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뛰는 소설 :: 최진영 외
첫 사랑 :: 최진영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할수록 더 외로워졌다. 그저 외로울 뿐이라면 어떻게든 꾹 참아 보겠는데, 사랑과 함께 오는 외로움은 꼭 경멸이나 굴욕감의 손을 잡고 왔다. 상대가 바람을 피우거나 거짓말을 할 때도, 약속을 안 지키거나 이기적으로 굴 때도, 혹은 그럴듯한 데이트를 마친 뒤 평온한 상태로 잠들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감정의 끝물에서는 외로움의 맛이 났다. (15)
숱한 연애를 하던 때가 생각이 난다.
저렇게 모든 감정의 끝물에서 나는 외로움의 맛이 싫었고 이상하고 불쾌했다. 그래서 비에 젖은 양말을 서둘러 벗어 던지듯 연애를 끝마쳤었다.
지형이에게는 그런 감정이 거의 들지 않는데, 그것이 당시에도 신기했고 지금도 마찬가지.
그래서 내가 너를 좋아하나보다.
너는 무생물인가?
ㅋㅋㅋ
나는 주문에 걸린 동화 속 어린이처럼 J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머리 위로 마른 낙엽 밟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좁은 흙길을 올라갔다. 낡은 운동화가 이미 죽은 낙엽을 잘게 부스러트렸다. 눅눅한 것은 소리가 없다고 마음에 적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알 수 없다고 이어 적었다. (30)
아. 작가님. ㅜㅜㅜㅜㅜㅜㅜ정말.....
햄릿 어떠세요? :: 박상영
내가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고 믿었던 현실이 실은, 헬륨을 넣은 풍선처럼 이리저리 정처 없이 나부끼고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현실은 전혀 정제되어 있거나 아름답지 않으며, 일상에 연습 따위는 없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이라는 사실을. (51)
"괜찮아, 니 털쯤은"
초민焦悶의 시간이 길어지고 뇌민惱悶의 실체에 가까워질수록, 희미하지만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해결되지 않을 고민과 오랫동안 동거하면 다치는 이는, 결국 고민에게 몸을 내어 준 자신뿐이다.' (112)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 :: 이지민
손에는 운명이 숨어 있다. 관광지의 안내도처럼 헷갈리는 손금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눈을 한번 감아 보길 권한다. 쾌활한 손도 있고, 순종적인 손도 있고, 상처받은 손도 있다. 손에는 성격이 있고 표정이 있다. 손은 끊임없이 선택을 하고 그것들이 모여 운명이 된다. (128)
내가 잡았던 수많은 손들을 떠올려보았다.
세상이 벽처럼 다가오는 어느 한 시절에는 남자야말로 가장 높고 단단한 벽인 것이다. 내가 아무리 발로 차고 때리고 뛰어올라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133)
그럴 수 있겠다.
이 단편을 읽으며, 그녀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우리가 오래 고민하고 아파했던 그녀.
어쩌면 자신이 사랑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의 전부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상대는 정해졌고 마지막은 어차피 알 수 없다. 그 불안한 과정을 견디거나 즐기거나, 선택은 각자의 몫인 것이다. (143)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였다.
세상에 왜 저렇게 연애를 하나 싶은 관계의 모양과, 굳이 저렇게까지 하며 만나야 하나 싶은 오만한 의구심에 대한 명징한 대답을 여기에서 만났다.
자신(혹은 그 혹은 그녀)가 사랑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의 전부인지도 모르겠다는 것.
그렇다면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은 오직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그는 어느 순간 무척 슬펐을 것이다. 넓을 줄만 알았던 골목길이 좁아 보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른이 되니까. 어른에게만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린아이처럼 많이 걷고 달리지 않기 때문이다. 걷지 않으니 추억이 없고 그래서 늙는 것이다. (145)
그럴 수 있겠다.
웨딩드레스 44 :: 정세랑
여자는 고전 문학 전공자였는데, 고전 문학 속 영웅들이 대다수 고아인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고아들만이 진정으로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164)
이 부분을 보고는 풉 하고 웃었다.
그리고 뒤늦게 고개를 끄덕끄덕, 그렇지, 맞아.
이 책을 읽으며 라샘과 정옥이에게 읽어준 부분이기도 하다. 마침 부모와의 독립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읽어주었는데, 단 두 문장으로 모든 자질구레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마법을 보았다.
영웅들이 대다수 고아인 것과 고아들만이 진정으로 용감해질 수 있다는 것.
"이렇게 추운 날에는 발가벗고 안고 있는 게 최곤데."
여자는 실수로 너무 크게 말해 버렸다. 골목에 둘만 있는 줄 알고서. 지나가던 사람이 흠칫했고, 두 사람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번화가에서 멀지 않은 어두운 골목이었다.
"그럼 우리 결혼할까?"
"결혼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결혼하면 굳이 애써 만나지 않아도 겨울 내내 껴안고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럴까?"
그래서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여자는 전자책 유저였고 남자는 스님처럼 옷이 없었다. 덕분에 아주 작은 집에서 매일 껴안고 있을 수 있었다.
맨살과 맨살 사이의 온기, 그것을 위해. (172)
사실 아무도, 가족도 그만큼 가깝지 않다고 여겨 왔다. 여자는 타고난 개인주의자였다. 그런 여자에겐 일가친척들이 덕담이랍시고 명절마다 하는 말들이 징그럽게만 느껴졌다. 왜 다른 사람의 생식과 생식기에 대해 그렇게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기이할 정도였다.
