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 감기 :: 윤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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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누구라도, 누구 한 아이의 엄마라도, 인사치레로라도 갑작스레 전화를 걸어, 많이 힘드시지요? 서균이는 좀 어떤가요? 하고 말을 걸어준다면 좋을 텐데. 우정이라는 적금을 필요할 때 찾아 쓰려면 평소에 조금씩이라도 적립을 해뒀어야 했다. 은정은 그런 적립을 해둬야 한다는 생각도,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할 거라는 예측도 하지 못했다. 그런 식의 적립과 인출이 너무도 부자연스럽다고, 노골적인 이해관계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친분을 쌓는 사람들을 남몰래 폄하했다.
정말 작가는 작가다. 우정을 적금에 비유한 것, 적립, 인출 등 모두 내가 생각했던 부분인데 참 맛깔스럽게도 표현하다니.
아마 누구든 한 번쯤 해본 생각아닐까 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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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을 것을 염두에 두고 사람을 만나 웃어 보이는 일은 회사에서 충분히 하고 있었으므로, 아이 엄마들하고까지 그렇게 하기는 싫었다.
나도 학교 외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동료가 아닌 이상 내가 사실 힘을 들이는 관계가 (요즘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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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야기를 할 때 실장님들의 목소리는 낮아졌고, 눈빛은 미묘해졌으며, 표정은 비열해졌다.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주고 받는 것처럼,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도 없으면서 험담을 하는 그들을 보며 지현은 환멸을 느꼈다. 왜 유능한 여자는 항상 이런 식으로 절구 속에서 마늘처럼 빻아지고 마는 걸까? 다 큰 어른들이면서 왜 동료를 저런 식으로 모함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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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백질을 먹고 소화시켜 머리카락으로 바꾸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그 일 자체에는 잘못이 없었다. 그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외의 시술들이 갑자기 낯설고 이상하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산업의 어디까지가 여성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고, 어디서부터가 여성을 아름다움에 억지로 묶어 자유를 빼앗는 일일까. 지현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이 책 내내 다 좋았지만, 여기 ‘지현’의 부분은 특히나 좋았다. 내가 근래 가진 고민과 의문이 담겨 있었기 때문.
그래서 사실 머리를 잘랐다. 언젠가부터 낯설고 이상하고 부끄러웠다.
미용 업계 종사자가 아닌 나도 그런데, 내가 몸담아 일을 하고 있는 일에 이같은 의문이 든다면? 정말 혼란스러울 것 같다.
무엇이 고정된 정답이나 진리는 아니겠지만, 나에게 낯설고 이상하게 보여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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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말들이 진짜 악의는 아니에요. 그건 그냥 거울 이미지예요. 전략적인 위악이라고요. 똑같이 당해보지 않으면 어떻게 느끼는데요. 남자들은 때리고 죽이고 강간하고, 여자들은 겨우 말이나 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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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은 결국 입술을 비틀며 조금 웃었다. 하지만 그 투박하고 유치한 말들을, 여자를 아름다움과 곧바로 이어버리는 직선을, 실장님 특유의 높고 들뜬 목소리를, 비웃고 싶은 마음보다 고맙다는 마음이 지금은 더 컸다.
나도 있다. 그런 투박한 직선을 비웃고 싶기 보다는 고마워지는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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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트를 뿌려주고 싶었다.
진경은 여전히 세연을 좋아했고 존경할 만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세연아, 너의 물기들은 어디로 갔어? 바람이 조금 빠진 자전거 타이어처럼 눌러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피식피식 웃을 수밖에 없던 너의 여유는, 농담들은, 꿈꾸는 듯한 문장들은 어디로 간 거야? 그건 너와 내가 공유하던 빛나는 보물이었는데.
혹시 나를 세연처럼 보는 사람이 있진 않을까, 아차 했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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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은 결국 목마른 사람이 되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상태를 오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연애가 끝나면 곧바로 다른 사람을 찾아 헤맸다. 한 연애가 끝나기 전에 다른 연애가 시작되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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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옷을 처분하던 날 진경은 잠든 딸의 이마를 쓸어주며 생각했다. 사랑하는 딸, 너는 네가 되렴. 너는 분명히 아주 강하고 당당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 거고 엄마는 온 힘을 다해 그걸 응원해줄 거란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약한 여자를, 너만큼 당당하지 못한 여자를,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여자를, 겁이 많고 감정이 풍부해서 자주 우는 여자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결점이 많고 가끔씩 잘못된 선택을 하는 여자를, 그저 평범한 여자를, 그런 이유들로 인해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도 나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할 거란다.
