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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천선란

꼬마대장님 2020. 10. 1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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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방을 오가며 통화를 하던 민주는 마침내 전화를 끊고 웃으며 콜리에게 다가왔다. 거기서 잘 살아봐. 민주는 그렇게 말하고 콜리의 전원을 껐는데, 콜리는 민주가 자신에게 '살아'라고 표현한 것을 잊지 않도록 메모리에 저장해두었다. (34)

 

다리뼈와 늑골이 붙을 즈음 얼굴 피부이식도 진행했다. 여린 허벅지 안쪽 살을 떼어 얼굴에 붙였다. 화장으로 가리면 티가 나지 않았지만 보경은 굳이 화장으로 수술 자국을 가리지 않았다. 이미 새겨진 자국을 평생 숨기고 살 수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것 같은 이 소방관이 치료 과정을 전부 지켜봤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만난 사람은 편안했다. 실제로도 보경이 지하에 있을 때 만나지 않았던가. (79)

 

보경은 소방관이 프러포즈를 해 왔던 날, 반지를 왼쪽 약지에 낀 채로 물었다.
"당신까지 위험해지는 데 왜 나를 구했어요?"
"3%였잖아요."
"고작 3%인 거잖아요."
"사람은 기계와 달라서 꺼진다고 완전히 멈추는 게 아니니까요. 3%라는 뜻은 말 그대로 살 수 있다는 뜻이에요."(80)

 

소방관이 놓지 않았던 보경의 3%에는 실로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보경은 언젠가, 한강 노을을 바라보며 바퀴를 열심히 굴리는 아이들이 멈추지 않고 달렸으면 좋겠다고 소방관에게 말했다. 삶이 이따금씩 의사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벽에 부딪혀 심한 상처가 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방향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이 1%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83)

 

밥해주려고 만난 거 아니라는 말을 하면서도 굶길 순 없다는 심정으로 주방에 들어가 쌀을 씻는 자신을 자각할 때마다 모든 것이 혐오스러웠다. 그래서 결국 헤어질 때 20킬로그램짜리 쌀을 그 자식 집에 다 쏟아붓고 나왔다. (153)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잘했다 복희야!!!!!!

 

다른 수험생들의 엄마가 어떻게 아이를 관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보경의 방식은 '방목'이었다. 숨통을 조이는 순간 분명 어느 한 곳이 짓무르기 시작할 거라고 믿었다. (165)

 

상체를 일으켜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웃음이 났다. 아직도 청승을 떨 기력이 남아 있는 자신이 새삼 대견스러웠다. 그리움이 밀고 들어오는 순간을 예견할 수 있다면 오래도록 그 순간을 만끽할 수 있게 준비라도 할 텐데, 친절하지 못했던 이별처럼 그리움도 불친절하게 찾아왔다. (168)

 

그리고 아주 가끔씩 경사진 인도를 내려가는 은혜의 휠체어를 허락도 없이 붙잡아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다. '도와준다'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지만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랬다. 그들은 은혜가 놀라든 말든 상관없이 은혜의 휠체어를 훅 밀었다. 손잡이를 잡는 것뿐인데 은혜를 그럴 때마다 길 가다 팔이 붙잡힌 사람처럼 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사람들은 그걸 선의라고 생각했다. 은혜가 '알아요'라고 차갑게 말하거나 대꾸하지 않으면 자신의 선의를 무시한 못된 인간이 된다. 그럼 곧장 인상을 찌푸리거나 대놓고 혀를 차는 경우도 있었다. 웃어야 한다. 사람들이 은혜에게 바라는 건 어떤 불굴의 상황도 이겨내는 긍정의 힘이었다. 은혜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렇지만 은혜는 그렇게 호락호락 그들 삶의 위안과 희망이 되고 싶지 않았다. 본인 인생은 본인이 알아서 보듬으세요. 가끔은 마이크 잡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178)

비장애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 
나도 처음에 알게 되었을 때 적잖이 놀랐었다. 
팔을 잡아 도와주는게 아니라 잡을 수 있도록 팔을 내밀어주어야 하는 것.

정말 여전히 무지한 것이 참 많다. 

