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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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가 되어 있었다. 끊어진 건 아니지만 밀착될 일도 없는, 간격이 불규칙한 점선 같은 관계였다.
그녀를 절친하다거나 좋아하는 친구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래 알아왔던 만큼 서로의 세목에 익숙해서 초보적인 오해 같은 게 없었고, 긴 세월 지켜본 바에 따라 어차피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너그럽긴 했다.
이때 느꼈다. 단 11쪽만으로도 이제 나는 은희경이라는 작가를 좋아하게 되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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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남자를 대하는 그녀의 기본 태도였다. 딱히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 원을 그릴 때 일단 컴퍼스의 각도를 되도록 크게 벌리고 보는 초기 설정 같은 것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바뀌지 않았다.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라도 일단 줄은 세워놓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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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노트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노력해보았다. 여럿이 한방에서 생활하려면 남의 말을 안 듣거나 적어도 안 듣는 척하는 기능이 필수일 것 같았다.
진짜 표현 좋다.
딱 대학생이 처음 된 그 느낌과 그리고 딱 그만큼의 이질감과 성가심과 설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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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이 분주한데도 시간은 너무나 느리게 흘러갔다. 긴장 속에 지루함이 이어지고, 쫓기면서도 침체돼 있는 이상한 시간 궤도를 통과하고 있었다. 기웃거려야 할 자리는 많았지만 모조리 재미가 없었다. 짧은 시간 안에 새로운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랜만이다. 정말 20살 날것의 느낌을 내가 다시 들여다보는 기분.
이건 대체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 싶었던 마음을 조심스레 펼쳐놓은 문장.
그래서 자꾸만 주인공이 안쓰러웠고 가여웠다. 주인공의 아주 가까운 미래 정도는 내가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리고 이부분의 플래그잇은 쪼글쪼글하게 울어 있었다.
기억난다. 소노문 1104호 거실 화장실의 욕조 안에서 거품 목욕을 하며 읽다가 플래그잇을 떨어트렸던 게.
거실에서는 크게 틀어둔 NHK 방송 소리가 들려왔다.
30분 정도 거품목욕 겸 반신욕을 하면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몸이 데워진다. 그리고는 샤워를 하고 양치를 하고 스킨 로션을 바른다.
방이 매우 뜨거운 나머지 건조하기 까지 해 새로 산 바디로션도 듬뿍 발라준다.
그리고는 머리를 조금 말리곤 잠들기 전까진 아직 시간이 많아서(너무), 23-25번을 돌려가며 그나마라도 내가 재밌게 볼 법한 영화를 찾아낸다.
낮에 방으로 넣어준 간식을 먹으며 혹은 물을 마시며 혹은 귤을 먹으며 영화를 본다.
영화가 끝나고 자정쯤, 안방에 가서 침대에 누워 자기전 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읽는다. 그리고는 조금 졸려 오면서 시계의 알람을 7시 50분으로 맞추고 불을 끈다. 불을 끄고 안방 창문 밖으로 보이는 강을 잠깐 보고는 침대에 누워 얼른 잠이 들게 해달라고 되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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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하면 저녁 시간의 식당은 여유가 있었다. 바쁘거나 인기가 많거나 돈이 많은 기숙사생들은 저녁 식사 시간에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혼자 저녁밥을 먹고 있으면 그 세 가지에 더해서 친구마저 없다는 생각에 처량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ㅋㅋㅋㅋ 대충 뭔진 알 것 같다.
특히 기숙사에서 먹는 저녁은 나도 별로였던 것 같다. 저런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냥 휑량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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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수에게는 길고 지긋지긋했던 초중고 단체 생활의 정서에서 이탈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취향을 갖는 일은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개인행동이란 점에서, 그리고 비용을 요한다는 측면에서 꽤나 적극적인 행위였다. 그것은 이전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종류의 ‘다름’이기도 했다.
