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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변치 않는 근본 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답을 제공하기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 문제에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나은 통찰과 자극을 주기에 유의미하다. 그래서 하나의 고전을 성전으로 만드는 대신 지적 네크로필리아들은 과거에 존재했던 다양한 양질의 자극을 찾아서 오늘도 역사의 바다로 뛰어든다. 
그들이 보기에 인간의 근본 문제는 일거에 대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혈압이나 피부 트러블처럼 평생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할 인새으이 동반자이다. 어제 맛있는 케이크를 먹음으로써 인생의 허무라는 근본 문제를 해결한 것 같았어도, 오늘 다시 배가 고파지면 그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인생의 허무란 제거할 대상이 아니라 관리할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보다 맛있는 케이크를 찾아 오늘도 새로 문을 연 제과점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이다. (14)

인생의 허무란 제거할 대상이 아니라 관리할 대상이다. 
내게 근래 필요했던 말일지도 모른다.

 

반면 텍스트 정밀 독해의 관건은 정식화된 절차를 적용할 줄 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독해를 할 수 있는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마치 깊은 울림을 주는 회화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공식화된 붓놀림의 절차를 밟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런 회화를 그릴 수 있는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텍스트를 잘 읽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잘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일종의 '동어 반복'이 텍스트 정밀 독해 방법의 핵심을 이룬다. (22)

세상에서 제일 멋진 동어 반복 아닐까요. 
진짜 김영민 교수님은 글을 참 맛있게도(맛깔나게) 쓰신다. 

 

레오 스트라우스의 추종자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종종 침묵의 의미에 대해 주목했다. 특히 주목한 것은, 박해가 두려워서 침묵한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순간, 그 발화로 인해 이익이 침해당하는 사람, 자존심이 상하는 사람, 시샘을 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못남을 증명할 의무라도 있는 듯 그 발화자를 박해하려 든다. 
특히 그 발화에 담긴 메시지가 기존 질서와 관행을 뿌리째 전복할 수 있을 정도로 불온한 것일수록 박해의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때로는 독배가, 때로는 잘린 말대가리가 소포로 전달된다. 그리하여 발화자는 침묵한다. 그러나 끝내 침묵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비범한 사상가라면 발화가 아닌 침묵의 방식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할 줄 안다. 자신의 말뜻을 이해해줄 사람을 기다리며, 관점을 이동시킬 수 있는 예민한 독해자만 알아보도록, 자신의 진의를 텍스트 어딘가에 침묵의 형태로, 혹은 모호한 표현의 형태로 매설해 놓는 것이다. 후대의 누군가 그 텍스트 위를 지나가며 전두엽이 폭발할 수 있도록. (29)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을 동정심을 발휘하여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구하려 들 것이라고. 그러니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이라고 한 가브리엘 마르셀은 타당하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동정한다는 것은, 그 순간 그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를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것이다. 당신은 죽지 않아도 돼! 신형철에 따르면, "마르셀의 문장은 뒤집어도 진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너를 살리겠다는 뜻인 동시에 너를 살리기 위하여 나도 존재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나는 존재해야만 해! 즉 이 사랑은 내가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82)

 

기만 없이 정확히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힘들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상대에게 투사하는 데 너무 익숙하다. 상대의 정확한 모습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환상을 사랑한 대가는 혹독하다. 사랑의 파국은 대개 상대와 자신에 대해서 부정확했던 사랑의 파국이다. (88)

부정확했던 사랑이 파국의 원인, 섬뜩하지만 날카로운 지적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사랑,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사랑, 정확한 사랑이기에 알몸이 부끄럽지 않은 사랑. 이토록 어려운 과업을 누군가 해내겠다고 약속한다면, 목석같은 사람도 마음을 열지 않을까? 그런 약속을 해주는 사람이라면, 철 지난 개량한복을 입고 프러포즈를 해도 성공할 것만 같다. (89)

그러게 아직은 나도 사랑에 낭만적인 구석이 요만큼은 남아 있어서. 
김영민 교수님이 이어 드는 예가 신형철 교수님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 서문이라니. 하......

