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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 오가와 요코

꼬마대장님 2019. 9. 25.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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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전화번호는 어떻게 되나?"
"576에 1455예요."
"5761455라고? 정말 멋진 수가 아닌가. 1에서 1억 사이에 존재하는 소수의 개수와 정확히 일치하는군."
사뭇 감격스럽다는 듯이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 전화번호가 뭐가 그리 멋진지는 이해할 수 없어도, 그의 말투에 담겨 있는 온기는 느낄 수 있엇다.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려는 의도보다는 오히려 조심스러움과 솔직함이 엿보였다. 어쩌면 우리 집 전화번호는 특별한 운명을 지니고 있고, 그 수를 소유한 자의 운명 또한 특별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온기였다. (14)

임용 공부를 하면서, 학자들의 논리가 정연하게 이어질 때 얻을 수 있는 기쁨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논리가 너무나도 명료해 따로 외우지 않아도 자연스레 머리에 도식화될 때 정말 기쁘고 좋았다.

 

문득 소맷자락에 붙어 있는, 어제까지는 없었던 새 메모지가 눈에 띄었다. 숟가락으로 스튜를 뜰 때마다 꼭 스튜에 빠질 것 같았다.
'새 가사도우미'
조그맣고 힘없는 글씨였다. 뒤에는 여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짧은 머리에 얼굴은 동그랗고 입술 옆에는 점이 있는,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애 수준의 그림이었지만 내 얼굴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22)

최근에 본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이와 비슷한 간지러움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대놓고 과시하며 너를 사랑한다 따위의 것이 아닌, 조용히 몰래 나에 대한 마음을 표현해온 것을 '내'가 만났을 때의 기분좋은 놀라움과 심장의 간질임. 신기하게도 매번 마음을 확인받고 싶은 나지만, 이렇게 만난 표현들은 참 오래 오래 내게 남는 것 같다. 그리고 그때의 내 마음까지도.

 

학교에 다닐 때부터 수학은 교과서만 봐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었는데, 박사가 가르쳐주는 수학 문제는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직업상 고용주의 관심사에 부응하려고 애써서가 아니라, 가르치는 방법이 좋아서였다.  수식 앞에서 그가 내쉬는 감탄의 한숨 소리와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언어와 빛나는 눈동자는 그 자체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36)

나조차 도덕이 무용하다고 생각하고, 이 단원이 의미없다고 생각하면 망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부분! 그러니 내가 진심으로 아끼고 믿는 가치를 알려주자.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든 전해질테니까.

 

"너는 루트다. 어떤 숫자든 꺼리지 않고 자기 안에 보듬는 실로 관대한 기호, 루트야." (42)

루트라는 기호를 이렇게나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구나. 내가 알던 그냥 루트랑 다른 루트같다. 나도 애기들에게 한 번 이런 애칭을 지어줘봐야지. 그럼 그 아이도, 그 공간에 있는 다른 아이들도 좀 더 다르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사랑, 정직, 신뢰, 칸트 ㅋㅋㅋㅋ

 

박사는 루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칭찬을 하느라 시간만 흘러 숙제에 진전이 없어도 전혀 허둥대지 않았다. 루트가 아무리 엉뚱한 실수를 해도 강바닥의 모래에서 사금 한 알을 캐내듯 잘한 점을 찾아내었다. (54)

 

"순서대로 하나하나 식으로 만들어봐도 돼요? 학교 선생님은 한 개의 식으로 정리해야지, 안 그러면 화내는데."
"틀리지 않게 신중하게 하고 있는데 화를 내다니, 이상한 선생님이로구나." (56)

그러게요. ㅠㅠ 왜이렇게 기다리는 게 힘들까요. ㅠㅠ

 

옛날에, 고용주의 심보에(보는 데서 준비한 음식을 쓰레기통에 내던지고, 억울하게 도둑 누명을 씌우고, 게으르다고 잔소리를 해대고) 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으면 어린 루트는 곧잘 나를 위로해주었다. (78)

나도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위로를 받곤 하니까.

 

"음, 아주 좋은 지적이군. 바로 쌍둥이 소수지."
평소 사용하는 언어가 수학에 등장하는 순간 낭만적인 울림을 띠는 것을 어째서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우애수도 그렇고 쌍둥이 소수도 그렇고, 적확함은 물론 시의 한 구절에서 빠져나온 듯한 수줍음이 느껴진다.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그 속에서 숫자들이 서로 포옹하기도 하고, 똑같은 옷을 차려입고 손을 마주 잡은 채 서 있기도 한다. (92)

나도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게된 수학 개념들인데, 정말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예쁠일인가. ㅎㅎㅎ

 

소수를 발견했다고 해서, 또는 소수가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 앞에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제조번호가 몇이든 냉장고는 그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고, No.341 결산신고서를 제출한 사람은 지금도 세금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을 것이다. 득은 커녕 오히려 손해가 난다. 냉동고에서는 아이스크림이 녹고, 바닥 닦기는 진전이 없고, 회계사의 짜증은 심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2311은 소수이고, 341은 합성수라는 진실은 퇴색하지 않는다.
"실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수학의 질서가 아름다운 거지." (165)

!!!!!!!!!

실리적인 이유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는 참 소중한 것들이 많다.

 

"물질이나 자연현상, 또는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그러나 수학은 그 모습을 해명하고, 표현할 수 있지. 아무것도 그걸 방해할 수는 없어."
배가 고픈 것을 참아가면서 사무실 바닥을 닦고 루트를 걱정하고 있는 내게는 박사가 말하는 영원하고 옳은 진실이 필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실감이 필요했다. 넓이도 없이 장엄하게 어둠을 뚫고 한없이 뻗어 나가는 한 줄기 진실한 직선. 그 직선이야말로 내게 잠시의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자네의 그 영리한 눈을 뜨게나."
박사의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어둠을 응시했다. (167)

내가 책을 읽는 이유. 단단하게 나를 잡아줄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필요하다. 꼭. !!! 특히나 요즘같은 때는 더ㅋㅋㅋ

 

계단을 내려오다가 문득 뒤돌아보았지만 수학 코너는 여전히 한산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183)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정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가 쓴 책에, 아이를 걱정하는 것이 부모에게 부과된 최고의 시련이란 말이 있었지." (200)

 

 

(물론 소설이지만) 내가 읽어본 첫 수학 책인 것 같다. ㅎ_ㅎ

그것만으로도 뿌듯. 쓰담쓰담 현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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