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한다는 것은 약점이다. 사랑이 내 몸에 거주하는 것은 축복이지만 연결되고 싶은 욕망은 지옥이다. 이 마음 자체가 '을'인데 만일 성별, 나이, 계급, 외모 같은 자원에서도 차이가 난다면... 그 괴로움, 그 부끄러움,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견딜 수 없다.
사람들이 고통받는 이의 호소를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일가. 무지일까, 의지일까. 현실이 먼저고 규범을 부차적 문제여야 한다. 문화와 윤리, 사회적 가치는 인간의 경험에 근거하여 지속적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가장 취약한 사람의 고통을 볼모로 기존 통념을 수호하려는 것은 인간이 지닌 최고의 악마성이다. 당위적인 윤리는 없다. 목적은 변화를 통해서만 성취되어야 한다.
구조와 개별 남성이 변해야 하는데, 남성성으로 조직된 가족, 사회, 국가, 시민사회가 먼저 변할 리 없다. 누리는 자 입장에서는 지금 상태가 좋고 성 차별은 어디서나 '상식'과 '미풍양속'으로 합의되기 때문이다.'사자'의 자신감은 자기들은 칼자루를, 여자는 칼날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변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시인은 고뇌한다. 이때 변화는 저항이 아니라 자기 채찍질이다.
간단히 말해, 구조는 개인에게 미치는 작용이고 그 구조에 대한 개인의 행위성을 반작용이라고 할 때, 구조에 편승한 이들의 변화는 약자의 예상치 못한 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들'이 기대하는 익숙한 패턴을 파괴하는 것이다.
시간 차 비극의 제일은 무엇일까. 며칠 전 "사랑의 반대말은 사랑이다. 사람들마다 각자 사랑의 개념,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부모 자식 간에 사제 간에 연인 간에 갈등이..." 이런 하나 마나 한 장광설을 늘어놓던 내게 친구가 말했다. "너는 아직도 그러고 사는구나, 사랑은 그런 게 아냐. 사랑한다, 사랑했다. 이게 서로 반대야." 꽝! 나는 아는 것도, 한 일도 없구나.
"내게 설명해줘"는, 책의 6장 "'유기'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들" 중 소제목으로 나온다. "왜 나를 버렸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 이에 대한 상대방의 태도는 다음 중 하나다. "나도 몰라, 나도 그게 알고 싶어." 혹은 "이유는 네가 더 잘 알잖아."
"내게 설명해줘!"는 탈식민 정신분석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인 '피해자의 정체성' 콤플렉스를 요약하는 문구이다. 피식민자는 이 질문에 시달리기 마련인데, 이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지금의 나는 상대방으로 인한 결과(피해자)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고통뿐인 권력 관계의 지속을 보장할 뿐이다. 학대당하면서 스토커가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끝내는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원인을 찾고 싶은 심리에서는 누군가가 '끝냈다'고 생각한다. 왜 나를 때릴까? 왜 나를 떠났을까? 왜 내가 아닌 그(그녀)지? 이건 우문도, 문장도, 질문도 아니다. 그냥 잘못된 진술, 나를 괴롭히는 지배 담론이다. 트라우마는 '가해자'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를 이해하려는 순간 시작된다.
주변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끔찍한 이유는 자기 가족과 공동체의 안녕이 타인을 억압하는 데 달려 있다는 사회적, 개인적 믿음 때문이다. 누군가 유복하려면 누군가는 야만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혐오로 괴로워하는 타인의 존재는 자신이 정상임을 증명한다. 자신의 안위는 타인의 파멸 위에서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이다.
악과 싸우는 것은 일단은 반(反)악일 뿐, 그것이 곧 선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혁명을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악인에 맞서지 마라."는 악인과 상대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까.
구조, 즉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성에 대한 분석을 제외하면 악에는 이유가 있다. 악은 간단하다. 어떤 '나쁜' 일을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있어서 한 것뿐이다. 이는 보통 사람들이 행하는 소소한 악도 설명해준다. 사이코패스의 존재나 '어린 시절 학대'같은 원인은 없다. 반례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인간이 옆에 있는 사람을 '함부로 하는'이유는, 시간(미래나 과거)을 매개로 한 권력욕 때문이다. 오지 않을 미래의 권력을 위해 현재 소중한 사람을 버리는 영화 속의 광해군이나 존재하지 않는 엄마와 과거에 살고 있는 나난, 어리석기 한량이 없다. "지금, 여김"를 살면 소유 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삶 자체를 누릴 수 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1904년에 썼다. 그는 지금이라는 불분명한 시대에 근대적 시간관의 불행을 이미 알았나 보다.