책 속의 희진도 좋아했지만, 나도 읽는 내내 오현수가 제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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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점호를 마치고 322호로 나를 찾아와 지하 매점에 가자고 불러낸 것도 남자친구를 위해서였다. 그녀는 무려 330원을 투자해 호두가 든 ‘카톤’ 아이스크림을 사 주며 내게 도움을 청했다. 남자친구의 부탁으로 미팅할 여학생들을 물색 중이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남자의 외모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지성인의 양심과 진실함에 더 가치를 두는 현명한 여성이어야 하며 그 현명함 안에는 남자들이란 타고나기를 여자의 외모를 따지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지혜로움도 포함되어야 했다. (중략) 내가 잠시 속도를 늦춘 것은 양보심이 강해서가 아니라 남자들이 원한다는 현명함의 뜻을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여자의 지성은 남자를 보필할 때에만 인정받을 수 있고 여자가 남자를 능가할 만큼 눈치가 없으면 진정으로 똑똑한 게 아니라는 뜻 아닌가. 똑똑한 걸 드러내지 않고 그 똑똑함으로 남자에게 헌신하는 태도를 제멋대로 현명함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경혜는 수업 시간에 발표한 대로 사랑에 대해서뿐 아니라 남자친구와 관련된 모든 일에 논리를 적용하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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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기숙사에서 나와야만 혼자의 생활이 시작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혼자라는 건 어떤 공간을 혼자 차지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익명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뜻하는 거였다.
혼자의 정확한 정의.
그래서 나는 서울이 좋다. 도시가 좋다.
혼자일 수 있어서.
대도시가 주는 위로라는 다소 진부한 표현이 이에 가장 가까울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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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멀리 떠나온 것 같지도 않았다. 여전히 나는 무력하고 방어적인 회색 지대에 갇혀 있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그러다 보니 의욕이 없어 방치하게 되고, 결국 해야할 것을 제대로 못 해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쫓김과 불안을 낳고 그래서 자신감을 잃은 끝에 제풀에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위에 생존 의지인 자존심이 더해지니 남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고, 그러자 곧바로 소외감이 찾아오고, 그것이 또 부당하게 느껴지고, 이 모든 감정이 시간 낭비인 것 같아 회의와 비관에 빠지는 것, 그 궤도를 통과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른바 청춘의 방황만이 아니었다.
지난 두 달 동안 나는 내 앞의 문을 열지 못하고 번번이 과거의 나로 굴러떨어지곤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세계의 부당한 규율에 복종했던 미성년 그대로였다.
아 이렇게 날카롭게 글을 써도 되나.
너무 날카로워서 다시 옮겨적는 동안에도 콕 콕 찌르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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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때에는 갑자기 식당에 활기가 돌았다. 탁자 위에 식판을 내려놓을 때 수저가 미끄러지는 소리, 찐 밥 냄새와 국 냄새와 밑반찬의 짠 내, 바쁘게 교차하는 슬리퍼 끄는 소리,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작은 웃음소리와 사투리 섞인 말소리들. 그때의 소리와 냄새는 마치 나에게 속하지 않는 먼 세계의 소음 같았다. 나를 구석으로 밀어내며 나의 존재를 점점 작고 희미하게 만드는 느낌마저 들었다.
세상이 이질스럽게 다가오는 때의 포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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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규칙적인 도형을 만들며 순서대로 늘어져 있는 빨래들을 젖히고 난간 쪽으로 나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울의 밤하늘이었다. 멀고 높은 곳에서 홀로 불빛을 반짝이고 있는 남산 타워. 그 너머 어딘가에 내가 두고 떠나온 밤하늘이 있을 것이다. 무심코 고개를 젖혀보니 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태어난 곳을 떠나온 뒤 몇십, 몇백 광년의 미지를 통과해서 이제야 내게로 도착한 빛이었다. 나는 어둠 속에 선 채로 한참 동안 그 빛을 한사코 바라보았다. 바람이 젖은 눈가를 말리며 스쳐 지나갔고 그것이 나의 축제 마지막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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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점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하나를 더 가진다. 약점은 연약한 부분이라 당연히 상처 입기 쉽다. 상처받는 부위가 예민해지고 거기에서 방어를 위한 촉수가 뻗어 나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약점이 어떻게 취급당하는가를 통해 세상을 읽는 영역이 있다. 약점이 세상을 정찰하기 위한 레이더가 되는 셈이다. (중략)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약점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가.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나를 조종하고 휘두를 힘을 가진다. 우리는 장점의 도움으로 성취를 얻지만 약점의 만류로 인해 진정 원하던 것을 포기하거나 빼앗긴다. 어쩔 수 없이 약점은 삶의 결핍과 박탈을 관장한다.
소설을 참 공들여 쓰면 이렇게 되는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문장들을 매만지면서, 신형철 교수님의 글과 비슷하게 쓰였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정말 공들이고 아주 신중하게 직조한 문장들과 표현들.
