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모르는 영역
저수지 너머 겹겹이 펼쳐진 산들 위로 해가 지고 있었다. 골짜기의 깊은 곳부터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는 가장자리부터 어두워지는 저수지 물과 그 위에 비친 산그림자가 짙어지다 물감처럼 풀리는 모양을 오래 지켜보았다. 어디선가 새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내려앉았다. 날갯짓의 급격한 상승, 날개를 접고 사뿐히 가지에 착지하는 모습, 가지의 흔들림과 정지... 그런 정물적인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새는 돌연 가지를 박차고 날아갔고 그 바람에 연한 잎을 소복하게 매단 나뭇가지는 다시 흔들리다 멈추었다. 멍하니 서서 새가 몰고 온 작은 파문과 고요의 회복을 지켜보던 그는 지금 무언가 자신의 내부에서 엄청난 것이 살짝 벌어졌다 다물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새가 날아와 앉는 순간부터 나뭇가지가 느꼈을 흥분과 불길한 예감을 고스란히 맛보았다. 새여, 너의 작은 고리 같은 두 발이 나를 움켜잡는 착지로 이만큼 흔들렸으니 네가 나를 놓고 떠나는 순간 나는 또 그만큼 흔들려야하리. 그 찰나의 감정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생생해 그는 거의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29)
진짜 첫 단편부터 작가님의 글빨 진짜......ㅋㅋㅋㅋㅋㅋㅋ
'글빨'이라는 단어가 이렇게나 적절한 표현이 되다니.
손톱
소희는 더이상 민경 언니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아니, 스펙이니 취업이니 하는 말은 들렸지만 아무 뜻도 없는 주문처럼 들렸다. 딱딱한 껍데기 속에 갇힌 느낌, 바삭하게 구워지는 과자처럼 겉은 점점 검고 단단해지는데 속은 끓는 시럽처럼 뜨거운 핏물이 휘도는 느낌, 겉과 속이 분리된 느낌이었다. (54)
계단을 내려오면서 소희는, 매가리가 없이, 매가리가 없이, 하고 중얼거려보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른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뜻인가. 민경 언니는 언젠가 소희에게 대화는 서로 주고받는 건데 너랑은 대화가 안 돼, 대화가, 그랬다. 아니, 소희는 언니랑 살 때는 대화가 잘됐다. 언니 말귀도 잘 알아듣고 언니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다. 근데 그게... 대화가 아니었나. 주고받는 게 아니었나. 상의도 아니고 대화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었나. (65)
아 진짜 이 단편 읽고 안 우는 사람 겸상 안한다. 진짜.
과연 울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진짜 이 소설집 최고의 소설을 꼽으라면 당연히 나는 <손톱>.
음. 상대를 향한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큰 나머지 상황을 직시하려하지 않고 또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언젠가 우리도 소희였던 때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가슴이 마구 섞이듯 요동치는지도 모른다.
희박한 마음
욕실 쪽 수도는 괜찮은데 부엌 쪽 수도만 틀면 그렇다고 하면서 수리기사가 혼잣말하듯, 밤마다 귀신 소리가 난다더니 그 소리가 이 소리였네, 했다. 디엔이 누가 또 신고한 사람이 있었으냐고 묻자 수리기사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바로 윗집에서 몇 번이나 관리실에 전화를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위층을 돌아다니며 이 집 저 집 검사를 다 했지만 아무 문제가 없어서 여자 혼자 사니 신경이 예민해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게 바로 여기 아래층 옆집에서 나는 소리였다고, 여자 혼자 사는데 그동안 얼마나 무서웠겠냐고 말했다. 수리기사가 옆집 계량기를 손보고 돌아간 후에 디엔이 현관에 서서 낮게 읊조리던 말을 데런은 기억한다. 저 말이 더 무서워. 여자 혼자 사는데, 하는 말. (86)
계량기 소리 때문만은 아닌데 언제부터인지 데런은 잠들지 못하고 몇 시간씩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누워 잠이 오기를 기다리곤 했다. 심신이 나른해지고 불면의 두께가 조금씩 얇아지면서 투명한 비눗방울 같은 잠이 자신을 감싸는 느낌이 들면 이제 곧 맥을 놓고 눈먼 누에처럼 잠에 빠져들 수 있으리라 여기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미간 안쪽 깊은 곳에서 기괴한 눈이 반짝 떠지고 흉부가 고장난 승강기처럼 난폭하게 덜컹거리면서 잠의 비눗방울은 감쪽같이 터지고 말았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데런은 잠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마치 드릴로 단단한 강화유리를 뚫기라도 하듯 엄청난 노력을 요하는 파괴적인 중노동처럼 생각되었고 차라리 잠을 자지 않기로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기대앉았다. (87)
너무 자고 싶은데 잠에 들 수 없어 고통스러운 일련의 시간들을 어떻게 이렇게 글로 표현할까?