'무능한 잉여'의 유일한 자원은 생각하는 능력뿐이다. 필독을 권한다(경제적 공포, 비비안느 포레스테).
가끔 학부모를 대상으로 대안 교육 콘텐츠 강의를 하는데, 내가 가장 강조하는 이슈는 '공부해라'의 의미다. 이 말 들으면 공부하기 더 싫어진다는, 누구나 아는 이유도 있지만 입시 공부는 동기, 몸의 훈육, 목표 의식에 체화된 '당사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공부하라는 말을 듣는 학생이라면, 이미 공부가 자기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사랑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하는 게 사랑인가? 공부도 마찬가지다. 하라고 해서 하게 되는 게 아니다. 사랑과 공부 모두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양도 불가능한' 한 사람, 개체의 몸에서 일어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모공'은 글자 그대로 전략과 공격에 관한 것이다. 전통적인 해석은 물리력보다 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적을 멸하는 것만이 승리가 아니다. 상대를 상하게 하지 않고 항복을 받아내는 장수가 명장이다.
굴복(屈伏), 허리를 엎드리고 무릎을 꿇다. 신체적 비유가 불편하긴 하지만 "싸우지 않고 굴복시킨다."는 전략은 약자에게 유리한 것이다. 권력과 자원, 물리력 모든 면에서 열세인 약자는 머리를 쓰는 수밖에 없다. 전략, 논리, 나아가 인간적 감화로 상대방을 자기 모순에 빠뜨리는 것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서로 당연하게 설정하고 있던 전선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기존의 사고방식, 싸움 주제를 생소한 것으로 만들어 적을 인식 분열 상태로 만든다. 그러기 위해서 약자는 자신이 약자라는 인식과 더불어 자각이 다른 앎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이 약자의 인식론적 특권이다. 강자는 자기 생각을 약자에게 투사하지만, 똑똑한 약자는 두 가지 이상의 시각에서 자신과 상대방을 모두 파악한다.
특히, 남성은 결핍을 결핍한 완전한 존재다. 자기 위치를 알기 어렵다. 물이 흐르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일 때다. 큰 물줄기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클 때다.
그나마 대안은 24시간 긴장, 타인 존중, 말 줄이고 경청, 자기 몸을 작게 하기, 중단 없는 주제 파악 ... 나부터.
그에게 메일을 썼다. "선생님은 퇴근 후 집에 가족이 있으면 덜 외로운가요? 저는 그 반대거든요. 저처럼 '아내'가 없는 사람은 종일 일하고 집에 들어갈 때 누군가 있는 것이 완전 공포거든요. 녹초가 된 몸으로 또 집안일을 해야 하니까. 여관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에요. 제겐 가족이 외로움을 덜어준다기보다 일거리예요. 저는 혼자 있을 때 안 외로워요."
그러다가 전날 밤 감탄했던 제주도 구좌읍 하도리의 별들이 밥상으로 떨어지는 듯한 충격과 깨달음이 왔다. 24시간 타인의 끼니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일상. 왜 세상은 가사 노동자를 존중하지 않는지, 나는 왜 평생 '초월적'이지 못하고 반찬거리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한지, 왜 사람들은 내 글이 사소한 이슈를 다루는데도 어렵다고 '강조'하는지... 크고 작은 수수께끼들이 해명되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세상 그 누가, 이 권력을 포기하겠는가. 식사 준비의 번거로움, 귀찮음, 먹는 사람의 평가, 남은 음식과 치우기 걱정은커녕 아예 그런 발상 자체와 무관한 삶. 누가 이 자연스러워보이는 권리와 '마음의 평화', 자유를 포기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저자의 시선과 약간 다르다. 그녀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만일 남자 요리사였다면 열광하는 추종자를 거느린 성인이 되어 그를 기념하는 축일이 생겼지 않을까?"였다. 물론 스타 요리사의 성별도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그 많은 설거지는 누가 했을까?'이다.
동물 세계에도 성폭력이 있다는 주장은 유구하다. 성=생물학이라는 통념인 듯한데, 당연히 둘 다 아니다. 이런 경우 나의 기운은 소중하므로 "이런 책을 읽어보세요."하면 그만이다.
한국이 일본에게 좀 무관심하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가해자는 뻔뻔한데 한쪽의 지나친 '피해의식'은 좌절, 절망, 원한을 순환하는 나르시시즘으로 추락하기 쉽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논하는 부분은 특이하게도 부록인 "장인 기질론"이다. 지식인을 화이트칼라로 여기는 것은 앎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오해다. 이런 인식이라면 절대로 공부를 잘할 수 없고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자료 조사, 인터뷰, 독서, 집필... 논문 하나를 위해 수천 쪽의 자료를 읽는 것은 기본이다. 체력과 끈기가 관건이다. 연구는 고된 노동이다.
