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가운데 :: 루이제 린저
모르겠어. 아니, 빈집에 혼자 있기 싫어서였을 거야.
니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이 말 속에는 불안이, 불안과 절망이 담겨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를 알아야만 했다. 나는 지금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사람들이 네게 무슨 일을 저질렀니?
저릴렀다고? 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그런식으로 상상하지 마. 여기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기 때문이야. 왜냐하면... 그녀는 말을 멈췄다가 빠르게 그러나 낮은 어조로 계속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을 바꾸어야만 하기 때문이야. 1
내가 왜 그랬는지 모릅니다. 여름 탓일까요. 나는 풍만함 그리고 포만함을 참을 수 없습니다. 자연은 정지해 있으며 동경을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그래서 공허하며 피곤을 느낍니다. 스스로가 가치 없어보입니다. 나는 자주 이른 새벽에 깨어납니다. 모든 것이 아직 빈 상태이고 회색으로 싸여 있을 때 말입니다. 그때마다 나는 공포, 누군가 내 목을 조르는 듯한 공포를 느낍니다. 삶에 대한 공포, 살아야만 한다는 것에 대한 공포입니다. 이때는 어떤 위대한 생가곧 나를 도울 수 없습니다. 신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공포에 단독으로 내맡겨져 있죠. 최악의 경우가 지나가면 나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려고 애씁니다. 여러가지 대답이 나옵니다. 내가 인생에서 아무것도, 어떤 의미 있는 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 내 인생을 그냥 사라지고 있으며 나는 살지 않았다는 불안감, 나는 실수를 저질렀으며 영원히 내 인생은 작은 궤적 속에서 움직일 뿐이라는 불안감들입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나에게서 어떤 의미있는 것이 나올 수 있겠어요. 이 무슨 오만인지요. 그렇지만 나는 이것을 당신한테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무언가가 <너는 무언가를 이룰 수 있어>하고 나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 <무언가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만 그것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또 나는 그 무언가를 이루지 못할까봐 불안합니다. 그 무언가를 영원히 상실할까봐 불안합니다. 영원히 말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불안의 가장자리, 아직 포착 가능한 불안의 제일 바깥 가장 자리에 불과합니다. 실체는 뭔지 모릅니다. 2
종종 내가 느끼는 불안과 감정을 내것처럼 표현해 놓은 곳. 책을 읽다 이런 부분을 만나면 반갑고 좋다. 나만 그런게 아니니까. 나만 속상한게 아니니까.
지난 얼마 동안 나는 얼마나 자주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더 살아야 하는가, 라고. 나는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또,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기쁨도 주지 못하는 이런 인생을 계속 영위해야 할 의무도 알지 못한다. 이전에는 공포를 느꼈으나, 이제는 나와 삶을 연결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평안함을 느낀다. 무한한 적막감이 나에게 입을 벌리고 있다. 엄청난 무기력이, 어떤 환멸이나 권태에서 비롯된 거싱 아닌 무관심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 나는 성공했으며 약간의 재산도 있다.
나는 언젠가 내가 인생의 무의미함에 대해 깊게 탄식했을 때 니나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그 의미를 결코 알게 되지 못할 거예요. 그것을 묻지 않는 자만이 해답을 알아요. 3
죽은 뒤에 생전의 죄를 속죄할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오. 내가 지은 죄란 결단을 회피했다는 것이오. 나는 그것이 비겁했기 때문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오. 그러나 그렇지 않소. 아마 유약했기 때문일 것이오. 4
언니는 그 사람과... 니나는 망설였다. 그러다가 재빨리 말을 마쳤다. 행복했어? 휴, 니나. 행복이 뭐니? 우리는 평화롭게 사는 거야. 공통의 관심이 있고 한 신문사에서 같이 일해. 자식이 없고 우리는 자식 없는 것을 좋게 여기고 있어. 멋진 집이 있고, 자동차, 개, 그래, 멋진 셰퍼드들이 있어. 그 밖에 더 뭘 바라야만 돼?
그때 물론 나는 이것이 행복일까, 하고 자문했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지 않았고, 삶에 대해 지나친 요구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행복하다고 나 자신과 타협할 수 있었다.
