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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 신형철

꼬마대장님 2020. 7. 27.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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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내 아내 신샛별은 이 책이 다룬 거의 모든 영화를 함께 보았고 최상의 토론 상대자가 되어주었으니 사실상 공동 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에 실린 글 중 하나를 나는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썼다. 그녀를 정확히 사랑하는 일로 남은 생이 살아질 것이다. (11)

내가 들은 그 어느 프러포즈 중에 단연 최고다.
이런 프러포즈 앞에 무력해지지 않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도대체 어떤 구조 속에서 A는 B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는가. 그리고 어떤 조건이 갖춰질 때 B는 A에게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는가. 이 두 물음 중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후자다. 왜냐하면 내가 어쩌다 너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라는 물음은, 내가 너와 '이미' 사랑에 빠진 이후에 던져지는 한에서는, 물음으로서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근본적으로 동어반복에 가까워지고 말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된 것은 네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 놀라운 것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나의 사랑에 응답하게 되는 일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상황 혹은 조건 속에서만 타인의 사랑에 기꺼이 응답하는가?' 
신선한 인용은 못되겠지만 역시 스피노자가 유용할 것이다. <에티카> 3부의 '정리 41'과 '주석'을 (편의상) 합쳐 정리하면 이렇다.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고, 또 그가 자신이 그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만한 타당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믿는다면, 그는 자부심을 느끼며 기뻐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되, 그가 그 사랑에 어떤 원인도 제공한 바가 없다고 믿는 경우, 그는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나는 너를 사랑해'가 상대방에게서 끌어낼 수 있을 두 가지 결과를 말한다. 사랑을 받기 시작한 사람이 자신은 확실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된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응, 나도 나를 사랑해." 과연 그럴 것이다. (19)

 

기본적인 신뢰가 갖춰져 있는 조건하에서라면 , 타인의 결여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태도는 그것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24)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문법적으로 틀린 데가 없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을 말한다. 그러나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학은 언제나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리라. ('근사하다'라는 칭찬의 취지가 거기에 있다. '근사近似'는 꽤 비슷한 상태를 가리킨다.)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이것은 장승리의 두 번째 시집 <무표정>에 수록돼 있는 시 <말>의 한 구절인데, 나는 이 한 문장 속에 담겨 있는 고통을 자주 생각한다. (27)

 

그러나 이 여행을 계기로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이별한다. 프레드에게 가정이 있고 그녀가 그것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로렌스가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존재가 되었을 때, 그리고 그런 로렌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때, 정작 프레드는 자기 자신이 아닌 존재가 되고 그만큼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이야기는 사실상 여기서 끝난다. (30)

 

삶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김연수의 단편소설 <벚꽃 새해>의 전언이기도 하다.) 아델의 첫사랑이 고통스러웠다는 것은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면 절망이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아델의 고통은 그녀를 달리 살게 할 것이고 더 사랑하게 할 것이다. (34)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에서 타자가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알게 된다. 사랑이 실패한 것은 내가 타자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 진정한 문제는 지금 타자를 잃어버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별은 이렇게 독이면서 약이다. 질 나쁜 연애소설은 연애에서 생긴 문제를 다른 연애(또 다른 타자, 반복되는 환상)로 봉합하지만, 괜찮은 연애 소설은 같은 문제를 이렇게 자기 발전(또 다른 나, 성숙한 환멸)의 형식으로 해결한다. (46)

그동안 내가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 크.. 무서운 말. 

 

여든다섯 살에 출간한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적었다. 서구 사회가 문명화되면서 죽음이라는 불편한 사건은 격리되기 시작했다고, 그 격리의 공간인 병원에서는 "사람 자체에 대한 배려는 뒷전으로 밀리고 장기에 대한 배려가 우선시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고, 그런데 죽어가는 자에게 정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적 통증이 아니라 정서적 고립이라고. (59)

 

안느는 지금 약해져 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감독 '종' 내외와 식사를 하고 난 뒤 새벽녘에 그의 유혹에, 비록 완전히는 아니었지만, 쉽게 투항해버린다. 안느에게는 "당신이라는 존재, 한순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거짓투성이 (..) 당신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고, 잠시 약해졌을 뿐"이라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타자의 욕망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필요하다. (85)

 