감히 최근 읽은 책의 작가들과 비교해보자면, 단연 가장 높고 가장 깊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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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생들은 눈치를 본다. 문제를 낸 사람과 점수를 매기는 사람의 기준, 즉 자기를 어디에 맞춰야 할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답을 맞히려는 것은 문제를 내고 점수를 매기는 권력에 따르는 일인 것이다. 그렇게 그저 권력에 순종했을 뿐이면서 스스로의 의지로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모범생의 착각이다. 그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점점 더 완강한 틀에 맞춰가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진짜 모범생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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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에게는 수많은 벽이 있었다. 그 벽에 드리워지는 빛과 그림자의 명암도 뚜렷했다. 하지만 각기 다른 바위에 부딪쳐 다른 지점에서 구부러지는 계곡물처럼 모두의 시간은 여울을 이루며 함께 흘러갔다.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 우리 모두는 막연하나마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지금과 다를 거라고 믿었다.
이 부분을 옮겨적고서, 상아가 떠올랐다.
내가 그리고 너, 우리가 가장 이 책의 주인공과 같을 때 우리는 항상 함께였다.
그래서 교보문고에서 이 책을 사서 상아집으로 보냈다.
보내고보니 크리스마스 선물 같기도 하고.
내가 상상하는 가깝거나 먼 미래에 우리는 예전 만큼은 아니겠지만, 이 책의 유경과 희진 정도는 되어있다.
그리고 그편이 다행이라고 이제야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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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을 며칠 앞둔 날 나는 오랜만에 시내버스를 타고 중심가로 나갔다. 분식센터에서 가락국수를 먹은 다음 오거리의 서점에 들렀다. 서가에 진열된 <한국문학사>가 눈에 띄어 집어 들었다.
“참되고 아름다운 문학은 작가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선 채로 서문을 세 번쯤 읽고 나서 그 책을 샀다. ‘참되고 아름다운’이란 표현 속에 깃든 씩씩한 희망과 순정함이 웬일인지 내 마음을 조금 아프게 만들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곳에 대한 알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것이 가슴 밑바닥의 무기력한 고요를 조용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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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부산을 포함해서 서울 이외의 곳은 다 ‘시골’로 칭하고 있었다. 또한 위도와는 상관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장대로 머리통을 맞아가며 버스표를 사려다 실패한 ‘시골’에도, 그리고 모두가 ‘올라온다’고 말하는 서울에도 내 자리는 없는 것 같았다.
맞아. 그리고 나조차도 이제는 무심코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아주 깊은 심연에는 나의 집단을 확인하려는 의도가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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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을 알고 지낸 사람들의 인생을 각기 포물선을 그래프로 그려보면 뜻밖에도 서로 맞닿는 경우가 적다는 걸 알 수 있다. 마치 시소게임 같다. 한 사람이 오르막길로 상승할 때 다른 사람은 내려가기 마련이다. 한 사람이 언덕마루에 서서 경치를 내려다볼 때 다른 한 사람은 바닥에서 헛발질을 하고 있기도 한다. 아침에 볕이 들었던 자리가 저녁이 되면 싸늘해지듯 빛은 자리를 옮겨 다니는데 어둠을 규칙 없이 찾아온다.
진짜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쓰지.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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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낙관과 비관의 차이는 쉽게 힘을 낼 수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인 점은 비관이 더 많은 희망의 증거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어둡고 무기력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관을 일삼는 사람이야말로 그것이 깨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자신 같은 비관론자도 설득될 만큼 강력한 긍정과 인내심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유일하게 그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게 된다. 아마 이동휘는 그것을 알고 도망쳤을 것이다.
나도 비슷한 이유로 도망쳤던 적이 꽤 많다.
그게 남자친구였든, 친구였든, 상사든, 가족이든, 누구든.
그런데 이 도망을 낙관과 비관의 차이로 설명해내다니.
은희경 작가님 정말 더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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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어디 있어. 각자의 기억은 그 사람의 사적인 문학이란 말 못 들어봤니?”
그녀는 그 문장을 쓴 영국 작가의 책에서 한 줄을 더 인용했다.
“우리가 아는 자신의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최근에 읽었던 책의 구절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오래전의 유성우로 지금 존재하는 커다란 호수를 설명할 수 있다.”
어차피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고 우리에게 유성우의 밤은 같은 풍경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서 말하듯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일 수도 있다.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오늘부터 은희경 작품 연어합니다!
2020년은 은희경을 만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은희경 작가님을 만나서 정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