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기억해줘 :: 임경선

꼬마대장님 2019. 3. 12. 03:47
반응형
SMALL

 

이별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은 황홀하게 나를 바라보던 너의 눈빛을 기억하기 때문이다.[각주:1]

 

해인은 유진과 이마를 맞대고 두 눈의 표정을 읽어보려 했지만 말 안 듣는 아이처럼 그녀는 고개를 저쪽으로 돌려버렸다. 눈 아래의 애교살은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유진은 다른 남자에게 지독한 열정을 품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각주:2]

 

"해인에게 말하고 나면 이해받는 느낌이야."

"너라면 뭔가 안심이 되고 말하고 나서 마음이 정리가 돼."

"해인은 입이 참 무거워."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이 세상의 여자아이들이란 그저 자기 얘기를 진지하고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사람을 간절히 필요로 할 뿐이었다. 불행하게도 또래의 남자 아이들은 대개 그럴 만한 인내심이 없었다. 착각도 심했고 손도 제자리에 가만히 두질 못했다. [각주:3]

그점에서 네가 어쩌면 내가 생각하기에 여전히 그 누구보다 훌륭한 이유.

 

"너는 정말 단단하고 강한 사람이야. 내가 너의 그런 점들을 얼마나 좋아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

해인은 침대 머리맡으로 옮겨 앉아 엄마가 아이에게 하듯 안나의 볼록 튀어나온 이마 위에 손을 갖다 댔다.

"난 약한 곳 투성이야. 네가 그렇게 볼 뿐이지."

"자신의 약한 부분을 인정하니까 강한 건데? 너의 약한 모습, 얼마든지 내게 보여줘. 친구로서... 너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나 더 깊이 알게 되면 이상한 애일지도 모르는데?"

안나가 눈을 치켜떴다.

"괜찮아. 사람들은 다 조금씩 이상해. 그래도 그 사람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가장 약하고 이상한 부분을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닐까?"

안나는 왠지 가슴이 벅차올라 해인을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아 힘껏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목덜미에서 그리운, 살아 있는 살 냄새가 났다.

"힘 나. 고마워. 잘할게. 좋아해. 많이."

안나는 두 눈을 감고 잠시 그대로, 조금 더, 해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각주:4]

내가 좋아하는 것.

꼭 안겨서 그사람의 목덜미에서 나는 냄새를 맡는 일.

그래서 안아달라고 나는 많이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매번.

 

엄마에게 누구냐고 물으니 그냥 친구라고 둘러댔다. '그냥'이 무슨 뜻이냐고 다시 묻자 '그냥'은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쓰는 말이라고 했다.[각주:5]

 

"해인아, 아까는 내가 잘못 말한 것 같아. 평소의 너답지 않은 지금의 네가 궁금해. 네가 나한테 했던 말 기억나니? 약하고 이상한 모습 보여줘도 괜찮다고 한 거. 사람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그런 부분을 좋아해야 하는 거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말해줘,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제발 나한테도 물어봐줘,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각주:6]

 

 

결혼과 달리 연애는 언제고 쉽게 떠날 수 있었기에 불안해하는 여자들이 많지만 어차피 어떤 관계도 영원할 수는 없다. 상대가 내 곁을 떠난다 해도 그렇게 한때나마 서로를 깊이 사랑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그 이상 인생에서 무엇을 더 바랄 수 있단 말인가. [각주:7]

 

"다른 딸내미들 보면 친구처럼 엄마한테 힘든 일을 상담하기도 하던데 우리 딸은 너무 똑 부러져서 힘든 일도 없나봐?"

정인이 그렇게 말하면 안나는 그저 빙긋 웃었다.

"엄마는 엄마지 친구가 아니잖아. 정확히 뭘 원하는 거야. 친구? 아니면 엄마?"

정인은 바보처럼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자신이 되레 상담하는 딸처럼 굴어서 정작 딸이 자신에게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주:8]

 

 

 

 

작년 10월쯤인가 11월쯤인가.

임경선님 책이라서 무조건 집어들었다가 혼난 책.

처음에 너무너무 힘든 이야기들로 가득한 이 책을 나는(그때의 나는) 소화하기가 힘들었고, 덮어두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오늘에야 다 읽었다.

그땐 이 책을 읽기가 왜 그렇게 버거웠는지.

살아가면서 있을 법한 이야이고, 누구나 겪는 이야긴데,

사실은 인생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다.

누구나 겪는 이야기고, 또 흘러갈 일들.

나의 경우에서만 유달리 의미있고 가치로운게 아닌 일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힘이 덜어지고 가벼워진다 몸도 마음도.

 

왜 그렇게 진심과 깊이에 집중했냐고 하면, 아마 짧지만 겪었던 나의 경험들 때문이겠지?

적당함에서 주는 위로가 있고 단단함이 있겠지만 그 뒤를 따르는 후회를 나는 지독히도 겪었기 때문.

 

오늘도 여러명의 네가 생각난다.

너는 이제는 정의할 수가 없다. 아마 초반에는 지금과 비슷했던 것 같다. 후반의 너에게서는 절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지만. 그래도 너라면 시간은 걸려도 깊이 사과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 시간들 사이에서 상처받고 더 속상해했었지만, 미안하다는 너의 말에 또.

또 너는 그래도 감정에 솔직했다. 그게 내가 너에게서 가장 최고라고 생각하던 부분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때 그때의 감정을 미뤄두지 않았다. 늘 감정에 충실했고 솔직했다. 그래서 너라면 오늘 같은 일은 절대 하루를 넘길 수 없다며 얼굴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게 너의 큰 장점이었고 우리를 이어주었다.

 

너라면, 이라는 가정이 얼마나 의미없는지.

사실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같은 행동을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너라면, 가정에는 의미가 없다. 고 하기에는 다른 의미의 어떤 것이 있다.

그건 나의 반응? 나의 행동 양식에 대한 것이겠지.

이런 때, 저런 때 나의 반응들을 되돌아보면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고

그때와 비교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가 판단해보게 되는 것 같다.

 

우선 정말 말을 못됐게하는 것을 혐오한다.

나도 너무 못된 말들을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기에, 나는 입을 다문다.

그게 내 단점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테지만, 적어도 주워담을 수 없는 말들을 배설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입을 닫는다.

그리고 나는 겁쟁이다.

내가 듣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피하기 위해 꼭 꼭 숨는다.

듣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게 된다.

아마 이건 나의 엄청난 자기 방어 기제겠지.

어린 아가가 눈 감으면 타인도 자기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듯, 나도 내가 숨어있으면 그 사실들이 나를 못 찾아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정말 몹쓸 버릇인, 웃음. 직접 말하고 직접 마주하면 또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할 것 같으니까.

나는 안 괜찮고 너무너무 속상한데, 반사적으로 나는 또 괜찮다고 할테니까.

나는 직접 말하고 마주하는 걸 피하고 싶다.

왜냐하면 나의 마음과 상처는 더 무겁고 크니까. 스스로 작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고 보니

이번 일과 이번 3월에 내게 온 일에 대한 나의 행동이 닮아있다.

나는 꼭꼭 숨어있고, 내가 숨는 가장 큰 이유는 괜찮다고 말하기 싫어서이다.

아직 나는 괜찮다고 말할 정도로 소화하지 못했으니까.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