처 하지 못한 생각들이 뒤늦게 떠올라 여기에 적는다. 그날 대담이 끝나갈 무렵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선생님은 외로우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물론 외롭습니다." 그러나, 하고 시인은 덧붙였다. "외로움이 두렵지는 않아요. 내가 외롭다고 말할 때 그 말은 '외로워 죽겠다'가 아니라 그냥 '외롭다'는 사실을 뜻할 뿐입니다. 내 외로움은 가볍습니다." 이 말씀이 인상적이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더 캐묻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혼자 묻고 있다.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137)

 

고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어려운 문장도 읽어볼 필요가 있다. 한 인간이 '개별화'되려면 '고독화'를 겪어야 한다는 것. "개별화,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약하고 보잘것없는 자아를 완강하게 주장하여 그가 세계라 여기는 바로 이런저런 것에다 자신을 펼쳐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개별화란, 오히려 개개의 인간이 그 속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모든 사물의 본질적인 것에 가까이 이르게 되는, 즉 세계의 가까이에 이르게 되는 그런 고독화이다." 그러니까 고독 속에서만 "처음으로" 사물과 세계의 본질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139)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 <하비의 꿈>에 대해 말하자면, 세 딸을 모두 키워내고 노년기로의 진입을 앞둔 부부가 있다. 권태로운 일상에 진저리를 치는 아내에게 어느 날 아침 남편이 악몽을 꿨노라고 말한다. 남편이 주저하자 아내는 재촉한다. 꿈은 말해버려야 실현되지 않는다고. 그런데 남편이 꿈속에서 봤다는 일들이란 게 그가 자는 사이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이어서 아내는 섬뜩함을 느낀다. 결국 꿈의 끝에선 딸이 죽었다는 전화를 받고 절규하며 깨어나게 됐다는 것인데, 남편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벨이 울리면서 소설은 끝난다. 
실제로도 딸은 죽었으리라. 일상이라는 것이 이렇게 전화 한 통으로 무너질 줄 알았다면 부부는 결코 권태롭다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은 어리석은 우리가 자기 앞에 놓인 것이 아이스크림임을 알아보지도 못한다는 것, 혹은 그것이 영원히 녹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특유의 노련한 테크닉으로 경고한다. (147)

 

글을 웬만큼 써서 나름의 요령이 생기면 스승의 자리가 슬그머니 없어진다. '스승께서 이 글을 보면 뭐라 하실까?' 이렇게 게 자문하게 만드는 '글쓰기의 초자아'가 잊힌다는 것이다. 어디 글쓰는 사람만의 일일까. 자신감이 좀 붙으면, 예전에 두려워하던 이가 귀찮아지는 때가 오는 것이다. 그 무렵이 가장 바쁜 때다. 그러나 그것은 잘되고 있는 게 아니라 헤매고 있는 것이다. 당사자만 그것을 모른다. 
내 안에 스승을 두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는 이성복 시인에게 배웠다. "어른이 없으면 자기가 어른인 것일까요. 아닙니다. 어른이 없는 것, 그것이 어린애지요." (<끝나지 않는 대화>). (207)

 

시인도 처음 알았을 때 놀랐으리라. 자는 동안 입속으로 벌레나 거미 따위가 들어가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해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저렇게나 많이 삼키는지 몰랐으므로 나 역시 이 구절에 놀라고 말았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바로 이런 것이 생의 실상 중 하나일 것이다. 실상과 대면하기 전에는 모른다. 우리가 눈뜨고 경험하는 세상이 환상이라는 것을. 내가 먹은 세끼 음식이 물질적으로 환상이라는 뜻이 아니라, 깨끗하고 고운 것만 먹으며 살고 있다는 그 믿음이 환상이라는 뜻이다. (209)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약점을 옮기고 다니면 내가 약하다는 증거예요. 그 사람의 비밀을 지켜줘야 그 사람을 싫어할 자격이 있어요." (<무한화서>). (210)