작가가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 여자들을 그런 이유들로 미워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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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왜 이런데, 윤슬은 그렇게만 대답했다. 진경에게는 항상 그렇게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고, 말을 빙글빙글 돌리게 됐다. 둥그런 대답을 원하는 사람에게 매몰찬 말을 해서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그런 때가 많은 것 같다.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고, 에둘러 묻고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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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교수실에서 채이와 나눈 그 많은 대화를, 돌려받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도 않고 열심히 빌려 주고 소개해가며 함께 읽은 책들을, 오직 서로에게만 지어 보일 수 있던 미소를, 우정 말고 다른 어떤 단어로 부를 수 있을까? 아무래도 할 수 없는 가족사 이야기도 경혜는 채이에게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혜와 채이의 우정을 보며, 나와 라샘의 우정을 떠올렸다.
어느샌가부터 라샘도 나도, 서로를 친구라고 생각한다. 서로에게만 지어 보일 수 있는 미소를 가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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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를 당하는 아이는 왜 왕따를 당하는가? 이런 질문에는 ‘그런 이유 따위는 없다’고 대답하는 게 옳다. 누군가를 따돌리는 인간들이 잘못이다. 그런 행위에 이유를 부여해 정당화해 주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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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은 진경을 보며, 정말 남자라는 족속은 왜 이렇게 내 친구를 피곤하게 할까, 생각했다. 너희들 때문에 진경이가 할 일을 제대로 못하잖아.
그리고 그 생각은 조금씩 바뀌어갔다.
왜 저렇게 남자가 없으면 못 사는 거야. 창피하게.
언젠가부터 세연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진경이 졸업을 하고, 직장에 들어가고,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기도 했다. 세연은 진경이 자신과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남자친구에게 달려가버리는 것이 황당했다. 그런가하면 양해도 구하지 않고 남자친구를 대동해 약속 장소에 나오는 것도 참기가 힘들었다. 나는 투명인간인가? 저 아이가 남자를 만나지 않는 시간을 채워주는 심심풀이 땅콩, 그 남자의 대용품에 지나지 않는 존재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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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어디서 울까.
경혜를 볼 때마다 채이는 생각하곤 했다. 쌤, 쌤은 언제 울어요? 어디 가서, 누구의 어깨에 기대서 울어? 그렇게 묻고 싶었다. 쌤은 나랑 밥을 먹으면 항상 계산도 혼자 하고, 말도 별로 하지 않고 다 들어주기만 하잖아. 쌤의 투정은 누가 받아줘요? 쌤 친구 많아? 많겠지. 하지만 그중에 나 같은 친구 있어요? 없으면 내 앞에서 좀 울어도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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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성들은 세연보다 훨씬 정치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그들에게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친분 관계만큼이나 입장과 노선, 목표에 따라 인간관계가 새로운 방식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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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네가 버스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버스 안에 있다고 믿어. 우린 결국 같이 가야 하고 서로를 도와야 해. 그래서 자꾸 하게 되는 것 같아. 남자들에게는 하지 않는 기대를.
맞다. 기대도 훨씬 많이 되니까 더 많이 화가 나고 속상한 것.
우리는 결국 같이 가야 하고 서로를 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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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걸로 강해지려고 하지. 자신을 드러내는 건 징징거리는 것이고, 그건 곧 약자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정말 정말 좋았던 책.
코로나로 인해 진행한 교보X정부 프로젝트 무료 대여 도서로 읽은 책인데, 정말 좋았다.
요즘을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의 고민이 다양한 무늬를 띤 채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진짜 좋은 책.
당분간 내 지인 한정 추천 도서는 이거다. (이미 공주랑 정아랑 라샘께 추천드림)
진짜 진짜 윤이형 작가님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