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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펀치
나와 원준은 손을 잡고 길 한가운데로만 걸었다. 걸으면서, 나는 어제 원준이 한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물론 살면서 누군가를 끔찍하게 미워해본 일이 있었고 눈물 나게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한 적도 많았는데 그러고 보니 그것들은 다 어떻게 되었더라. 내 속에서 싫다, 싫다 하며 몇 번이고 되뇌어지다가 결국, 사라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 사라지는 과정이 지난하고 복잡했을지언정 확실히 사라졌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던 분노도 평생 잊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원한도 시간이 지나면서 없던 일처럼 없어졌다. 딱히 없애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없어졌다. 그 일이 없던 일이 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쁜 감정은 틀림없이 사라졌고 그땐 그런 더럽고 괴로운 일이 있었어, 하고 떠올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건 분명히 내 몸 어딘가에 있는 무슨 기관이 작동한 결과임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선명하던 것들이 이렇게 감쪽같이 무뎌질 수가 있을까. 이런 것들을 오래 품고 있으면 올바르게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 나를 다시 안온한 상태로 되돌리는 역할을 맡은 어떤 기관이 열심히 일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원준은 너무 많은 괴로움을 그대로, 그대로 받아들이다 결국 어느 날 아침 별안간 브로콜리가,
그렇다면 원준의 손이 낫고 나면 원준은 어떻게 하는 게 옳을까. (101)
그러고 보니 원준이 복싱을 그만두고 싶다는 얘길 내게 하지 않은 것이 새삼 조금 섭섭했다. 평소에는 세상 오만 것들에다 제 느낌과 견해를 떠들어대는 녀석이, 정작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고런 중요한 일에 대해선 입을 꾹 다문 채 그 지경까지 혼자 괴로워했다니. 그런 건 좀 터놓고 얘기하면 얼마나 좋아, 우리 사이에. 나는 어둠 속을 향해 혼자 입을 삐죽거렸다. 하긴 얘기했다 한들 내가 뾰족한 대책을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긴 했다. 맛있는 걸 사 줄까, 아님 시원하게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올가, 하며 기분을 풀어주려고 안감힘을 쓰기야 했을 테지만. 어젯밤 박광석 할아버지가 안필순 할머니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 사람들이 대개 비슷하구나, 실의에 빠진 연인을 달래는 방식은. (111)
왜가리 클럽
"우리 중학생 막내가, 유별나게 속을 썩이는 앤데요. 왜가리를 보니까 참 쟤는 쟤네 부모가 어떻게 가르쳤길래 저렇게 고기를 똑부러지게 잘 잡나 싶은 거예요. 첨에는 그렇게 부러워하면서 내내 봤는데 보다 보니 알겠더라고요. 가르쳐서 되는 게 있고 스스로 배워야 하는 게 있다는 걸." (170)
실은 나도 있었다, 왜가리를 보고 생각했던 것이. 왜가리는 그 생김새도 미끈하니 좋고 물고기를 잡는 모습도 노련하여 멋있었으나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사냥에 실패했을 때였다. 오랫동안 도사리고 집중해 부리를 내리 꽂았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물방울만 사방에 튀기며 고개를 드는 왜가리가. 분명 나였다면, 아니 사람이었다면 민망하여 헛기침이라도 한 번 하며 혹시 누가 이 창피한 꼴을 보지는 않았나 슬쩍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법한 보기 좋은 실패였다. 하지만 왜가리는 그렇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패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같은 무게로 여기는 것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그도 그럴 것이 고기를 잡았다고 해서 왜가리가 특별히 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왜가리에게는 그저 매번 잘 노려서 잘 내리꽂는 것만이 중요했고 그 뒤의 일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모두 같았다. 그것이 멋있었다고, 가슴이 뻐근하도록 부러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인간에게 가능한 일인지 조차 알 수 없으나 그저 사는 동안 조금이라도 닮아보고 싶다고,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172)
평평한 세계
조그맣고 동그란 눈이며 뭉툭한 코 주변으로 흉한 주름이 자글자글한 탓이었다. 평생 인상을 찌푸리고 살아온 사람들이 나이 들어 갖게 되는 그런 주름이. 자기 보다 약한 사람에게 소리 지를 때, 그 고함의 절반은 자기 얼굴에 도로 가서 들러붙게 된다. 그것들이 얼굴의 팬 곳곳마다 고이고 묵어서 꼭 저런 모양으로 남는 것이다. (230)
이구아나와 나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상황이 기어코 벗어난 과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안전해 보이던 발밑이 사실 천 길 낭떠러지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처럼 갑자기 무섭고 아뜩해진 것이다. 나, 이렇게 위기의식 없이 살아도 괜찮은 걸까. 자기가 삶아지는 줄도 모르고 태평한 냄비 속 개구리처럼, 나도 언젠가 인생이 망했고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걸 갑자기 눈치채는 날이 오는 거 아닐까.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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