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10주년 특별전 :: 편혜영 외
저녁의 구애 :: 편혜영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김은 여자의 낮은 한숨소리를 들으며 여자가 있어서 많은 순간을 견뎌왔지만 문득 앞으로는 여자가 있는 순간을 견딜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김은 지금도 자주 여자에게 위안과 온기를 얻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언제나 곧 사라져버렸다. 김은 갑자기 마음속에 내려진 결단을 미루는 게 어리석게 느껴졌다. 이미 충분히 여자와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여자의 한탄을 듣는 동안 더 멀어지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여자가 말을 멈췄다. 어쩌면 김이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줄곧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번에도 여자는 들었어요? 하고 물었다. 김은 못 들었다고 솔직하게 얘기했다. 여자가 다시 낮게 숨을 내쉬었다. (24)
앞으로 여자와의 통화는 더 드물어질 것이고 간혹 이어지는 만남은 지루할 것이고 말투는 무뚝뚝해질 것이며 웃는 일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럴수록 여자는 더 자주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소홀하고 무관심한 김을 이해하려고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서운함과 허전함을 견디지 못해 울컥하여 화를 내고 얼마 후에는 화낸 것을 사과할 것이다. 그런 일이 얼마간 반복되다가 나중에는 오로지 마음을 되받지 못한 것을 억울해하며 김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데 시간을 쓸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이 모든 일을 되풀이할 정도로 김을 사랑하지 않으며 어쩌면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동시에 허탈해질 것이다. 김으로서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쩌면 그때 비로소 여자에게 애틋함을 느끼게 될지도 몰랐다. (27)
폭우 :: 손보미
그녀는 다시 핸들 위로 엎드렸다. 그는 폭우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와 모든 것이 멈춰버린 자신들의 차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의 차는 이 세계의 아주 좁은 곳을 차지하고 있어서, 이대로 사라져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101)
절반 이상의 하루오 :: 이장욱
그러니까 이건 거대한 쇳덩어리인데 허공에 붕 뜰 수 있단 말야. 가벼운 솜털이 가지 못하는 곳을 무거운 쇳덩어리는 왕래할 수 있다는 거지. 그녀는 첫 비행을 마치고 난 소감을 그렇게 말했다. 얼굴이 달떠 있었다. (111)
어느 날인가 그녀가 나를 불러낸 적이 있다. 그녀는 2단짜리 캐리어를 끌고 비행기에서 내린 모습 그대로 내 사무실 앞에 서 있었다. 퇴근하는 길인 모양이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고, 그녀는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한 걸은 한 걸음 다가가는데, 무언가 내 가슴 속을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줄기 텅 빈 바람인지도 모르고, 늙은 나무에서 마지막으로 떨어지는 잎사귀인지도 몰랐다. 이것으로 그녀와의 관계가 과거의 일이 되었다는 것을 나는 깨닫고 있었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날 저녁식사를 하면서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동시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있는 타락한 천사가 우리의 표정에 무거운 돌을 하나씩 올려놓는 느낌이었다. 돌이 떨어지면 잠시 미소가 돌아오려 하고, 그러면 그 짓궂은 천사는 무거운 돌을 하나 더 올려놓는 것이다. 나는 하루오의 그 방긋, 하는 웃음을 흉내내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125)
그녀와는 가끔 연락하고 지냈다. 아내가 아니라 스튜어디스였던 그녀 말이다. 한번은 아주 오랜만에 저녁식사를 함께한 적도 있다. 하필이면 우리가 처음 연애를 시작한 바로 그날이었다. 목소리들이 마구 날아다니는 술집에서, 대화라는 걸 생전 처음으로 해보는 사람의 기분으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오래전의 그날. (128)
대화라는 걸 생전 처음으로 해보는 사람의 기분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날이라면 작년 1월 지형이와 통화했던 날이 떠오른다. 정말 꼭 그 마음이었는데.
상류엔 맹금류 :: 황정은
나는 지금 다른 사람과 살고 있다. 제희보다 키가 크고 얼굴이 검고 손가락이 굵은 사람으로 그에게는 누나나 형이나 동생이 없다. 그의 부모님은 자동차로 두 시간 걸리는 거리의 소도시에서 살고 있고 두세 달에 한 번쯤 나는 그와 함께 그 집을 방문해 밥을 먹고 돌아온다. 그는 내게 친절하고 나도 그에게 친절하다. 그러나 어느 엉뚱한 순간, 예컨대 텔레비전을 보다가 어떤 장면에서 그가 웃고 내가 웃지 않을 때, 그가 모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서 부쩍부쩍 다가오는 도로를 바라볼 때, 어째서 이 사람인가를 골똘히 생각한다.
어째서 제희가 아닌가.
그럴 땐 버려졌다는 생각에 외로워진다. 제희와 제희네. 무뚝뚝해 보이고 다소간 지쳤지만, 상냥한 사람들에게. (162)
지형이와 떨어져 있으면서 나도 문득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내가 선택한 일이었지만 어째서 지형이가 아닌가 하는 마음.
이제라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서 다행이다. 마음이 놓인다. 언제가 상아가 말했던 것처럼 현아 니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이 책을 6월쯤 빌렸었으려나?
이제야 다 읽었다. 어제 밤(오늘 새벽?)에 갈피가 끼워져있던 곳은 강화길 작가님의 소설이 시작하는 부분이었다.
단편 소설 하나만 남아있던 것이다.
하필 새벽 3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강화길 작가의 소설을 집어 든 것은 내 실수였다.
어떻게 묘사 하나 없이 공포를 유발시키는 걸까?
아직은 좋아한다기에 자신이 없지만, 강화길 작가님은 여름에 어울린다고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는 문득 궁금해졌다.
남자가 읽어도 무서운 이야기일까? 어떤 마음일까? 어떤 생각이 들까? 어떤 풍경이 그려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