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김영민
23;
행복의 계획은 실로 얼마나 인간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주는가. 우리가 행복이라는 말을 통해 의미하는 것은 대개 잠시의 쾌감에 가까운 것. 행복이란, 온천물에 들어간 후 10초 같은 것. 그러한 느낌은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새해의 계획으로는 적절치 않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는 거지’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서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33;
살아가다 보면, 자기 안의 관광객이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깨달음을 얻는 곳, 금각사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자기 안의 고지식한 안내자가 천천히 답을 생각하고 길을 가르쳐주려고 하면, 그 관광객은 이미 서둘러 떠나고 없다. 그래서 삶에 대한 진짜 이야기는 대개 허공에 흩어지게 된다. 허공에다 이야기하다가 죽는 게 인생이지. 그러나 이것도 사치스러운 생각일 거야, 병원에 누워 있지 않으면 행복한 것이지.
내 안의 관광객이 질문을 던질 때, 나는 천천히 그의 말을 들여다보고 귀를 기울였던가.
서둘러 떠나는 내가 되지 않기를.
34;
먼저, 성장한다는 것은 주변과 자신의 비율이 변화하는 것이다. 성장의 체험 속에서 크기란 상대적이며 가변적이다. 꼬마였을 때, 가로수는 아주 커 보였다. 그러나 자라면서 그 가로수는 점점 작아 보이고 가로수 너머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확장된 시야 속에서, 한때는 커 보였던 부모 품도, 고향 동네도 점점 작게 느껴진다. 그러다가 마침내 저 멀리 새로운 세계가 눈에 들어오고 나면, 어느 날 문득 떠나게 된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가족을, 옛 친구를, 혹은 자신이 나서 자란 고장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나아갔다. 이렇듯 성장은, 익숙하지만 이제는 지나치게 작아져버린 세계를 떠나는 여행일 수밖에 없다. 익숙한 곳을 떠났기에 낯선 것들과 마주치게 되고, 그 모든 낯선 것들은 여행자에게 크고 작은 흔적 혹은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는 우리를 다시 성장하게 한다. 혹은 적어도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다.
성장은 익숙하지만 이제는 지나치게 작아져버린 세계를 떠나는 여행-이라.
가슴을 쿡 쿡 찌른다.
지난 나의 대부분의 선택과 성장(으로 미루어지는 것들)을 떠올려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37;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고, 상처 입고, 그러다가 결국 자기 주변 사람의 죽음을 알게 된다. 인간의 유한함을 알게 되는 이러한 성장 과정은 무시무시한 것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확장된 시야는 삶이라는 이름의 전함을 관조할 수 있게 해준다. 그 관조 속에서 상처 입은 삶조차 비로소 심미적인 향유의 대상이 된다. 이 아름다움의 향유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시야의 확대와 상처의 존재다.
시야의 확대가 따르지 않는 성장은 진정한 성장이 아니다. 확대된 시야 없이는 상처를 심미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할 수 없다. 동시에 아무리 심미적으로 거리를 유지해도 상처가 없으면, 향유할 대상 자체가 없다. 상처가 없다면,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 용기가 없어 망설이다가 끝낸 인생에 불과하다. 태어난 이상, 성장할 수밖에 없고, 성장 과정에서 상처는 불가피하다. 제대로 된 성장은 보다 넓은 시야와 거리를 선물하기에, 우리는 상처를 입어도 그 상처를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상처도 언젠가는 피 흘리기를 그치고 심미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성장이,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구원의 약속이다.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
삶과 상처의 관계를 이렇게나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니.
이 글은 내게 엄청난 위안이 되어주었다. 성장이,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구원의 약속, 그리고 상처도 심미적 대상이 되어 향유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두 번째 읽는 것임에도 전율.
