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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책 :: 한정원
꼬마대장님
2020. 12. 30.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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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을 잃었을 때, 사람의 마음은 가장 커진다. 너무 커서 거기에는 바다도 있고 벼랑도 있고 낮과 밤이 동시에 있다.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아무데도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거대해서 오히려 하찮아진다. 그런데 그 마음을 페소아는 다르게 바라봤다.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속에선 죽음이요
이 세계의 슬픔이다.
이 모든 것들이, 죽기에,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이 온 우주보다 조금 더 크다.
(페르난두 페소아, <기차에서 내리며>,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텅 비워진 공간에서 어찌할 바 모르고 슬퍼하던 시인은, 그 공간으로 시간을 데려오기로 한다. 내가 존재하는 한 내가 잃은 것도 내 안에 존재한다는 초월적인 시간에 바쳐진 마음은 이제 우주보다 더 커진다. 그렇게 커진 마음은 더는 허무하지 않다. 수만 년 전에 죽은 별처럼, 마음속에 촘촘히 들어와 빛나는 것이 있어서이다. (13)
친구와 함께 언 강 앞에 선 적이 있다. 그녀는 내가 위로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혹독한 사별이 몇 차례 그녀를 관통했다. 그러고도 다시 웃으며 지내는 듯 보였지만, 웃음과 웃음 사이에 캄캄한 허방이 없었을 리 없다. 하지만 나는 번번이 위로의 불가능을 절감할 뿐이었다. 위로의 말은 아무리 공들여 건네도 섣부르게만 느껴진다. 위로의 한계이자 말의 한계일 것이다. (18)
내가 보는 것이 결국 나의 내면을 만든다. 내 몸, 내 걸음걸이, 내 눈빛을 빚는다(외면이란 사실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인간은 내면과 내면과 내면이 파문처럼 퍼지는 형상이고, 가장 바깥에 있는 내면이 외면이 되는 것일 뿐. 외모에 관한 칭찬이 곧잘 허무해지며 진실로 칭찬이 될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려면 이렇게. 네 귓바퀴는 아주 작은 소리도 담을 줄 아는구나, 네 눈빛은 나를 되비추는구나, 네 걸음은 벌레를 놀라게 하지 않을 만큼 사뿐하구나). 그런 다음 나의 내면이 다시금 바깥을 가만히 보는 것이다. 작고 무르지만, 일단 눈에 담고 나면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단단한 세계를.
그러므로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지혜로워지거나 선량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시의 한 행에 다음 행이 입혀지는 것과 같다. 보이는 거리는 좁지만, 보이지 않는 거리는 우주만큼 멀 수 있다. '나'라는 장시(長詩)는 나조차도 미리 짐작할 수 없는 행동을 붙이며 느리게 지어진다. (25)
행복은 그렇게 빤하고 획일적이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고 설명하기도 어려우며 저마다 손금처럼 달라야 한다. 행복을 말하는 것은 서로에게 손바닥을 보여주는 일처럼 은밀해야 한다.
내 손을 오래 바라본다. 나는 언제 행복했던가. 불안도 외로움도 없이, 성취도 자부심도 없이, 기쁨으로만 기뻤던 때가 있었던가. (30)
세상의 모든 불행이 작정하고 이들에게 덤볐다고 오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내가 배운 것은, 비정상적인 외모가 흉함을 만들지 않고 불행이 인간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 겉으로 드러나는 조건에 무너지지 않고 마음의 격을 지킨다는 것. (32)
마음의 격을 지키는 일.
사랑은 단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모르면 불행이 닥치는 순간 절망에 빠지게 된다.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이것은 사랑에 관한 기록이지만, 나는 '사랑'의 자리에 '행복'을 넣어 다시 읽는다. "행복은 단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가 아니다."
행복이 내가 가져야 하는 영혼의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토록 자주 절망한다.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피동적으로 얻어지고 잃는 게 행불행이라고 규정하고 말면, 영영 그 얽매임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가지지 못한 것이 많고 훼손되기만 했다고 여겨지는 생애서도, 노래를 부르기로 선택하면 그 가슴에는 노래가 산다. 노래는 긍정적인 사람에게 깃드는 것이라기보다는, 필요하여 자꾸 불러들이는 사람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매 순간 '방향'을 선택한다. 행복을 목표로 삼는 방향이 아니라, 앞에 펼쳐진 모든 가능성 중에 가장 선한 길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른다. 그 둘은 처음에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끝내 행복은 선에 속할 것이다.