사회적 약자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부당한 질문을 받는 사람이다. "너 빨갱이지?" "폭력적이지?" "게으르지?" "더럽지?" ...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신으로부터 면허라도 받았는가?
사람들은 다양한 대상에 중독되어 있다. 중독되지 않은 몸은 드물다.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긍정적 중독(일, 공부, 운동...)인 경우 문제가 덜 될 뿐이다.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중독자의 의지 부족이나 인격적 결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대상이 위로와 즐거움을 주거나 삶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중독은 생존을 도와준다(~없이는 못 살아). 그러니 지나친 수치심이나 굴욕감, 좌절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런 감정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중독은 누구나 겪는 삶의 고단함에 대한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대응일 뿐, '문제가 아니다'.
폭식은 먹는 행위 자체에 대한 중독이다. 배고파서, 맛있어서,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심리적 허기 때문에 먹는 것이다. 심리적 허기는 아무리 먹어도 포만감이 없다. 위는 한정되어 있는데 음식은 계속 들어온다. 몸이 이 고통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과거엔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지금은 위협이 되는 것. 작가는 중독을 통나무에 비유한다. 인생에서 완전한 기쁨이나 완벽한 절망은 없다. 한때 나를 구원했던 것(사람, 생각, 조직...) 이 나를 억압하는 시기가 온다. 이것은 나의 성장 때문일 수도 있고 대상의 변질이나 상실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그것들과 헤어지거나 최소한 거리를 두어야 생존할 수 있다. 내게 이 이야기는 분리의 어려움에 대한 비유였다. 20년 된 관계, 30년 된 생각, 사라진 이들과 헤어져야 한다.
인생이 강물이 아니라 사막을 혼자 걷는 일이라면, 애초에 물에 빠지는 사람도 없다. 우리가 선택한, 그립지만 괴로운 대상들은 사막을 지나가다 잠시 스친 풍경들이다. 조우했을 뿐 오아시스에서 만나 한참 이야기를 나눈 사이가 아니다. 인생에 오아시스가 없다고 생각하면 익숙한 것들의 막강한 존재감이 다소 상대화된다. 중독보다는 생존의 힘이 세다고 믿는다. 천천히 조금씩 이별할 수 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말처럼 근거 없는 말도 없다. 우울도 감기도 가벼운 병이 아니며, 질병으로서 우울증과 감기의 작동 방식은 매우 다르다. 굳이 비유한다면 에이즈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완치 개념을 적용하기 힘든 질병이다. 잠복성, 만성 질환, 치명성, 외로움, 사회적 낙인...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심각한 면역력 저하다. 신체가 외부 자극에 대처할 수 없는 상태. 면역성이 사라지면서 부드러운 미풍조차 사포로 미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우울증 환자의 증상은 인새으이 본질이 순간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나는 이제까지 '미봉책'을 제대로 꿰매지 않은 상태로 알고 있었다. 완전히 봉합하지 않는 미봉(未縫), 혹은 미봉(未封)인 줄 알았던 것이다. 마치 야구공의 빨간 실 땀 자국처럼 확실히 꿰매 그 자국이 선명한 것이 좋은데, 미봉책은 그렇지 못한 어중간한 대응 방식, 불충분한 처리라고 생각했다.
아뿔싸! 사전적 의미의 미봉책은 미봉책(彌縫策)이었다. 미(彌)와 봉(縫), 모두 꿰매거나 깁는다는 뜻으로 흔적과 자국이 남는 것은 그 자체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본질적 해결이 우월하고, 미봉책은 속임수나 일시적 방도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의미가 강한 단어다. 아무런 표시가 남지 않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 찬사인 이유다.
미국의 전설적인 노동운동가 지미 호파는 마피아 보스 알 카포네를 만난 뒤 부러운 듯 말했다. "그의 손은 하얗고 부드러웠다." 이 말은 내가 반복해서 생각에 담그는 글귀 중 하나다. 몸, 특히 손은 일상의 노동과 계급을 상징한다.