45;
그러나 제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것들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데 아무런 직접적 관계가 없다는 점입니다. 혹시라도 자신들이 잘생기고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결혼생활마저 잘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결혼생활은 그와는 다른 별도의 역량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 역량은 다름 아닌 연민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인물도 뛰어나고, 공부도 잘하고, 장학금도 받고, 장래가 창창해 보이는 스스로와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제 결혼을 하고 나서 함께 보낼 미래의 시간들은 다름 아닌 노화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중략)
이제 오늘 이후로 신랑 신부는 노화의 과정을 홀로 겪지 않고 배우자와 함께 겪게 될 것입니다. 결혼을 통해 유한한 생물체의 고단함과 외로움과 무기력함을 위로하고 연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위로와 연민 속에서 비로소 상대에게 너무 심한 일은 하지 않게 되고, 그러한 절제 속에서 인간에게 허락된 행복을 최대한 누리기를 신랑 신부에게 기원합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ㅋㅋㅋㅋ그러게, 나도 그랬네.
48;
따라서 이제 제가 살면서 들은 조언 중에서, 외모에 너무 의존하지 않고 결혼생활을 잘해나갈 수 있는 두 가지 가설을 골라 전해주겠습니다.
첫째, 아무리 부부지만 상대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기 바랍니다. 특히 각자, 상대가 모르는 외로운 전투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배우자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외로운 싸움을 혼자 수행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씩 해주기 바랍니다. 그래서 외로운 전투 중인 상대를 되도록이면 따뜻하게 대해주기 바랍니다.
둘째, 살다 보면 둘 중 한 사람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나 잘못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나머지 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잘못을 한 상대보다 우위에 서게 되고, 사정없이 비난을 퍼붓게 되기 십상입니다. 바로 그 순간, 제발 정도 이상으로 잔인해지지 말기 바랍니다. 외로운 전투 중에 실수한 상대를 되도록이면 따뜻하게 대해주기 바랍니다.
요컨대, 상대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일상적인 습관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의 감정이 아무리 뜨거워도, 그 애정이 따뜻함의 습관을 만들어주지는 않을 겁니다. 그보다는 거꾸로, 일상적으로 따뜻함을 실천하는 습관이 길게 보아 두 사람 간의 애정을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랑 신부는 결혼생활 내내 이 가설을 테스트해본 뒤, 타당한 것으로 판명되었는지 나중에 알려주기 바랍니다. 두 사람의 결혼을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상대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일상적인 습관.
ㅋㅑ..... 진짜 녹습니다 교수님.
맞아 그래서 나도 다정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묻어가기)ㅋㅋㅋㅋ
이런 주례면 얼마나 재밌을까, 내 결혼식이 아니어도 너무 유쾌할듯. 이렇게 재밌는 사람이고 싶다.
50;
영양 상태가 좋아 뽀송뽀송한 피부를 유지한다고 하여 곧 수려한 얼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시각적 체험에 중요한 것은 ‘빛’입니다. 사람의 얼굴에는 누구에게나 어떤 빛이 깃들게 마련이고, 그 빛이야말로 그 사람의 후천적인 얼굴을 완성합니다. 아름다운 얼굴빛은 유복한 생활을 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고, 사적인 행복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넓은 ‘공적인 행복’을 추구할 때 깃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얼굴에 깃든 빛은 어떤 모양일까.