그러니 역시 '행복'이라는 낱말은 없어도 될 것 같다. 나의 최선과 당신의 최선이 마주하면, 나의 최선과 나의 최선이 마주하면, 우리는 더는 '행복'에 기댈 필요가 없다.
에른스트 얀들의 시에 "낱말들이 네게 행하는 것이 아닌 네가 낱말에 행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된다"는 구절이 있다. '행복'이 우리에게 가하는 영향력에 휘둘리는 대신, 우리가 '행복'에 무언가를 행해햐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무언가가 바로 망각이기를 바란다. 그 낱말은 죽은 조상에게 맡기고 그만 잊자고. 할 수 있다면 '불행'도 잊자고.
기쁘고 슬플 것이나 다만 노래하자고. (35)
행복은 영혼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
올해 내가 만난 표현 중에 가장 단순하고도 명료한 게 아닐까.
이 부분을 옮기고, 지형이랑 라샘이랑 친구들에게도 적어 보냈다.
그래서 나는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메리 올리버의 말을 살짝 바꿔 옮겨보면, 나는 동네를 사랑하기 위해 동네를 걸었다. (중략)
우리는 잘 모르는 것을 무서워한다. 순서를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그토록 겁을 먹었던 건, 칠흑의 어둠 속에 어떤 얼굴이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래서 어느 마당에 어떤 나무와 꽃이 피는지까지 알게 되었을 때, 더는 밤길이 힘들지 않았다. 앞, 옆, 뒤가 아니라 별이 흐리게 묻힌 하늘을 볼 수도 있었다. 불이 꺼진 창도, 그 창 너머에 내가 아는 누군가가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감은 눈꺼풀처럼 순하게만 보였다. (47)
그런 경험이 있다.
내가 사는 동네를 걷고서 동네를 사랑하게 된 적.
더이상 밤의 길이 무섭지 않고, 동네의 곳곳을 오래 바라보게 되는 적이.
괴팍하리만치 도도한 정념은, 지금에 대한 완전한 몰두에서 만들어진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울음을 멈추지 않는 것도, 자신을 해하는 것도 그렇다. 뜨거운 존재들이 견디고 있는 것은 '지금'이라는 시간이다. (61)
팔다리가 나무처럼 굳어가고, 호흡이 가빠지고, 덜 보이고 덜 들리게 될 때,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까. 아껴 움직이고, 아껴 말을 하고, 아껴 보고 듣게 될까. 아껴 사랑하게 될까 사랑을 아끼게 될까.
노인의 몸이 가벼워지는 것은 뼈가 비워지는 탓이겠지만, 점점 더 많은 것들을 단념해서 버려지는 무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노인의 등을 가만히 보며, 나는 그 반대편 가슴 안에 머무는 색(色)에 대해 생각했다.
빛을 흡수하거나 반사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색이라면, 무엇이든 마음에 들이고 보내며 일생을 살아야하는 사람에게도 색이 있을 테니까. 어느 물감도 따라 잡지 못할 만큼 찬연한 색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이제 색이 바랬다고, 혹은 아예 색을 잃었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게 늙음일 것이다.
대개 서른, 마흔, 예순 같은 나이에 큰 의미를 두고 '꺾인다'는 표현을 쓴다. 나는 삶을 꺽이게 하는 것은 그보다는 '사건(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주로 나쁜 사건-개인의 불행이나 세계의 비극-을 겪는 순간이라고. 그래서일까. 나는 덜 늙고서도 늙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보내지 않으려고 아무것도 들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몸의 관절이 오래 쓰여 닳듯, 마음도 닳는다. 그러니 '100세 인생'은 무참한 말일 뿐이다. 사람에게는 100년 동안이나 쓸 마음이 없다.
사람의 색이 바래거나 사라지지 않고, 순록의 눈동자나 호수의 가슴처럼 그저 색을 바꿀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계절에 따라, 나이에 따라, 슬픔에 따라. 그러면 삶의 꺾임에도 우리의 용기는 죽지 않고, 무엇을 찾아 멀리 가지 않아도 서로에게서 아름다움을 목격하며 너르게 살아가지 않을까.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늙었구나.
(세사르 바예호, <여름>,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내가 귀하게 여기는 한 구절이다.
노인을 경외하는 것은, 내가 힘겨워하는 내 앞의 남은 시간을 그는 다 살아냈기 때문이다. 늙음은 버젓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결과일 뿐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열차가 완전히 정지하기 전에 그러하듯, 흔들림 없이 잘 멈추기 위해서 늙어가는 사람은 서행하고 있다. (68)
나는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시어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시인이 아니라도, 시를 지으려는 게 아니어도 말이다.
