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람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21;
그 당시 토마시는 은유란 위험한 어떤 것임을 몰랐다. 은유법으로 희롱을 하면 안 된다.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아.. 진짜 맞는 말.
은유란 위험한 어떤 것이라니, 날카롭다.
사랑은 정말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27;
그날 이후 두 사람 모두 잠까지 함께 잘 수 있다는 것이 미리 즐거워했다. 나는 그들이 정사를 나누는 목적은 관능성이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지는 잠에 있었노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테레자는 그가 없으면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혼자만 원룸에 있을 경우 (그것은 점차 하나의 구실에 불과해졌는데) 밤새 한잠도 자지 못했지만 극도로 불안해하다가도 토마시의 품 안에서는 언제나 차분해지곤 했다. 토마시는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그녀만을 위해 꾸며 낸 옛날이야기를 해 주거나 위로의 말, 혹은 우스갯소리를 단조로운 어투로 되풀이하곤 했다. 이러한 말들은 테레자의 머릿속에서 흐릿한 영상으로 변했다가 이내 그녀를 첫 꿈으로 인도하곤 했다. 그는 그녀의 잠에 대해 절대적 권력을 행사했고, 그녀는 토마시가 원하는 순간에 잠들어 버렸다.
28;
토마시는 생각했다. 한 여자와 정사를 나누는 것과 함께 잔다는 것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거의 상충되는 두 가지 열정이라고.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이 욕망은 수많은 여자에게 적용된다.)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이 욕망은 오로지 한 여자에게만 관련된다.)
!!
38;
동정에 대한 악마적 능력을 갖지 못한 자라면 테레자의 행동을 매몰차게 비난했을 것이다. 타인의 사생활은 신성하며 누구도 타인의 편지를 정리한 서랍을 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토마시는 동정이 그의 운명(혹은 저주)이 되었기에 서랍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으로 쓴 사비나의 편지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인 것처럼 느꼈다. 그는 테레자를 이해했고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다.
42;
그는 출구가 없는 상황에 빠져 있었다. 애인들 눈에 그는 테레자에 대한 사랑의 도장이 찍힌 사람으로 보였고, 반면 테레자의 눈에는 이미 애인들과 나눈 사랑 편력의 도장이 찍힌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49;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 테레자의 망명 욕구를 토마시는 죄인이 유죄 선고를 받는 듯 받아들였다. 그는 그 선고에 따라 얼마 후 테레자, 카네닌과 함께 스위스의 가장 큰 도시에 있게 되었다.
51;
테레자와 사비나는 그의 삶에 있어서 두 극점, 서로 멀리 떨어져 화해가 불가능하지만 하나같이 아름다운 극점을 표상했다.
54;
토요일 저녁이 시작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혼자 취리히 거리를 산책했고 자유의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거리 모퉁이마다 연애의 가능성이 널려 있었다. 미래는 다시 하나의 신비로 되돌아갔다. 그는 오로지 독신으로만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살 수 있으니 자신의 운명은 그런 것이라고 굳게 확신했던 삶, 독신자의 삶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는 테레자에게 얽매여 칠 년을 살았고, 그녀는 그의 발길 하나하나를 감시했다. 마치 그의 발목에 방울을 채워 놓은 것 같았다. 이제 그의 발걸음은 갑자기 훨씬 가벼워졌다. 거의 날아갈 듯했다.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마술적 공간 속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을 만끽했다.
57;
그는 정상으로 돌아오려고 노력했다. 생각하지 마라! 생각하지 마라! 난 동정심이라는 병을 앓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떠나서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가 아니라 동정심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전에는 몰랐지만 그녀가 병균을 주입한 이 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동정심으로부터 벗어난다, 슬프지만 정확한 말이다.
61;
그렇다, 취리히에 남아 파라하에 혼자 있는 테레자를 상상하는 것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동정심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을까? 일생 동안? 한 달 동안? 딱 일주일만?
63;
잠든 테레자 곁에서 뒤척이다가 몇 년 전 그녀가 무심코 던진 말이 떠올랐다. 그들이 친구 Z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그녀가 말했다.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틀림없이 그를 사랑했을 거야.”