58;
밥을 먹다가 주변 사람을 긴장시키고 싶은가. 그렇다면 음식을 한가득 입에 물고서 소리 내어 말해보라. “나는 누구인가.” 아마 함께 밥 먹던 사람들이 수저질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당신을 쳐다볼 것이다. 정체성을 따지는 질문은 대개 위기 상황에서나 제기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그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내가 누구인지, 한국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하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한국이 어떤 정책을 집행하는지, 즉 정체성보다는 근황과 행위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 규정을 위협할 특이한 사태가 발생하면, 새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미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시 봐도 웃기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부산여행 갔을 때 읽었던 부분인데, 힐튼 호텔 침대 위에서 읽다가 빵 터져서는 정아랑 왕보에게 소리내어 읽어주었던 기억이 난다ㅋㅋㅋㅋㅋㅋㅋ진짜 밥먹다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말하면ㅋㅋㅋㅋㅋ 갑분싸이거나, 내가 궁예가 되거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이렇게 진지하게 웃긴 사람 너무 좋아 ㅠ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61;
따라서 ‘그런 질문은 집어치워주시죠’라는 시선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거기에 대해 “얘가 미쳤나?”라고 말하면, “제 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아버지가 “손주라도 한 명 안겨다오”라고 하거든 “후손이란 무엇인가?”라고. “늘그막에 외로워서 그런단다”라고 하거든 “외로움이란 무엇인가?”라고. “가족끼리 이런 이야기도 못하니?”라고 하거든 “가족이란 무엇인가?”라고. 정체성에 관련된 이러한 대화들은 신성한 주문이 되어 해묵은 잡귀와 같은 오지랖들을 내쫓고 당신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칼럼이란 무엇인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이 칼럼 하나로 이 책은 살 만하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bbbb
76;
그러나 애써 시험공부를 해서 기왕에 대학에 들어왔다면, 반드시 지식을 통해 머리에 전구가 들어오는 경험을 해야 한다. 자루에 갇혀 있다가 튀어나온 고양이처럼 그러한 사치스러운 지적 경험을 찾아 캠퍼스를 헤매야 한다. 그리고 입시를 위해 보내야 했던 그 지루했던 시간에 대한 진정한 보상을 그 환한 앎에서 얻어야 한다. 세상에는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할 수도 있는 다른 종류의 공부가 있음을 영원히 모른 채로 죽지 않기 위해서.
맞아. 진짜 좋았던 부분이다 여기도.
대학에서 나도 처음으로 격었다, 내가 배운 지식과 활자들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경험을. 그게 너무 좋았고 그래서 빨리 시험을 쳐서 그것을 풀어내고 싶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진짜 진짜 공부하는 즐거움을 그때 느꼈던 것 같다. 교수의 교수적 역량과는 무관하게 지식이 내게 구조적으로 쌓이는 그 느낌이 참 좋았다.
80;
이 아수라에서는 어차피 어떤 성취의 희열도 짧기 마련이니, 지나친 허무감을 경계하라.
84;
그리고 지도자라는 자리가 꼭 좋은 것이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지도자에게는 책임이 따릅니다. 책임은 대개 무겁습니다. 무거운 것을 들고 있다 보면 힘이 듭니다. 오랫동안 힘든 상태가 지속되면, 우울해집니다. 우울한 나머지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그뿐 아니라 일을 너무 잘해도 사람들이 시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위 지도자의 영광에는 이렇게 힘든 면이 함께하곤 합니다.
ㅇㅈㅇㅈ ㅆㅇㅈ!!!!!!
거의 매해 다른 상사를 모시면서, ‘리더’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그리고 나도 우리 반의 리더인데.. 혹시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선생일까. 양행하는 담임이고 싶은데.
87;
그렇다면 잘 쉬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쉬기 위해서는 일단 열심히 일해야 한다. 무엇엔가 열심히 종사하지 않은 사람은, 잘 쉴 수도 없다. 열심히 종사하지 않은 사람의 휴식에는 불안의 기운이 서려 있기 마련이다. 쉰다는 것이 긴장의 이완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오직 제대로 긴장해본 사람만이 진정한 이완을 누릴 수 있다. 당겨진 활시위만이 이완될 수 있다.
95;
학자가 되면 좋은 점은 없나요?
“어느 시점이 되면, 내가 책을 좋아할 뿐 아니라 책도 내심 나를 좋아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죠. 나도 책을 읽으면 행복하지만, 책도 나에게 읽히는 게 분명 행복할 거야, 라는 충족감이 들죠. 그리고 직장인들이 월요일 아침에 허겁지겁 출근할 때, 창문을 열고 ‘월요일이란 무엇인가!’라고 소리를 지를 수 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14;
그러나 이 졸업의 순간, 지금까지 젊음의 시간을 누려온 졸업생 여러분들이 부럽습니다. 뭔가 귀중한 것들을 과감하게 소비한 이에 대해서는 부러운 마음이 들게 마련입니다. 실로 여러분들은 학창 시절 동안 귀중한 것들은 가차 없이 소비했습니다. 비싼 학자금이랄지, 젊음이라는 이름의 소중한 시간이랄지, 흡연과 과음으로 거덜 나기 이전의 깨끗한 장기랄지. 그처럼 귀중한 것을 소비해서 뭔가 이루어나가는 것도 멋있어 보이고, 심지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해버리는 경우에도, 부러웠습니다. 젊음같이 귀중한 것을 낭비해버리는 것은 그 나름 쾌감이 따르는 일입니다.