자신에 대해 말하길 주저하는 안느에게 스님이 '진짜 질문'을 해보라고 말하자 안느는 자신이 왜 거짓말을 하고 왜 힘이 들며 왜 무서운지 등을 묻는다. 스님은 지혜롭게도 질문을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답한다. 요약하면 그것은 '당신은 이미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는 것, 다만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 정도가 될 것이다. 도움이 안 된다며 안느가 불평을 늘어놓자 스님은 최종적으로 반문한다. "당신은 어렸을 때의 당신으로부터 얼마나 달라졌는가?" 이것은 선가의 오래된 화두 중 하나인 '부모가 태어나기 전 너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하는 물음이다. 자아에 대해 집착하는 이에게 당신에게는 애초 집착할 자아라는 게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논법인 셈이다. 스님이 안느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당신 자신을 똑바로 보라는 것,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순간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 안느는 분명히 무언가를 깨달았을 것이고 마침내 외출을 감행한다. "나는 내가 가보지 않은 길로 가보려고 합니다." (85)

 

선희의 '실체'라는 것이 과연 있는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그녀 자신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라는 물음을 뒤에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고, 여기서 다시 몇 겹의 막을 걷어내고 나면 애초의 물음은 사실상 '나는 타인이 욕망할 만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선희만의 물음이 아니다. 언제나 이것보다 더 절실한 물음이 우리에게 있었던가. (96)

 

선희가 내가 누구인지를 물을 때 그녀가 타인의 인정(욕망)을 은밀히 바라듯이, 선희에게 그녀가 누구인지 말하는 남자들 또한 그녀의 인정(욕망)을 은밀히 바란다. 같은 욕망이 말을 끌고 가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다른 사내의 그것을 복제하면서 결국 비슷해지고, 선희가 어떤 여자인가 하는 물음 따위는 어느새 무의미해져버린다. (97)

 

우리가 인감임을 다시 상기하게 만드는 선물. 조물주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가 인간에게 욕망이라는 것을 만들어 넣은 것은 인간이 계속 살아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겠지만, 그는 인간의 삶이 그 욕망과 더불어 장차 행복할지 불행할지는 미리 계산하지 못했거나 안 한 것 같다. 그 계산을 대신 해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른다. (99)

 

애도와 우울은 사랑해오던 대상을 상실했을 때 주체가 보이는 반응이라는 점에서는 일단 같다. 그러나 애도가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그 대상에 쏟았던 에너지(리비도)를 철회하여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라면(그래서 '애도 작업'이나 '애도 기간' 같은 말이 성립될 수 있다), 우울은 대상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그 대상과 동일시하면서 자기 파괴적인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경우다(그래서 애도와 달리 우울은 병리적 현상이며 치료의 대상이 된다). (103)

 

신이 아닌 인간의 이성이 과연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던 이 영화는 이제 다른 가능성 하나를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 진실은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 능력은 때로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어 발현될 수 있다는 것. 그를 통해 인간은 서로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것. (129)

 

타인들과 더불어 사는 인간의 삶에서 이것보다 더 절망적인 결론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네가 누구건, 무엇이 진실이건, 그것은 우리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네가 유죄라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어쩔 수 없이 또 카프카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었던가. 인간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기소되기도 한다는 것.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그 재판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이것은 시작되는 순간 반드시 질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재판이라는 것. 이것이 그야말로 부조리한 전언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 카프카적 세계에는 진실이라는 가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도 그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이 영화의 마지막 총성이 알려준다. (131)

 

진실이 무력한 세계에서 우리가 피고인의 자리에 서게 되는 비극을 용케 피해 간다 하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배심원의 자리에 서서 무고한 자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는다. 진실에 도달하는 이성의 능력에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면 저 불행한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132)

 

우리라고 다른가. 그렇지 않다. 프로이트의 개념 중에 '덮개기억'이라는 것이 있다. 덮개와 기억의 합성어로 '어떤 중요한 기억을 덮기 위한 사소한 기억'을 뜻한다. 사소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을 유독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작 중요하고 본질적인 어떤 기억을 가리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것. 이 발견의 메시지는 "우리의 기억 작용이 예기치 못한 목적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얼마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잊고 싶은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잊고 싶은 일'이라는 것이 미처 정산이 끝나지 않은 채로 버려진 진실이라면 그것은 언젠가는 다시 되돌아와서 계산을 끝내려 든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다. 소위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146)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가장 바람직한 연인은 내가 그를 떠났으면서도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게 해주는 연인일 텐데,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런 연인은 거의 없다. 철수가 바로 그런 연인이다. 이것은 너무 과도한 판타지 아닌가. (159)

ㅎㅎ 때론 있을 수도. 
그래서 너를 넘는 사람이 없는 건지도.
넘을 수나 있을지도. 

