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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 정세랑
꼬마대장님
2019. 10. 30.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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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이럴수가 ㅠㅠㅠㅠㅠㅠ
반 정도 쓴 글의 임시저장이.... 사라지다니요... ㅠ_ㅠ
그러고 나서 한아가 느낀 감정은 새로웠다.
"보고 싶어."
그 말이 자연스럽게 새어나왔다. 망할, 외계인이 보고 싶었다. 익숙해져버렸다. 그런 타입도 아니면서 매일 함께 보내는 데 길들여져버렸다. (143)
그러니 어쩌면, 한아는 이제야 깨닫는 것이었는데, 한아만이 경민을 여기붙잡아두던 유일한 닻이었는지 몰랐다. 닻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유약하고 가벼운 닻. 가진 게 없어 줄 것도 없었던 경민은 언제나 어디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고 종국에는 지구를 떠나버린 거다. 한아의 사랑, 한아에 대한 사랑만으로는 그 모든 관계와 한 사람을 세계에 얽어매는 다정한 사슬들을 대신할 수 없었다. 역부족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닻이 없는 경민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을까?
쉬운 과정은 아니었으나 거기까지 이르자, 한아는 떠나버린 예전의 경민에 대한 원망을 어느 정도 버릴 수 있었다. 나 때문이 아니었어. 날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던 거야. 다만 오로지 그 사랑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던 거지. 질량과 질감이 다른 다양한 관계들을 혼자 다 대신할 수는 없었어. 역부족도 그런 역부족이 없었던 거야. (147)
경민은 바로 옆에 있다가도, 혼자 있고 싶은 낌새를 조금만 보이면 눈치껏 피해주었기 때문이다. 지구인보다 눈치가 낫다니. (150)
강한 집단 무의식 때문에 경민이 한아를 사랑하면, 그 별 전체가 한아를 사랑한다고 했다. 한아 역시 어째선지 우주를 건너오는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154)
서윗해....//-//
그 별 전체가 한아를 사랑한다니..
"내 생각에 우리들은 곧 뿔뿔이 흩어질 것 같아. 모두 저길 떠나게 될 거야."
경민이 심각하게 미간 사이에 주름을 네 개쯤 만들고 말했다. 그럴듯한 표정이었다.
"왜, 근사한 곳 같은데?"
"하지만 저긴 너무... 컴포트 존comport zone이야."
"그게 뭐가 나빠?"
"안락하고 평화롭지만, 고민없이 출아법으로 끝없이 자기 분열하는 것에 이제 모두 질린 거야. 이주율이 순식간에 늘 거야." (155)
한아는 문득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원래의 경민이 무사하기를 바랐다. 언젠가는 저기 저 미묘한 휴게소에 들러 쉬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건 남은 사랑은 결코 아니었고 이미 산화할 대로 산화해버린 우정일 뿐이었지만. (168)
"정말 그런 듯해. 가끔 인체에 대해 나도 몰랐던 걸 가르쳐줘."
"어떤 거?"
유리가 눈을 빛냈다.
"다른 어떤 뼈에도 붙어 있지 않은 갈비뼈가 있는 거 알고 있었어? 외로운 갈비뼈. 그런 곳을 짚어줘."
"엥, 뭐야, 하나도 안 야해. 그런 거 궁금하지 않아. 그거 말고는?"
"원래 경민이보다 조금 더..."
"조금 더, 조금 더 뭐? 조금 더 커?"
"조금 더 함께 있는 기분이야."
유리는 야유했고 한아는 웃었다. 함께 있는 기분이 드는 건 경민이가 외계인이고 아니고는 상관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170)
'조금 더 함께 있는 기분'을 주는 사람이라니.
내가 원한 것도 비슷한 유의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만나는 빈도와 시간과는 무관하게 함께 있는 '기분'을 줄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랐다. 충만하다고 표현되는 그런 기분.
한아가 말했고 경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민은 한아만큼 한아의 신념을 사랑했다. 한아의 안에도 빛나는 암석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172)
부럽다아아아아
나의 신념도 사랑해준다니 꺅.