115;
여러분들에게는 창창한 미래가 있고, 진정한 평가의 시간은 죽음을 앞두고서야 찾아옵니다. 그러면 미래에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의 삶을 평가할 때 적용되어야 할 평가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때 평가 기준은,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 얼마나 사회적 명예를 누렸느냐, 누가 오래 살았느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보다 근본적인 평가 기준은, 누가 좋은 인생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것이 좋은 이야기일까요? 좋은 이야기의 조건은 너무도 큰 주제라서 오늘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좋은 등장인물이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부자가 많이 등장한다고 해서 좋은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으로만 점철된 이야기라고 꼭 좋은 이야기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실패담도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이야기를 위해서는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에 대한 망각도 필요합니다. 인생에서 일어난 일을 요령 있게 망각하고 기억할 때 좋은 이야기가 남겠지요. 그래서 용기와 도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졸업은 끝이 아니라 앞으로 남아 있는 그 큰 도전의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좋은 이야기를 인생에 가지고 있는 것.
1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을 다니다 보면 누구나 가끔 확 때려 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나. 이게 다 뭐하자는 짓이지 하는 생각이 뺑소니 차처럼 자신을 치고 달아날 때가 있지 않나. 상대적으로 편한 직장에서 ‘꿀을 빨고’ 있다고 해서 그 뺑소니 차가 비켜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존재가 수단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 때면, 자신을 제약하는 권위를 납득할 수 없을 때면, 다시 말해 자신이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라는 느낌이 들 때면, 누구나 그 난폭한 뺑소니 차에 치일 수 있다.
125;
그렇다. 모든 것은 결국 다 소멸한다. 북극의 빙하보다 모질지 못한 당신도, 나도, 대학도. 당신이 평생을 갈아 넣은 경력도. 당신의 인생을 대신해서 살아가는 자식들도. 소멸에는 어떤 예외도 없다. 어떤 존재를 지탱했던 조건이 사라지면 그 존재도 사라진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소멸의 여부가 아니라 소멸의 방식이다.
소멸의 방식을 선택한다,
아 정말 어떻게 이렇게 정말 유려한 표현을 하지.
128;
진상이 무엇이든 정체성이 부재한 대상에게 원칙에 입각한 비판을 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연체동물에게 뼈를 때리는 비판을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131;
위력이 왕성하게 작동할 때는, 인생이라는 극장 위의 배우들이 이처럼 별 생각 없이 자기가 맡은 배역을 수행한다. 당시 교수들도 자신이 위력을 행사하고 있으리라고는 새삼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위력이 왕성하게 작동할 때, 위력은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위력은 그저 작동한다. 가장 잘 작동할 때는 직접 명령할 필요도 없다. 니코틴이 부족해 보이면, 누군가 알아서 담배를 사러 나간다.
그 시공간이 일상적으로 떠먹여주는 무기력을 더는 삼킬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는 다른 나라로 공부를 하러 갔다.
132;
분노나 폭력이나 강제는 위력이 잘 작동할 때보다는, 위력이 자신의 실패를 절감할 때 나타나는 징후다.
147;
에세이집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말미에서 스가 아쓰코는, 각자 가지고 있던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몰락해간 사회 변혁 운동의 과정에 대해 이렇게 쓴다.
“우리의 차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궁극적으로 지니고 살아야 하는 고독과 이웃하고 있으며, 각자 자신의 고독을 확립해야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적어도 나는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이어 덧붙인다, 꿈꾸었던 공동체의 몰락이 꼭 저주만은 아니었다고. “젊은 날 마음속에 그린 코르시아 데이 세르비 서점을 서서히 잃어감으로써, 우리는 조금씩, 고독이 한때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황야가 아님을 깨달았던 것 같다.”