당시에도 그 말을 듣고 토마시는 야릇한 우울함에 빠졌더랬다. 테레자가 그의 친구 Z가아닌 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철저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가능성의 왕국에는 토마시와 이루어진 사랑 외에도 실현되지 않은 다른 남자와의 무수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69;
그러나 그토록 자기 육체를 등한시하다간 쉽게 육체의 희생자가 되는 법이다. 토마시와 마주 선 그 순간 자기 배가 발언권을 행사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황당함이란! 그녀는 거의 울음보가 터지려 했다. 다행히도 십 초 후 토마시가 그녀를 껴안아 줬고, 그녀는 배의 목소리를 잊을 수 있었다.
72;
그러나 누군가를 미친 듯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창자가 내는 꾸르륵 소리를 한번 듣기만 한다면,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과학 시대의 서정적 환상은 단번에 깨지고 말 것이다.
82;
그녀는 한때 그녀가 과대평가했던 젊음과 아름다움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지나간 삶과 엄숙하게 결별하고자 철저하게 뻔뻔해졌다.
88;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중략)
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특히 사랑에서 우연이란 필연적 요소가 된다.
우연이 낭만을 더해주고, 우연이 필연성을 더해준다. (알랭드보통의 책이 떠오른다)
92;
우리의 일상적 삶에는 우연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소위 우연의 일치라고 부르는, 사람과 사건 간의 우연한 만남들이 일어난다.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순간 토마시가 술집에 등장하는 것처럼. 이러한 엄청나게 많은 우연의 일치를 우리는 대개 완전히 무심결에 지나쳐 버린다. 토마시 대신 동네 푸줏간 주인이 테이블에 앉았다면 테레자는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것에 주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 싹트는 사랑은 그녀의 미적 감각의 날을 날카롭게 세웠다. 그녀는 그 음악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매번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녀는 감격할 것이다. 그 순간 그녀 주변에서 일어날 모든 일은 그 음악의 찬란한 빛에 물들어 아름다울 것이다.
93;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103;
테레자는 자신이 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꿈을 통해 토마시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녀는 모든 육체가 평등했던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와 함께 살러 온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와 함께 산 것이다. 그런데 이제 토마시 역시 그녀와 다른 여자들 사이에 평등의 선을 그었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모든 여자에게 키스했고 같은 식으로 애무했으며 테레자의 육체와 어떤 구별도, 정말 추호의 구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벗어났다고 믿었던 세계로 그녀를 되돌려 보낸 셈이다. 그는 다른 벌거벗은 여자들과 함께 행진하라고 그녀를 내몰았던 것이다.
106;
끊임없이 ‘신분 상승’을 원하는 자는 어느 날엔가 느낄 현기증을 감수해야만 한다. 현기증이란 무엇인가? 추락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튼튼한 난간을 갖춘 전망대에서 우리는 왜 현기증을 느끼는 것일까?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151;
그들은 그들이 서로에게 했던 말의 논리적 의미는 정확하게 이해했으나 이 말 사이를 흘러가는 의미론적 강물의 속삭임은 듣지 못했던 것이다.
사비나가 그 앞에서 중산모자를 썼을 때, 프란츠는 마치 누군가가 미지의 언어로 그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이 행동이 음탕하다거나 감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의미의 부재로 인해 그를 당황케 하는 난해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우리 둘만 가진 의미의 의미.
159;
그녀는 음악의 소음화가 인류를 총체적 추함이라는 역사적 단계로 밀어붙이는 세계적 과정임을 확인했다. 추함의 총체적 성격은 우선 도처에 편재된 음향적 추함으로 발현되었다. 자동차, 오토바이, 전기 기타, 파쇄기, 확성기, 사이렌. 시각적 추함의 편재도 이에 뒤질세라 나타났다.
185;
그러나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프란츠는 강하다. 그러나 그의 힘은 오직 외부로만 향한다. 그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는 약하다. 프란츠의 허약함은 선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프란츠는 사비나에게 결코 명령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예전 토마시처럼 바닥에 거울을 놓고 나체로 걸어 다니라고 명령하진 않을 것이다. 그에게 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명령할 힘이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폭력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있다. 육체적 사랑이란, 폭력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186;
“당신 힘을 가끔 내게 쓰지 않는 이유가 뭐야?”