경민이 부드럽게 한아를 껴안았다. 중요한 결정을 언제나 한아에게 맡겨주는 게 좋았다. 불안한 부분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인 것도. 흔한 방식으로 불행한 결혼을 하게 될까봐 걱정했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 방향으로는 걷지 않게 될 걸 알았다. (175)
1가구 1경민 소취요
두 사람은 설거지를 하느라 차가워진 서로의 손을 잡고 차를 마셨다. (180)
같이 설거지한 것도 좋고, 차를 마시는 것도 좋고, 무엇보다 차가워진 손을 데워주려고 잡고 있는 것이 너무 좋다. 으윽.
몰디브의 해변에서 한아는 경민의 팔을 베고 누웠다. 사랑스러운 배우자의 얼굴을 보며 원래 그 얼굴의 주인과는 전혀 다른 사람을 보았다. 한아는 그 얼굴이 아니라 얼굴 너머에 있는 존재를 사랑한다고 느꼈다. 이 사랑은 혼란스럽지 않아, 입안으로 말했고 확신했다. 외부 슈트 없이 본연 그대로의 돌덩어리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80)
돌아오고도 한참 동안,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서 꺼내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는 건 좋았다. (182)
한아는 마음이 더 아파졌다. 집을 나서는 경민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널."
그러나 한아는 마땅한 동사나 형용사를 찾지 못했다.
"... 너야."
언제나 너야. 널 만나기 전에도 너였어. 자연스레 전이된 마음이라고 생각해왔었는데, 틀렸어. 이건 아주 온전하고 새롭고 다른 거야. 그러니까 너야. 앞으로도 영원히 너일 거야. 한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채 말하지 못했고 물론 경민은 그럼에도 모두 알아들었다. (197)
몇 번을 읽은 부분. 블로그에 쓰려고 다시 읽는데도 좋다. '널 만나기 전에도 너였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니.
"놓아버리고, 놓쳐버린 걸 인정해. 하지만 정말 사랑했던 거 알아?"
"말하지 마. 괜히."
"아니, 해야겠어. 세상에... 우주 끝까지 갔더니 네가 그걸 아는 게 나한테 가장 중요한 문제더라. 진부하게 말이지."
"이제 아네. 알게 됐네."
한아는 자기가 정말 알게 되었다고 희미하게 신기해했다.
"너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해준 거 알아. 고맙게 생각해."
"미안해. 한도가 작은 남자라. 더 한도가 큰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다. 뭔지 모를 외계인이긴 하지만." (205)
혼자 남은 한아는 술이 깨는 걸 싫어하며 다시 날아다니는 먼지를 구경했다. 우리는 다 먼지가 될 거야, 한아는 생각했다. 빈집에 메밀 베개처럼 누워서, 사지를 움직이지 못했다. 움직여야 하는데, 나가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 수 없는데... 머릿속이 그런 말들로 가득했지만 팔도 다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실이 끊어진 것 같았다. 한아의 우주가 점점 좁아져 이 집이 되고, 집조차 점점 한아의 안으로 말려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난 아마 점이 될 거야. 먼지가 될 거야. 모든 게 의미 없게 느껴졌다. (213)
한아는 경민에게 온 체중을 실어 안겼다. 경민의 오래된 스웨터에서 먼지 냄새, 바람 냄새, 시간 냄새가 났다. 한아는 그 순간의 두 사람이 얼마나 완벽하게 꼭 들어맞는가를 가만 느끼고 있었다. 우주가 그들을 디자인했다. 재단하고 완벽한 스티치로 기웠다. 한아는 그 솜씨를 죽었다 깨도 못 따라 하리라는, 기이한 감탄에 빠져들었다. (216)
포옹하는 게 좋다. 특히나 가까운 사람과 하는 포옹이 좋다. 그게 남자친구라면 사실 제일 좋다.
나와 네가 꼭 들어맞는 느낌이 좋았다. 우리 사이에 우주가 생기는 것 같은 기분이라서. 그리고 그 우주는 우리 둘만 아는 비밀 같아서 더 좋았다.
"남겨질 날 좀 이해해줘. 너 없이 어떻게 닳아가겠니." (220)
심장이 간질간질했던 책.
마침 학생 중에 경민이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걔의 모습에 대입해 읽었던 것 같다.
경민아 미안해 ㅋㅋㅋㅋㅋㅋ
지구에서 한아뿐, 제목 정말 잘 지었다. 지구에서 오직 하나뿐인 한아와 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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