 

카프카의 문학은 "인생이라는 화마를 잡기 위한 '맞불'"(<극지의 시>)이라는 것. 산불이 났을 때 불이 진행되는 방향의 맞은편에 마주 놓는 불이 맞불이고, 두 불이 만나 더는 탈 것이 없어 불이 꺼지도록 하는 게 맞불 작전이다. "하나의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임의의 다른 절망을 만들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이라는 불에 대해 문학은 맞불이라는 것. 그렇구나. 나를 태우는 불을 끄기 위해 나는 타오르는 책들을 뒤적이는 사람이 된 것이다. (211)

 

여럿이 마시는 사람은 희망이 소중하다고 믿는 사람이고, 혼자 마시는 사람은 절망이 정직하다고 믿는 사람일까. 전자가 결국 절망뿐임을 깨달으면 귀가하다 혼자서 한잔 더 할 것이고, 후자가 끝내 희망을 포기 못하겠으면 누군가를 불러내 한잔 더 할 것이다. (226)

 

1연에서 그가 '같은 듯 다른' 세 가지를 함께 말했다는 점을 눈여겨보고 싶다. 서둘지 말고, 바라지 말고, 당황하지 말라. 이 셋은 자주 엉킨다. 바라는 것이 너무도 많은데, 이룬 것이 너무 없어 당황스러울 때, 그때 서두르게 되는 것이다. 그때가 위험한 때다. 김수영이 걱정한 것도 그것이지 않을까. 빨리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마음에 지면 나를 잃고 꿈은 왜곡된다. (228)

 

고대 철학자에게 욕망의 '강도'가 문제라면, 우리의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욕망의 '속도'다. (229)

 

말하자면 이런 은유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아래쪽에서 위로 점점 물이 차오르는 일이며 그렇게 한 단계를 넘어갈 때마다 지난 시간들은 수몰되는 집처럼 그 형태 그대로 가라앉는다.' 그런데 그 과정을 막을 수는 없고 다만 잠수하듯 상기해볼 수만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233)

 

원격현전은 접촉신뢰를 대체하지 못한다. 강의도 그렇고 연애도 그렇다. 20년 동안 우리는 바뀌지 않았다. (258)

철학자 휴버트 드레이퍼스.

 

이것은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잃을 것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거기서 하나를 더 잃었으니까. 존재론적 정착지를 완전히 잃은 사람, 그는 존재론적 난민이 되었다. (279)

 

그는 뱉어진 말들이 사라지지 않고 모여드는 어떤 숲을 상상한다. "그해 여름"에 셋이 장마를 보며 나눈 말들이 오늘쯤에는 그 숲에 도착할 것이다. 이것은 그해 여름의 말들, 이를테면 장마를 보며 "슬프다"라고 한 너의 말을 오늘쯤에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뜻일 수 있다. 그가 다른 시에서 "낮에 궁금해한 일들은/깊은밤이 되어서야/답으로 돌아왔다"라고 적은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그 숲에는 언젠가의 말들이 하나씩 도착할 것이고, '말들이 서로의 머리를 털어줄' 시간, 그러니까 우리가 시간차를 두고 서로를 이해하는 다정한 때가 올 것이다. (311)

 

보살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우리말 '보살피다'는 '살피다'를 품고 있다. 그러니까 살피지 않으면 보살필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살피는가? 다가올 시간이 초래할 결과를 살핀다는 것이다. 이런 보살핌을 우리는 돌봄이라 부른다. 돌봄이란 무엇인가. 몸이 불편한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그가 걷게 될 길의 돌들을 골라내는 일이고, 마음이 불편한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그를 아프게 할 어떤 말과 행동을 걸러내는 일이다. 돌보는 사람은 언제나 조금 미리 사는 사람이다. 상대방의 미래를 내가 먼저 한번 살고 그것을 당신과 함께 한번 더 사는 일.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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