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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통령인 이승만은 반공과 통일을 목표로 단일민족의 혈통과 공동운명을 강조하는 '일민주의' 이념을 세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통령 자신의 부인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성이었다. 부계혈통 가부장제에서 아내가 외국인인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국적법에서 '대한민국의 국민의 처가 된 자'는 자동적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혼혈'을 모두 해외로 보내려고 할 정도로 '순혈'을 강조하면서도 남성의 피만을 고려하는 부조화가 그때 한국사회에서는 이상하지 않았나보다. (80)
때때로 가장 강력한 차별은 온정적인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태어날 아이의 불행을 예고하는 염려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출산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온정적인 염려와 경고를 보냄으로써, 세상의 차별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계속될 것임을 기정사실화한다. 그리하여 실제로 닥치는 불행은 오롯이 출산을 '선택'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결국 그렇게 차별을 보존하고 전승하며 어떤 집단의 미래를 영구적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행위에 (의도치 않게) '가담'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어떤 사람들을 이 땅에 오지 못하게 막는 행위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91)
당시 정부 측은 한센인들이 수술에 동의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를 '동의'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동의는 "자유롭고 진정한 의사"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사회적 편견과 차별, 열악한 사회, 교육, 경제적 여건 등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동의는 사실상 공권력에 의한 강제라고 보았다. (93)
흔히 한국의 전통으로 떠올려지는 남성 중심의 대가족도 지배계급인 양반이 추구하던 모습일 뿐이다. 예컨대 천민계급인 노비는 소유주인 양반의 필요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 실상 1인 가족이 많았다고 한다.
근대에 들면서 한국에서도 '능력 있는 가장'과 쌍을 이루어 '전업주부'라는 이상이 등장하였는데, 이는 장경섭의 표현에 따르면 "가족문화의 귀족화"를 추구한 결과였다. 바꿔 말하면,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가족모델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105)
여성의 경제활동을 당연시하면서도 여전히 성별분업의 이념을 버리지 않는 이율배반이 존재한다. 이런 이율배반 속에서 고용상의 불평등을 계속되고, 여성에겐 일도 가족도 불안한 삶의 조건이 된다. (118)
통상 교육이란 학생이 지식을 배우고 관심을 갖고 탐구하게 돕는 과정이다. 하지만 성교육만큼은 성에 관해 두려워하게 하고 호기심을 없애려 했다. 성적 발달이 왕성한 시기지만 성적으로 순진무구한 청소년을 만드는 이 어려운 과업을 성교육이 맡아왔다. 그런데 성을 둘러싼 이 익숙한 공포가 무엇을 지키기 위한 것인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126)
사실 사람들이 가족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면서 머릿속으로 '결혼 가능성'이나 '거래'를 계산하고 있을 리 없다. 다만 알게 모르게 당연하다고 믿어온 오래된 가족질서에서 벗어나는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불안의 감정이 덮치는 건 사실이다. 이러한 분노와 배척은 가족제도로부터의 일탈을 통제하는 무력이고, 궁극적으로 가부장제를 유지시키는 정교한 톱니바퀴다. 그러니 단순히 여성의 교육과 고용의 증진으로 가부장제가 간단히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면 서툰 기대가 아닐까. 가부장제는 가족이 가족에게 행하는 성적인 통제와 잔인한 폭력을 통해서도 연명하고 있다. (140)
동질혼 경향은 전소득계층에서 나타나지만 소득이 낮은 계층에게 동질혼은 불리하게 작용한다. 남편의 소득이 낮으면 여성이 일을 해야 하는데, 이때 여성의 일자리는 주로 비정규직으로 가구소득을 크게 끌어올리지 못한다. 반면 고학력 동질혼을 한 여성은 남편의 소득이 높아서 직장을 다니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 생길 수 있다. (157)
가족을 통한 계층 세습은 가족기리 재산을 공유하게 돕는 이런 제도와 무관하지 않다. 일반적인 사회관계와 달리 가족 사이에는 부양의 명목으로 돈이 상당히 자유롭게 이동한다. 노동의 대가로 소득을 쟁취하는 치열한 사회에서, 당당하게 불로소득을 요구하는 세계가 가족이다. 이렇게 설계된 제도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족에게 더 유리하게 작동한다. 가령 교육비에 지출할 재려이 충분한 가족은, 교육비에 대한 세금도 감면받으며 부모로부터 자식에게로 사회경제적 지위를 대물림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부모는 자식에 대한 부양의무를 충실히 수행한 훌륭한 양육자라는 인정도 받는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세금을 면제받거나 공제받는 게 무슨 혜택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통상 국가가 직접 자금을 제공하는 방식만을 지원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때때로 국가는 세금을 감면함으로써 같은 효과를 얻는다. 연말정산에서 부양가족공제를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부양비용을 지원하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런 후자의 방식은 가진 것이 있는 사람이라야 혜택을 누린다. 그렇지 않은 이는 혜택과 무관하다. 게다가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가족에게 받을 수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얻어야 하는데, 그럼 이자든 세금이든 지출해야 할 수 있다. 가난해서 돈이 더 많이 드는 아이러니다. (162)