늘 화가 나 있는 사람, 자주 화를 내는 사람, 표현하지 않는 조용한 사람이 있다. 모두 한 사람의 모습일 수 있다. 사회적 인간은 아무에게나 화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사람과 참는 사람의 차이보다, 대상에 따라 '화풀이' 여부가 정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진짜 문제는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화를 나게 하는 사람 아닌가?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 몸이 나다. 타인을 판단할 필요가 있다면 그냥 그의 행동을 보면 된다. 행동이 그 자신이다. 이 말은 인간의 행불행은 개인의 결과(내 탓이오)라거나 부와 권력의 소유가 허무하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인간은 타인과 사물은 물론 자신도 소유할 수 없다. 가장 간단한 증거는 누구나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무엇을 소유할 수도 없고 누구로부터 버려질 수도 없다. 인간은 행동일 뿐 대상도 주체도 아니다. 그렇다면 버림받았다고, 모욕당했다고, 빼앗겼다고 분노할 이유도 줄어든다.
내 무능력도 원인이겠지만 사유는 힘든 일이다. 생각할수록 공부할수록 무지의 공포는 비례 상승한다. 나 자신이 작아지고 우울해진다. 우울은 공부의 벗.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사회는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세상사 그 무엇이든 이해하기 쉬운 일이 있겠는가. 사람들은 서로 이해해 달라고 싸운다. 사람마다 각자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가 있다. 이해는 공부, 습득, 인지와 혼재되어 있다. "제발 나를 이해해 달라.", "이 문장을 이해하겠니?" 전자는 수용에 가깝고, 후자는 학습에 가깝다.
그러니 이해는 난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영역이다. 이해의 영어 표현이 좋다. 이해하려는 대상 아래 서 있으려는 겸손한 마음, 이것이 첫 번째 자세다. 이해는 사랑과 지식을 아우른다. 사랑은 수용이다. 상대를 수용할 때 이해는 따라온다.
이해는 아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선입견이든 지식이든 기존의 앎을 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것은 절대 우리 몸에 들어오지 않는다. 충돌은 앎의 지름길이다. 먹지 못할 떡을 두 손에 든 사람들이 있다. 절충은 아는 방법,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앎 자체와 가장 거리가 먼 행위다. 욕심일 뿐 지식도 정보도 아니다.
간혹 매우 총명한 이들과 조우한다. 나는 그들의 '비법'을 알고 있다. 이해는 영혼이 순수한 사람의 특권이다. 대상에 대한 사랑. 이해하고 싶어서 기득권을 포기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자신을 보수하지 않는다.
말로는 '미안'이지만 어감에 따라 '미안하지 않은 미안'도 많다. 면피, 내 불편 해소, 건성, 달래기, 위기 탈출용, 조롱, 습관적 감탄사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가식과 뻔뻔함을 사과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미안함에 관련한 표현은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네가 불쾌했다면 미안해."다. 이럴 땐 차라리 '싸우자'는 게 예의다. 진짜 미안할 대는 할 말이 없거나 멀리서 오랫동안 미안해한다.
낙오자 취급은 '엘리트'였던 그녀의 자아에 사망 선고가 되었다.
의욕, 삶의 방향, 목적. 사람은 결국 '무엇'때문에 산다. 삶의 의미는 인간이 묻는 것이 아니다. 삶이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는 몸부림이, 내가 생각하는 의미 있는 삶이다. 승부나 성공 패러다임과 달리 의미는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어서 아무도 속일 수 없다. 자신과 마주할 수밖에 없으니 인생에 몇 안 되는 정의다.
사람들이 외로운 이유 중 하나는 자신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데 있지 않을가.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에 몰두하는 사람은 덜 외롭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죽는 것. 모든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이다.
운동은 립싱크나 대필이 불가능하니 윤리의 마지막 영역일지 모른다.
연습은 정신력으로 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연습된 몸으로 정신(적 실수)을 '없애는' 방식이다. 연습, 연습, 연습. 그런 경지의 노력은 명예와 금전적 보상만으로 불가능하다.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다.
모 신문에 게재된 채현국 선생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치유란 사람의 매력 그 자체의 효과이지 '시대의 멘토'가 '해주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의 언어는 모두 깊고 힘이 있었다. .
하지만 이 책만큼 노동과 공부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을, '자기 선택'으로 극복한 '신인류'를 구체적이고 진지하게 묘사한 책도 드물다. 아이들은 빵점을 받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며, 가장은 가혹한 노동에 종사한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폭발 직전이고, 일본 주부들의 남편에 대한 최대 봉사는 남편의 존재 자체를 견디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은 불쾌감을 견디면서 서로에게 대가를 요구한다. 저자는 불쾌감을 일종의 화폐로 보는데, 다른 비인간성과 교환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불행하다.
나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적에 이미 그것을 알았다. 밥상에는 깍두기를 먹는 사람과 깍두기 국물을 먹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것이 역할이든 윤리든 취향이든 그냥 버릴 수 없는 아까운 '깍두기 국물'의 세계를 아는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