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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그러므로 당신들이 괜찮다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들에 대해 생각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야기는 계속 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자주 만났다가 헤어지며 그리워도 하겠지만 끝내 서로를 다 이해하지는 못할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거듭되는 재회와 헤어짐 속에서도 당신들이 처음 내 마음속에 들어와 헤이, 라고 스스로의 존재를 각인시켰던 그 눈부신 순간에 대한 감각은 잊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떠난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차마 가져가지 못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다정함을 주었던 사람이라면 마땅히 차지해야 할 오롯한 빛이니까. (7)

 

 


원피스를 돌려줘

윤경은 사무실에서 반나절을 고민하다가 "내 원피스를 돌려"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러고 나서 한두 시간은 정말 지옥불 같았다. 답이 올 경우와 오지 않을 경우를 나눠가며 혹시 그 답신의 내용으로 자기가 또다시 일종의 번뇌에 휩싸이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19)

 

"백숙이 맛이 있지? 그래도 백숙이."
윤경은 그런 마음을 떨쳐내기 위해 명랑하게 물었다.
"백숙이 백숙 맛이지 뭐."
상조는 대답과 달리 닭 뼈를 쪽쪽 야무지게 발라내며 말했다. 그런 것, 매사에 무슨 일에나 시들하고 관심이 없는 것, 그렇게 해서 옆사람의 생기까지도 제습제처럼 빨아들여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 그건 윤경이 제일 못 견뎌 하던 상조의 모습이었다. 윤경은 헤어져 있던 1년이라는 시간은 그냥 1년일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23)

 

 


규카쓰를 먹을래

하지만 희영이 좋아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셋 다 가서 앉아 있곤 했는데, 한영과 소영은 특히 이런 순간이 오는 것을 경계했다. 술을 마시다 자정이 넘어서 웬만한 사람들은 다 돌아가고 이제 남은 선배나 동기들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사실은 있잖아, 나, 야, 그게 그런 게 아니고, 진짜 아니고 대체 어떻게 된 거냐면, 하면서 날이 밝으면 테이블 위의 강냉이처럼 쉽게 바스라지고 말 어떤 진심에 대해 떠드는 순간. 누구나 듣고 그냥 넘길 만한 그런 이야기들에 희영은 쉽게 속아서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그런 말들이 지시하는 누군가의 고독, 누군가의 상처, 누군가의 고난, 누군가의 갈구에 마음을 활짝 열고 연애를 시작해버리는 것이었다. 소영이 보기에는 그런 고독과 허무의 제스처에 익숙한 인간들이란 결국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마저 살뜰히 이용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인간들인데도 희영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술자리에서 느꼈던 감정의 폭풍을 믿었다. (28)

 

"너는 가끔 잊는 것 같아. 너가 되게 운이 좋은 아이라는 것."
"내가 뭐가 운이 좋니? 운이 좋으면 이렇게 몇 년을 임용고시를 못 붙겠어?"
"그러니까 그 못 붙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다는 거야." (33)

 

그리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시간이 흐른 뒤 여행 준비를 위해 셋이 만들어놓았던 채팅방이 울렸다. 우리 규카쓰 먹을까, 그렇게 물은 것은 희영이었고 좋은데, 라고 답한 건 소영이었다. 그리고 야 거기 레알 맛집이라 얼른 뛰어야 해, 우리 이럴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주륵 열어젖힌 건 한영이었다. (38)

이런 이유로 나는 친구와 1:1인 둘의 관계보다, 셋의 관계를 선호한다.
내가 못 해도 다른 친구가 도와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감정들이 차곡차곡 정돈되며 견고해지는 우정이 된다.  

 

 


그의 에그머핀 2분의 1

회사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간신히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햄버거 가게에서 에그머핀 세트를 시켰다. 연이어 이틀만 먹어도 질리는 맛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을 조금씩 뜯어 먹으며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머릿속을 커피로 깨우며 하는 이런 것들을 좋아했다. 백지에 가까운 다이어리에 특별할 것 없는 일정을 적어보거나 이제는 사이가 소원해진 사람들의 SNS 계정에 들어가 댓글을 남길까 말까 고민해보는 것. 비 구경을 하거나 보도블록 사이로 난 풀잎들에 괜히 시선을 두는 것. 사실상 앞으로 낮 동안 선미가 해야 할 업무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었는데, 왜 그런 무용한 것들을 할 때만 서울에서의 시간을 버틸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41)

 

 


파리 살롱

파리 살롱을 다시 찾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앞으로도 어딘가에서 불현듯 추위를 느끼고 혼자임이 실감된다면 어디든 가장 가까운 곳에 들어가 누구도 기다리지 않고 따뜻한 것, 아주 따뜻한 것을 먹겠다고. 
수프를 다 먹은 윤이 식당을 나서는데 청년이 미안한 듯 쭈뼛대며 알고 보니 히터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었다고, 그래서 추웠던 것 같다고 사과했다. 그러자 윤은 자기가 느끼고 있던 추위, 차가움이 착각이 아니라 실제였구나 싶었다.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수리를 했는데 또 그러네요."
"괜찮아요, 정말."
식당을 나서는데 전화가 울렸고 경이었다. 윤은 전화를 받을까 말까 하면서 다시 파리에서 만났던 그 여자를 떠올렸다. 팔에서 가장 파리답지 않은 곳에 앉아서도 당당하게 노,를 외치던 파리지앵인 그녀를. (69)

 

 