사랑에 대해서 언니는 알고 있어? 니나는 질문했다. 요는 사랑이 무언지 알고 있느냐는 거야.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불쾌해졌다. 사랑이란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감정이야. 오로지, 그리고 철저하게 말야. 5
나는 죽고 싶은 거예요. 이해 못하시겠어요? 사는 것보다, 여기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게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공부하고, 먹고, 자고, 직업을 갖고, 결혼하고, 아리를 낳고, 이런 게 다 뭐죠? 이것만으로는 모자라요. 사람들은 그런 것에 익숙해져서 마치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타이르죠. 그래요, 다른 어떤 것은 필요로 하지 않고, 또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어요? 멋진 순간이 우리의 삶에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책에서 읽었어요. 사랑을 하거나 혹은 아이를 낳거나 혹은 어떤 진리를 발견한 순간이 그렇다는구뇽. 그러나 그런 건 영원히 계속되지 않아요. 우리는 그저 맛만 보고 조금 구경하고 그리고 다시 빼앗기고 말아요. 이건 절대로 나에겐 충분치 못래요. 그래서 나는 죽고 싶어요. 이해하시겠어요? 6
당신은 내 삶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당신은 내 본질 중 굳어 있는 부분을 용해시켰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좋은 일을 베풀고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마치 숨쉬는 공기처럼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을 찾으려 나는 거리를 헤맵니다. 당신을 만나야겠습니다. 부디, 부디, 내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나를 찾아주시든지, 아니면 단 한 줄이라도 좋으니 소식을 주십시오. 나의 삶을 당신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7
우울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 니나는 천천히 말했다. 온갖 아름다운이란 것이 일시적이고 다만 얼마 동안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 그리고 우리가 인간들 틈이나 나무와 극장과 신문 사이에 있으면서도 마치 차가운 달 표면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은 누구나 다 우울하지.
니나!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니? 네가 삶을 기쁘게 사는 줄 알았는데. 왜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너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
우울은 인식의 시초일 뿐이다. 정말 너무 맞는 말이라 깜짝 놀란 부분! 우울할 때(우울이라기 보다 예민해진다고 해야하나, 그럴 때) 모든 감각들이 더욱 날을 세운다. 모든 것들이 기민하게 다가오고 느껴진다.
가끔 저녁에 거리로 나갈 때가 있어. 특히 여름날 저녁때 그래. 그러고는 전등이 켜 있고 라디오 소리가 새어나오는 방안이나 정원을 들여다보곤 해. 거기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지. 그러면 나는 가족에 대해서, 그리고 나에게 잘해 주고, 내가 의지하고, 밤에는 나를 안아줄 한 남자에 대해서 끔찍하지만치 강렬한 동경을 느껴. 9
내 생각에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생기에 차 있을 때야. 그리고 마치 미친 자가 자기의 고정 관념에 몰두하듯이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을 때야. 10
그래서 사랑을 하면 행복해진다고들 하나보다. 모든 것이 색을 입은듯 생기 있어지고, 잠을 못자도 쌩쌩하며, 별 일들에도 웃음이 피기 마련이니까.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니까. 매일이 봄처럼 생동하니까.
또 무언가에 몰두할 때. 그렇다. 그래서 내가 4학년을 너무너무 그리워하는 것일테지. 지금도 직업에? 일상에? 몰두하는 것은 맞지만, 그래도 그때가 그리운 건 나에게 몰두하는 때라서가 아닐까. 아니면 사실은 이조차도 나의 미화인지도. 가장 심적으로 힘들었던 때를 꼽으라면 분명 그 1년에 속한 날일테니까.
그러내 내 생각에는 네가 그 애를 계속 옆에 둘 수 없을 것 같구나. 아니, 곁에 두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주머니는 미소짓기만 했다. 그러고는 나를 당황하게 하는 말을 했다. 물론 뜻밖의 말은 아니었다. 나 자신도 그전에 이미 수백 번이나 생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했다. 그애는 네가 갖고 있는 조용한 세계에서는 살 수 없을 거다. 뜨거움, 소란, 변화들이 있어야 하는 애다. 그 애는 많은 모험을 무릅쓸 그런 종류의 여자다. 11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인간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야. 그 당시 나는 어렸고 매우 혼란한 상태에 있었어. 언니도 알아?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전날과 아주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는 거야. 갑자기 다르게 걷고, 다르게 글을 쓰고, 다르게 말을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자기 자신은 잘 알고 있지. 우리는 이렇게도 될 수 있고, 혹은 전혀 다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야.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고 자기 자신과 게임을 할 수 있어. 책을 읽으면서 책 속에 있는 이런저런 인물과 자기가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는 경우가 있잖아? 다른 책을 읽으면 또 다른 모습이 보이고, 끝없이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거야. 자기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수백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보여. 어느 것도 진정한 자아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게 미정이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사실은 이 여러 자아 가운데 하나의 자아만을, 미리 정해져 있는 특정한 하나의 자아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만.
