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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하면 화낼 만도 한데 노아 선배는 이상하게 분노에 휩싸이지도 속을 끓이지도 않았다. 선배는 국화를 참아냈고 그렇게 선배가 참는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마음이 서늘했다. 그 모든 것을 참아내는 것이란 안 그러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절박함에서야 가능한데 그렇다면 그 감정은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22)

 

그날 우리는 햄버거를 사다가 동아리방에서 먹고 있었는데, 선배가 생일 선물이라며 국화 앞에 상자를 내밀었다. 휴대전화였다. 그런 선물이란 나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무지갯빛 종이로 포장된 그것을 보면서 나는 실망이라고 하기에는 좀더 비참하고 상실감이라고 하기에는 그럴 만한 게 있었는지 여부가 불확실한 감정에 휩싸였다. (23)

 

처음에는 가슴 아팠지만 차츰 선배를 향한 내 마음도 부피를 줄여갔다. 가장 먼저 선배에 대한 감각-목소리, 얼굴, 체취, 어쩌다 닿았을 때의 몸의 느낌-이 희미해졌고 다음에는 사실이나 정보 같은 것이 사라져서 과거의 일들이 불명확해졌다. 그때 누구의 생일날 선배가 왔었던가. 그 교양수업을 선배가 들었던가. 그때 선배가, 선배가, 있었던가. 마지막으로는 삼차원이라고 할 만한 감각에 공동空洞이 생겨났는데 이를테면 이러한 변화였다. 술에 취한 채로 영화관에 들어가 <나라야마부시코>를 보고 나서 거리를 걸었을 때 분명 선배와 나 사이를 넘나들었던 감정의 서라운드 같은 것. 그때 우리는 산다는 것의 비참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당장이라도 무언가 깊숙한 포옹이나 구애의 말을 해야 할 듯한 다급함으로 몸을 떨었다. 하지만 연락이 끊어지자 그 기억의 입체감은 사라졌고 그 일은 그냥 어느 한밤의 수상쩍은 산책 같은 것으로 남게 되었다.
시간의 힘은 대단했고 예외는 없는 듯했다. (27)

 

물론 규칙을 어긴다고 사장이 다른 매정한 작업장처럼 임금을 깎거나 벌점을 주지는 않았지만 불같이 화를 냈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패널티를 받아야 한다는 건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다. (44)

오우........ 이거 진짜 뼈에 새길 것.......... 이거 찐임. 진짜 감정적 패널티는 으으으..

 

그렇게 해서 나는 밧줄도 잡을 것도 없는 비탈길을 엉거주춤 균형을 잡아가며 내려왔다. 눈발은 전보다 더 세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젖은 눈이라 앞사람이 밟고 지나간 뒤에는 그 발자국만큼 눈이 녹아 있었다. 그렇게 눈을 녹이는 것이었다. 붙들 것이 없다면 그냥 자기가 걸어서. 이만하면 그래도 나쁘지 않고 무사한 안녕이 아닌가. (59)

 

낸내를 만날수록 내게는 그런 질문들이 떠올랐고 그때마다 기생각이 났다. 그런 의문들은 감상적인 것이고 기의 동력으로 겨우 꾸려나가는 우리의 결혼생활을 아슬아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궁금함은 이미 일상에 깊은 자국을 내고 있었다. 그것은 낸내를 만나러 갈 때마다 깊어져 구덩이가 되더니 스산한 바람이 통하고 원주가 넓은, 마침내 곰 한 마리는 넉넉히 살 만한 굴의 형태로 바뀌었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거나 속되게는 바람이 났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싶진 않았지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면 문득 혼자 있고 싶어지면서 기에게서 좀 떨어지게 몸을 돌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순간에 그 여자, 낸내가 똑 떨어지게 그리웠던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내게는 그렇게 몸을 누일 굴이 있다는 것, 어딘가에 그런 것이 있다는 감각만이 중요했는지도 몰랐다.  (84)

 

그러면 유나는 어디 가- 하고 소매를 잡아끌듯 뒤에서 물었고 나는 묻는 말이 반가우면서도 대답을 않거나 혹은 어디 가, 라고 짭게 끊은 말로 돌려주었다. 말끝을 올리고 내리는 것으로 누군가는 남겨지고 누군가는 옮겨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 어쩌면 세상의 많은 일들은 그런 사소한 변별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에 대해 그후로도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99)

 

유나는 부모가 자신의 미래에 그렇게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특유의 쿨함으로 넘기려 하면서도 때때로 서운함이 이는 듯했다. 아주 죽이 잘 맞아들, 하면서 집안 분위기를 요약하곤 했다. (105)

 

초등학생 때부터 쓰던 방이라도 도저히 그 방에 있을 수 없는 감정이 별안간 생겨나기도 한다는 걸 부모는 끝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갑자기 그런 것이 어떻게 생겨나 이토록 난폭하게 뒤흔드는지. 나는 더 나이가 든 뒤에야 그런 마음이 두려움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유나와 내 관계에서 상대를 믿지 못한 건 내가 아니었을까, 하는. 연가가 연가가 아니게 되면서 무섭게 종결되는 순간이 싫었던 것은 그게 내가 만성으로 젖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그 모든 이해는 나중의 일이었다. (126)