더 좌절할 때는 젊은 세대의, 충분히 개인주의자가 될 기회가 있었던 세대의 사람이 비슷한 말들을 할 때였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가 기성세대의 언어를 그대로 답습하여 여자의 프라이버시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말들을 할 때, 여자는 마음속 리스트에서 그이의 이름을 지웠다. 너는 이제 그만 만나야 하겠구나, 질린 채 생각했다. (173)
마트 앞에서 크게 싸웠다.
"와, 홈패션 배우고 싶어. 수강료도 안 비싸고 좋다."
여자가 마트 문화 센터의 수업 소개 게시판을 보다가 말했을 때, 남자가 쏘아붙였다.
"요리부터 배워."
한 번은 그냥 넘어갔다.
"쉽게 하는 이탈리아 요리, 이거 배울까?"
"좀! 한식부터 배워 좀! 밑반찬부터."
두 번은 넘어갈 수 없었다. 둘 다 일하는데 식사 준비를 여자가 하는 건 여자의 자발적인 기여일 뿐이었다. 남자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차분하게 반박해야 했지만 여자도 쌓였던 게 많았다.
"다시 말해 봐, 씨발 새끼야."
격론 끝에 남자는 마트 앞에서 울었다. 여자는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174)
아 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웃겼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생각지 못한 말이라 깜짝 놀랐는데 그만큼 웃겼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른다섯 번째 커플은 신혼 내내 저녁마다 나라 걱정을 했다.
"신혼부부가 나라 걱정하느라 섹스할 시간이 없네."
"이게 출산율 저하의 이유군." (177)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세랑은 확실히 이런 류의 위트가 있다.
차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운전을 하던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다.
"그래도 당신은 나랑 결혼해서 다행이지? 나는 전혀 가부장이 아니잖아."
"글쎄."
"나처럼 가부장이 아닌 사람이 어딨다고?"
"당신 한 사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야. 예를 들어 지난 제사 때 생각해 봐. 나는 조퇴하고 가서 아홉 시간 일했지. 당신은 퇴근하고 와서 한 시간, 절 몇 번 하고 과일 집어 먹고 사촌 동생들이랑 논 게 다잖아."
"그럼 두 사람 다 조퇴했어야 했다고?"
"내 말은 그런 시간들이 계속, 평생에 걸쳐 쌓인다는 거야. 쌓이다 보면 큰 차이가 나는 거고.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아? 당신 할아버지 제사잖아? 난 만난 적도 없는 분이야. 왜 효도를 하청 주는데?"
"하청이라고까지 말하면..."
"아홉 시간 일한 며느리들은 제사 지낼 때 아무도 절도 안 하고 뒤에 멀뚱멀뚱 서 있지."
"몇 년 전에 며느리들도 절하는 걸로 바꿀까 했었는데 큰어머니 무릎도 안 좋으시고..."
"어쨌든 그게 가부장제야. 당신 눈에는 안 보여도 내 눈에는 보여. 내 눈에만 보이는 게 아주 많아." (178)
커피를 좋아했다. 커피를 마시면 기운이 나고 세 배 정도 똑똑해지는 기분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미용실에 갔다가 식장으로 이동하느라, 결혼식 날 아침엔 커피를 한 잔도 마시지 못하고 말았다. 아, 누가 커피 한 잔만 줬으면. 하지만 커피는 이뇨 작용을 활발하게 만들 거고, 드레스를 입었다 벗었다 하며 화장실에 가기는 귀찮았다. 여자는 꾹 참았다.
"신부님께는 다과와 음료를 제공합니다. 지금 가져다 드릴까요?"
예식장직원이 들어와 단순한 메뉴판을 보여 주며 물었다.
"에스프레소요."
여자는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다과는 일괄로 마카롱과 에클레르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직원이 다시 쟁반을 들고 나타났을 때는 식이 시작하기 30분 전이었다. 손님들이 슬슬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 작은 에스프레소 잔을 향해, 구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자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장갑이었다. 장갑이 지나치게 마찰이 없는 소재였다. 작은 에스프레소 잔이 뱅글, 손가락 사이에서 돌아 드레스의 왼편 엉덩이에서 허벅지까지 커피가 쏟아지고 말았다.도우미 분이 비명을 질렀다.
친구들까지 한꺼번에 달라붙어 물수건으로 처치하고, 다행히 준비되어 있던 처리제를 바르고, 허리 뒤에 달린 장식을 앞으로 옮겨 달았다. 그래도 티는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놈의 커피." (184)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내 얘기일 것 같아서 ㅠㅠㅠ너무 웃으며 공감하며 읽었다.
특히 마지막 외마디는 꼭 정아가 할 것만 같다 ㅠㅠㅠㅠㅠ어우 들려 들려.
봄밤 :: 권여선
영경은 계속 읽어 나갔다.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노보드보로프라는 혁명가는, 톨스토이에 따르면, 이지력은 남보다 뛰어나지만 자만심 또한 굉장하여 결국 별 쓸모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그 까닭인즉, 이지력이 분자라면 자만심은 분모여서 분자가 아무리 크더라도 분모가 그보다 측량할 수 없이 더 크면 분자를 초과해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240)
수환이 죽었을 때 자신들이 연락 두절인 영경에서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물러져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 버렸다는 것을, 늙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255)
앓던 모든 것 :: 홍희정
웃으면서 어색하지 않게 윤오의 손을 놓는다. 윤오한테 내가 묻을까 봐. 내 늙음이 묻을까 봐. (283)
윤오라는 이름을 좋아했다.
이소라의 어느 곡에서도 나오고, 발음하기도 예뻐서 더.
이 단편은 <나의 할머니에게>에 실렸어도 좋았겠다.
나로서는 다소 생경한 할머니의 시선에서 쓰이는 소설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