그래.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가끔 우리는 선택이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될 때가 있지. 혼자 있을 때, 아주 고독할 때,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것이, 자기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는 거야. 우리는 그것을 보지. 자기 자신을 말이야. 12
누구나 우릴 보면 자매라고 여길 것이다. 똑같은 얼굴이다. 그러나 나는 내 얼굴이 훨씬 예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리가 나란히 걸어갈 때 니나를 쳐다본다. 내 얼굴은 말끔한데 니나의 얼굴은 표정이 가득하다. 바로 이것이다. 니나는 이 얼굴을 위해 비싼 대가를 치렀다. 나도 니나처럼 독일에서 전쟁과 고난을 함께 겪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속 편한 생각일 뿐이다. 13
그러나 그녀 역할이 더 쉬운 것이었다. 더 격한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이 항상 불리한 법. 감정이 어디서나 그를 방해하고, 자기의 정열에 걸려 넘어지고, 패배할 때마다 더 우스꽝스러운 짓을 한다. 찬스는 매번 줄어들지만 감정은 더욱 격렬해진다. 14
이건 정말 지나쳐. 나는 말했다. 사랑을 재능과 결부시키고 있어.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것이지, 재능이 많고 적음은 부차적 문제라고 생각해. 15
아름답군요. 나는 니나에게 말했다. 찢어서 유감입니다, 암기하실 수 있습니까?
아니요. 니나는 말했다. 벌써 잊었어요. 쓴 것은 잊어버려요.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니까요. 그건 이미 지나버린 것만을 말하죠. 나는 그 동안 나이를 먹었는걸요. 16
당신은 나에게 몹시 고독하다고 말했고 그 말에 대해 나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당신은 진부하게 받아들였을 테지만, 그러나 사실입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것이며 이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17
나는 자유롭게 있어야 한다는 것 외에는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내 속에 수백 개의 가능성이 있는 것을 느껴요. 모든 것은 나에게 아직 미정이고 시작에 불구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자신을 어떤 것에다 고정시킬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정말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당신에겐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정말로 나를 모릅니다. 18
독자는 재미를 요구하고 있어. 작가는 좇아가기 쉬운 편안한 이야기를 제공해야 하는 거야. 처음에는 이것이 일어나고 다음에는 그것, 그러고는 또 저것, 그리고 행복이든 불행이든 결말이 나야 해. 마치 극장에서처럼 모든 것이 깨끗하게 결말이 나야 해.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기가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정작 인생에는 한 가지 계산서도 없고 아무런 결말도 없는데 말이야. 결혼도 결말이 아니고, 죽은도 겉보기만 그렇지 결말이 아니고. 생은 계속 흘러가는 거야. 모든 것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고 아무 논리도 없으며, 모든 것은 즉흥적으로 생성되고 있어.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서 한 조각을 끌어내서는, 현실에는 없고 삶의 복잡함에 비하면 우스울 뿐인, 작고 깔끔한 설계에 따라 그것을 건축하고 있어. 모두가 꾸민 사진에 지나지 않아. 내 소설도 마찬가지야. 19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훨씬 덜 아름답고 덜 효과적이지. 독자는 쉽게 남을 믿는 한나를, 또한 자기 자신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나를 조금은 부끄럽게 생각할 거야.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워. 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가끔 그럴 뿐이야. 우리 모두는 약간은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이지.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어. 내가 그리고 싶은 게 바로 이거야. 우리는 착하면서 동시에 악하고, 영웅적이면서 비겁하고, 인색하면서 관대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밀접하게 서로 붙어 있다는 것, 그리고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도록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말야. 20
나는 이 지역과 도시 전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니나는 중얼거렸다. 언니는 이런 감정을 가져본 적 있어? 여태까지 애착을 갖고 있던 것이 지긋지긋해지는 것, 갑자기 아주 지긋지긋해지는 일 말이야. 하루라도 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모든 것이 이전과 똑같아. 방과 집과 거리 모두가 말이야.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해서, 밉고, 참을 수 없이 적막하고, 적의를 품은 듯 보이게 돼. 그러면 떠나야만 하는 거야. 정말 떠날 때가 된 거야. 자기도 모르게 이미 우리는 이 모든 사물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끄집어냈던 거야. 사물들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보니까 사는 거야. 21
해뜨기 직전의 시간은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 시간이었다. 쌀쌀하고 냉정하고 차가우며 엄격했다. 세상이 드러나기 바로 직전의 휴식 시간, 마치 자연이 호흡을 멈춘 듯한 시간, 어떠한 소리도 생명력이 없는 듯한 무시무시한 시간, 해뜨기 직전의 시간은 시간보다는 영원에 더 가까웠다. 이날 아침 나는 처음으로 그 시간이 내뿜는 완강한 적의를 느꼈다. 22
나는 모든 다른 남자들이 굴욕적이라고 여기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니나가 부르자 마치 개가 주인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달려가듯 그녀에게 간다. 23
언젠가 니가 내게 했던 말.