그저 작가님이라고 밖에 들지 않는 감탄.
왜 나는 당연히 데런이 남자라고 읽었을까?
가여운 데런, 그리고 디엔.
혐오와 폭력이 가져다 준 상처가 이토록 오래 남아있다.
그리고 대부분 가해자인 그 남성들은 비슷한 안경을 쓰고(썼도 안 이상하고, 안 써도 안 이상하다) 생김새는 가림막을 친 듯 모호하다.
이러한 얼굴의 표현은 범汎남성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익명적이기도 다수이기도 한 그들.
너머
점심때 N의 옆자리에 앉은 2학년 5반 담임은 늘 그렇듯 학교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떠들고 있었는데, 때로 N은 그 입에 뭔가를 가득 넣어 닥치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도 때로는 그 말에 유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기도 했다. (141)
이 단편은 읽는 내내 부끄러웠다.
픽션이 아니라 팩션이라서.
나와 내가 있는 공간의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겠다. 그리고 다같이(그러나 따로) 깊이 생각해보면 더 좋겠다.
전갱이의 맛
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는 또 잠시 쉬었다가, 내 안에서 뭔가 이상하게 예민한 감각이 생겨난 것 같았어, 라고 말했다.
"원해서 생겨난 게 아니고 그냥 생겨난 거야. 이를테면 개인마다 감당할 수 있는 감각의 에너지나 민감함의 총량이 정해져있다고 할 때, 한 감각이 억제되면 다른 감각이 계발되는 식이지. 예전 같으면 비슷하다고 여겼을 것들에서 무한한 차이를 식별하게 되더라고."
"예를 들면?"
"택시 기사와 청송 아주머니의 반응 같은 것. 똑같이 측은하게 여기는 얼굴인데 다르게 느껴졌지." (239)
어느날엔가 갑자기 주어지는 민감성과 감수성이라는 것.
생각해보니 나도 가람이언니나, 상아나, 지형이나, ㅂ부장님이나, 라샘이나, 내 가까운 이들에게서 움터지고 자란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낮은 자리에서, 듣는 시간들을 통해 생겨나는 것들이었다.
그러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절망적인 자폐감이 비로 인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사람은, 사람이라는 존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그렇게 감각하는 자체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더라고. 내가 지금 이걸 느낀다, 하는 걸 나에게 알려주지 못하면 못 견디는 거지. 어떤 식으로든 내 느낌과 생각을 내게 전달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감각이나 사고 자체도 그자리에서 질식해버리고 마는 것 같았어."
나는 잠깐 멍한 상태가 되었다. 그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말이란 게, 하고 그가 말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 위한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나와 대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까 그동안 난 쉴새없이 누군가에게 말을 해왔는데, 그 말을 사실 나도 듣고 있었던 거지. 그런 의미에서 말은 순수히 타인만 향한 게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던 거야. 그런데 말을 못하게 되면서 타인을 향한 말은 그럭저럭 포기가 되는데 나를 향한 말은, 그건 절대 포기가 안되더라고." (241)
"언제부터 어떤 식으로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을 조금씩 하게 되면서 내가 변했다는 걸 알았지. 예전처럼 말하지 않고 있더라고. 묵언의 시간이 번개처럼 번쩍 지나가고, 이동한 경로는 불타버렸지만, 나는 이미 다른 곳에 있게 된 거지. 그건 분명히 나만의 말과 관계가 있어." (246)
이건 맞다.
나도 말을 한다는 행위에 골몰한 나머지 전혀 듣지 못했던 때가 있다 아주 분명히.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와 같냐고 묻는다면,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묵언의 시간이 번개처럼 번쩍 지나가고, 이동한 경로는 불타버렸지만 나는 이미 다른 곳에 있게 되듯 다른 내가 지금 있다.
특히나 책을 읽는 것이 그러한데, 조용히 입을 닫고 다른 사람(작가)의 말을 듣는 일. 경청하는 일. 그리고 나의 말을 블로그에 글의 형태로 전하는 일.
그래서 내가 가장 아끼는 시간.
그리고 우리 독서모임에서 내가 낸 발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