시어는 말 그대로 돌멩이, 가시, 구름 같은 단어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얼굴이나 사건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아주 깊은 곳에 잠겨 있어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예민하고 집요하게 찾아 헤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어둠 속으로 첨벙 뛰어들어야 한다.
사람은 매일 오늘을 잃고, 영원은 얻지 못한다. 그 상실을 나만의 시어가 달래줄 것이다. 무언가를 희망할 용기가, 단 하루 솟아오르는 도시처럼 융기할 것이다. (73)
집안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텐데, 언니는 어떤 경로인지 모르겠지만 연애도 섭섭지 않게 했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언니는 먼저 나에게 고백했다. 두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연신 손부채질을 하고, 웃음이 헤퍼져서는 수다를 이어갔다. 그럴 때 언니는 한 겨울이라도 더워 보였다. 좋아하는 마음은 저렇게 더워지게 하는 걸까, 생각했다. (84)
너무 예쁜 표현이어서 한참 입안에서도 굴려보았다.
그날도 침대에 누워 기다리는데, 한의사가 들어오더니 말했다. "왼쪽 발로 걷는 거 무섭죠?" 침대까지 가는 동안의 내 걸음걸이를 눈여겨본 모양이었다. 그는 내 발목 주위로 침을 놓으며 말을 이었다.
"한번 다친 발이니까 더 조심스럽고, 또 아플 것 같고 그렇죠? 그래도 왼발에 힘을 실어야 해요. 안 그러면 계속 약해질 거예요. 두려워하지 말고 발을 내딛어요. 괜찮아요. 걸어요. 자꾸 걸어요."
그가 커튼을 닫고 나간 후 다시 혼자 남아 누워 있으면서, 나는 어쩐지 후련하고도 글썽글썽한 기분이 되었다. 발목을 고쳐달라 했더니 마음을 고쳐주고 그래요. (91)
흐린 날에는 모든 것이 떨어진다. 새는 날개를 떨어뜨리고(낮게 날고), 구름은 빗방울을 떨어뜨리고, 사람은 기분을 떨어뜨린다. 흔히 그보다 조금 부드러운 단어인 '가라앉다'를 선택하지만 말이다.
나는 흐린 날을 다정히 맞는 편이다. 침침한 빛, 자욱한 사물들, 묵직하게 흩어지는 향. 흐린 날에는 모든 존재가 자신을 잠잠히 드러낸다. 내 안의 언어와 비언어들조차 소란스럽지 않다. 그 세계가 몹시 안온하고 충만해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 햇빛은 온기를 주는 동시에 대상을 퇴색시킨다. 지나친 빛 속에서는 노출과다 사진 속 피사체가 그러하듯, 내가 배경 속에 희석되거나 본디와 다른 모습이 되고 만다.
그러니 진심이나 맹세는 흐린 날에 건네져야 할 것 같다. 햇빛은 사랑스럽지만 구름과 비는 믿음직스럽다. (136)
이 글을 읽고, 나도 흐린 날을 좋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침잠은 표면적인 것과 멀어지므로 필연적으로 깊이를 얻는다(그것은 힘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동시에 무게도 얻는다. 내가 무게를 느낄 때를 곰곰이 따져보면, 거기에는 늘 지나친 자애와 자만이 숨어 있었다. 나를 크게 만들려고 하다 보니 우울해지는 것이다. 마음이 가라앉을 때, 나의 느낌이나 존재를 스스로 부풀리고 싶어 하지 않는지 잘 살펴야 한다.
체스터튼은 <정통>에서 그러한 무게의 해악을 설명하며, "자신을 중시하는 쪽으로 가라앉지"말고 "자기를 잊어버리는 쾌활함 쪽으로 올라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엄숙함은 인간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웃음은 일종의 도약이기 때문이다. 무거워지는 것은 쉽고 가벼워지는 것은 어렵다."
결국 발목에 추를 달 줄도, 손목에 풍선을 달 줄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양극을 번갈아 오가는 게 아니라, 한 번에 두 겹의 감정을 포용하라는 것이다. 추를 달 때 풍선을 기억하고, 풍선을 달 때 추를 잊지 않기.