 

우리를 윤리적인 혼란에 빠뜨리는 일들은 대체로 선과 악이 서로 번지고 섞이는 불투명한 경계 지점에서 발생한다. 선과 악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는 서사들은 선과 악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선한 우리는 악해질 수가 없을 것이라고 안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낭만적 사랑이라는 판타지 못지않게 이것 역시도 일종의 윤리적 판타지일 수 있다. 진정으로 윤리적인 태도는, 선의 기반이 사실상 매우 허약하다는 것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악의 본질이 보기보다 복합적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선의 악'과 '악의 선'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태도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악에도 다 이유가 있으니 이 세상에 이해 못할 악은 없다고 단언하면서 다 같이 윤리적 상대주의의 불지옥 속으로 뛰어들자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대부분의 악은 자신이 한 번도 악이었던 적이 없다고 믿는 자들에 의해 행해진다. 적어도 이야기라는 장르에서만큼은 이 세상의 모든 단호한 경계들에 대해서 확신보다는 회의를 품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161)

 

잘 알지 못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프로이트적인 해석은 모든 사물을 성적 상징으로 변환하는 기술이 아니라, 이성과 의지의 산물인 것처럼 보이는 행위와 사건들에 (어쩌면 그런 것들일수록 더) 무의식적인 요소가 얼마나 깊숙이 '매개'돼 있는지를 따져보는 작업이다. (170)

 

그 은유를 이렇게 정리하려고 한다. '성장은 살인이다.' 우리는 성인이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먹어치우고, 그것으로 내 안의 타자를 일깨운 다음,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그들을 (실제적으로건 심리적으로건) 떠난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의 몇몇 고비들을 특정한 어떤 사람을 상징적으로 살해하면서 통과한다. (자신의 성장 과정을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도대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기억조차 죽여버리기도 한다. 지금 나의 내면에도 누군가의 벨트, 누군가의 블라우스, 누군가의 구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잊었다. 잊지 않으면 그 미성숙의 시공간을 떠나올 수 없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183)

 

이상의 설정에는 청소년 성장담의 기본 문법이 내장돼 있다. 첫재, 가족의 불화. 어린아이에게는 세계의 전부나 마찬가지일 가족 내부에 불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아이가 외부 세계(공간적으로는 낯선 지역, 시간적으로는 성인의 삶)의 다양한 가능성에 눈길을 돌릴 만한 동력으로 작동한다. 둘째, 강이라는 배경. 육지 교통이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강은 지역 공동체 내부에는 존재하지 않는 유형의 타작 유입될 수 있는 좋은 통로가 되었을 것이다. 셋째, 타자의 출현. 외부 세계의 낯선 가능성을 표상하는 존재(이를테면 다른 곳에서 온 도망자들)와의 갑작스런 만남이 소년을 모험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넷째, 모험. 타자의 유혹 혹은 강요로 소년은 가족이나 이웃과의 협의 없이 독자적인 판단과 행동을 감행한다. 이와 같은 모험이 아이를 실제로 낯선 시공간에 내던질 수도 있지만, 공동체의 규범을 위반하면서 아이가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죄의식을 느끼게 되면 그것 자체가 이미 아이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일(이를테면 '내면의 발견'이라 부를 만한 사건)이기도 할 것이다. (187)

 

그에게 침투했다가 빠져나간 독은 무엇인가. 소년은 이제 사랑에 대한 판타지(독)에서 벗어난 것일 터다. 어떤 감정의 순수한 원형 혹은 완벽한 전형이 존재한다는 생각이야말로 판타지의 핵심이다. 판타지는 현실을 혐오하게 만든다. 사랑의 판타지로부터 자유로워져야만 사랑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191)

판타지에서 자유로워지기, 는 참 어렵다. 나는 약 16년째 허우적대고 있으니까. 

 

어린 엘리스의 문제는 에덴 이래로 세상의 모든 사랑의 관계에는 언제나 뱀이라는 제3자가 있다는 사실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리고 뱀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는 '완벽한'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 뱀을 다스리는 '성숙한' 사랑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데 있다. 그런 그가 에덴의 타락상을 뒤늦게 깨닫고 지독한 환멸에 빠지는 순간 뱀에 물리고 마는 것은 상징의 논리로 볼 때 필연적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93)

 

넥본의 삼촌이 엘리스에게 들려주는 다음 대사는 어쩌면 미래의 가장(커티스)이 과거의 자신(엘리스)에게 건네는 충고로 읽히기도 한다. "강에는 많은 것들이 떠내려 오지. 떠내보내야할 것과 건져내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해." 중반부에 나오는 이 대사는, 영화 도입부에 그와 사랑을 나누다 말고 집을 뛰쳐가는 여성을 그가 느긋하게 '떠나보내는' 장면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또 영화 말미에 총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머드를 그가 강에서 '건져내는' 장면을 미리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지혜로도 유용해보인다. 사랑의 강에서 떠내려 오는 것들 중에서도 건져야 할 것과 흘려보내야 할 것들이 있을 테니까. (194)