니나는 망설이면서 말했다. 이해하실지 모르겠어요. 커다란 저항감을 갖고 시작한 일에 마침내 적응해 버리는 것 말이예요. 아니죠. 적응한 것은 아니죠. 받아들인 거죠. 제 말뜻을 이해하시죠? 인간이 순응만 하면 참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요. 24
씁쓸한 구절. 적응이 아니라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것. 내 삶에서도 언제나 그래왔다. 그래서 자조적인 말도 있지 않은가, 죽으란 법은 없다는.
봐라. 너는 중요한 인식의 순간에, 적나라한 진실 앞에서, 도망치고 있다. 다시 들어가라. 노인을 보고 너 자신을 보라. 비록 두렵기는 하겠지만 전혀 해는 안 되는 법. 이것도 삶의 일부일 뿐. 모든 것을 경험해야 한다. 추악한 것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중요한 것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25
경험하지 못한 것을 상상하지 못한 탓에 없다고 생각하지 말기. !! 경험이 늘 키워왔다. 그게 나든, 너든, 누구든.
슈타인의 일기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깨끗했고 단정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의식적으로 공들인 필체였다. 니나는 이 글씨체를 싫어했다. 아주 기교적이고, 꼼꼼하고, 신중한 특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어서 과장된 느낌,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생명력이 없었으며, 단지 틀만 있을 뿐이었다. 점차 나도 이 글씨체에서, 그리고 이 남자에 대해서 저항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읽은 것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26
과장스럽다. 생명력 없이 단지 틀만 있을 뿐. 전부 모서리처럼 다가오는 글.
당신은 절르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그걸 시인하려고 하지 않아요. 당신은 정신이 무엇인지, 정신도 배고픔, 비 또는 더위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이라는 점을 알고 있어요. 또 정신에 쫓기는 일이 매우 불쾌한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세요. 당신은 그런 경험을 틀림없이 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왜 귀 먹고 눈먼 시늉을 하시는 거죠? 27
슬픔도 재산이라니. 마흔여덟 누군가의 깨달음이라면 그건 거의 옳다고 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사실 지금 나는 슬픔이 제일 싫은데. 슬픔 속에서 허우적이기 싫어서 단선적인 생각과 결정을 하는 나인데. 이같은 의미에서 내 재산은 상당히 빈하겠군.. ㅠ
나는 이미 오래전에 남편과 멀어졌다. 나는 나 혼자만의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이 부분에 대해 어떤 간섭도 하지 않는다. 니나가 그를 사랑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지.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의 집을 사랑하는 것처럼, 나의 달콤한 습관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는 나의 습관이다. 그렇다 해도 이런 인식이 전혀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29
나의 집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를 사랑한다. 그는 나의 습관이다.
그저 습관이 된 것이지, 우리는 이미 멀어진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전체의 인식 조차 나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정말 습관이 되어버린 것.
약간의 안정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좋은 일이었어. 진정한 안정은 물론 아니었어. 그러나 당시에 이런 것은 문제가 안 됐어. 멋진 가을이었고 나는 훌륭한 아내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어. 청춘에 종지부를 찍고 퍼시와의 생활에 나를 맞추었어. 우리는 부엌 살림을 사기 시작했어. 여기서는 냄비를, 저기서는 커튼 천을 하는 식으로 말이야. 신부 역은 매력적이었어. 나는 단정해지고, 스스로 중요해지고, 아주 달라졌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어. 퍼시는 어렸고, 약간은 부박하고, 흥분하길 잘했어. 그리고 나를 약간 비웃는 것 같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기로 했어. 아니, 퍼시의 이런 면을 좋아했고 이런 것이 퍼시의 우월한 표시인 것처럼 나는 생각했으니까. 30
나는 말하고 싶었어. 아니라고, 슈타인은 당신의 정신과 감정의 빈곤함 때문에 당신을 미워한 것이라고. 그때 나는 잠시나마 퍼시와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퍼뜩 느꼈어. 그러나 나는 더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았어.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충실하려고 들었어. 나는 신들의 경고를 흘려들었으며 그래서 그 때문에 벌을 받았어. 31
가장 무서웠던 말. 자신만이 느끼는 직감, 직관을 신들의 경고라고 표현한 부분이 예리하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일수록 사실 그 직감(직관)이 맞을 확률이 대개 높으니까.