삶의 마디마다 기꺼이 가라앉거나 떠오르는 선택이 필요하다면, 여기에서 방점은 '기꺼이'라는 말 위에 찍혀야 할 것이다. 기꺼이 떨어지고 기꺼이 태어날 것. 무게에 지지 않은 채 깊이를 획득하는 일은 그렇게 해서 가능해지지 않을까. (137)
그렇다면 이불 위에 못이 없다는 말은 진실일까. 수십 개의 못이 보이고, 그토록 잔인하게 자신을 해치려는 것 때문에 불안하고 속상한 그녀에게 말이다. 그 순간만큼은 못을 보지 못하는 나의 시각과 못이 없다는 나의 말이 거짓이지 않을까. 내 편에서의 진실과 그녀 편에서의 진실이 다를 때, 그것은 어떻게 전해져야 아무도 해치지 않을 수 있을까. (143)
산책자는 걸을 때만큼은 자신의 '몸'보다 '몸이 아닌 것'에 시선을 둔다. 지난밤의 꿈을 생각하고, 함께 나눈 이야기를 혼자 복기하고, 궁금해하다가 미뤄둔 질문을 다시 꺼내보고, 까맣게 잊었던 얼굴을 문득 보고 싶어 하다가, 방금 스쳐 지나간 사람의 모자와 나무를 타는 다람쥐까지 일별한다. 그의 사유는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파도 같다.
그러나 아무리 쓸모도 정처도 없이 걷는다 해도, 산책에는 끝이 있게 마련이다. 길은 계속 이어지더라도, 그만 멈추고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지점이 반드시 있다. 사람들이 자심의 삶 속에서 일이나 사랑이나 꿈을 두고 그런 지점을 느끼듯이.
결심하는 자리에 돌아갈 집이 요술처럼 나타나지는 않으므로, 다시 왔던 만큼을 다 걸어야 한다. 산책의 마지막 기쁨은 돌아가는 길을 얼마나 순순히, 서두르지 않고 걷느냐에 달려 있다. (155)
걷다가 죽어가는 벌레 곁에 있어주고, 창을 내다 보는 개에게 인사하고, 고양이의 코딱지를 파주며 탕진하는 시간이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 시간의 나는 진짜 '나'와 가장 일치한다. 또한 자연이나 스치는 타인과도 순간이나마 일치한다. 그 일치에 나의 희망이 있다. 부조리하고 적대적인 세계에서 그러한 겹침마저 없다면, 매 순간 훼손되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견딜까.
방 안에 있을 때 세계는 내 이해를 넘어선다. 그러나 걸을 때 세계는 언덕 서너 개와 구름 한 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윌러스 스티븐즈, <사물의 표면에 대하여>) (157)
처음 수도원을 찾았을 때 신부님이 마당까지 마중을 나오셨지요. 길 끝에 온통 흰 사람이 서 있었어요. 제가 길을 다 걸어 앞에 도착할 때까지 저에게서 눈길을 거두지 않으셨어요. 보통은 괜히 이쪽저쪽을 한 번씩 보게 되잖아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 우리는 멋쩍어져서요. 한 사람을 오래 응시할 수 있으려면 마음이 단출하고도 단단해져야 할 거예요. 그때 당신의 모습은 네 귀를 조약돌로 단정히 누른 백지 같았어요. 이후 저는 누구를 기다릴 때면 그 잠잠한 시선을 떠올리며 자세를 가다듬습니다. 펄럭이지 말자, 다짐하면서요. (167)
스테인드글라스 공방, 출판사, 목공소를 차례로 지났어요. 수사님들의 일터이지요. 목공소 화단 앞에서 톱밥들이 둥글게 말린 꽃 시늉을 하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요.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넘어왔어요.
"걷고 있어요?"
백발의 수사님 한 분이 기척도 없이 제 곁에 다가와 있었지요. "같이 걸어요."
모든 시작이 이런 말이면 어떨까요. 같이 걷자는 말. 제 마음은 단번에 기울 것입니다. (169)
갊언니에게, 라샘에게 배송될 수 있게 주문을 넣었다.
그리고 ㅂ부장님께 건네질 예정인 이 책.
읽는 동안 나는 자꾸 잃거나 잊기 쉬운 마음에 대하여 떠올리게 되었다.
이번에는 오래 간직하고 싶은데, 또 어느샌가 나는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게 되겠지?
그러면 그때 또 읽어야지- 하고 생각하게 되는 책.
2020.12.31. 덧

어제 빌려드린 ㅂ부장님은 이렇게, 하루만에 반납하셨다. 너무 좋았다는 끄덕임과 함께.
다행이다. ㅂ부장님에게도 올해의 책이어서.
나돈데.
그리고

올해 안에 드리고 싶었는데 마침 오늘 도착한 라샘 책.
2020년 첫 시작을 책으로, 그리고 라샘과 함께 했는데 2020년 마지막도 책으로, 그리고 라샘과 함께 했다.
내 소중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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