 

그 믿음이 그를 살게 했고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어떤 논리적 역전이 발생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제가 도출된다. 믿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면, 살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는 것.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고통이 닥쳤을 때, 이성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어떤 초월적인 것을 믿기로 결정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해야 한다. 이 판단은, 이성을 믿으라는 아버지의 말, 마음속의 일들은 이성이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어머니의 말 중 어느 것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맹목적인 근본주의자들을 화나게 할 만한 소리지만, 어쩌면 이것을 실용주의적 신앙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필요하니까 믿는다는 것. 여기서 신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유구한 논쟁은 별로 의미가 없다. 존재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201)

 

결국 파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과거의 체험을 어떤 식으로건 서사화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저명한 실용주의자 리처드 로티는 <우연의 아이러니 연대성>에서 자신의 과거를 바로 자신의 언어로 '재서술'하는 행위의 중요성에 대해 열렬히 강조한 적이 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읽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비평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이라는 이야기를 자신의 뜻대로 쓸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운명 혹은 신이 쓴 이야기 속의 힘없는 주인공으로서 태평양 위를 표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과거, 그러니까 누군가에 의해 이미 쓰인 이 이야기를 어찌할 것인가. 우리가 이야기를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어떤 이야기도 그 의미가 확정돼 있지는 않기 때문이고 그 덕분에 우리가 그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3)

 

칼 세이건의 명저 <코스모스>는 이런 헌사와 함께 시작된다. "앤 드루얀을 위하여. 광대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 속에서, 하나의 행성과 하나의 시절을 앤과 공유하는 것은 나의 기쁨이다." (205)

 

요컨대 이 영화는 지구에 주인공의 가족을 남겨두지 않았고 동료의 죽음을 감상적인 방식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덕분에 이 영화는 얼핏 비슷해 보이는 다른 영화들이 '어떻게 지구로 돌아갈 것인가?'를 물을 때, 근본적으로/급진적으로, '왜 지구로 돌아가야만 하는가?'를 물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든다. 그리고 이 질문은 결국 다음 질문과 같다. '우리는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가?'(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이것이 철학의 유일한 근본문제라고 했다. 비슷하게 이것을 '인생의 근본질문'이라고 불러보자.) 언뜻 보면 라이언은 이런 질문을 던질 틈이 없어 보인다. 영화의 거의 대부분에서 라이언은 죽지 않기 위해 고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고투는 '죽지 않기 위한' 것이지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둘의 차이는 작지 않다. 죽지 않기 위한 고투는 '본능'의 소관이고 그 고투를 이끌고 가는 것은 '공포'라는 감정이다. 그녀가 시종일관 그런 고투를 한다고 해서 그녀에게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이미 해결돼 있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런 고투의 와중에도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살기 위한 이유'를 질문하게 될 수 있다. (210)

 

결국 텍스트에 대한 모든 해석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해석일 뿐인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2013년 하반기 내가 읽은 텍스트들은 대체로 '삶의 의미'라는 주제 둘레로 모여들어 서로 연결되고는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렇게 되기를 내가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가족과 일상의 소중함에서 답을 찾는 태도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고, 신앙에 근거해 답을 제시하는 (문제를 해결한다기보다 해소해버리는 것에 가까운) 태도 역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답을 찾고 싶었다. 이 와중에 이 영화를 보았으므로 여기서도 같은 질문을 발견(투사)했을 것이다. '삶에는 의미가 있는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 영화가 내게 준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질문의 층위를 삶이 아니라 생명으로 바꾸면, 생명이 긍정되는 데에는 이유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살아 있으니까, 계속 살아야 한다.' 나는 이 대답에도 역시 만족하지 못한다. 어쩌면 애초에 질문 자체가 틀린 것일까. 나쁜 질문을 던지면 답을 찾아낸다 해도 그다지 멀리 가지 못하게 되지만, 좋은 질문을 던지면 끝내 답을 못 찾더라도 답을 찾는 와중에 이미 꽤 멀리까지 가 있게 된다. 일단은 좋은 질문이라 믿고 계속 물어나갈 수밖에 없겠지. 나는 내 생명의 절반을 살았다. 나 역시 어떤 식으로건 나를 다시 낳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낀다. (214)

나를 다시 낳는다는 말은 신샛별 평론가님의 해석에서 차용한 것이다. 
진짜 멋진 남편과 멋진 아내, 멋진 부부다. 감히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람들. 