“사랑한다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지.”라고 프란츠가 부드럽게 말했다.
사비나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이 말은 아름답고 진실하다. 둘째, 이 말 때문에 프란츠는 그녀의 에로틱한 삶에서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에로틱한 삶에서 자격을 상실하는 것과 아름답고 진실한 것.
참 어렵다.
187;
사비나에게 있어 진리 속에서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사비나는 작가가 자신의 모든 은밀한 삶, 또한 친구들의 은밀한 삶까지 까발리는 문학을 경멸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202;
사비나는 그녀를 둘러싼 공허를 느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허가 그녀가 벌인 모든 배신의 목표였다면?
물론 지금까지 그녀에게 이런 의식은 없었고,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사비나 역시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목표일까? 제네바를 떠나온 이래 그녀는 이 목표에 부쩍 가까워졌다.
205;
그녀가 프란츠에게 묘지에서 산책한 일을 이야기했을 때, 그는 몸서리를 치며 묘지를 뼈와 돌조각의 하치장에 비교했더랬다. 그날 그들 사이에 몰이해의 심연이 깊게 팼다. 오늘에 와셔야 몽파르나스 묘지에서 그녀는 그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기에게 참을성이 없었던 것을 후회했다. 함께 더 오래 있었더라면 그들은 조금씩 그들이 사용했던 단어들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어휘는 너무도 수줍은 연인들처럼 천천히 수줍게 가까워지고, 두 사람 각각의 음악도 상대편의 음악 속에 녹아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제 너무 늦었다.
222;
집단 수용소, 그것은 밤낮으로 서로 뒤엉켜 사는 세계였다. 잔인성과 폭력은 이 세계의 부수적(전혀 필연적이지 않은) 측면에 불과했다. 집단수용소, 그것은 사생활의 완전한 청산이었다.
226;
더 이상 테레자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신체 각 부위가 커지거나 작아진다면 그래도 여전히 자기 자신일까? 여전히 하나의 테레자로 남을 수 있을까?
당연하다. 테레자가 전혀 테레자를 닮지 않았다고 가정해도 그녀의 영혼은 언제나 변함없을 것이며 그녀 육체에 일어난 일을 경악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렇다면 테레자와 그녀 육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녀의 육체는 테레자라는 이름에 대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육체에 이런 권리가 없다면, 그 이름은 무엇과 관련되는 것일까? 오로지 비육체적이며 비물질적인 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258;
그때 뭔가 잊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방에 있는 그를 만나서 그의 목소리, 그의 부름을 듣고 싶어졌다. 그가 부드럽고 나지막한 소리로 그녀에게 말한다면, 그녀의 영혼은 다시 과감하게 육체의 표면까지 떠오를 것이며, 그녀는 울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녀는 꿈속에서 커다란 마로니에 나무 둥치를 껴안았듯 그를 감싸 안았을 것이다.
현관에 서서 그녀는 그의 면전에서 펑펑 울고 싶은 커다란 욕망을 애써 억눌렀다. 그것을 자제하지 못한다면 원치 않는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사랑에 빠질 것이다.
그럴 수 있지. 그런 때가 있지.
271;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미래로 도망친다. 그들은 시간의 축 위에 선이 하나 있고 그 너머에는 현재의 고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테레자는 자기 앞에 이 선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뒤돌아보는 시선만이 그녀에게 위안이 될 뿐이었다.
321;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어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쟁취하는 것이, 나의 자아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335;
젊은 여자는 폭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거의 꿈꾸는 듯한 미소를 지었고, 그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거의 수치심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뭔가 아름다운 것을 체험 했는데, 자신은 그녀와 더불어 그것을 체험하지 못한 것이다. 한밤중의 폭우에 대한 그들 기억의 이분법적 반응은 사랑과 비-사랑 사이에 있을 법한 차이점을 드러낸 것이다.
336;
뇌 속에는 시적 기억이라 일컬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지대가 존재해서 우리를 매료하고, 감동시키고, 우리의 삶에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 기록되는 모양이다. 토마시가 테레자를 안 후부터 어떤 여자에게도 그의 뇌 속에 있는 이 지대에 아주 사소한 흔적조차도 남길 권리가 없었다.