우리가 헤이, 라고 부를 때

지하철은 한참이나 들어오지 않고 선배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나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문득문득 하는 생각, 대체 지하철의 이 빈 공간들이 어떻게 지상의 압력을 견디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빈 공간이 견디는 것이 아니라 지상이 빈 공간을 견디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견디고 있어야 이 도시라는 일상의 세계가 유지되는 것이고. 각별히 애정한, 마음을 준 누군가 우리 일상에서 빠져나갔을 때, 남은 고통이 상대와 유리된 오로지 내 것이 되면서 그 상실감을 견뎌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상대 역시 견뎌야 완전한 이별이 가능한 것처럼. (78)

 

 


류, 내가 아는 사람

실패한 농담이 상대에게 주었을 모욕에 대해 밤길을 걸으며 사과하고 싶어 하던 사람, 다른 어떤 말보다 사람을 보고 온다, 라는 말을 수면 위의 파문처럼 울려 받아들이던 사람. (91)

이런 사람 멋있지.

 

 


17/24

은지는 그제야 남수에게 문자메시지를 남길 생각을 했다. 그 전까지는 전화를 했어도 문자메시지는 남기지 않았는데 왜냐면 자기가 쓴 어떤 말이 그 창에 덩그러니 떠 있는 것이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99)

 

 


서로의 기도

그 순간 주용은 어쩌면 아주 어려서부터 영란의 마음은 전혀 다른 멜로디로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문제는 오히려 듣는 이의 관성화된 귀와 마음이 아닐까. 어느 괴롭고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수업 시간의 끝을 알리는 <소녀의 기도>처럼. (112)

 

주용은 분위기가 나아진 김에 누나가 한 그 연애란 대체 뭐야? 라고 물어서 어떻게 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볼까 하다가 관두자고 생각했다. 적어도 자정의 뉴스를 듣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영란은 웃고 있으니까. 좀 더 식은 마음의 상태가 되어 그 사랑에 대해 음미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해 이미지가 탈색되거나 변형되지 않고 오로지 영란 자신만의 해석으로 연주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자 싶으면서, 일단은 그런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용은 그릇 바닥을 싹싹 긁어 라면을 먹고 냉수로 입가심을 했다. (116)

 

 


영건이가 온다

재시험을 통고받은 영건이와 나는 어색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한 주 동안은 둘이 만나서 영어 문답을 연습해야 했다. '자기 자신을 소개하기'라는 장이었고 그것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문답들은 너무 지루해서 그런 소개를 받다가는 얼마 있던 서로에 대한 관심조차 시들해질 듯했다. 하지만 그때는 질문 내용과는 상관없이 누군가와 대화한다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의 상태, 그러니까 나란 사람의 특징, 취미, 유년 등이 술술 나오던, 대학 진학처럼 많은 인간관계를 단번에 형성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지니는 자기표현의 열정 같은 것이 있던 때니까 질문은 질문들을 낳아서 어느덧 나는 영건이가 보아의 열성 팬이라는 것을 알았고 영건이도 내가 무척 노동집약적인 연애를 해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랑에는 그런 무한정의 투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영건이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연애에 동의했고 나는 귀가 솔깃했다.
"야, 근데 생각하면 한심하지. 내가 뭐라고 걔 인생을 그렇게 걱정해. 쓸모없고 안 돌아오지."
"안 돌아오니까 좋지. 주는 족족 돌아오면 정 없잖아." (119)

스무살 혹은 스물 한 살의 저 마음? 상태? 어수선함?을 이렇게 표현하시다니......
ㅠ_ㅠ 작가님.....

 

"다르지, 달라, 아주 다르다고. 그건. 나는 보아 음악은 엠피쓰리로 안 들어."
영건이는 손을 내저으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건 뭐 다른 데서 다른 게 아니라 쉽게 지울 수가 없으니까, 지우려고 하면 이른바 일종의 충격, 버튼을 누르든 시디를 부러뜨리든 아무튼 힘을 써야 하는 거니까, 그렇게 해야 뭔가를 지울 수 있다는 건 중요해. 그런 건 정말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닮았달까." (122) 

 

 


그 여름 아케이드

영현은 회사 사람들과 점심 먹고 싶지 않았다. 먹고 싶지 않다, 정말 먹기가 싫어, 생각하다 보면 무엇보다 점심을 먹으면서 나누게 될 대화가 상상되면서 신물이 났다. 상사들이라도 껴들면 그들 집집마다의 사정에 귀 기울이고 적절히 응대해주어야 하는 것이 피곤했다. 맞아, 안 맞아, 내 말이 맞지 않아? 하며 동의를 구하는 상사의 목소리가 커져가다 보면 이내 반주 한잔 하지 뭐, 하면서 술이 돌고 이 끔찍한 더위에 원치도 않는 한잔을 꺾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러고 식당을 나오면 습하고 유난히 고온인 이 여름의 자비 없는 열기가 아무리 떼어내려고 해도 당최 떨어지지 않는 옛 애인의 부담스러운 애착처럼 모두를 감싸고. (215)

 

 

가볍고 재밌게 읽은 소설.

이 책만큼은 힘을 빼고 편안하게 읽었던 것 같다.
작가님도 힘을 빼고 편안하게 쓰셨을까?(아니겠지. 글을 쓰는 건.. 편안할 수가 없겠지)

오랜만에 동글동글한 연애와 이어지는 숱한 감정들을 만났다.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우리는 대개 비슷한 마음을 공유하나보다. 
단편 소설들에 실린 표현에 샐죽대고 피식하는 나를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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