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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식탁 :: 구병모

꼬마대장님 2020. 7. 22.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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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건 웬만한 소음은 배경음악으로, 어수선한 광경은 손 닿지 않는 액자 속 풍경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10)

진짜 너무 정확해서 섬뜩한 말. 

 

본인이 작정하고 악의를 품어서 뺀질거리는 게 아니라 믿고 싶지만 조효내의 무책임과 게으름은 자기도 모르게 밴 천연 습관이어서 혼자만 무구할 뿐 그것을 감당 및 조율해야 하는 상대방 내지 제삼자를 지치게 만들었다. (23)

혼자만 무구할 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표현이 참 재밌다. 그리고 날카롭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관절과 같은 것이라 활액이 없이는 삐걱거리며, 그에 따른 통증과 불편을 실제로 느끼고 감당하는 쪽이 으레 따로 있다는 게 단희의 주된 불만이었다. 어디까지나 뭔가 인사를 못 얻어서가 아니라 공동주택에 살면서 그 정도가 최소한의 상식과 도리라고 단희는 믿었다. (28)

 

결혼과 출산을 통해 개선된 점이라곤 단 하나, 그림 값을 제때 못 받아 동동거리고 핫식스니 레드불로 일용할 양식을 삼으며 밤을 버티는 와중에 그래도 너는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잖니 너는 자유롭잖아 같은 푸념을 친구들한테서 더는 듣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암전이었고, 기혼 유자녀 친구들은 출산 축하 인사와 아기 내복 선물에 이제 너도 우리와 같다는 승리감과 고소함을 담아 건넸으며, 그러고 나선 피차 육아에 치여 소식을 주고받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효내는 그전에 친구들이 하던 행동ㅡ마주 앉은 무관계한 상대방이 바로 이 환난의 원인을 제공하기라도 한 양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스스로의 불운한 선택과 그 결과를 전시하는 일ㅡ을 다른 독신 및 딩크족 동료들에게 자신이 그대로 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들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 뒤, 자신에게 남은 거라곤 다림이밖에 없다는 초조감과 자괴감을 중화하기 위해 의뢰가 들어오는 일들의 대부분을 거절 않고 악착같이 받아 매달렸으며, 화장실에서 이삼 분가량 휴식을 가질 때면 자유네 마네 같은 말을 들으며 남 속도 모르는 질서와 부러움을 받던 시절이 차라리 나았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곤 했다. (40)

이렇게 긴 문장인데 호흡도 적절하고 장황하지 않을 수가 있나?
진짜 표현을 재밌게 하시는 분. 

 

그리고 요진은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출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내면의 일부를 침해당한 느낌이었다. (51)

 

아이들은 살이 있고 움직이고 떠들었다. 서로를 때리거나 발을 걸어 넘어뜨리거나 울고 웃을 때마다, 목마르고 땀이 날 때마다 엄마를 찾았다. 아이들이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는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무심코 튀어나오기도 했고 그건 때로는 본능이나 반사작용 이전에 존재하는 자연법칙, 이를테면 심장박동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61)

심작박동에 가까운 외침. 

 

핵심은 시간을 보내는 데 있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면서 체세포의 수를 착실히 불리는 거야말로 어린이의 일이었다. 그 어린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일은, 주로 시간을 견디는 데 있었다. 시간을 견디어서 흘려보내고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일. 그곳에 펼쳐진 백면에 어린이가 또다시 새로운 형태 모를 선을 긋고 예기치 못한 색을 칠하도록 독려하기. 그러는 동안 자신의 존재는 날마다 조금씩 밑그림으로 위치 지어지고 끝내는 지우개로 지워지더라도. (67)

 

언제나 선을 넘어올 듯 말 듯한 자리에서 신재강의 말과 행동은 종료되었다. 물론 선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지 요진이 어느 순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싸늘하게 자르거나 거절해도 그만이었다. 요진이 불편하고 불쾌하면 곧 그것이 선을 넘는 일이었다. 그러나 요진은 가능한 한 '누가 봐도 이상하며 그럴듯하지 않은' 일에 반응하고 싶었다. 해석의 방식과 범위에 따라 불쾌지수가 널뛰는 일에 낱낱이 발끈함으로써 서로에게 개운치 않은 뒷맛을 초래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피곤한 여자로,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예민한 이웃으로 간주되기 싫었다. 좋은 게 좋은 줄 알며, 사소한 농담에 호응해 주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회인이 되는 게 바람직했다. 호젓하고 의지가지없는 소규모 공동주택으로 이사 와서만이 아니라, 약국에서 수많은 아픈 사람들을 대하는 동안 요진은 세상 모두를 손님으로 인정하고 접객을 할 수도 있을 것처럼 일상의 근육이 잡혀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왜 먼저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여야 하는지, 표정을 지어 보일 적절한 타이밍을 재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가 됐든 그가 어느 순간 멈춰 버린 빈 자리에 대고 항의하는 우스운 꼴은 되고 싶지 않았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 어떤 사람도 이런 소극적인 항의에 정직하게 의중을 밝혀 줄 리 없으며 그럴 경우 반드시 이쪽의 입에서 먼저 말이 나가게 된다. 남의 집 여자가 소리 지르는 거 들어 보고 싶다니 무슨 소린가요? 그게 그런, 뜻으로 하시는 말씀 아닌가요? 당신의 의도는 어떤지 몰라도 저는 듣기 거북합니다. 농담이더라도 앞으로 주의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기도 안 찬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을 것이다. 와, 당신 앞에서는 이후로 그 어떤 말도 못 하겠군요. 어떻게 그게 그런, 얘기가 됩니까? 소리 지르는 거 들어 보고 싶다는 말에서 대뜸 교성을 연상한다면 그게 미친 거고 네 귀에 음란 마귀가 끼인 거 아니냐, 맘만 먹으면 누구라도 그리 웃어넘기며 손가락질할 상황이었다. 발화 당사자의 미묘한 제스처나 그 자리의 공기, 청자의 심리가 지워진다는 점이, 언어 자체가 지닌 약점이었다. (120)

너무 공감이 된다. 그래서 지금 현 상황이 더더더 화가 난다. 

 

홍단희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요진은 뭐라고 토를 달 수가 없어서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때웠다. 자신의 마음은 어딘가 용납되지 않는데 이미 형성된 분위기가 그 용납되지 않음을 용납하지 않을 때, 이럴 때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일은 화제 전환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교원씨는 좀 괜찮으신가요." (128)

 

정말이지 교원은 제 몫으로 주어지고 대부분 스스로 선택했던 모든 일과 그것의 결과들에 이즈음 환멸을 느꼈다. 당연한 줄로 여기고 품을 들였던 매순간의 노동과 의무가 10원 어치의 의미도 없다고 선고받기란 자주 있는 일이었으며, 일상에서 여산과 일가친척의 입을 통해 확인 사살당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교원은 스스로마저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끝이라는 절박감에 살림과 육아를 더욱 밀도 있게 사수하는 데 골몰했고, 그 결과는 누구나 부러워하며 좋아요 버튼을 클릭하는 각종 사진과 짧은 동영상으로 남았었다. (136)

 

 

책 중반부터 계속 나오는 '악취'가 책을 덮고나서도 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씁쓸하고 쾌적하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타사打寫를 하다보니 그제야 이 책이 좋았다. 

그래서 내 앞에 앉은 그에게 조용히 건넸다. 


덧1. 건넨 즉시 구병모 작가님을 알더외다.
덧2. 나아가 구병모는 필명인 것까지. 허허.
덧3. 그래서 찾아본 구병모 작가님의 본명은 '정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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