 

<셰임>에서, 스스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삶의 무의미에 짓눌려 있는 주인공 브랜든은 바로 그 감정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섹스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알몸을 보일 때마다 어떤 돌이킬 수 없는 비탄이 그의 피부를 뚫고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긴장감을 느끼게 하던 이 슬픈 영화가 주인공의 오열로 끝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인물을 두고 (새봉 당시 이 영화에 대해 쓰인 많은 글들에서 그렇게 했듯이) '섹스 중독자'라고 부르는 것은 내게 탐탁지 않다. '섹스'가 아니라 '과식'이거나 '게임'이었어도 달라질 것이 없었을 것이고, 또 그의 상태를 '중독'이라고 낙인찍어 우리가 그와 다르다는 위안을 얻는 것도 변변찮은 짓이다. 그는 섹스에, 우리 모두가 대체로 어느 한 가지에 중독돼 있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은 강도로, 중독돼 있을 뿐이다. (아무것에도 중독돼 있지 않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분명히 한 가지에는 중독돼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대체로 자기 자신에 중독돼 있기 때문이다. 살아온 대로 살고 있는 사람은, 이제까지의 삶의 방식에 중독돼 있는 것이니, 그는 곧 '자기-중독자'다.) 그래서 그가 '수치Shame'를 느껴야 마땅하다면 그것은 그가 섹스에 탐닉해서가 아니라 삶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의문'과 그러므로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요청'으로부터-이 둘을 상징하는 것이 여동생의 끊임없는 부름("브랜든, 브랜든, 어디에 있니?")일 텐데-내내 도망치기만 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219)

원래도 마이클 패스밴더를 좋아하는 난데, 이 글을 보고 영화 <셰임>을 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됐다. 
이번 주에 방학하고 나면 꼭 첫 번째로 할 일은 이것이 될테다. 

 

인간 의식의 발전 과정을 다루는 <정신현상학>은 4장에 이르면 '자기의식'을 다룬다. 인간의 의식은 어느 순간부터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의식하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데 그런 단계의 의식이 '자기의식'이다. 자기의식은 자신의 자립성을 확인하고/확인받고 싶어한다. 우선 할 수 있는 일은 나와 대치하고 있는 대상을 부정하고 삼켜버리는 일이다.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내 자기의식의 자립성이 입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대상은 소멸되므로, 나의 자립성을 계속 확인하기/확인받기 위해서는 또 다른 대상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알게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자립적이지 않다는 사실, 오히려 대상에 종속돼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 필요한 것은 나에 의해 부정된 뒤에도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 어떤 대상이다. 부정되면(먹히면) 없어지는 빵 같은 것과는 다른 그것은 무엇이어야 하나. 헤겔의 중간 결론은 이렇다. "자기의식은 오직 다른 자기의식 속에서만 스스로 만족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식은 다른 자기의식을 통해서만 만족을 얻는다는 것, 즉 내가 진정한 자기의식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인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나'라는 자기의식을 인정해주는 '너'라는 자기의식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나를 인정하기만 할 뿐인 존재는 나에게 한낱 사물과 다를 바 없으니, 설사 그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해도 그 인정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나를 인정해줘야 할 사람은, 무엇보다도 내가 인정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인정할 만한 존재로부터 인정받아야 진정한 인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상호인정을 통해 진정한 자기의식에 도달하는 관계를 상상해볼 수 있겠는데 그런 관계를 '사랑'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221)

사랑을 헤겔의 관점에서 이렇게 풀어낸다고요? 
진짜 신형철 교수님은 도대체 어디까지 가계신건지..

 

서사론은 시간론이고 시간론은 인생론이다. 이 영화가 채택하고 있는 저 '불합리한 공존'과 '신비로운 공명'의 서사는 이 영화의 감독이 사랑이라는 사건을 일생이라는 시간의 축 위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돌려 말하는 장치일 것이다. 열일곱의 인영은 이수와 이석을 구별할 수 있게 된 뒤에도 죽은 이수에 대한 못다 한 사랑을 이석에게로 이어갔고, 서른 살의 인영은 열일곱의 이석이 자신의 첫사랑 이석과 똑같이 생겼다고 믿었으나 사실 그 둘은 전혀 닮지 않았다. 이런 '같음과 다름'의 혼돈과 착종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한다. 실제와 환상이 뒤섞이듯, 진짜와 가짜, 과거와 현재, 열일곱 살과 서른 살, 나와 네가 뒤섞인다. 사랑은 가까이 갈수록 흐릿해지는 원시의 피사체다. (238)

너가 준 '눈송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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