174;
블레즈 파스칼은 말했다.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나를 보는 것이 놀랍다. 왜냐하면 거기가 아니라 여기에, 다른 때가 아니라 현재여야 하는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은 자유와 존엄이 박탈당한 상태에서 태어난다. 태어난 당사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은 스스로의 결정이 완전히 배제된, 전적으로 타율적인 사태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벌거벗겨지고, 씻겨지고, 볼이 잡아당겨지고, 신생아실에 무력하게 눕혀진다. 이렇게 시작된 자신의 삶은, 건조하게 말하여, 부모의 성욕이 원인이 된 외인성 사태다.
태어난 이후의 삶은, 자유와 그에 기초한 존엄을 쟁취하기 위한 집요한 노력으로 상당 부분 채워진다. 양육자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대소변을 가리고자 하며, 보호자의 물적 지원으로부터 벗어나 각자의 생업을 통해 밥을 벌어먹고자 하며, 자기 심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각종 억압에 저항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일정한 심적, 물적 자원이 확보되면, 그 자원을 활용하여 자기 인생의 독특한 이야기를 쓴다.
187;
SF작가 어슐러 르 귄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며>는 그러한 복지사회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울려 퍼지는 즐거운 종소리가 도시를 휘감고 지나며 달콤한 음악이 되어 들려왔다... 주식시장이나 광고, 비밀경찰, 폭탄도 없었다.” 그뿐이랴. 그곳에 사는 이들은 행복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여기는 나쁜 지적 습관조차 없다. 마약을 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오멜라스를 떠나며> 아이들 수업 때 써야지. 신형철 교수님 책에서도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이 책.
249;
우리가 정서적 환기를 얻는다면 그것은 카메라가 우리를 극중 인물과 일치시켰기 때문이거나, 극적 대사건에 의해 카타르시스를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의 차분한 호흡이 우리 개개인의 분산된 체험을 유장한 삶의 흐름 속으로 전이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객이 영화를 통해 얻는 정서적 고양감은 실로 이성적인 이유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고 하겠다.
255;
의미적 동물로서의 인간. 사람은 밥 없어도 못 살고, 사회가 없어도 못 산다지만 의미가 없어도 못 산다.
292;
우리가 가장 상관하는 것은 늘 자신의 삶이며, 삶이란 저녁식사와 같은 일상의 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저녁식사 순간이 예술의 경지가 된다면, (바로 그 부분의)삶이 예술이 되는 것이다. 즉 예술의 인간에 대한 궁극의 공헌은, 만들어내거나 향수하기 위해 사들인 예술품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예술품을 만들거나 향수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고양된 자신의 생 자체에 있다.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예술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장소가 일상임을 아는 사람이다.
‘예술의 인간에 대한 궁극의 공헌은, 만들어내거나 향수하기 위해 사들인 예술품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예술품을 만들거나 향수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고양된 자신의 생 자체에 있다’라니. 진짜......... 당신......
당신이 진짜 예술이다....
299;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에의 헌신으로부터 온다. 그 헌신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종류의 헌신, 어떤 종류의 욕망 없이는, 우리의 삶은 구겨진 종이에 불과하다. 우리 삶의 의미는 우리가 무엇엔가 헌신함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우리는 누구나 주군이 필요한 사무라이들인 셈이다. 그런데 결국 우리를 파괴하는 것은 바로 헌신했던 그 주군이라는 점에 인생의 역설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한숨은 이 헌신과 배반의 스토리로 번안할 수 있다. 우리가 헌신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좀처럼 우리를 배반할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헌신하고 싶어 하는 동물이다.
나는 참 좋았는데, ㅂ부장님은 다소 실망한 듯한 이 책.
근데 화은샘이랑 사서샘은 좋아했다. ㅋㅋㅋㅋㅋㅋㅋ여심 저격인가? 키키킼
무튼, 이 분의 글을 읽다 보면 대학 때 공부한 정치철학이 자주 떠올랐고(문체와 어휘 때문인가?) 그래서 종종 설렜고 기뻤다.
이 책 읽고 바로 다음 신간을 샀으니, 팬심 인증한 셈이지.
무튼 진지하게 재밌는 사람 정말 멋있다!!
대충 김영민 교수님 좋다는 뜻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