정신과 감정의 빈곤함. 이 부분은 참 어렵다. 빈곤하다고 해서 불편함을 느끼지도 못할 뿐더러 사실 빈곤의 잣대마저도 개개별로 상이하기 때문에. 어렵다. 지극히 상대적인 빈부이기 때문에. ㅠㅠ 그치만 가장 무섭다. 대화의 8할 이상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니까. ㅠㅠ
니나는 내가 가지려고 했고 되기를 원했던 모든 것에 대한 비유일지 모른다. 그렇게라도 항상 있어주면 좋겠다. 니나는 생 자체에 대한 비유이다. 32
슈타인도 니나를 동경했었나보다.
니나의 방문이 나의 평화를 위협했다. 인위적인 평화가 존재한다. 속이 텅 비고 부서질 것 같고 모든 이음새가 삐그덕 거리는 평화다. 33
나는 떠나고 싶다. 나의 안온함이 있는 집에 가고 싶다. 이런 식의 거창하고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위험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보단 질서가 잡힌 집에서 사는 게 더 낫지 않은가? 모르겠다. 더 이상은 모르겠다. 갑자기 하나 이상의 질서가 존재했다. 많은 종류의 질서가 있었다. 모든 것이 맞든가 아니면 모든 것이 틀렸다. 매우 혼란스러웠다. 34
마침내 나는 모든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운명은 운명이며 인생의 중요한 일들은 당사자들의 머리 너머에서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35
마침내 마이트는 내가 결혼에 적합한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느냐고 물었다. 더 중요한 것은 결혼이 과연 할 만한 것인지, 도움이 되는지,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라고 마이트는 말했다.
마이트의 결혼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 드물게 모범적인 경우라고 생각해 왔으므로 이런 마이트의 질문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36
그녀는 내가 혼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그녀에게 무관심해졌다는 것을 조금도 몰라. 친구여, 여자들은 우리를 항상 실망시킨다네. 그러나 그는 현명하게도 -나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도 여자들을 실망시킨다네. 진정한 결혼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네. 체념만 있을 뿐이지. 37
그녀는 왜 나를 부른 것일까?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그녀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는 고통인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니나가 이미 7년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왜 그녀는 나에게 자유를 돌려주지 않는 것일까. 자기가 얼마나 잔인한지 니나는 모르고 있다. 그녀의 대단한 총명에도 불구하고 니나는 다른 여성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리고 나는? 나는 다른 남자들보다 똑똑한가? 웃기면서도 끔찍한 유희라고 할 수밖에. 나는 그녀를 계속해서 방문할 것이다. 미친 짓! 어리석은 짓! 그러나 그녀 없는 나의 인생은 무언가? 38
1920년대에도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렇게나 복잡하다. ㅋㅋㅋㅋㅋㅋ루이제 린저 선생님.. 아직도 2018년인데도 저도 그래요. ㅠㅠ
지금까지 살았는데요? 나는 살려고 해요. 나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해요. 그러나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은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삶을 비켜갔어요. 한번도 모험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신은 아무것도 얻지도 못했고 잃지도 않았어요. 39
나는 그녀를 초대하는 게 약간 불안했다. 그녀의 생동감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니나가 변화되었다고 생각했다. 지난해의 저 숨막히는 명예심, 쉽게 끓고 쉽게 끝나는 정열, 분주함, 과도 노출 등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분주함으로 자기를 내몰아 자기에게 부과된 침묵에서 벗어나려는,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되는 시도였다. 40
우리는 서로 만나긴 했지만 어느 누구도 상대방의 문지방을 넘어서지 못한 거요. 문지방 너머 다른 사람의 왕국이 있는 그곳으로 말이오. 당신은 나의 생을 인정할 수 없었소. 당신의 인생과는 너무 달랐던 거요.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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