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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 백수린
꼬마대장님
2020. 9. 3.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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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어릴 적부터 뭐든 잘 잃어버리곤 했던 내게는 필기구나 머리끈 같은 일상적인 사물들뿐 아니라 지갑이나 계약서처럼 제법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일마저도 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요즘 내가 가장 많이 잃어버리는 것은 시간인 듯하다.
정신없이 앞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멈춰 돌아볼 때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상실의 세목들. 겁 없이 손가락 걸며 주고받던 순정한 약속과 내일에 대한 무구한 믿음, 비눗방울처럼 허황하고 아름다웠던 꿈과 작은 기척에도 쉽게 수줍었던 날들은 이제 다 어디에 가 있을까.
이 책에 실린 짧은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이다. 마음을 들여다볼 겨를이 없어 자신이 무언가를 상실하고 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일상의 사람들. 어쩌면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그들을 대신해 마음의 풍경을 그리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밤이 지나면 사라져버릴지라도 지금은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기미와 흔적을 언어로 붙잡아두는 일. 굳은살처럼 딱딱해진 마음의 외피 아래서 벌어지는 사세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들을 기록하는 일. (8)
완벽한 휴가
그러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그래서 우리는 텐트 안으로 서둘러 숨어들었어. 빗소리가 들리는 텐트 안은 왜 그렇게 아늑할까? 나는 텐트 문을 살짝 열고 아빠가 조그만 삽으로 텐트 주변에 물도랑을 만드는 걸 훔쳐봐. 비에 젖은 아빠의 어깨는 넓고, 허리를 숙인 채 도랑을 파는 아빠의 옆모습은 늠름하지. 이윽고 아빠가 텐트 안으로 들어오고, 우리는 넷이 나란히 텐트 안에 누워. 나는 아빠 옆에, 동생은 엄마 옆에. 빗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아빠의 옆구리에 코를 바짝 대면 아빠의 몸에서는 소금 냄새가 나. (53)
어릴 때 텐트를 가지고 하던 여행이 떠올랐다. 그리고 우리 아빠도 비올 때 또는 비가 오지 않을 때 언제나 그랬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비치 타올
상준은 그들의 대화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서둘러 어묵 값을 계산했다. 포장마차 밖으로 나오자 거리는 한결 더 서늘해져 있었다. 칼칼한 바람이 부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상준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 대해 생각할 조금의 여유마저 우리에게서 박탈하는 것은 대체 무얼까 생각했다. 우리로 하여금 끝내 자신의 고통에만 골몰하게 만드는 그것은. 그러는 사이 보행자 신호등의 초록불이 들어오고, 상준의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길을 건넜다. 횡단보도로 진입하려던 상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발길을 돌려 포장마차로 다시 향했다. 밀떡볶이와 순대를 사기 위해서. 염통도 잊지 말아야지, 상준은 생각했다. 이 세계는 사람들을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이고 끊임없이 비참하게 만들며 타인에게 잔인해지도록 종용하지만, 이런 세계에 살더라도 그가 아내에게 주고 싶은 것은 오직 사랑뿐이니까. (102)
어떤 끝
그날 퇴근하기까지 시간은 정말로 더디게 흘렀다. 어찌나 더디게 흐르는지, 퇴근 시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을 땐 겨우 오후 세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에 빠진 것을 알았다. (106)
내가 사랑에 빠진 것을 알았다니.
"성훈이 정도면 정말 준수하지!" 사귄 햇수는 쌓이는데 내가 결혼을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안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 하지만 뭔가가 소리 소문 없이 분명히 무너져 내리고 있는걸. 그러나 여기는 도쿄였고, 우리가 처음으로 같이 잤던 도쿄의 한복판에서,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내 접시 위로 닭껍질 꼬치의 살을 젓가락으로 발라내어 가만히 얹어주는 성훈의 단정한 이마를 보는 순간, 나는 무너지고 무너지고 무너져서 저 멀리로 떠내려가던 그 무언가가 밀물에 실려 다시 나의 연안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112)
단정한 이마.
시간이 흐르고도 여전히 단정한 지형의 이마를 보는 내 마음이 떠올랐다.
어제 밤에 정아의 "그걸 믿어?"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충격을 말하고부터 "이제 질문에 대한 답이 됐어?"라고 네가 답하기까지. 정말 오래도록 내가 그리워한 것이었다고 생각했어.
언제나 해피엔딩
"...괜찮아지나요?"
박 선생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민주의 책상 위에 차가 담긴 종이컵을 다시 올려놓았다.
"그 시기만 지나면 그런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나요?"
민주의 질문에 박 선생은 아무런 말없이 웃더니,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155)
오직 눈 감을 때
그때 우리는 이유도 없이 호프집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친구의 울음이 그치기를 하염없이 기다려도 시간 아까운 줄 모르던 나이였다. 별것도 아닌 일로 정의 운운하며 핏대 높이고 싸우다가도, 실연하면 쉽게 동지가 되던 나이. 마흔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고, 서른이 되기 전엔 인생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매일 조바심이 났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 사이를 휘청거리면서도 그 나이에만 허락되던 무책임과 자유를 방탕하게 누리던 날들. (188)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고 나는 누구에게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나 아닌 무엇이 되기 위해 안달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내가 나인 것을 온전히 좋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나는 점점 더 그런 사람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내가 잃어버린 것,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오직 눈 감을 때에만 내게로 잠시 돌아왔다 다시 멀어지는 모든 것들이 한없이 그리워졌다. 내 것인 줄 알아차리기도 전에 상실해버린 그 모든 것들이. (195)
초단편소설집이라고 해야할까?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여름의 빌라>가 더 좋았다.
그래도 작가님의 문체는 너무 아름답고 현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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