 

"그리움이 어떤 건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보경은 콜리의 질문을 받자마자 깊은 생각에 빠졌다. 콜리는 이가 나간 컵에서 식어가는 커피를 쳐다보며 보경의 말을 기다렸다.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는 거야."
보경은 콜리가 아닌 주방에 난 창을 쳐다보며 말했다.
"문득문득 생각나지만 그때마다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그래서 마음에 가지고 있는 덩어리를 하나씩 떼어내는 거지. 다 사라질 때까지."
"마음을 떼어낸다는 게 가능한가요? 그러다 죽어요."
"응. 이러다 나도 죽겠지, 죽으면 다 그만이지, 하면서 사는 거지."
보경은 민주처럼 콜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풀지 않고 더 어렵고 난해하게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창을 바라보는 보경의 시선 각도와 느려진 숨이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어 콜리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콜리 역시 메모리에 저장된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그 순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 콜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식탁 끄트머리에 걸쳐 있던 노을빛이 길어져 이내 식탁을 반으로 가르듯 가로질렀다. 
"그리운 시절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거야."
보경의 눈동자가 노을빛처럼 반짝거렸다. 반짝거리는 건 아름답다는 건데, 콜리 눈에 그 반짝거림은 슬픔에 가까워 보였다.
"행복이 만병통치약이거든."
"..."
"행복한 순간만이 유일하게 그리움을 이겨."
그리움이란 그런 것이구나. 콜리에게도 그리워할 순간이 생겼다. 투데이와 주로를 달릴 때다. 투데이가 행복해하는 진동을 느끼면서. (205)

나는 정말 너를 오래도록 그리워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그리워하는 줄도 모르고 그리워했다 아주 오래. 

 

콜리는 연재가 하는 말들, 제 몸이 될 부분들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유독 빛나는 연재의 눈을 보았다. 사람은 아주 가끔, 스스로 빛을 낸다. (210)

내가 스스로 빛을 내던 순간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보경이 은혜에게 괜찮다고 말할 때마다, 이 사소한 불편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할 때마다 은혜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정상적인 사람에게 너의 정상성은 괜찮은 것이고, 그것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은혜도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보경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가 가끔은 자신이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났음을 확인시키는 차갑고 날카로운 창살 같다는 것을. (221)

 

"고작 이틀에서 14일로 삶을 연장한다고 뭔가 달라질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생길까...?"
서진이 애처롭게 물어봤다. 자신의 취재 자료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하지만 연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당연하지. 살아간다는 건 늘 그런 기회를 맞닥뜨린다는 거잖아. 살아 있어야 무언가를 바꿀 수 있기라도 하지." (261)

 

도대체 그걸 왜? 궁금증은 증폭되었지만 한 발자국 다가온 콜리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오늘은 어딘가 달라 보이네요. 피부가 푸석하고 피곤해 보여요. 집에서 쉬는 게 적절한 조치일 것 같아요. 인간은 아프면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들다고 들었어요." (270)

 

하지만 콜리는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정보는 도리어 그게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대화였다. 콜리는 공감을 느낄 수 없는 개체였지만 공감하는 척 움직이게 만들어졌다. 어차피 사람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공감이었다. 보경은 콜리를 앉혀놓고 몇 번 대화를 한 후에야 진정으로 필요했던 건 들을 수 있는 귀와 끄덕일 수 있는 고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생 보경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노라 약속했던 사람이 오래도록 비워둔 자리를 뜻하지 않을 것이 채웠다. (271)

 

슬픔도 배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있었는데 놓쳤다. 현실의 무게감이 몸을 눌러 아무것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것은 몸속에서 흐르지도, 버릴 수도 없는 물로 오래도록 고여 있었다. 비린 냄새가 났다. 새벼겡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일 때도 속에 쌓인 슬픔이 찰랑거리며 비린내를 풍겼다. 슬픔이 비림으로 바뀌자 후에는 꺼내려고 해도 비릿해서 꺼낼 수 없어졌다. 그렇게 계속 몸에 담아두었다. 고여서 비려질 때까지. 끝끝내 썩어 마를 날을 기다리면서. (278)

 