이런 제도가 가족 간 불평등을 얼마나 해소할 수 있을까? 가족부양을 우선으로 하는 사회보장제도 안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는 일은, 마치 가족의 실패를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는 것과 같다. 가족이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국가의 지원을 받을 자격을 얻기 때문이다. '가족의 실패'가 사회보장의 전제요건이 되면서, 사회복지제도는 마치 가족이 없는 자들을 위한 낙오된 세계인 것처럼 만들어졌다. 한국전쟁 후의 '고아'와 '미망인'부터 오늘날의 장애인, 노숙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복지시설에서 집단적으로 생활한다. 이들은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시설에 오고, 또 시설이 있기에 자유로이 가족을 형성할 수 없는 덫에 빠진다. (165)
'가족관계'로써 신분을 증명한다는 말은, '나'라는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가족 구성원의 정보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다른 가족 구성원도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면서 내 정보를 공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183)
수많은 아동들이 가족 배경을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차별을 겪는다. 아동이 겪는 온갖 놀림과 괴롭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족 형태, 가족소득, 가족 구성원의 특징 등 가족에 관한 이유 때문인 경우들이 많다. 가족의 상황이 아동들 사이에 권력관계를 만든다. 흔히 그렇게 태어났은 어쩔 수 없다며 운명으로 받아들이곤 하지만, 이는 가장 부정의한 불평등이기도 하다. 어느 가족에게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누구는 존중을 받는 반면 누구는 무시를 당하고, 누구는 풍족한 기회를 얻는 반면 누구는 생존도 어렵다면, 벌거벗은 아기 때부터 우리의 몸에 계급이 새겨져 있다는 뜻인 거다. (191)
장경섭은 '가족도덕'의 회복을 강조하는 정치적 기조의 이면에, 국가가 사회보장 책임을 축소하면서 이를 합리화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았다. (중략) 한국은 사회보장에 필요한 비용을 아끼고 가족에게 돌봄의 책임을 맡김으로써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해왔다. (199)
이 모든 불행의 이야기 속에서 거의 언제나 원인은 가족이었다. 가족이란 제도가 아니라, 온전치 못한 그 가족이 문제라는 생각. 그래서 해결을 구하는 지점도 그 '문제적' 가족이었다. 제도나 관습으로서의 가족은 바꿀 수 없는 상수이고, 자의든 타의든 모범가족의 모습을 따르지 못한 개별 가족들이 변화의 대상이었다. 가족의 기능을 정상화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많은 경우 이미 시작부터 실패한 기획이었다. 가족의 기능을 회복시킨다는 건, 애초에 불평등을 만든 바로 그 가족모델을 정당화하고 유지시키는 회로의 일부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경제위기가 몰아치고, 더 많은 가족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흩어지고 있었다. (205)
부모찬스를 비판하던 이들도 가족에게 돌아가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자식을 위해 자신이 가진 최대치의 권력을 사용하는 일을 당연하거나 어쩔 수 없거나 숭고하게 여긴다. 단지 각자가 가진 '최대치의 권력' 수준이 다를 뿐, 누구든지 기회가 허락하는 만큼 부모의 능력을 사용하는 사회에서 공정성이란 가치는 얼마나 유효한가. (206)
이 책을 쓰며 인용한 문헌들에서 보듯, 이미 수많은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가족제도를 비판적으로 연구해왔다. 놀랍도록 풍부한 연구들을 감탄하며 읽고 정리하면서 생각했다. 가족제도에 대한 논의는 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되지 못하는가? 가족 생활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의제가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사회에서 경제, 국방, 교육 등 다른 의제보다 가족을 덜 중요하게 다루는 관념 자체가 말해주는 현실이 있다. 가족은 여전히 국가를 위해 유용한 인력을 생산하는 수단이며, 헌법이 요구하는 가족생활의 보장은 아직도 국가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
합계출산율 1명 미만의 시대는 이토록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사회에 아이를 낳으라는 불가능한 요구와 함께 계속되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의 저출생이 국가적 위기라면, '인구'가 줄어서가 아니다. 웬만해서는 사람이 태어나 살 수 없는 땅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돌봄의 공동체가 시간과 마음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가기 어려운 사회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인구정책은 가족정책이 아닌데, 이 두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는 사회를 또 반복하며 우리 삶의 시간은 흘러간다. 그래서 묻고 싶다.
이제 우리, 가족각본을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요?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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