337;
사랑의 역사는 그 후에나 시작되었다. 그녀의 몸에서 열이 나는 바람에, 그는 다른 여자들에게 그랬듯이 그녀를 돌려보낼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자 불현듯 그녀가 바구니에 넣어져 물에 떠내려 와 그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은유가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이미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357;
그리고 다시 한 번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380;
만약 흥분이 창조주가 재미 삼아 즐기는 기계 장치라면, 사랑이란 오로지 우리의 권능에만 속한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창조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사랑, 그것은 우리의 자유다. 사랑은 “es muss sein!”을 초월하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의 자유라니.
384;
그렇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들 각자에겐 과거에 한 몸을 이루었던 반려자가 이 세상 어디엔가 있다고. 토마시의 다른 반쪽은 그가 꿈에서 보았던 그 젊은 여자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다른 반쪽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신 테레자 같은 여자를 바구니에 넣어 그에게 흘려보낼 것이다. 그런데 훗날 그에게 숙명적인 여자, 자신의 또 다른 반쪽을 진짜 만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누구에게 호감을 주어야 할 것인가? 바구니 속에서 발견한 여자인가? 아니면 플라톤 신화의 여자인가?
399;
말하자면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404;
키치의 왕국에서는 가슴이 독재를 행사한다.
411;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적대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에 숨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이다. 사비나가 테레자에게 자기 그림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앞은 이해 가능한 거짓말이고 그 뒤로 가야 이해 불가능한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415;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 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439;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을 도와주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448;
문득 캄보디아 여행이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하게 보였다. 도대체 왜 이곳까지 왔을까? 이제 와서야 그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가 이 여행을 한 것은 자신의 진정한 삶, 유일한 실제 삶은 행진도 사비나도 아니며 안경 낀 여학생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였다! 현실이란 꿈을 뛰어넘는 것, 꿈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란 확신을 갖기 위해 그는 여행을 했던 것이다!
478;
그녀는 자기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고 (개는 자고 있지 않았다.) 자기가 남의 아픈 곳을 찌르고 싶어 하고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 해야 하는지 통달한 가장 천박한 여자처럼 행동하고 있음도 알았다.
481;
그녀에게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은 (적어도 여러 형태 중에서 최상의 경우라도) 본질적으로 개와 인간 사이의 사랑보다 열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간 역사의 이러한 기형태는 아마도 조물주가 계획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다. 테레자는 카네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 한 쌍을 괴롭히는 질문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그가 나를 사랑할까? 나보다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할까? 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탐색하고 검토하는 이런 모든 의문은 사랑을 그 싹부터 파괴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사랑)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도 있다. 테레자는 카네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를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바꾸려 들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그가 지닌 개의 우주를 수락했고 그것을 압수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의 은밀한 성향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녀가 개를 키운 것은 그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남편이 부인을, 그리고 여자가 남자를 바꾸고 싶어 하는 것처럼) 단지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함께 살 수 있도록 그에게 기본적인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중략)
카네닌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테레자에게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매일같이 입에 크루아상을 물고 다니는 게 이제 재미없어. 뭔가 다른 것을 찾아줄 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2017년에 읽었을 때도 지금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이 구절?
지금은 조금 충격적이다.
493;
공포는 하나의 충격, 완벽한 맹목의 순간이다. 공포에는 모든 아름다움의 흔적이 결핍되어 있다. 오로지 우리가 기대하는 미지의 사건이 내뿜는 광폭한 빛만 보일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슬픔이란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을 상정한다.
500;
“내가 왜 이리 고집불통인지 나도 모르겠어. 어느 날 결심을 하면 왜 그런 결심을 했는지조차 모르면서 그 결심에는 자기 고유의 관성이 생기는 거야. 세월이 흐를수록 그것을 바꾸는 게 더 힘들어.”
501;
그녀는 그가 자기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고 속으로 항상 그를 비난했다.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에는 조금도 흠잡을 데가 없지만, 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단순한 자만심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3년만에 리뷰를 쓰는건가,
2017년 여름즈음의 나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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