 

송은 양에게 애정을 느끼다가도 어떤 대상과 가까워질 때마다 드는 복잡한 결의 불편함을 끝까지 참아내지는 못했다. 자기 내부에서 느껴지는 냉소, 환멸, 혐오감 같은 것들, 부담들을. (143)

 

하지만 기차가 빠르게 대구를 벗어날수록 그런 말들은 머릿속에서 길게 이어져 결국 송은 양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 여기를 떠나는지, 이제 아주 떠나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지 궁금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그렇게 만날 수 없는 사이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으니까. (155)

 

송은 문득 내가 나빴지, 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런 나쁘지 않음에 대한 기대, 이를테면 속죄 같은 것은 그 공허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지 않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 (158)

 

김수정은 일 관계로 만난 사람들과 그런 친분을 맺고 싶지 않았지만 책 만드는 일이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그런 과도한 친교 활동까지 해야 하느냐고 생각하면서도 필자를 만나면 어느덧 팔로우를 하고 친구로 추가해 성실히 좋아요를 누르고 있었다. 김수정은 편집자 일이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 게 아닐까, 종종 생각했다. 그저 조용히 활자나 다루면서 고독하지만 생산적으로 인생을 보내고 싶을 뿐이었는데. (166)

 

그때 운주는 연료통이 거의 빈 차를 끌고 우리 아파트 앞으로 와서 작별 인사를 했다. 하필이면 벚꽃이 가지마다 무더기로 피어서 이제는 운주의 소유가 아닌 중형 세단 위로 하늘하늘 떨어져내렸다. 그 장면은 4월의 봄밤다운 낭만적인 풍경이었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결별에 필요한 충분한 양의 분노와 냉소와 환멸이 차오르고 있었다. (198)

슬퍼 ㅜㅜ.......  너무 사실이라 더 슬프다.

 

그쪽 굴뚝에만 연기가 나는 걸 내가 동상이 걸린 발로 울면서 봤다고요. 셋째숙부는 그때 동상에 걸려 아직도 발바닥이 아프다고 했다. 거기에 얼음이 아주 박혀버려 겨울마다 다리를 절며 걷는다고.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몇십 년 전 얼음이 어떻게 아직도 거기 박혀 있어요?"
"다정아 그게 그런 게 아니야. 그렇게 언 발에는 얼음이 박힌다. 그게 봄여름 잠깐 숨었다가 겨울 되면 다시 나타나. 안 사라져, 꼭 타나나는 거야." (217)

 

할말이 있으면 다가가서 아주 조그만 소리로 현경, 이라고 하거나 어깨를 두드리거나 손목을 잡았다. 이름을 부를 때는 몰라도 내가 어딘가 신체 접촉을 하면 현경은 약간 움찔했는데, 나는 그렇게 잠깐 굳었다 풀리는 현경의 긴장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다. 어쩌면 현경은 좋아하는 친구와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거나 하는, 그런 자연스러운 친교에도 익숙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226)

나도.

 

그래도 K는 엄마가 '그곳'에 있는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외판원으로 일하던 시절에는-휴대전화도 없었으므로-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 텅 빈 집에서 엄마의 동선을 상상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머릿속에서 엄마는 멀미를 참으며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가서 어느 골목을 걷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있었다, 살 것을. 최선을 다해서 살 것을. (254)

와 이렇게 멋진 문장을. ㅠㅠ 하... 자까님....ㅠㅁㅠ

 

그렇게 해서 비닐봉지를 들고 나가는 그 순간, 그는 스스로 꿈꾸는 어떤 세계, 취향에 따라 샴푸를 고를 수 있는 백인 소녀의 세계, 혹은 혁명을 꿈꾸는 일개미의 세계,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아니면 리듬에 맞춰 춤을 추면 일순 몸을 드러내는 어떤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아주 닫혀버리는 기분이었다. (259)

 

물론 연애도 했다. 하지만 애인들에게조차 자신을 이해기키려는 성의가 없었으므로 오래가지 못하고 시든 배추처럼 종결되곤 했다. K는 실연을 경험하고 나서도 그다지 아프지 않았고 도리어 고양감 같은 것을 느꼈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상처를 치유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깊게 깊게 파고들어가면서 곪고 썩어가는 과정을 괴상한 희열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이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치명적인 고통에 대해 깨닫지 못한 어떤 마비 상태이기도 했지만 어떻든 그것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열도를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63)

 

그 나이 때의 사랑이란 아무리 과용량을 섭취해도 축적되지 않고 몸밖으로 다 빠져나가고-마치 수용성 비타민처럼- 남지 않는다고 K는 생각했지만 무려 네 사람에게 퍼부었다는 사랑은 문제는 문제였다. (266)

 

그사이 K는 울지는 않고 손을 떼서, 멀어지는 여자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K는 여자가 늙었다는 것, 여자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마침내 늙어버렸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적어도 여자는 거부하지 않았음을, 살 것을. 최선을 다해 살 것을. 여자가 했다면 자기도 할 수 있을 것이었다.여기 이 도시에서 어떤 무게를 감당하면서 거짓말처럼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272)

여기 이 도시에서 어떤 무게를 감당하면서 거짓말처럼 살아내는구나 우리 모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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