"시간이 서로 다르게 흘러간다는 이론에 대해서는 연재가 말해줬어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것이라고요. 제가 투데이와 함께 달릴 때 느꼈던 시간이 접힌 듯한 현상은 실제라고요. 생명은 각자마다 삶의 시간이 다른 것 같아요."
".. 다르지, 달라."
"그렇다면 인간은 함께 있지만 모두가 같은 시간을 사는 건 아니네요."
"..."
"같은 시대를 살고 있을 뿐 모두가 섞일 수 없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네요. 맞나요?"
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기 탓인지 목이 잠겨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콜리가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283
“시간이 서로 다르게 흘러간다는 이론에 대해서는 연재가 말해줬어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것이라고요. 제가 투데이와 함께 달릴 때 느꼈던 시간이 접힌 듯한 현상은 실제라고요. 생명은 각자마다 삶의 시간이 다른 것 같아요.”
“.. 다르지, 달라.”
“그렇다면 인간은 함께 있지만 모두가 같은 시간을 사는 건 아니네요.”
“...”
“같은 시대를 살고 있을 뿐 모두가 섞일 수 없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네요. 맞나요?”
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기 탓인지 목이 잠겨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콜리가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요?”
콜리는 보경이 침묵을 유지하는 동안에도 지루해하지도 않았고 딴 곳을 보지도 않았으며 되묻지도 않았다. 침범할 수 없는 보경의 시간을 이해하는 것처럼 기다렸다.


;291
지수는 외로운 적이 없어 외로움을 타지 않는 성격이라 스스로 말했지만 연재가 보기에는 늘 외롭게 있어 외롭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294
“그럼 당신도 세상에서 지수를 가장 아끼나요?”
“아니거든?”
“저는 팀이란 게 그렇다고 생각해요. 물론 투데이는 자신의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저는 감정이 없지만 100마리의 말이 바다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저는 투데이를 구할 거예요. 바다에 빠진 모든 말을 결국에는 구하겠지만 가장 먼저 구하는 거요. 그건 아낀다는 뜻이래요.”
“그런 건 어디서 알았어?”
“보경과 보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요. 거기서 바다에 빠지면 누구를 가장 먼저 구할 거냐는 질문이 나왔어요. 그게 소중한 사람의 순위를 매길 때 사용되던데... 그런데 참 이상한 비유예요. 왜 꼭 절망의 상황에서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요?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를 누구에게 먼저 줄 거냐는 비유도 할 수 있을 텐데요.”


;300
콜리는 그런 연재의 둥글게 말린 등과 두통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연재는 무언가에 열중할 때 빛나는 인간이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빛으로 발산되는 것이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열을 감지할 수 있는 콜리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다. 연재는 콜리의 몸을 수리할 때 자주 빛을 뿜었다.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열중하며 콜리의 다리를 만지던 순간과 그릇에 담아 온 씨리얼을 퍼먹으며 어느 부분이 잘못 연결되어 있는지 도면을 살펴볼 때에도 빛이 나왔다. 지금도 연재의 몸에서는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콜리가 연재의 등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연재는 “뭐야?” 하고 물었지만 콜리의 손을 치우거나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콜리는 오래도록, 연재의 진동이 느껴질 때까지 손을 올려둘 수 있었다. 떨린다. 행복에 휩싸인 연재의 몸이 진동으로 떨렸다. 연재는 살아 있었다. 늘 살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있었다. 무엇이 연재를 이토록 가슴 뛰게 만드는 것일까. 투데이처럼 달리는 것도 아니고 저 작은 화면에 기계를 구상하고 있을 뿐인데.


;322
화났냐고 물으려다가 그건 또 아닌 것 같아 결국 답장하지 않았다가 결국 콜리에게 한 소리 들었다.
대화하지 않고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나요? 인간에게는 서로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기능이 있나요?


;326
연재는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숱한 시간 동안 이해받지 못해 상처 입은 날들이 쌓여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 터였다.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저마다의 고통과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척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란 모두에게 존재했다. 적어도 연재는 그렇게 생각했고, 이해받기를 포기했다. 연재는 은혜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마다 어디서 누구와 있든 모든 것을 그만두고 집으로 향해야 했다. 친구들은 연재에게 언니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왜 항상 갑자기 집에 가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연재는 덤덤하게 은혜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연재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이해한 건 아니었다. 이해에는 한계가 있고, 횟수가 있고, 마지노선이 있다. 그 선을 넘으면 이해해주던 사람은 어느 순간 상대방의 이기심을 지적했다.
“그런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몇 번씩 그렇게 가면 우리는 뭐가 돼?”
이해받기를 포기한다는 건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연재는 상대방의 모든 행동에 사사건건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저렇게 행동하면 저렇구나, 하고 말았다.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해서 그러는지 싫어해서 그러는지 따위를 생각하면 너무 많은 이해심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이해를 포기하면 모든게 편해졌다. 관계에 기대를 걸지 않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다. 적어도 지수를 만나기 전까지, 연재의 세계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였다. 적막이기도 했고.