 

그렇다면 지하철의 쩍벌남에 대해서 공자는 어떻게 했을까? <논어>에서 딱 한 번 공자가 직접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원양이라는 이가 길가에 무식하게 틀어놓은 유행가처럼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자, 공자는 그에게 "사람들에게 해만 끼치는 놈이다"라고 일갈하며, 지팡이로 그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마치 정확한 미움을 실험하는 것처럼. (96)

 

"70세에, 마음이 욕망하는 대로 해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다." 멋대로 해도 다 도리에 맞는 경지, 스스로 기준이 되는 경지. 이 찬란한 혹은 오만하게까지 들리는 자기 자랑. 더 얄미운 것은, 그러한 경지를 타고난 자질로 가정하지 않고, 부단한 인생 역정 속에서 멈추지 않았던 배움의 결과로서 설정하는 태도이다. 
진정 감탄스러운 것은 나이 일흔에도 여전히 공자는 욕망의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보니 욕망이 사라진다고 말하거나, 오랜 수양 끝에 욕망을 없애는데 성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은 욕망을 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질주해도 여전히 궤도 위에 있는 기차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105)

 

나 역시 그처럼 찬란한 악당의 예를 알고 있다. 그곳은 하나의 신전과도 같은 식당이다. 뭔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일 때면 나 자신을 단죄하기 위해서 그곳에 밥을 먹으러 간다. 그곳의 음식은 정말 맛이 없고 비싸다. 그곳의 음식을 먹고 나면 먹기 전에 비해 확연히 기분이 나빠진다. 이것은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다. 그곳을 드나드는 손님들 모두가 그곳 음식이 맛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 식당은 망하지 않는다. 모기업으로부터 식자재를 싸게 공급받는 데다가, 위치가 절묘하고 근처에 다른 식당이 없으며, 일부 맛없는 음식 추종자들 덕택에 맛 없는 음식을 팔면서도 현상 유지에 성공한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던가. 실수로라도 일 년에 한두 번쯤은 음식을 맛있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언제나 한결같이 맛이 없다. 총장이 오든 학생이 오든 예외 없이 정교하게 맛없는 음식을 제공한다. 이러한 일관성에는 어떤 의도, 어떤 집요한 노력, 혹은 어떤 신학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엄격하게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여기에는 고통의 체험을 통해 죄 많은 손님들을 정화하려는 신학적인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그리하여 나는 속죄할 일이라도 생기면 이 식당으로 일부러 찾아와서 가장 맛이 없는 밥을 먹고 스스로를 정화하곤 한다. 이곳은 '성소聖所'이다. (121)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렇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지하게 웃긴거 너무 좋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후배가 경외의 대상일 수 있는 것은 아직 소진되지 않은 가능성 때문이듯이, 그들의 한계 역시 그것이 아직 가능성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하여, 잠재력의 특징은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잠재력을 제대로 꽃피우는 이는 의외로 많지 않다. 반짝이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어도, 미완의 대기로 그치는 경우는 허다하다. 꽃피우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가 있음을 공자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미완의 대기 노릇이란 얼마나 달콤한가. 미완이기에 완성된 것을 보여줄 부담도 없고, 언젠가 큰 그릇이 될 것이라는 기대만 향유하면 된다. 그러나 노확으로 죽은 이의 묘비명에 "미완의 대기"라고 적혀 있다면 그것은 결코 찬사가 아니다. 미완의 대기 역할은 오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젊은이도 곧 늙고 중년의 나이에 이른다. "나이가 사십이 되어서도 미움을 받는다면, 아마도 끝난 것이다." (232)

미완의 대기. ..

참 달콤하지. 그런데 '대기'의 기준은 누가 주는 것일까? 
제일 못난 것은 스스로 '대기'라고 일컫고 스스로 '미완'을 완수하는 것이겠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운 것 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건 '말 전달 놀이'다. 선생님은 맨 앞에 앉은 학생에게 귓속말로 어떤 메시지를 건넨다. 그러면 그 학생은 자기 뒤에 앉은 학생에게 역시 귓속말로 그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런 식으로 교실 맨 끝에 있는 학생에 이르면, 메시지의 내용은 원래 내용과 크게 달라져 있다. 이러한 놀이를 통해 선생님은 메시지 전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전달 과정을 통해 메시지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음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261)

 

 

 

워낙 글을 잘 쓰셔서 재밌게 읽었지만, 전작에 비하면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가만하게 들여다보면 전작에 대한 ㅂ부장님의 소감을 알고 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하여간 나는 참 ㅂ부장님을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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