;328
“네가 로봇광인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로봇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지. 너보다 콜리가 더 인간적이겠다.”
연재는 악담을 쏟고 있는 것이냐고 물으려다가 참고 지수의 말을 계속 들었다. 한참 말을 토해내던 지수가 한숨 돌리고는 조금 진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더는 못 온다고 해도 너는 알았어가 아니라 아쉽다고 했었어야지. 아쉬웠으면. 물론 네가 아쉽지 않았으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그때...”
순간 지수의 말을 끊고 연재가 말했다.
“아쉬웠어.”
지수가 입을 다물었다. 연재가 계속 말을 이었다.
“당연히 아쉽지. 근데 내가 아쉽다고 너한테 학원을 그만두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래도 아쉽다고 했었어야지. 그래야 내가 어떻게든 시간이 날 때마다 또 놀러 갈 수 있지. 참, 내가 이 나이 먹고 친구한테 이런거 하나하나 말해줘야 하는지 몰랐다. 네가 눈치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부분 읽으면서 중-고-대학생때 너랑 만나면서 쉼없이 서운해하고 알려주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ㅋㅋㅋㅋ
그래서 지수의 마음을 나는 알지!
그런데 화자가 연재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어서, 꼭 그때의 너의 마음인 것 같아서 너무 귀엽기도 했다.


;332
연재는 2층에서 콜리와 함께 벽면에 영상을 쏘았다. 제목과 감독, 그리고 주연 배우 이름이 천천히 떴다. 그 속에 있는 ‘김보경’이라는 이름이 익숙하고도 낯설었다. 공포영화를 보는 것처럼 연재가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려 앉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콜리가 연재를 따라 무릎을 끌어안았다. 콜리가 옆에 있어 연재는 홀로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콜리에게는 생명체가 가진 체온이 없었다. 그럼에도 콜리는 언제나 이곳에 함께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였다.


;335
아이들은 저마다 해외 여행이나 유학 경험을 토대로 서구권의 연구 자료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다. 모두 세상에 필요한 아이디어였다. 연재가 자신이 준비한 발표 자료를 다시 살폈다. 오탈자는 없는지 확인하려는 요량이었지만 동시에 다른 발표들에 비해 내용이 너무 부실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단순한 도면을 바라보고 있으니 지수가 연재의 손을 붙잡았다.
‘네 아이디어가 제일 훌륭해.’
지수가 소리 없이 말하고는 허리 펴라며 연재의 등을 팍팍 내리쳤다. 든든한 말이었다. 청심환이 이제 효과를 내는 건지 속이 편안해졌다.


;337
“이 아이디어를 왜 냈죠? 학생이 대답해봐요.”
지수가 마이크를 연재에게 내밀었다. 연재가 지수 옆으로 다가와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견문을 넓혀 얻은 아이디어라는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연재는 아직까지 ‘집’이라는 세상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 심사위원들은 연재의 답을 시시하다고 느낄 것이다. 연재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연재에게 세상은 아직까지 집이 전부인 걸. 그리고 그 집에서조차 세상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너무나도 많은 걸. 연재가 떨지 않기 위해 천천히 숨을 뱉었다. 몸에 힘을 줄 때보다 힘을 뺐을 때 긴장이 더 풀렸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요.”
“한 번 외출하기 위해 남들보다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준비를 한다고 나갈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의지나 실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끝내 포기하는 경우도 많아요. 어렵거든요. 도움이 없으면 갈 수 없는 길들이 많으니까요. 누구는 쉽게 수술을 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그 수술은 누군가에게 불가능과 같은 비용이거든요. 그리고 또 그 사람은 우리와 같은 온전한 두 다리를 갖고 싶은 게 아니에요. 다리는 형체죠. 진정으로 가지고 싶은 건 자유로움이에요. 가고자 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요. 자유를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아주 잘 만들어진, 오르지 못하고 넘지 못하는 것이 없는 바퀴만 있으면 돼요. 문명이 계단을 없앨 수 없다면 계단을 오르는 바퀴를 만들면 되잖아요. 기술은 그러기 위해 발전하는 거니까요. 나약한 자를 보조하는 게 아니라, 이미 강한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연재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마지막 문장까지 무사히 내뱉었다.
“인류 발전의 가장 큰 발명이 됐던 바퀴도, 다시 한 번 모양을 바꿀 때가 왔다고 생각해요. 바퀴가 고대 인류를 아주 먼 곳까지 빠르게 데려다줬다면 현 인류에게도 그렇게 해줄 거라고 믿어요.”


;343
연재는 그 후로도 같은 영화를 세 번씩 더 봤다. 콜리는 한 번 본 순간 장면에 등장하는 소품의 위치까지도 외웠지만 연재는 볼 때마다 새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인간의 눈이란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어도 각자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콜리는 인간의 구조가 참으로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있지만 시간이 같이 흐르지 않으며 같은 곳을 보지만 서로 다른 것을 기억하고, 말하지 않으면 속마음을 알 수 없다. 때때로 생각과 말을 다르게 할 수도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다가 모든 연료를 다 소진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다른 것을 보고 있어도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으며 멀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것처럼 시간이 맞았다. 어렵고 복잡했다. 하지만 즐거울 것 같기도 했다. 콜리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면 모든 상황이 즐거웠으리라. 삶 자체가 연속되는 퀴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344
살아 있지 않은 걸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인간밖에 없으리라. 결혼하고 소방관과 처음 샀던 차를 되팔며 울었다는 보경의 말만 들어도, 보경이 그 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다.


;348
투데이는 주로에 서서도 뛰지 않는 훈련을 했다. 태어난 이후로 줄곧 빨리 달리는 훈련만을 받았던 투데이는 이제, 아주 천천히 다치지 않을 만큼 느긋하게 달려야 했다. 투데이가 조금만 속력을 내려고 해도 옆에 서 있던 민주와 연재, 그리고 은혜가 손을 저으며 뛰지 말라고 투데이를 어르고 달랬다. 천천히, 느리게, 여유 있게, 느린 호흡으로, 하늘을 쳐다보고, 주변을 둘러보고, 네 등에 타고 있는 콜리의 움직임을 함께 느끼면서...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했다. 경마장에서는 빠른 말이 1등을 하지만, 느리게 달린다고 경기 도중 주로에서 퇴출당하지는 않았으므로, 애초에 천천히 달리는 것이 규정에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352
경기장은 여느 때와 달리 혼란스럽다. 함성이 아닌 원성과 질타가, 욕설이 난무한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저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당신의 주로가 있으니 그것만 보고 달려요.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요.
어차피 이 주로는 투데이만 달릴 수 있다. 관중석에서 보내는 야유는 중요하지 않다. 투데이가 신경 쓰지 않도록 귓가에 말했고, 또 말했다.
신경 쓰지 마요, 저 소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굳이 들을 필요 없어요. 모든 것을 듣고 살 필요 없어요.




지난 토요일(2020.10.10.) 은평뉴타운 도서관에서 진행한 천선란 작가님과의 북토크를 참여했다(줌으로).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천선란은 필명이라고. 아빠, 엄마, 언니의 이름 한 자씩 가져와 만든 것이라고.
또 나의 질문에도 답을 주셨다.

왜 콜리가 아는 단어는 모두 파랑으로 물들었나요?
물론 콜리가 하늘을 좋아했어서 파랑일 수 있겠습니다만,
그 외에 투데이의 색, 연재의 눈동자 등 콜리가 좋아한 다른 것도 많았기 때문에 궁금해졌습니다.

작가님이 말하길,
파랑, blue는 대개 우울과 불안의 상징으로 많이 쓰이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또 푸른 하늘을 보면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것이 인간이기에, 이렇게 용례의 스펙트럼이 넓은 파랑이 콜리의 파란만장한 삶을 대변해줄 수 있을 색이라고 생각했다고.

또 더 놀라운건 작가님은 93이시다. 무려 나보다 1살 언니.
진짜 멋지고 다하세요.

북토크(하는 중에 지형이는 수영하러 감 ㅋㅋㅋㅋ)를 마치고 그의 다른 책도 궁금해서 바로 이북으로 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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